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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30.
유가사지론
☎ 이 1권에는 인간의 심의식 心意識의 작용과
육체가 죽은 다음, 사후 49일 동안 의식 意識이 어떻게 활동을 하고
다시 어떻게 환생하는 가에 대한 내용을 발췌하였습니다.
왜 미륵보살이 《유가사지론》을 지었을까 생각해 보니,
말세 중생들이 마음(心) 의식(意識)에 대하여 숱한 의문을 갖게 될 것을 예견하시어
그 의심을 풀어주고자 남기신 게 아닌가 합니다.
이 《유가사지론》에 근거하여 유식론 구사론 등 많은 저서가 등장 합니다.
그런데 유가사지론, 유식론, 구사론을 이해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 따라서 여기 올린 내용이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최소한 그냥 50번 정도는 정독하셔야 쬐끔 이해가 될 것입니다.
▶ 그렇지만, 한 일백 번 정도 탐독할 것을 권합니다.
,공자께서는 만년에 주역을 좋아하여 주역을 엮은 죽간의 가죽 끈이 세 번에나 끊어지도록 탐독(獨易韋編三絶)했다는 일화가 《孔子世家》에 나와 있습니다.
공자께서도 가죽 끈이 세 번 끊어질 때 까지 주역을 수백 번을 읽으셨듯이 《유가사지론》를 그렇게 읽지 않으면, 마음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모든 정신적 장애를 극복하는 방법을 알 수가 없을 것입니다.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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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유가사지론은 미륵보살이 지은 것입니다.
유가瑜伽는 한국식 발음이며, 중국에서는 요가Yoga라고 발음합니다. 본래 요가는 인도 6파철학(불교에서는 6사 외도라고 함)의 한 파로서 요가학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Yoga를 무슨 신체 단련하는 운동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Yoga 수행의 지도자에 대하여는 여러 경전에서 확인되는 바,
화엄경 33권(40화엄; 선지식은 유가사와 같나니, 善知識者,如瑜伽師,能令趣入相應行故),
대반야바라밀다경 127권(마치 유가사(瑜伽師)들이 수승하고 미묘한 선정[勝妙定]에 들면 그 선정의 힘으로 말미암아 몸과 마음이 더욱 윤택해지고, 선정에서 나온 뒤에도 모든 맛있는 음식에 대해서 그 마음이 가벼운 것처럼 이것 또한 그와 같으니라. 如瑜伽師入勝妙定,由彼定力滋潤身心,從定出已,於諸美膳其心輕微,此亦如是),
불설보우경 5권(다시 선남자야, 보살이 열 가지 법을 성취하면 자기의 성품이 고요함을 얻으니, 어떤 것들이 열 가지가 되는가? 첫째는 유가의 스승[瑜伽師]을 얻는 것이요,... 復次,善男子!菩薩成就十種法,得自性寂靜。何等爲十?一者、得瑜伽師 ...)
대승입능가경 1권(대혜보살 게송; 유가사는 얼마나 있어 ... 瑜伽師有幾...)
등입니다.
중국 불교에서 Yoga를 瑜伽라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선禪(참선參禪)이라고 하는데, 화엄경 14권에서 이 禪은 6바라밀 가운데 하나인 선나바라밀 禪那波羅蜜이라고 하였습니다. 선나 禪那는 선정 禪定바라밀(사마타)입니다.
이 선정이 사마타(삼매三昧)입니다.
명상 冥想이라는 용어는 중국에서조차도 사용하지 않으며, 일본에서 사용한 것을 2000년대 들어와 우리나라에서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선禪과 명상冥想을 합성하여 선·명상이라고 하는 것은
역전驛前을 역전 앞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왜나하면 선禪 자체가 선나禪那(선정, dhyâna)이기 때문에, 명상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 이전부터 Yoga는 인도에 있었으며,
세존께서 6년 고행은 시마타 수행, 마지막 7일을 위빠사나(觀照)수행인데,
위빠사나는 세존께서 정립하신 것입니다.
註 ; 이 하는 유가사지론 해석 자료 인용
유가(瑜伽)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의 남성 명사로서 Yoga이며, 여성명사로 표현하면 유기(瑜祇:Yogī)라고 한다. 한역으로 상응(相應)이라고 번역한다.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서는 “일체승(一切乘)의 경행과(境行果) 등의 일체 모든 제 온(蘊)을 모두 유가라고 이름한다. 일체가 모두 방편선교(方便善巧)와 상응한다는 뜻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서는 네 가지의 유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간단히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경유가(境瑜伽) - 일체의 경(境)은 무전도(無顚倒)의 성(性), 불상위(不相違)의 성(性), 능수순(能隨順)의 성(性), 구경취(究竟趣)의 성(性)으로서 올바르게 교리의 행과(行果)와 상응하기 때문에 경유가(境瑜伽)라고 한다.
