윤동주의 범신론적 자아인식
코로나19로 인해 생명체 존재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졌다. 공중보건에 대한 담론은 물론 생명에 대한 거대한 담론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자리한 문화와 문명에 대한 성찰을 강제 받았다. 태초부터 생명에 대한 담론은 끓임 없이 받아왔지만 남녀노소불문하고 문화와 문명의 차원에서 생명에 대한 거대한 담론을 논하는 것이 익숙하게 다가 온 적이 있었는지 반문하고 싶다.
생명이 다양하게 존재하듯이 생태계의 존재들의 각각의 생명은 나름대로 자기만의 지능을 가진다. 다양하고 가혹한 생존 환경 속에서 생명체는 여러 복합적인 문제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결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생명체가 획득하게 된 능력이 바로 지능이다. 지능은 문제 상황에서 선택 가능한 행동들을 고려한 후 그중 가장 적합한 행동을 선택하는 의사결정 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지능은 전반적인 문제해결 능력을 일컫는다. 인간은 여러 가지 반사에 소수의 고정행위패턴 그리고 그 밖의 타고난 행동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전체 행동에서 이러한 선천적 반응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52명의 지능 연구자들이 1994년에 발표한 지능을 이렇게 정의했다. “‘여러 정신 능력 중에서도 매우 보편적인 정신 능력으로 추론, 계획, 문제 해결, 추상적 사고, 복잡한 개념의 이해, 빠른 정보 습득, 경험에서 배우는 능력 등을 아우른다. 이는 단지 학교 교육, 좁은 의미의 학습 기술 또는 시험을 치는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이는 우리가 주위 환경을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넓고 깊은 능력으로, 사물을 이해하고 대응책을 고안해내는 능력을 반영한다.” 지능은 생명이 진화하면서 획득하는 능력이다. 즉 자기 자신을 보존(생존)하고 복제(생식)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는 ‘지적인’ 능력이다. 윤동주의 사후 출판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서시」를 보면, 인생의 종합적인 삶에 대한 이해와 넓은 사고력으로 자연을 이해하고 대응책이 보인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 운다
- 윤동주의 「서시」 전문 -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첫 소절에부터 누군가에게 고백하듯이 회개하며 창조된 모든 자연 만물에게 단 한 점이라도 그릇될 수 없다는 마음이다. 생태적 환경을 그르치는 윤리적 문화적 타락과 관련되는 것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다. 「잎 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에서는 자본주의에 물들어 순간적으로 금전에 흔들리는 사람들의 마음을 말한다. 즉 인간들은 이익을 위해서 자연을 활용하고 환경을 유발시켜 자연과 인간 모두의 생명에 치명적인 영향으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미치게 된 것에 대한 괴로움을 말한다.
미래 세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지 못하면 당장의 관심사에만 매달려 소외된 자연생태계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된다. 더욱 공평한 세대 간 연대 의식에 덧 붙여 세대 간 연대 의식을 새롭게 하는 생태적인 도덕적 요구가 절실하다.
이어지는 구절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에서는 서로 경쟁하듯이 개발에 의해 자연 훼손으로 파국으로 치닫는 생태계와 공존하는 생태계와의 공생으로 인간들의 심성을 되살려서 모든 생태계의 생명체와 공동체적 관계를 갖자는 마음이다. 우주 속에 있는 작은 별이라도 공동체적 삶의 인식으로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생태계의 개체들과의 관계를 가진다. 그래서 별을 통해 매개체 역할을 하여 그들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임을 밝힌다. 우주와 자연, 자연과 인간, 인간과 우주 등 조화로운 관계 지향으로 생태적 영성을 갖게 한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에서는 창조주께서 만물을 창조할 때 인간도 함께 만드신 피조물임을 되새겨 준다. 많은 피조물 중에 인간은 순결하고 생태적 영성을 갖고 오직 창조주께서 인도하는 길로 간다는 것이다. 시적 화자는 무분별하게 자연생태계를 훼손시킨 인간들에게 우주론적 인간성을 갖춘 영성적인 존재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지침이다. 우주론은 영성성찰에 심미성을 주며 굳이 종교적 색채를 띠지 않아도 독자들에게 다양성과 다종성으로 폭넓게 이해하도록 한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에서는 다 함께 공존하는 세계는 변함없이 또 다른 것들과도 넓게 생태적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성찰을 통하여 영성적인 패러다임으로 생태적 미래를 바라보면서, 별이 바람에 스치며 변함없이 자연생태계의 순환진리에 따라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적 화자는 스스로 낮은 자세로 종교적 이미지를 심으며 반성과 지향하는 이상세계로 형상화하면서 자연을 사랑하였다.
