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결한
사랑, 잊혀진 계절
옛날 직장 동료들이 모여 송년회를 합니다.
연말 송년회라서 그런지 평소에 나오지 않던 회원들이 많이 왔습니다.
멀리 호주에 21년 전에 이주하여 시드니에서 식당을 경영하는 홍사장도 왔고 호랑이 노릇했던 권사또도
왔습니다.
식사에 술을 곁들여 즐겁게 먹고 마십니다.
이차는 노래방에 간다고 하는데 밤이 늦어서 영표는 별로 내키지 않습니다.
자리를 옮기기 전에 인사가 뜨겁습니다. 다른 때에는 악수하거나 고개만 까딱하고 가는데 이날따라 포옹을 하고 정답게
인사말을 나눕니다.
박영표는 호주에서 온 홍사장과 예전에 같은 부서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데 21년 만에 만났으니 엄청 반가워서 포옹을 하고
인사를 길게 나누었습니다.
“야! 이거 몇 년 만이야. 건강하시죠.”
“사업 잘 되시죠?”
“옛날에 같이 근무할 때 내가 박사장 커버해 주느라고 고생 좀 했지, 사람이 아주 외고집이라 도통 말을 들어야지,
애먹었어, 웬 고집이 그리 센지…, 지금도 그래?”
“웬 고집? 나 고집 없어”
“그럼, 그래야지, 나이가 들어가면 이순(耳順)이라 했으니 좀 유연해 져야지”
“그래야죠”
박영표는 홍사장과 한참 길게 인사를 나누고 나서 혼자 우두커니 서 있는데 옥경이가 영표에게 다가와서 포옹하자고 합니다.
영표가 팔을 벌리자 옥경이가 영표를 안아주고 영표도 팔을 옥경이의 등 뒤로 돌려 안아줍니다. 옥경이가 포옹을 하고 난
뒤에
“한 번으로는 안 되겠어, 한 번 더해” 하고 다시 영표를 안습니다.
“옛날에 모모야마 근무할 때 보니까 오라버니 엄청 강하더라. 그때부터 오라버니
좋아했어”
“그래? 난 전혀 눈치 못 챘는데…”
“오라버니랑 뽀뽀 한 번 해야겠다”
옥경이가 핑크빛 입술을 내밀며 영표 얼굴로 다가오더니 영표의 왼쪽 뺨에 키스합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한 번 더해”
옥경이의 핑크빛 입술이 영표에게 아주 가까이 점점 다가오면서 옥경이가 눈을 가늘게 감습니다. 영표는 가슴이 두근거리고
당황스럽기도 하여 어찌 할 바를 몰라 고개를 돌려 피해야 할 것인지 받아 주어야 하는 것인지 쩔쩔 매고 있는데 옥경이 입술이 영표 입술
1센티미터 앞까지 다가오더니 방향을 돌려 영표 오른쪽 뺨에 키스를
합니다.
“……”
영표가
비로소 안심이 되어서 속으로 가만히 안도의 숨을 내쉬며 옥경이를 안은 팔에 힘을 줍니다.
“그렇게
날 좋아했어? 그런데 왜 암말 안하고 있었니?”
“사랑은
원래 짝사랑이 아름답고 순결하잖아!”
“그건
그래, 맞는 말이야”
“그리고
짝사랑이 오래 가는 거야, 변치도 않고.”
옥경이의
때늦은 사랑 고백에 영표의 가슴이 크게 출렁거립니다.
30년 전 낙천호텔은 박정희 대통령의 후원에 힘입어 서울 한복판 노른자위 땅 넓은 대지 위에 세계수준의 초현대식
관광호텔을 지었는데 낙천호텔의 하루 물 소비량은 목포시의 소비량과 비슷하다고 했을 정도이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때는 객실부나 식음료부 종업원은 봉급보다는 팁(TIPS : to insure prompt service)이 주
수입원이었던 시절이었는데 교통부에서 봉사료 관리지침을 하달하여 고객에게 개별 팁을 받지 못하게 금지하고 대신에 호텔 이용요금에 일률적으로
10%를 가산하여 분배하라고 지시하였습니다.
