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상회 2008 봄야유회/강화도 문화유적 답사
2008.5.16
오상회가 금년도 봄 야유회로 우리나라 긴 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는 강화도를 찾았다.
압구정동으로 8시시간에 맞춰가니 아침밥을 못먹고 나올까봐 김밥과 생수를 준비해 놓고 탑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에 탄 인원은30명. 강화현지에서 정일채동문이 합류하고,그리고 점심시간에 김성호 동문이 조인하면 32명이 오늘 이벤트에 참가하게 된단다.
필자는 작년도 5월에 강화지역 역사탐방을 한 일이 있어 복습을 하는 셈이지만,안 가본 애기봉에 관심이 많았다. 오늘 찾게될 탐방순서를 들어보니~
애기봉-연미정-고려궁지-외규장각-고인돌-창후리(횟집중식)-외포리-전등사-초지진-상경 순이다.
애기봉 매년 년말이 가까워 오면 이곳 애기봉에 크리스마스 트리에 점등이 되고 북녁땅에 친족을 두고 온 실향민들이 안타까운 한을 달래는 곳이다. 2005년부터는 남북 합의에 따라 크리스마스나 석가탄신 일 때 점등행사는 없어졌다고 한다. 북녁의 동포들에게 자유에 대한 동경을 자극하지 말라는 북측 의 강요 때문이겠지-- 애기봉은 김포시 하성면 가금리와 조강리의 경계에 위치하는 조그만 동산으로 북녁땅을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이다.해병대 작전지역에 있어 출입신고를 해야 한다. 애기봉에 대한 전설이 현판에 기록되어 있었다.
인조 14년(1636) 청나라 태종이 10만대군을 이끌고 침략한 병자호란 때 평양감사는 사랑하는 애기 를 데리고 한양으로 피난을 떠났는데 바로 강 건너 개풍군에서 감사는 오랑캐에 잡혀 끌려 가고 애기만 강을 건너 이곳 조강리에 머물게 되었다. 애기는 매일 이 봉우리에 올라와 북녘하늘을 바라 보며 일편단심으로 감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다 그만 병들어 죽어가면서 이곳 북녁땅이 잘 보이 는 곳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1966년 고 박정희 대통령께서 이 슬픈 이야기를 듣고 애기의 한 은 강하나 사이에 두고 오가지 못하는 일천만 이산가족의 한과 같다고 하시면서 이름을 애기봉이라 고 명명하고 친필휘호로 비를 세워주셨다. 비석 하단에는 노산 이은상 시인의 헌시가 적혀있다.
기생 애기와 평양감사의 애틋한 전설이 어려있는 애기봉 비석/휘호필체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관리관의 브리핑을 들으며
명절때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낸다/망배단
북녘의 선전마을/멀리 송악산이 보인다
실향민을 대표해 조상희 동문이 망배단 앞에 포즈를 취한다.
무적해병이라 쓴 건물안에 들어가니 관리관이 브리핑을 해 주었다. 강건너 북쪽 선전마을을 바라 보며 언제쯤에나 마음대로 오갈 수 있는 통일이 될 수 있을까 상념에 젖어든다. 500원짜리 동전을 넣고 망원경으로 좀더 크게 보는 친구들-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안타까운 마음은 마찬가지다.
마당에는 명절때 이북을 바라보며 절을 올리는 망배단과 청룡을 양각해 세운 청룡 비석,옛 소대 장의 소망의 글을 새긴 청룡부대 비석도 보인다.
건물 옆에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달았던 높다란 첨탑 조형물이 서 있다. 그리고 계단을 한참 올라가 는 곳에 "해병대김포지구전적비"가 세워져 있었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석가탄신일 점등을 이제 볼 수가 없다.
