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35] 포화 속 누빈 종군기자들
◇김해룡: 개머리판으로 맞고 얻은 특종
"이런 기사를 누구 마음대로 쓰는 거야!"
1950년 10월 평양, 한 군인이 조선일보 편집부 기자 김해룡의 머리를 소총 개머리판으로 내리쳤다. 평양에서 자란 김해룡은 국군의 평양 탈환 직후 현지에 특파돼 일선판 신문을 발행했고, 동장(洞長)들이 모이는 회의장에 잠입해 자료집을 입수한 뒤 새로운 시민증 발급 기준에 대해 상세히 보도했다. 당시 평양 시민에겐 시민증이 공산주의자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사활이 걸린 문제였다. 군 당국은 당장 김해룡을 잡아 가 폭행했다. 피가 솟구치고 의식이 희미해져 갈 때, 한 장교가 "어떤 놈이 이랬느냐"며 개머리판을 휘두른 군인에게 총구를 겨눴다. 김해룡은 급히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이송돼 살아났지만 평양의 가족과는 그 길로 영영 헤어졌다. 그는 "나를 살려준 장교는 신문사와 관련 있는 인물일 것"이라고 회고했다. 소학교 졸업이 전부였던 김해룡은 통신사 문서 배달을 하던 독학파. 굶어도 지조를 지켜야 한다는 꼿꼿함을 보였던 그는 '면도날'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전동천: 평양 최후의 날을 취재하다
1950년 12월 4일, 중공군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포기했다. 폭음과 화염, 아우성이 뒤덮인 아비규환 현장에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전동천이 있었다. 그는 12월 13일 자 조선일보에 '평양 최후의 날―죽음으로 찾은 자유'라는 제목의 생생한 르포를 실었다. "대동강의 가교가 최후 철수 부대의 손으로 끊긴 다음에도 이 가교로 모여드는 남하 피란민의 수는 무수했다. 그들은 파괴된 가교를 드럼통과 부서진 가교의 목편(나무 조각) 등으로 얽어매 가지고 건넜다. … 쓰러지는 사람의 시체를 넘으면서도 도강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이 기사는 제1차 교육과정(1954~1963)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다. 평북 정주 출신인 전동천은 평양민보사 기자로 일하다 1947년 38선을 넘었다. 6·25 때는 북진하는 국군을 따라 취재하다 1952년 9월 수도고지 탈환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최병우: 휴전협정 역사의 기록자
"아, 만사휴의(萬事休矣·모든 일이 중단됨)! 백만의 동포가 흘린 피의 값을 어디서 찾아야 옳단 말인가."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을 조인한 판문점, 역사적 현장을 취재하는 한국 기자 단 두 명 중 한 명인 조선일보 외신부 최병우가 탄식했다. 그는 기사에서 "휴전회담에 한국을 공적으로 대표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볼 수 없었다"며 "이리하여 한국의 운명은 또 한번 한국인의 참여 없이 결정되는 것"이라고 썼다. 또 "우리가 그리지 않은 분할선이 울긋불긋 우리의 강토를 종횡으로 그려져 있을 것"이라며 민족의 험난한 앞길을 우려했다.
한국은행에서 근무하다 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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