그런데 관리부에서 교통부 지시를 악용하여 그 내용을 종업원들에게 알리지도 않고 속임수를 써서 “교통부 지시에 의하여
팁을 기획실 총무부 인사부 관리부 회계부 경리부 시설부 조리부 직원을 비롯한 모든 종업원들에게 균등 배분한다”고 발표하였기 때문에 팁에
의존하였던 객실부와 식음료부 객실관리부(house keeping) 종업원들이 구내식당에 모여서 격렬한 토론과 회사 성토를 하면서 점심시간이
되었는데도 영업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모여 있습니다. 근무스케줄에 따라 늦은 시간에 출근하던 사람들도 다들 종업원 식당으로
모여듭니다.
“관리부에 팁을 나누어 주는데 반대합니다”
“조리부에 팁을 나누어 주면 안 됩니다”
“시설부가 왜 팁을 나누어 가져야 합니까?”
“팁을 균등 배분하는데 반대합니다. 부서별 직급별로 차등을 두어야 합니다”
다들 분노가 들끓고 있어 열기가 뜨겁지만 리더가 없어 중구난방입니다.
“우리 여기서 노동조합을 만듭시다”
“와~”
환호성과 박수가 터지지만 정작 노동조합을 어떻게 만들어야 하는 건지 1,000명이 넘는 영업부서 사람들 중에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
식음료부장이 달려와서 “여러분의 의견은 알았으니까 일단 영업장으로 복귀하라. 지금 점심시간이지 않냐”고 설득하지만
어림도 없습니다. 객실부 직원들이 달려들어서 식음료부장을 식당에서 쫓아내 버립니다. 객실부장은 낮에 별로 할 일이 없으니
느긋합니다.
한참 있으니까 쫓겨 갔던 식음료부장의 안내로 대표이사 총무부장 관리부장 경리부장 객실부장 등 높은 사람들이 식당으로
들어섭니다. 사까이 아사히 할베르 칼베츠 등 외국인 중역들도 왔습니다.
높은 사람들이 한꺼번에 구내식당으로 들어서자 뜨겁던 열기가 식고 다들 눈치를 보면서 슬금슬금 꽁무니를 빼고 심지어
일부는 식당을 빠져 나갑니다.
이러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됩니다. 죽 쑤어 개 주는 꼴이 될 것 같습니다.
이 때 선임캡틴 영표가 식탁 위로 올라서며 고함을 지릅니다.
“지금 사장님과 중역님들이 오셨습니다. 먼저 박수로 환영합시다”
일제히 박수가 쏟아지고 동요하던 사람들이 진정합니다.
“사장님께서 우리의 요구를 직접 듣기 위하여 귀중한 시간을 내 주셨습니다. 이 자리에 와 주신 모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여러분의 의견을 기탄없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만 조금 전까지 잘난 척 흥분해서 사람들을 선동하던 자들은 어디로 갔는지 쥐 죽은 듯이
조용합니다.
시간이 몇 분 지났지만 나서는 사람이 없습니다. 뒤에서는 잘난 척 사람들을 선동하지만 정작 높은 사람들 앞에서는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비겁한 자들입니다.
그러자 사장이 나서서 한마디 합니다.
“여러분의 뜻은 알았다. 지금 고객들이 식사하려고 각 식당에 꽉 들어차 있으니 일단 현장으로 복귀하라. 회사 방침은
여러분의 의견을 반영하여 차후에 통보하겠다.”
종업원들은 아무런 의견도 회사에 전달하지 못하고 있는데 ‘여러분의 의견’이라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출입구
쪽에서 밖으로 빠져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금 더 늦어지면 게도 구럭도 다 놓치고 일을 그르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의 고견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면 저희들의 뜻을 전달하겠습니다. 먼저 임금격차를 줄여야 합니다. 지금까지 관리부
등 관리직과 조리부 시설부는 팁이 없는 것을 고려하여 고임금을 받았고 식음료부와 객실부는 팁을 고려하여 저임금을 받았습니다. 이를 시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일률적 팁의 균등 분배에 반대합니다. 부서별 직급별로 차등을 두어서 과거에 팁에 의존하였던 부서에는 높은 비율로 배당하고 팁과
관련 없는 부서에는 낮은 비율로 배당해야 합니다. 직급별로도 부서장이 팁을 받는 것은 재검토해야 합니다. 직접 일선에서 고객에게 서비스하는
직원들이 가장 높은 비율로 배당을 받아야 합니다.”
영표가 목에 핏대를 올리며 큰소리로 외치자
“와아! 찬성이요, 옳소!” 일제히 고함을 지르면서 손바다ㄱ이 터져라 박수를 칩니다.