해병대 김포지구 전적비
해병대 출신 이장원동문과 친구들이 전적비 앞에-
연미정
다음에 찾은 곳은 연미정. 한강과 임진강의 합해진 물줄기가 하나는 서해로, 또 하나는 강화해협으로 흐르는데, 이 모양이 마 치 제비꼬리 같다고 해서 정자 이름을 연미정이라 지었다고 한다. 언제 처음 지었는지 정확히 알지 못하나 고려 고종(재위 1213∼1259)이 사립교육기관인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놓고 공 부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때 큰 공을 세운 황형에게 이 정자 를 주었다고 한다. 인조 5년(1627) 정묘호란 때에는 강화조약을 체결했던 곳이기도 하다. 연미정은 강화십경의 하나로서 뛰어난 경치를 이루고 있으나, 민간인통제구역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일반인의 출입을 금지되었으나 얼마전부터 초소를 30m 뒤로 이동하고 민간이 출입이 허용된다.
장무공 황형장군 비석
연미정
보호수
연미정에서 보이는 도로와 해병초소
고려궁지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고려시대의 궁궐터로사적 제133호이다. 이곳은 고려가 몽고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하여 도읍을 송도(松都)에서 강화로 옮긴 1232년(고종 19)부터 다시 환도한 1270년(원종 11)까지 38년간 사용되던 고려궁궐터이다.
강화도에는 정궁(正宮) 이외에도 행궁(行宮)·이궁(離宮)·가궐(假闕) 등 많은 궁궐이 있었는데, 이곳 강화읍 관청리 부근은 정궁이 있었던 터로 추정된다. 정문의 이름은 승평문(昇平門)이었고, 양측에 삼층루의 문이 두개가 있었으며 동쪽에 광화문(廣化門)이 있었다.
이 궁은 1270년 송도로 환도할 때에 모두 허물어졌다. 조선시대에도 국난시 강화도를 피난지로 정하
여 1631년(인조 9) 고려 옛 궁터에 행궁을 건립하였다.
전각과 강화유수부·규장외각 등을 세웠으나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하여 거의 소실되고, 현재 관
아건물인 명위헌(明威軒)·이방청(吏房廳) 등이 남아 있다. 이곳은 외침에 줄기차게 저항했던 민족의
저력이 흐르는 국난 극복의 역사적 현장이다.
승평문
고려궁지로 들어가는 정문은 승평문이다. 이 곳에는 세 개의 길이 있다. 각각 왕이 다니는 길과 문신이 다니는 길, 무신이 다니는 길이다. 보통 왕은 가운뎃길로 다녔고, 문신은 오른쪽, 무신은 왼쪽 길로 다녔다.
강화 유수부 동헌(명위헌)
유수부란 조선 시대에 설치한 서울을 방비하는 대도시이자 군사도시를 말한다.
서울의 북쪽으로 개성 유수부, 서쪽으로 강화 유수부, 동쪽으로 광주 유수부(남한산성),남쪽으로 화성 유수부(수원)가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기초자치단체가 아닌 광역자치단체에 가깝다.
고려 인조때 고려 궁터 자리에 행궁(임금이 나들이 할때 머무는 별궁)을 지었으나 병자호란 때 청 나라 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 다시 지은 강화 유수부 건물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 의해 불에 타 거의 없어져 지금은 동헌과 이방청만 남아 있다.
동헌이란 고을의 수령이 업무를 보고 재판을 하던 관아를 말한다.
동헌은 대체로 수령의 생활처소인 '내아'와 구분되어 그 동편에 있었기 때문에 동헌이라고 한 것이 다. 오늘날의 구청이나 군청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지금의 동헌 건물은 조선 인조때 다시 수리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뒤까지는 군청 건물로 사용하다가 1977년 수리하여 복원하였다.
'명위헌'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조선 영조 때의 명필인 윤순이 쓴 것이라고 한다.