②행유가(行瑜伽) - 일체의 행(行)은 서로 상응하고, 정리(正理)로 지칭되고, 정교(正敎)에 수순하고, 정과(正果)로 나아가기 때문에 행유가(行瑜伽)라고 한다.
③과유가(果瑜伽) - 일체의 과(果)는 서로 수순(隨順)하고, 정리(正理)에 화합하고, 정교(正敎)에 수순하고, 정인(正因)으로 지칭되기 때문에 과유가(果瑜伽)라고 한다.
④교유가(敎瑜伽) - 일체삼승(一切三乘)의 성교(聖敎)는 정리(正理)로 지칭되고, 정행(正行)에 수순하고, 정과(正果)를 이끌어내기 때문에 교유가(敎瑜伽)라고 한다.
사(師)란 산스크리트어 Ācārya(;阿遮羅)의 한역으로 아차리(阿闍梨)ㆍ아차리아(阿遮梨耶) 등으로 음사되며, 궤범사(軌範師)ㆍ정행(正行)ㆍ교수(敎授) 등으로 의역된다. 유가사(瑜伽師)의 명칭에 대하여 『유가사지론석(瑜伽師地論釋)』에서는 두 가지로 풀이되는데, 간략하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①3승(乘)의 행자(行者)가 문(聞)ㆍ사(思) 등으로 인하여, 이와 같은 유가(瑜伽)를 익히고 행하며, 분(分)에 따라서 만족하고 전전(展轉)하여 모든 유정을 조화(調化)하기 때문에 유가사(瑜伽師)라고 한다. ②모든 여래(如來)는 유가(瑜伽)를 완벽하게 증득하고, 그 상응하는 바에 따라서 이 유가(瑜伽)를 지니게 하며, 일체의 성제자(聖弟子) 등을 조화(調化)롭게 하여 그로 하여금 차제(次第)로 정행(正行)을 닦게 하기 때문에 유가사(瑜伽師)라고 한다.
지(地)란 산스크리트어 Bhūmi의 의역(意譯)으로서 생성(生成)하여 머무른다[住持]는 뜻이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에서는 처음 5식신지(識身地)부터 마지막의 무여의지(無餘依地)에 이르기까지 범(梵)과 성(聖)의 인과(因果)를 모두 갖추고, 모두 함께 능히 생성하고 머무름[住持]이 지(地)와 비슷한 종류이므로 지(地)의 명칭을 따서 붙인 것이다.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제1권
미륵보살(彌勒菩薩) 지음
삼장법사(三藏法師) 현장(玄奘) 한역
1. 본지분(本地分)
...중략...
2) 의지(意地; 전절(前節)에서는 8식 가운데 전5식(前五識)을 설하였고, 지금부터는 제6, 제7, 제8의 세 가지 식(識)을 설하는 데 있어서, 세 가지 식은 공통적으로 의근(意根)에 포함되기 때문에 의지(意地)에서 설명한다. 이를 원래는 ‘의식신상응지(意識身相應地)’라고 해야 5식신상응지(識身相應地)에 배대하여 볼 때 맞는 명칭이지만 지금은 ‘식신상응(識身相應)’의 네 글자를 축약하여 의지(意地)라고 한다.)
① 이미 오식신상응지(五識身相應地)를 설명하였다.
무엇을 의지(意地)라고 하는가? 本地分中意地第二之一已說五識身相應地。云何意地?
여기에서도 5상(相)이 있음을 알아야만 하니, 즉 자성(自性)때문이요, 그것의 소의(所依)때문이요, 그것의 소연(所緣), 그것의 조반(助伴), 그리고 그것의 작업(作業)때문이다.此亦五相,應知。謂自性故,彼所依故,彼所緣故,彼助伴故,彼作業故。
무엇을 의(意)의 자성(自性)이라고 하는가? 云何意自性?
