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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획 1] 전남대학교 개교 60년 의미와 과제 (2) 전남대 민주화운동 60년
현대사 분수령마다 ‘민주화 물꼬’ 튼 60년
4․19로 시작된 민주화 운동 참여 역사 고비마다 봇물
숱한 구속 등 시국사범 발생… 목숨까지 바친 열사도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수들도 역사 흐름 동참
5․18이 정점… 호남 의병정신 등 이은 애국 절규
(전남대학교의 민주화운동 참여는 학생과 교수 구분이 없었다. 위 사진은 1980년 5월 14일 금남로에서
열린 '민족·민주화 성회'에 참가한 전남대 교수들이 앞장서고 학생들이 뒤따르고 있는 모습)
전남대학교 60년은 민주주의 이념을 실천하는 피와 땀의 역사였다. 모교는 현대사의 주요 순간마다, 민주주의가 흔들릴 때마다 민족의 미래를 위한 버팀목 역할을 하며 ‘민주화운동의 성지’ 역할을 자임했다. 그 영광스러운 과정을 주요 사건별로 정리한다.
민주주의를 ‘다양한 의견의 통합과정’이라고 정의한다면 역사에는 이러한 모습을 역사의 분기점마다 보여 왔다.
전남대는 1952년 비록 국립대학교로 개교하였으나 공립 및 사립 단과대학의 결합, 시․도민 성금으로 재원 마련 등의 과정을 거쳐 설립되었으므로 학내에서는 많은 의견이 표출되었다. 그러나 초창기에 일관성 있는 발전이라는 목표 때문에 터져 나온 의견들은 반영되지 않았다.
■ 4․19 혁명과 학내 민주화
전남대학교의 기나긴 민주화 여정은 4․19혁명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19 하루 뒤인 4월 20일 계엄령이 발표되자 중․고교생 시위에 전남대생들이 개별적으로 참여하는 형태로 합류했다. 오전 9시 광주역전에 400~500명의 중․고교생들이 집결하자 전남대생들은 사이사이에 끼어 “부정선거 다시하라”는 등의 구호를 선창하며 충장로 쪽으로 학생들을 유도하였다.
시위대의 선두가 충장로1가 구 삼복서점 앞에 이르자 전투병과교육사령부 헌병들이 시위대의 중간을 자르며 저지했다. 그때 군용지프 한 대가 싸이렌을 울리며 우체국 쪽으로 돌진해 오자 시위대는 투석으로 지프를 멈추게 했다. 이것을 본 헌병들이 발포를 시작하고 경찰과 합세하여 학생들을 무차별 연행하였다. 이후 시위대는 소방차를 탈취하고 몽둥이와 돌멩이를 던지며 전남도청으로 진출하려 했으나 다시 군에 포위되어 해산되고 말았다. 이 시위로 전남대 상대 김영은 등 15명이 중경상을 입고 77육군병원에 입원했고, 37명이 군경에 연행돼 서석초등학교 임시수용소에 수용됐다.
광주에서의 4․19시위는 이렇게 끝났지만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뒤 민주화의 폭풍이 몰아닥쳤다. 31일 학생들의 요구로 최상채 총장이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5월 5일 공대 박하욱 교수를 총장서리로 선출했다. 학생들이 5월 2일 본부(현재 평생교육원) 앞에서 집회를 열고 △관제 학도호국단의 해체 △1인 독재 교학방침의 지양 △어용학자와 교권을 문란케 한 교수는 사죄하라 △최상채 총장은 책임을 지고 물러나라는 등 4개항을 담은 민주화결의안을 채택하자 교수단이 3일 지지성명을 발표하였다. 의과대학 학생들은 파벌 교수의 사퇴 등을 주장하며 11일부터 동맹휴학을 벌였으며, 상대생들은 12일 △교수단의 보강 △무능 교수 퇴진 △교사의 신축 등을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렇게 하여 9월 22일 학생자치기구인 총학생회가 출범하게 됐다. 그러나 대학의 민주화는 1년만인 1961년 5․16쿠데타가 일어나면서 꽃을 피우지 못하고 동토 속에 묻히게 됐다.