외규장각
본래 '규장각'은 조선 영조때 세운 기구로 학문 연구나 도서 편찬, 국립도서관 역활을 하던 곳이다. 외규장각에는 왕실과 관련된 중요한 기록물을 보관했다.외규장각은 조선 정조때 고려 궁터에 세웠 지만 병인양요때 모두 불타 없어지고 지금 건물은 몇 년 전에 다시 복원한 것이다. 병인양요를 일으 킨 프랑스군은 고려 궁터 안의 행궁과 강화 유수부의 부속 건물을 수색하여 은괴 18상자,중요 문서, 서적, 군수물품을 약탈해 갔다.
강화 동종각
숙종 때 만든 원래의 종은 종의 몸체 부분에 금이 가 더 이상 타종할 수 없게 되어 강화역사관으로
옮기고 지금은 복제한 종을 만들어 전시해 놓았다.
강화유수부 이방청 강화유수부 안에 있던 관청건물로 유수를 보살파던 판관과 행정실무자들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1654년(효종5년)에 유수 정세규가 세웠고 1783년(정조7년)에 유수 김노진이 내부를 수리하였다. 'ㄷ'자형 단층기와집으로 바이 8칸 마루가 12칸 부억이 1칸으로 모두 21칸 규모이다. 1915년부터 1972년까지 등기소로 사용되다가 1972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1977년 강화중 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 때 고려궁지와 함께 정비되었다.
승평문(昇平門)
외규장각이 보인다
동헌 명위헌(明威軒)
동헌 내부
외규장각
강화동종각
유형문화재 26호 유수부 이방청
앵두나무에 열매가 맺기 시잣한다.
목단꽃이 화려한 자태로 반긴다.
고인돌(강화지석묘)
지석묘는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주로 경제력이 있거나 정치권 력을 가진 지배층의 무덤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탁자형과 바둑판식으로 구분된 다. 고인돌공원내에의 강화지석묘는 사적 제137호로 200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 었다. 덮개돌만 80톤으로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당시 족장이거나 정치,경제적 막대한 지위의 사람 으로 추정된다.
강화고인돌 문화축제 깃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강화 지석묘(고인돌)
강화지석묘 앞에서 단체사진
창후리에서 중식 강화지석묘를 구경하고 식사시간이 되어 창후리로 갔다. 오상회 회장단이 미리 사전답사를 하고
바닷가 좋은 장소의 횟집을 예약을 해 두었다. 점심시간에 김성호동문이 식당에 미리 와 있엇다. 죠니워카블루30년 양주 한병을 들고서. 대마도에서 이미 오상동문들 술 실력은 익히 알려졌지만 대단했다. 마침 필자가 앉은 자리가 여학생 강춘구,장윤자 동문 바로 앞이었다. 술한잔 들어가니 모두들 여학생 동문으로 몰려오는데 구경거리였다. 학교다닐 때 이렇게 보살펴 주었더라면 --
서해횟집으로 들어가고 있다.
건배
조중헌 회장이 칠레산 와인을 테이블당 한병씩 안겼다.
와인과 우럭,광어회를 포식했다.
와인박사 이남수 동문이 와인강연
김성호 동문이 죠니워카블루를 한잔씩 따르고- 호를 장산으로 작명했다고.장(늘) 산에 있다고 장산인가? 썩 어울린다.
늘 수고가 많은 이장원총무는 이날도 대단한 수고를-
황정길,성락원,김성호 동문 모습이 보인다.
버스를 타면 단연 인기사회자 서영교 동문. 천하술꾼 김천기동문도 옆에 보인다.
태국에 가 있는 이상익동문이 부인 디스크수술 때문에 귀국, 정만 반가워요.
강화에서 제자를 키우고 지금도 강화인으로 살고 있는 정일채 동문을 범초가 반기고-
조중헌 오상회 왕회장께서 강춘구 동문에게 한잔 따르고 있다.
박호전 동문이 두 여학생 사이에 앉아 분위기를 일신시킨다.