심(心)ㆍ의(意)ㆍ식(識)을 말한다. 謂心、意、識。
심(心)이란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소수의지성(所隨依止性; 유루종자(有漏種子)는 본식(本識)에 따라서 유루무기(有漏無記)가 되는 것을 나타낸다. 이는 용(用)은 체(體)에 의지한다는 뜻)이며
소수의부의지성(所隨依附依止性; 이러한 종자(種子)는 본식(本識)에 의지하더라도 선(善)ㆍ염(染)들을 일으키는 공능(功能)이 달라서 같지 않음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므로 의부(依附)라고 명명하는 것)으로서
본체[體]는 능히 집수(執受)하는 이숙에 포함되는[異熟所攝]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心 謂一切種子 所隨依止性 所隨依附依止性 體能執受異熟 所攝阿賴耶識。
의(意)란 항행의지성(恒行依止性)의 의(意; 7식/말나야식)와 그리고 6식신(六識身)의 무간멸(無間滅)의 의(意)를 말한다. 意謂恒行意及六識身,無閒滅意。
식(識)이란 현전(現前)에서 소연(所緣)의 경계(境界)를 요별(了別)하는 것이다. 識謂現前了別所緣境界
。
그것(의식 意識)의 소의(所依)로는 등무간의(等無間依)는 의근[意 : 意根]이고 종자의(種子依)는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아뢰야식(阿賴耶識)이다. 彼所依者,等無閒依,謂意,種子依,謂如前說一切種子阿賴耶識。
그것의 소연(所緣)이란 그 상응하는 것[所應]에 따른 일체법(一切法)이다. 彼所緣者,謂一切法,
불공인 경우[不共者; 전5식(前五識)과 공통하지 않는 의식 특유의 대경(對境)을 의미]의 소연(所緣)은 즉 수(受)ㆍ상(想)ㆍ행온(行蘊; 색온(色蘊)과 수온(受蘊)과 상온(想蘊)과 행온(行蘊)을 의미하며, 식온(識蘊)을 제외한 것은 다음의 6내처(六內處) 중에 의처(意處)가 있기 때문이다.)과 若不共者,所緣卽受想行薀、
무위(無爲)와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 무견무대색(無見無對色)은 무표색(無表色)을 의미))과 6내처(六內處; 6근(六根) 즉 안(眼)ㆍ이(耳)ㆍ비(鼻)ㆍ설(舌)ㆍ신(身)ㆍ의(意)))와 그리고 일체종자(一切種子)이다. 無爲、無見無對色、六內處及一切種子。
그것의 조반(助伴)이란 작의(作意)ㆍ촉(觸)ㆍ수(受)ㆍ상(想)ㆍ사(思; 작의(作意)ㆍ촉(觸)ㆍ수(受)ㆍ상(想)ㆍ사(思)는 5변행심소(遍行心所))와 彼助伴者,謂作意、觸、受、想、思、
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삼마지(三摩地)ㆍ혜(慧; 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삼마지(三摩地)ㆍ혜(慧)는 5별경심소(別境心所))와 欲、勝解、念、三摩地、慧、
신(信)ㆍ참(慚)ㆍ괴(愧)ㆍ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정진(精進)ㆍ경안(輕安)ㆍ불방일(不放逸)ㆍ사(捨)ㆍ불해(不害; 신(信)ㆍ참(慚)ㆍ괴(愧)ㆍ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무치(無癡)ㆍ정진(精進)ㆍ경안(輕安)ㆍ불방일(不放逸)ㆍ사(捨)ㆍ불해(不害)는 선심소(善心所))와 信、慚、愧、無貪、無瞋、無癡、精進、輕安、不放逸、捨、不害、
탐(貪)ㆍ에(恚)ㆍ무명(無明)ㆍ만(慢)ㆍ견(見)ㆍ의(疑; 탐(貪)ㆍ에(恚)ㆍ무명(無明)ㆍ만(慢)ㆍ견(見)ㆍ의(疑)는 6대번뇌(大煩惱))와 분(忿)ㆍ한(恨)ㆍ복(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교(憍)ㆍ해(害)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사욕(邪欲)ㆍ사승해(邪勝解)ㆍ망념(忘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 분(忿)ㆍ한(恨)ㆍ복(覆)ㆍ뇌(惱)ㆍ질(嫉)ㆍ간(慳)ㆍ광(誑)ㆍ첨(諂)ㆍ교(憍)ㆍ해(害)ㆍ무참(無慚)ㆍ무괴(無愧)ㆍ혼침(惛沈)ㆍ도거(掉擧)ㆍ불신(不信)ㆍ해태(懈怠)ㆍ방일(放逸)ㆍ사욕(邪欲)ㆍ사승해(邪勝解)ㆍ망념(忘念)ㆍ산란(散亂)ㆍ부정지(不正知)는 22수번뇌(隨煩惱))와 貪、恚、無、明、慢、見、疑、忿、恨、覆、惱、嫉、慳、誑、諂、憍、害、無慚、無愧、惛沈、掉擧、不信、懈怠、放逸、邪欲、邪勝解、忘念、散亂、不正知、