■ 6․3 항쟁
5․16 군사정부가 ‘조국근대화’를 명분으로 국교정상화를 위한 한일협정에 박차를 가했다.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당시 중앙정보부장)․오히라(당시 일본 외상) 회담을 통해 대일 청구권 문제가 무상공여 3억 달러, 정부차관 2억 달러, 민간차관 1억 달러로 합의했다. 야당은 ‘굴욕외교’를 내세워 한일화담반대의 깃발아래 뭉치게 됐고 대학들도 동조하여 1964년 3월 24일 서울대․연세대․고려대를 중심으로 4․19이후 가장 규모가 큰 시위를 벌였다.
광주에서는 3월 26일 오전 8시 30분께 계림동 파출소 옆 버스정류장에 모였던 전남대생 700명이 미리 준비한 ‘대일 굴욕외교 반대’ ‘사수하자 평화선’ 등의 플래카드를 들고 가두시위를 전개해 경찰의 저지 없이 금남로, 도청 앞, 충장로, 사직공원을 거쳐 학생독립운동기념탑에 참배한 뒤 10시 30분 귀교했다.
그러나 정부가 협상체결을 강행하자 5월 27일 시위대는 “박정희 하야” “배고파 못살겠다” 등의 구호와 ‘해방의 노래’ 등을 부르며 경찰과 유혈극을 빚으면서 전남도청까지 진출하게 됐다. 이 일을 계기로 6월 1일 전남대생을 비롯하여 서울의 각 대학들도 대통령의 하야를 주장하며 시위에 나서 서울에서는 대학생들이 파출소를 점거하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다.
광주에서는 3일(6․3항쟁)에 5,000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4일에는 1만 명이 넘는 사람이 전남도청 앞에서 집회를 갖는 것을 정점으로 5일까지 계속 되었다. 그러나 이날 오후 기관총을 장착한 20여대의 군 트럭이 시내에 진입하면서 대부분의 시위학생은 귀가하였다. 이 기간 동안의 시위로 모두 338명이 경찰에 연행돼 8명이 구속, 47명이 불구속 입건되었고 24명이 무기정학을 당하는 한편 13명은 ROTC로부터 제단(除團)처분을 받았다.
■ 한․일 회담 반대 학생운동
한․일 회담이 비준단계에 들어서자 1965년 3월 31일 전남대가 전국에서 맨 먼저 문리대 이학관 앞 운동장에서 시위를 벌였다. 정동년 학생회장이 성명서를 발표한 뒤 800명이 ‘매국외교 결사반대’ ‘김․오히라 비밀흥정 이완용을 웃긴다’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에 들어갔다. 시위대는 임동 쪽으로 진출하다 경찰의 무차별 진압으로 상당수가 부상을 입고 32명이 연행됐다. 문교부의 주동학생 엄중처벌 지시를 내려 결국 정동년이 구속되는 외에 7명이 제적됐다. 학생들은 4월 7일 제적생복교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300명으로부터 서명을 받았다. 제적생들에 대한 징집영장까지 발부되자 16일 200명의 본부 앞 연좌농성, 18일 인문사회과학관 500명 성토대회 등이 계속됐다. 결국 일부의 제적생이 무기정학으로 마무리되고 한일협정은 1965년 6월 22일 정식 조인됐다. 이 해 8월에는 월남파병을 반대하여 박석무 등이 구속되기도 했다.
■ 삼선개헌반대운동
1969년 서울에서 3선개헌반대투쟁위원회가 구성되자 대학들은 조기방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후학기가 개학하자마자 9월 11일 법대 고재득 김진, 문리대 이강 김남주 주도로 300명이 상대 앞 노천광장에서 성토대회를, 농대생과 상대생이 가두진출 시도를, 의대생들이 농성을 각각 벌였다. 학교당국은 15일부터 임시 휴강에 들어갔다가 10월 20일 개강했다.
■ 교련반대운동
1970년 김대중 대통령 후보 지명, 전태일 분신자살 등으로 정국이 긴장된 가운데 1971년 문교부가 교련(학교군사훈련) 강화를 계획하자 학생들은 학원을 군사조직화 하려 한다며 4․19 11주년인 4월 19일 문리대 상대 법대생 150명이 교련반대 시위를 벌였다. 이어 삼선개헌 헌법에 따른 제7대 대통령 선거를 닷새 앞둔 22일 11시, 6개 단과대학 학생 1,000명이 본부 앞에 모여 ‘교련문제에 대해 당국과 대화의 광장을 마련하라’ ‘학원사찰을 즉각 중지하라’는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성토를 벌였다.