생태의식의 근본은 우주를 통해서 자연과 인간의 일치를 말하며, 영성적 세계관에서는 시대적 고뇌를 해결하는 것은 천상 세계 도래 이다. 따라서 우주와 영성적과의 존재 하에서 소재로 한 시적 작품은 이상세계를 추구하는 생태시로 볼 수 있는데 시적 화자의 모든 시에서 나타나듯이 항상 습관적으로 반성과 지향하는 이상세계로 형상화하면서 자연을 사랑하였다. 생태시 학습기반을 구축되기 위해서 생태주의 습관화가 필요하다. 지구를 살리는 가치 있는 행동 실천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기후위기 대응 생태행동 실천을 통해 조직문화 및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기 위한 『필(必) 환경시대 ‘나 먼저 우리 먼저’』 프로젝트가 우선 되어야 한다. 가령, 대체 가능한 1회용품 사용 제로화, 탄소발자국을 줄이기 위한 생활습관화, 종이 없는 회의 문화 구축 등 생태행동을 실천하는 조직문화가 정착되도록 노력하는 과정에서 생태적 영성이 성장할 수 있다.
범신론적 세계관에서 윤동주의 십자가(十字架)는 인간들의 잘못에 대한 속죄양을 부르짖고 시적 화자도 그에 대한 자기희생적인 내용을 보여주는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희생함으로써 원죄에서 벗어나 모든 인간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던져주는 것이다. 모태신앙을 가진 윤동주는 「십자가」에 달려있는 예수그리스도가 자신의 처지와 비유하면서 그 뒤를 따르겠다는 결심을 말하고 있으며 일제 강점기 암울한 시대 상황 속에 시인이 겪는 고통은 포용적이고 영성적으로 숭고한 가치로 승화되는 자신의 삶과 희생이 절정으로 묘사되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붉은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윤동주의 「십자가」 전문 -
1연에서 빛은 창조주께서 세상을 밝게 하고 어둠을 이겨내기 위함에서 먼저 창조하셨다. 창세기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1장3절>, 첫 구절에 「쫓아오던 햇빛인데」는 그동안 햇빛은 나를 잡으러 쫓아왔던 것이다. 어쩌면 나를 교회당으로 몰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리고 요한복음에는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 하더라’<1장4-5절>라고 하신 것을 보면,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깨닫게 하여 밝은 세상을 주게 하려 한 것이다. 「지금 교회당(敎會堂)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에서는 절대자의 말씀이 교회당으로 스며들기 위하여 십자가에 머물게 하였음을 표현한 것이다. 햇빛은 절대자의 말씀을 표현한 것으로 추구하려고 의도를 생태적인 삶으로 비유하였다. 햇빛, 교회당, 십자가 등은 무생물이지만 살아있는 생명체로 표현함으로 더욱 존귀하게 인식된다.
2연의 「첨탑(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에서는 화자는 해가 중천에 뜬 낮 시간에 아무리 높은 곳이라도 절대자의 말씀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필요한 곳이면 어디든지 그 말씀을 전하신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첨탑이 아무리 높아도 나도 올라 갈 수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것이다. 저 높은 곳에 계시는 그 분과 함께라면 그 무엇도 두렵지 않는 용기를 말한다.