자리를 양보하고 가는 김길중 동문
서영교동문이 범초를 데리고 간다
한잔 하셨나 이남수,조용헌 동문까지 가세한다.
식사후 끼리끼리 한장씩 남기려고 찍은 사진들
범초와 심천
수출입은행 동료 황정길과 김강언 동문
대마도 룸메이트 필자와 김성호 동문
버스 앞에서/김남중,이상익,최재만,강종우,이인희,김성호 동문
외포리에서 당초 외포리에서 배를 타고 석모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으나 스케쥴이 너무 빡빡해 석모도는 생략 하고 석모도를 바라보는 외포리에서 단체사진을 남기기로 했다.
사진 뒤로 석모도가 보인다.
갈매기들이 하늘을 덮는다.
해병 108기 이장원동문 소개로 해병 1036기생과 악수
전등사
오늘의 탐방코스 중 핵심 중의 하나인 전등사를 찾았다.
강화도에는 전등사를 비롯해 유서 깊은 사찰도 많이 터 잡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호국불교 근본 도량인 전등사와 그리고 300여 년 후에 세워진 보문사 및 정수사가 있다.
전등사는 현존하는 한국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가졌으며,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킨 호국 불교 근본도량으로 역사와 권위를 간직한 사찰이다. 삼랑성 안에 자리 잡은 전등사는 세 발 달린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모양을 가진 정족산(鼎足山)과 더불어 강화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화 유적 으로 유명하다.
전등사가 창건된 것은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년)으로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처음으로 전래된 것이 서기 372년이므로 지금은 그 소재를 알 수 없는 성문사, 이불란사(375년 창 건)에 이어 전등사는 한국 불교 전래 초기에 세워진 이래, 현존하는 최고(最古)의 도량임을 알 수
있다. 처음 전등사를 창건한 분은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 화상이었다. 당시 아도 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도 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지금의 전등사 자리에 절을 지었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 하였다.
그 후 고려 제27, 28, 30대의 충숙왕(忠肅王)·충혜왕(忠惠王)·충정왕(忠定王) 때에 수축하였고, 1625년(인조 3)과 1906년에도 중수하였으며, 또 일제강점기에도 두 차례 중수하였다.
전등사라는 이름은 충렬왕(忠烈王:재위 1274∼1308)의 비 정화궁주(貞和宮主)가 이 절에 옥등(玉
燈)을 시주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 정화궁주는 승려 인기(印奇)에게 《대장경》을 인간(印刊), 이 절에 봉안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 절에는 보물 제178호인 전등사 대웅전(大雄殿), 보물 제179호인 전등사 약사전(藥師殿), 보물 제393호인 전등사 범종(梵鐘)이 있다. 또 대웅전에는 1544년(중종 39) 정수사(淨水寺)에서 개판 (改版)한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의 목판 104장이 보관되어 있다.
1866년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을 물리친 양헌수 장군의 전적비
윤장대/손잡이를 돌리면서 극락정토를 기원한다.
전통찻집 죽림다원(竹林茶園)
대웅보전
대웅보전 전경
석가모니 삼존불
나부상(裸婦像)
대웅보전 안에는 삼존불을 모셔놓았고 양쪽에는 다른 절에서 보기 어려운 업경대가 세워져있다.
1627년(인조 5)에 제작된 전등사 업경대는 죽은 사람이 생전에 지었던 죄업을 보이게 하는 거울로 염라대왕이 갖고 있다고 하며 업경륜이라 부르기도 한다. 저승에 가면 생전의 선업과 악업이 그대 로 비추어진다는 업경대는 죄를 짓지 말고 선행을 행하라는 경책을 담고 있다. 전등사 업경대는 목각사자의 몸체와 등위에 커다란 불꽃이 활활 일어나고 있는 무늬의 거울이 꽂혀
있는데, 불꽃 무늬를 사실적으로 드러내 저승의 무서운 분위기를 보여준다.