이 해 10월 5일 고려대학교 시위에 수도경비사 군인들이 대학에 난입한 일을 계기로 불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전남대에서는 11일부터 14일까지 교내 또는 광주시내에서 300에서 700명이 시위를 벌였다. 14일 오후에는 교정에서 전국 14개 대학 공동선언문을 낭독한 뒤 200명이 자진해서 경찰차를 타기도 했다. 15일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명령으로 500명의 경찰이 캠퍼스에 진입해 학생회장단 10명과 학생 50명을 연행해 갔고, 오후 4시 전남대를 포함한 4개 대학에 휴교령이 내려졌다. 16일에는 송정민 등 시위 주동학생 9명을 제적하고 17명을 무기정학에 처했으며 교련거부학생 57명이 병무청에 통고됐다.
■ ‘녹두’ ‘함성(喊聲)’ ‘고발’지 사건
1968년 학내 사회과학서클인 RCA를 조직했던 송정민은 1970년 박석무가 작명한 ‘녹두’라는 이름의 교내 지하신문을 제작하여 3호까지 발행하다 중앙정보부에 적발됐다. 1972년 10월 17일 계엄령과 함께 소위 10월 유신이 선포된 뒤 김남주와 이강은 ‘반군사독재’ ‘반유신’을 내용으로 한 8절지 크기의 비밀지하신문 500매를 만들어 44일간의 대학휴교령이 풀리고 개학하기로 한 12월 10일 하루 전인 9일 밤 전남대 각 대학 교실과 간이 의자에 300매, 시내 고등학교 4곳 운동장에 200매를 살포했다. 김남주가 문학활동을 위해 서울로 떠난 뒤 이강은 1973년 3월 ‘고발(告發)’이라는 반유신 지하신문을 제작하여 김남주에게 보내는 이불에 깊숙이 감춰 화물 발송했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면서 함성지 제작과정도 탄로 났다. 이 사건으로 이강 등 9명이 구속됐다.
■ 유신(維新)반대 시위
유신헌법이 공포된 지 1년만인 1973년 12월 10일 500명이 학기말 고사를 거부하고 ‘자유민주주의 체제 확립’ ‘구속학생 즉각 석방’ 등의 구호를 외치고 교내 시위에 이어 도서관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의과대학생과 간호학교생들도 ‘민주주의를 수호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충장로 3가까지 가두진출하여 시위를 벌였다. 학교당국은 즉시 학장회의를 갖고 다음날부터 방학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이 시위사건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은 없었다.
■ 민청학련사건과 석방 시위
1973년 유신헌법을 반대하며 재야가 100만인 서명운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1974년 긴급조치 1호와 2호를 공포했다. 대학가에서도 서울과 대구 광주 부산 등이 조직적으로 학생운동을 벌여야 한다는 분위기가 조성되면서 1973년 1월부터 이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974년 초 서울대와 경북대, 전남대 학생들이 주동하여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을 조직하고 윤한봉을 전남북 총책, 김상윤을 전남대 연락책으로 하여 4월 9일 유인물을 뿌리며 시위에 들어가기로 했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4월 3일 정부가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하며 4월 8까지 자수를 권하게 됐다.
그러나 일부 체포되지 않은 학생들이 경찰이 깔린 삼엄한 캠퍼스에서 유인물을 돌리며 시위를 시도했다. 결국 윤한봉 등 17명이 구속돼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에서부터 집행유예까지의 형을 받았다. 이들은 1975년 2월 15일 모두 석방되었다가 1980년 신학기에 복학했다.