3연의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에서는 예수님의 마지막 혼인 잔치, 그때를 알려주는 종소리는 언제 울려서 잔치에 초대될 것인지, 벅찬 가슴으로 기다리는 마음에 휘파람을 불면서 서성이는 화자의 간절함을 볼 수 있다. 모든 운명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따르겠다는 각오가 되어 있다.
이어서 4연에서는 더욱 결의 찬 각오를 볼 수 있는데, 「괴로웠던 사나이/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십자가가 허락된다면」에서 꿈 꾸어왔던 뜻을 펴고자 하니 십자가를 본 순간, 괴롭고 고통의 순간을 이겨 낸 예수님의 뒤를 따르고 싶은 갈망이 행복으로 변환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삶처럼 살아가겠다는 결심이다. 인류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처럼 화자도 행복한 생태적인 삶을 위해 공동체 운명을 십자가와 함께하겠다는 간절한 호소임을 알 수 있다. 화자가 겪고 있는 고뇌를 십자가를 통해서 속 시원히 털어 내고 있다.
화자는 보잘 것 없는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한 희생은 자신도 그런 삶을 선택하겠다는 의지를 말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하신 겟세마네에서 ‘베드로와 세베대오의 두 아들에게 내가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마26:36>고 말씀하신 것은 아버지의 뜻대로 진행되기를 원했다. 그런 기도에도 예수의 죽음이 갖는 의미를 알아차리지 못한 제자들을 안타까워하면서 화자는 생태계의 순환 진리를 위해 모든 창조물을 포용하는 초월적 삶의 의지로 그의 뒤를 따르겠다는 것이다.
5연의 「모가지를 드리우고/꽃처럼 붉은 피를/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조용히 흘리겠습니다.」에서는 시적 화자가 말하고자하는 핵심 내용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밝은 빛으로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모가지를 내 놓으면서 그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당시 상황에 비추어 보면,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 바치고자 하는 숭고한 애국심이 끓어오르는 그 순간 자신을 오롯이 바친 예수 그리스도처럼 말이다. 속죄양이 되어 원죄를 대신하고 인류를 구원하신 피 흘리신 십자가에 비유한 것이다. 생태계 회복을 위해서도 화자의 영성적 세계관과 같이 올바른 신앙으로 생태중심주의 사고와 함께한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화자의 「십자가」는 거룩하고 숭고한 시이다. 십자가와 오롯이 함께한다는 것은 성직자, 목회자, 수도자 등 부르심을 받은 분들만의 몫이 아니라, 이 시를 통해서 그 분과 함께할 수 있는 깨달음에 도달하면 누구에게나 행복해 질 수 있다. 십자가 형상에서 생태적인 삶의 모범된 모습으로 암흑과 같은 세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온 인류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이다.
영성적인 마음은 깊은 어둠 속에서 빛을 갈망하듯 양지이든지 음지이든지 생태적 질경이 삶처럼 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인간중심주의 사고에만 집착하면 비전이 사라지고 목표 없는 삶보다 더 심각한 삶도 없어질 것이고 키워드가 없어지는 것이다. 가슴을 뛰게 하고 타 오르게 하는 빛이 없다면, 비전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을 갈망한다. 신앙으로 다져진 윤동주는 철제로 된 십자가 형상에도 신성이 깃들어 있다는 초월적 실체의 절대권능을 믿는 범신론적 세계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명상을 통해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고정 관념 등에 대한 알아차림과 생태적 개체들의 우주심이 곧 공성(空性)이라는 사실을 직접 경험하고 통찰할 수 있다. 공성(空性)의 체험은 신비스러운 무엇이 아니라 먼저 생태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정신현상과 육체현상에 대해서 명확히 구별하고 그 변화의 양상을 알아차리면서 삶에서의 편견과 습관적인 생각들이 지닌 한계를 통찰하는 과정이다. 창조의 원천이 인간중심적 자아가 경험한 무의식적인 욕망들에 닿아 있거나 우주심, 청정심, 일심 등과의 만남 등으로 대별된다. 이러한 과정으로 생태적 문제에 대한 반성과 명상을 통한 새로운 인식으로 생태시 창작에 적용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