“사장님의 의견을 듣겠습니다”
사장이 “여러분의 의견 잘 들었다. 옳은 말이다. 부장은 서비스를 하지 않는데 봉사료를 받아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고객과 접촉하여 팁을 받는 부서에 봉사료를 고율로 배당하겠다. 여러분의 대표를 선출하여 회사와 협의하도록 하고 지금은 근무시간이니 일단
영업장으로 복귀하라.”
높은 사람들은 입만 열면 당장의 위기를 벗어나려고 하고, 나중에 보자고 하지만 그
건 거짓말입니다. 틀림없이 주모자를 잡아내서 해고하려고 들 것입니다.
다시 영표가 나섭니다.
“사장님께서 저희들의 요구를 수용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오늘 여기 모인 사람들은 전부 그 약속에 대한 증인입니다.
지금 우리가 헤어지면 대표를 뽑을 수 없습니다. 빠른 시간 내에 각 부서별 대표를 뽑아 주시기 바랍니다.”
“영표씨가 전체 대표 하세요”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저는 봉사료 사건의 내막을 자세히 모릅니다. 그 동안 앞장서서 이 사건에 대하여 알려주고
수고했던 분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반드시 종업원대표로 나서 주어야 하겠습니다.”
“옳소!”
그리하여 식음료부와 객실부 객실관리부(house keeping)에서 봉사료 문제를 가장 먼저 제기했던 사람들을 모조리
종업원대표로 선임하고 영표를 끼워 넣는 것으로 결정을 보았습니다.
선동자들은 결정적 순간에 뒤로 빠지려다가 목덜미를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선발된 종업원 대표들은 날마다 대책회의를 하고 드디어 회사 실세라는 관리부장과 총무부장이 종업원대표들과 담판을
지어서 분배율을 결정했습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사태가 수습된 후 주모자를 색출하여 처벌하는 것이 언제 어디서나 정해진
수순입니다.
각 부서에서 주모자들이 사직서를 내고 쫓겨나고 버티는 사람은 기물관리과로 전보되어 접시닦이 쓰레기 치우기 등 허드렛일로
내몰렸습니다.
일부 약삭빠른 미꾸라지들은 높은 사람들 찾아다니며 구명운동을 해서 살아남았고 일부는 한직으로 좌천되어 사직서를
제출하라는 압력에 시달립니다.
영표는 사장 이하 중역들이 수첩에 이름을 적어가지고 다니면서 감시한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어 한직으로 쫓겨
다니면서도 몸조심을 하다가 일식당 모모야마 캡틴으로 보직을 받았습니다. 선임캡틴인 그는 하급 캡틴이 책임자로 있는 영업장으로 배치를 받아서
굴욕을 당했으나 끝까지 견디어 내다가 이제야 겨우 레스토랑으로 복귀한 것입니다. 프랑스식당 선임캡틴이었던 영표가 전문분야가 아닌 일식당에
배치되었으니 회사는 아직도 그를 밉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제부터인가 노동조합이 생겼다고 하지만 위원장이 누구이고 조합사무실이 어디에 있는지 아는 사람이 별로 없습니다. 알고
보니 총무부 노무계장이 노조위원장이라는 어이없는 소문이 나돌고 있습니다. 노무계장은 사용자의 대표이니 노동조합원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그런 자가
노조대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영표는 모모야마에서도 지배인들의 견제를 받으면서 기를 펴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 때 옥경이는 말없이 영표를 지켜보고 영표가 곤경에 처했을 때 눈치껏 돕곤 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영표는 기혼자인데다가 옥경이는 사회 초년생이었기에 직장 내
상급자와 신입사원 이었을 뿐 특별한 관계는 아니었던 것입니다.
송년 파티 덕분에 옥경의 마음의 비밀을 알게 되었지만 둘 다 기혼자이니 이제 와서 이성간의 사랑을 속삭일 형편은 못됩니다.
하지만
영표는 옥경이에게 별 관심을 주지 않았던 일이 미안하고 마음에 걸립니다.
다음 정기모임에서 이차로 노래방에 갈 때 영표는 옥경이와 함께 참석하여 ‘잊혀진 계절’이라는 노래로 옥경이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달합니다.
♪잊혀진 계절 / 이 용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잊을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용 - 잊혀진 계절(콘서트 7080.E529.151031)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_UFLttlkgec
게시일: 2015. 10. 31.
국카스텐 - 잊혀진 계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vb-lGA-bdpA
게시일: 2012. 11. 6.
아이유 - 잊혀진 계절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T6iKZ8KvTI0
게시일: 2014. 9. 20.
아이유 - 잊혀진 계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