전등사 대웅보전이 세상에 더욱 유명하게 된 것은 대웅보전의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나부상(裸婦 像) 때문이다. 대체 석가모니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법당에 웬 벌거벗은 여인인가 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이 나부가 아니라 원숭이로 간주하는 경우도 있다. 원숭이는 사자나 용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수호하는 짐승으로 중국, 인도, 동남아시아의 사찰에 모
셔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등사 대웅전의 조각상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나부상이라는 데 의견이
더 많다. 이 나부상과 관련해서는 유명한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전등사는 1600년 이상의 역사를 간직한 가운데 여러 차례 화재를 겪고 이 때문에 대웅보전도 여러 번 중건되었다. 그 중 지금의 나부상이 만들어진 것은 17세기 말로 추측된다. 당시 나라에서 손꼽히는 도편수가 대웅보전 건축을 지휘하고 있었다. 고향에서 멀리 떠나온 그는 공사 도중 사하촌의 한 주막을 드나들며 그곳 주모와 눈이 맞았다. 사랑에 눈이 먼 도편수는 돈이 생길 때마다 주모에게 모조리 건네주었다. “어서 불사 끝내시구 살림 차려요.” “좋소. 우리 그림 같은 집 한 채 짓고 오순도순 살아봅시다.” 도편수는 주모와 함께 살게 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대웅보전 불사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공사 막바지에 이른 어느 날 그 주막으로 찾아가보니 여인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며칠 전에 야반도주를 했수. 찾을 생각일랑 아예 마시우.” 이웃집 여자가 말했다. 도편수는 머리끝까지 화가 치밀었다. 여인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 때문에 일손이 잡히지 않았고 잠 도 오지 않았다. 그래도 도편수는 마음을 다잡고 대웅전 공사를 마무리했다. 공사가 끝나갈 무렵 대 웅전의 처마 네 군데에는 벌거벗은 여인이 지붕을 떠받치는 조각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전등사 대웅보전에 얽힌 전설이다. 이 나부상이 더욱 재미있는 것은 네 가지 조각이 제각각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옷을 걸친 것도 있고 왼손이나 오른손으로만 처마를 떠받든 조각도 있으며 두 손 모두 올린 것도 있기 때문이다. 이 전등사 대웅전의 나부상은 희랍의 시지프스 신화를 연상케 한다. 그런가 하면 부처님을 모신 성 스러운 전각이지만 그런 조각상을 세운 당시 도편수의 익살과 풍자, 그런 파격을 기꺼이 받아들일
줄 아는 전등사 스님들의 자비로운 마음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명부전,약사전 등을 둘러보고 우물에서 시원한 한잔을 마셨다. 명부전에는 지장보살을 비롯하여 시왕,귀왕 등 모두 29존상이 모셔져 있다. 대개 명부전은 지장전 으로 부르기도 하는데 죽은 이를 재판하는 시왕이 있는 곳은 명부전, 지장보살을 모셨을 경우에는 지장전이라 부른다.
명부전
염라대왕이 죽은 사람의 재판을 관장하고 있다.
전등사 범종
보물 제 393호인 전등사 범종
일제시대 말기 금속류의 강제수탈로 빼앗겼다가 해방 후 부평군기창에서 발견하여 전등사로 옮겨 현재까지 보존하고 있다. 형태와 조각수법에서 중국종의 모습을 한 높이 1.64m, 입지름 1m의 종 으로 한국의 종과는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종의 재질이 구리가 아닌 쇠종이라는 점이 특이하 다. 종꼭대기에는 두마리의 용이 서로 등지고 웅크려서 종의 고리를 이루고 있고, 소리의 울림을 돕 는 음통은 없다.몸통 위 부분에는 8괘를 돌려가며 나열하고, 그 밑으로 종을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 어 각각 8개의 정사각형을 돌렸다.