민청학련 관련자들이 2심 재판을 받는 동안인 1974년 10월 14일 700명의 학생들이 “구속학생 석방하라” “유신헌법 개정하라” “언론은 각성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동구 계림동 광주시청 앞까지 진출하여 경찰과 대치하며 투석으로 맞섰다. 이 일로 휴강조치가 내려졌다. 25일부터는 의과대학을 제외하고 무기휴강에 들어가 55일만인 12월 9일 개강했다. 이 시위로 김선홍 등 3명이 무기정학을, 허신석 등 4명이 유기정학을 받았다. 의과대학에서도 11월 19일 구속학생 석방을 외치며 시위를 벌여 배춘상이 무기정학을, 김홍수 등 2명이 유기정학을, 간호전문학교는 이성자 김상숙이 29일 결의문을 배포하다 무기정학을 받았다. 개강 이틀 뒤인 12월 11일 학생 200명이 ‘구속학생 석방’ ‘유신헌법개정’ ‘학원사찰 중지’ ‘언론자유 보장’ ‘생존권 보장’ 등을 외치며 장시간 경찰과 대치했다. 1970년대에 학내에는 1972년 정상용을 중심으로 민족사회연구회가 서클로 등록하였고, 오재일이 74년 10월 독서클럽 RUSA를, 지병문이 독서잔디를, 신일섭이 문우회를 만들어 활동했고, 후에는 민청학련 구속자였던 윤한봉과 김상윤 중심의 연구모임도 만들어졌다.
■ 교육지표사건과 시위
교육지표사건은 1978년 6월 27일 송기숙 교수 등 전남대 교수 11명이 교육민주화를 주장하며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를 발표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전국의 대학 교수들이 함께 시국성명을 발표하기로 했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성내운 교수가 전남대 교수들만의 성명서를 일본 아사히신문과 AP통신에 제공함으로써 알려지게 됐다. 교수들이 정권에 집단적으로 저항한 일은 세계적으로도 찾아보기 어려운 충격적인 일이었다. 교수 11명은 즉시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은 뒤 송기숙 교수는 구속되어 징역 4년 형을 받았고, 나머지 교수들은 의원면직 형식으로 강제 해직됐다.
교수들이 연행되자 그동안 소모임을 가져왔던 학생들이 6월 29일 중앙도서관 앞에서 시위를 벌였는데, 경찰이 물대포와 페퍼포그를 쏘며 공격해 왔다. 시위는 다음날까지 시내에 진출하여 이어져 100여명이 연행되고 노준현 박현옥 등 14명이 구속됐고, 조봉훈 등 15명이 제적, 9명이 무기정학됐다.
교육지표사건으로 대학 내의 연구회 등 서클들이 사실상 와해됐으나 민속문화연구회가 문화운동을 표방하고 활동을 벌였다. 또 학생운동의 현실적 한계를 인식하고 현장에 뛰어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들불야학이 1978년 7월 23일 조직돼 박기순 등이 강학(講學)을 했다.
■ 5․18 광주민중항쟁
박정희시해사건 이후 1980년 3월 캠퍼스에는 ‘민주화의 봄’이 찾아왔다. 유신시절에 파면․의원면직․제적됐던 교수 학생들도 모두 복교하였고,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의 활동으로 학도호국단이 해체되고 학생회가 조직되어 박관현이 회장에 선출됐다.
5월에 들어서면서 신군부의 정권찬탈을 제지하기 위한 정치적 운동으로 확대되어 14일부터 16일까지 광주시내에서 가두시위를 벌이게 됐다. 특히 15일에는 광주시내 대학생과 일부 고등학생까지 2만 명이 참여하는 ‘민주화성회’가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렸고, 16일에는 횃불시위를 평화적으로 가졌다. 정치권에서는 5월 20일 국회에서 헌법개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기로 했고, 기자들은 검열을 거부하기로 하는 등 민주화를 구체화하기로 했다.
그러나 신군부는 5월 18일부터 비상계엄을 확대하면서 정치활동 금지와 전국의 대학에 휴교령을 내리고 공수부대로 구성된 계엄군을 진주시켰다. 18일 오전 10시 학생 200명은 정문(서문)에서 몇 차례 계엄군과 충돌한 뒤 시내로 진출해 12시에는 1,000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오후 4시 공수부대가 시내에서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하면서 피의 항쟁이 시작됐다. (이하 생략) 5월 17일 밤 박관현 학생회장은 몸을 피했으나 학생회와 단과대학 회장단 대부분과 복적생인 정동년 감상윤 등은 사전에 검거됐다. 따라서 지도부가 와해되는 바람에 항쟁기간동안 들불야학 탈춤반 학생과 일부 검거를 피한 대학생들이 개별적 또는 단체로 활동했다. 항쟁이 끝난 뒤 형을 받거나 징계를 받은 학생은 49명이었고 교직원 23명도 수사를 받거나 면직, 또는 형을 선고받았다.