이 정사각형사이에는 명문을 새겼는데, 이 명문으로 중국 하남성 백암산 숭명사의 종이라는 것과 북송 철종 4년, 곧 고려 숙종 2년(1097)에 주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체적인 종의 형태가 웅장하고 소리가 청아하며 중국종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문화재이다.
범종각 앞 마당에 시원한 샘물이 있다.
초지진 서울로 들어오는 초지대교 못미처 초지진이 있다.
강화도의 초지진은 조선 숙종 때인 1679년에 강화 남단의 해안 방어를 목적으로 구축된 많은 돈대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이 부근에 섬암돈대, 장자평돈대 등의 해안 방어를 위해 요새가 많이 구축되었 는데, 지금은 초지진과 섬암진만이 남아 있다. 이 초지진도 1976년에 복원된 것이다. 초지진은 현재 남아 있는 광성보나 덕진진보다 규모가 작은 전형적인 작은 돈대의 형태를 보여준다. 성곽의 총 길 이가 500m도 채 되지 않을 정도여서 한눈에 돈대가 다 들어온다. 돈대 가운데는 포각이 하나 있고 이 포각에 홍이포가 전시되어 있다. 이곳 초지진에 있는 홍이포만이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홍이포라 한다. 이 초지진은 강화 남쪽의 요새로 1866년 병인양요 때와 1871년 신미양요 그리고 1875년 운양호 사 건 때 모두 전투가 벌어진 곳이라 한다. 초지진 진입로 반대편 성밖에는 커다란 소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이 소나무에는 구한말 전투의 흔 적인 포탄 자국이 아직도 있다고 한다.
초지진 안내도
성곽 뒤편에 있는 소나무는 총탄흔적을 몸에 지닌채 역사의 산 증인으로 남아 있다.
성곽에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뒤로돌아! " 구령에 일제히 모델이 되어 준다.
사정거리 700m의 포 앞에서 마지막 단체사진으로 오늘 출석부를 대신한다.
필자도 찍어야 한다 해서. 진사(사진사)에서 박사(박는다의 뜻)로 승격(?)했다.
긴 강화초지대교 앞바다 물이 빠져나간 자리가 을시년스럽다.
오상회의 보배 명MC 서영교 동문
강화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언제나 밀리기 때문에 서두르지 않으면 안된다. 차 안에서 역시 서영교 동문이 마이크를 잡았다. 저녁식사를 교대앞 할매곰탕집에서 하기로 예약 을 했단다. 저녁식사대 갹출은 간단하다. 특별한 재주를 가진 서 동문이 노래자랑을 시켜 금새 마 련됐다. 노래실력이 제대로 평가될 수 없다 벌금이 마음에 안들면 하차하라는데야--
웃고 떠들면서 재미있게 보내는 시간에 금방 서울로 진입되었다. 희한스럽게도 그다지 밀리지 않 고 목적지에 도착했다. 뒷풀이 식사와 술을 하면서 오늘을 마감하는 조중헌회장의 인삿말이 이어
진다. 두개의 선물꾸러미(마른새우 한봉지,강화순무김치한통)를 들고 각자 집으로 향했다.
오상회 봄 나들이 ! 행복을 만들어가는 다정한 친구들, 다음 기회가 또 기다려 진다.
좀 길지만 차분히 읽으면서 공부도 하고 사진을 보면서 즐거웠던 순간들을 기억하는 아름다운 추억이 되기를 바랍니다. 조중헌회장님,이장원 총무님 수고 많았습니다.
- 미 전(米 田) 김 수 철 올림-
<참가동문>강종우,강춘구,김강언,김길중,김남중,김동엽,김병수,김성호,김수철,김천기,박호전, 서영교,성낙원,안병춘,위봉택,이남수,이상익,이윤우,이인희,이장원,이종완,장수웅, 장윤자,정일채, 조병훈,조상희,조용헌,조중헌,최재만,홍순호,황재부,황정길 32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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