■ 5․18 진상규명 요구 시위
광주항쟁이 휩쓸고 간 뒤 캠퍼스는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10월 12일 이재의 등이 김대중 최후 진술서를 복사하여 뿌리다가 검거되었고, 20일에는 송재형 등이 ‘국민투표를 하는 것은 전두환 반민족 독재정권을 방조하는 것’이라는 유인물을 호남동 천주교회 옆길에 살포하고, 정철도 유인물을 살포했다가 발각되는 일이 있었다. 12월 9일에는 임종수와 카톨릭 농민회원들이 5․18때 군부대의 광주투입을 승인한 미국을 응징해야 한다며 광주미문화원 지붕으로 올라가 방화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81년 9월 29일에는 학생회관에서 신영일 임낙평 등의 주도로 ‘반제․반파쇼 민족해방학우 투쟁선언(9․29선언)’을 낭독하자 1,000명이 교내시위에 동참했고, 일부는 계림동 등지에서도 시위를 벌였다. 1982년에도 9월 15일 김학덕 이춘희 등이 대학졸업정원제, 학원사찰, 교수재임용제의 철폐와 5․18진상규명을 요구하는 ‘학원민주화선언’ 유인물을 뿌리다 현장에서 체포됐다. 10월 12일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던 박관현이 숨지고 경찰이 박관현의 관을 탈취하여 고향인 영광에 강제로 안치하자 일주일간 학내와 가두에서 시위를 벌였다.
1983년에도 줄기차게 유인물 배포, 1인 시위, 가두시위 등이 벌어졌는데 주동학생들은 구속 및 학교 징계 외에 권고 휴학이나 강제징집의 방법으로 학교를 떠났다. 전국적인 시위에 부딪히자 신군부 정권은 12월 21일 국민대화합을 명분으로 구속학생 석방, 제적생 복교, 학내 사복경찰의 철수, 학생회 부활 등 학원자율화 조치를 발표했다. 이에 따라 1980년 이후 제적됐던 85명 가운데 39명이 복교됐다.
그러나 이후 학원자율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민주적 제도의 실현을 요구하면서 시위가 자주 벌어졌는데 이 해 9월에는 회장을 직선으로 뽑는 총학생회가 부활돼 오병윤이 회장에 당선되기도 했다.
1987년 전국적인 6․10항쟁의 결과로 6․29선언과 대통령 직선제, 지방자치제 실시 등이 이루어지고 노태우 대통령이 집권한 이후 대학은 남북통일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여 학생운동도 NL․PD 등에 의해 주도됐다.
그러나 평화적인 정권교체, 5․18 진상규명 및 책임자 처벌과 반민주적인 요소의 척결 등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따라 1990년대에는 이 같은 내용이 시위의 이슈로 등장하였다. 1991년 4월 26일 명지대생 강경대군이 시위도중 경찰의 구타로 사망하자 29일 박승희 양이 ‘노태우정권 타도’등을 내세우고 분신하여 치료를 받다가 숨졌다. 이에 따라 전남대병원 앞에서 시위가 계속됐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문민정부)이 취임한 이후 전남대생이 주축이 된 남총련 학생들이 김 대통령의 망월동 참배를 저지함으로써 5월 문제의 해결을 다시 한 번 제기하는 계기가 됐다. 1994년에는 UR국회비준반대로, 1995년에는 7월 18일에 검찰이 5월 문제와 관련하여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에 대해 ‘공소권 없음’이라는 결정을 내리자 다시 이를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그러나 우연히 터진 비자금 사건으로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두 전직 대통령이 한꺼번에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전남대학교 민주화 운동은 결국 임진왜란과 대한제국 말의 가장 활발한 의병활동, 광주학생독립운동의 정신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개교 이후에도 끊임없이 국가와 사회를 향한 절규로 이어져 왔으며, 현재도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김성(농업생명과학․80, 지역활성화 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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