악작(惡作)ㆍ수면(睡眠)ㆍ심(尋)ㆍ사(伺; 악작(惡作)ㆍ수면(睡眠)ㆍ심(尋)ㆍ사(伺)는 4부정심소(不定心所))를 말한다. 惡作、睡眠、尋、伺,
이러한 등의 것들은 함께 있으면서[俱有] 상응(相應; 심왕(心王)과 구유(具有)하고 상응(相應)한다는 뜻) 심소유법(心所有法)이며, 이를 조반(助伴)이라고 이름한다. 如是等輩,俱有相應心所有法。是名助伴。
동일(同一)한 소연(所緣)이면서도 동일한 행상(行相)은 아니라서, 일시(一時)에 함께 있으면서도[俱有] 하나 하나 구른다<모든 심소유법(心所有法)은 심왕(心王)에 따라 다니는 것이지만 그 하나 하나의 행상(行相)은 동일하지 않고 그 나름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뜻>. 同一所緣,非同一行相,一時俱有,一一而轉,
각자의 종자로부터 생겨나면서도 서로 상호 상응하여 (능연[能緣]의) 행상(行相)이 있고 소연(所緣)이 있으며 소의(所依)가 있다. 各自種子所生,更互相應,有行相,有所緣,有所依。
------중략 -------
의식意識의 작업(作業; 이하는 의식(意識)의 작업(作業)을 밝히는 것으로 여기에는 2문(門)이 있다. 2문(門) 가운데의 그 첫 번째는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작업(作業)을 밝히는 것이며, 두 번째는 의식이 전5식(前五識)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업(不共業)에 대하여 밝히는 것이다. 다음의 일단(一段)은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작업(作業)을 밝히는 부분이다.)이란
즉 능히 자기의 경계[自境]의 소연(所緣)을 요별하는 것을 말하니, 이것을 첫 번째 업[初業]이라고 한다. 彼作業者,謂能了別自境所緣。是名初業。
다시 능히 자상(自相)ㆍ공상(共相; 자상(自相)이란 사법(事法)의 자체 특유의 상(相)이다. 즉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 등의 각자 특유의 상(相)으로서 다른 것과 공통하지 않는 대경(對境)을 의미한다. 공상(共相)이란 제 법(法)과 공통하는 것으로서 즉 무상(無常)ㆍ고(苦)ㆍ공(空) 등과 같은 상(相)이며 이는 일체 유위법(有爲法)에 공통된 상, 즉 공상(共相)이다.을 요별하고, 復能了別自相、共相,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두 번째 작업(作業)으로써,> 능히 과거[去]ㆍ미래[來]ㆍ현재세[現世]를 요별하고, 復能了別去、來、今世,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세 번째 작업(作業)으로써> 다시 찰나에 요별하고 혹은 상속하여 요별한다. 復剎那了別,或相續了別。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네 번째 작업(作業)으로써> 다시 구르고[轉] 따라서 구르면서[隨轉] 청정하고[淨]과 청정하지 않는[不淨] 일체법(一切法)의 업(業)을 일으킨다. 復爲轉隨轉發淨不淨一切法業,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다섯 번째 작업(作業)으로.>다시 능히 탐애[愛]와 비탐애[非愛]의 과보[果]를 취하고, 復能取愛非愛果,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에 대한 여섯 번째 작업(作業)으로> 다시 능히 다른 식신(識身;5식신(識身))을 이끌며 또한 능히 인(因)이 되어 등류(等流)의 식신(識身;5식신(識身))을 일으킨다. 復能引餘識身,又能爲因,發起等流識身。
또한
제 의식(意識; 이하는 의식의 작업(作業) 가운데의 그 두 번째로 의식(意識)이 전5식(前五識)과 함께하지 않는 불공업(不共業)에 대하여 밝힌다. 여기에서는 소연분별(所緣分別)ㆍ소연심려(所緣審慮)ㆍ취(醉)ㆍ광(狂)ㆍ몽(夢)ㆍ각(覺)ㆍ민(悶)ㆍ성(醒)ㆍ신업(身業)과 어업(語業)ㆍ이욕(離欲)ㆍ이욕퇴(離欲退)ㆍ단선근(斷善根)ㆍ속선근(續善根)ㆍ생사(生死)의 열 네 가지 문(門)으로 그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은 다른 식신(識身)에 비해서 뛰어난 작업(作業)이 있다. 又諸意識,望餘識身,有勝作業,
즉 소연(所緣)을 분별하고, 소연(所緣)을 심려(審慮)하며, 취(醉)하거나, 미치거나[狂], 꿈꾸거나[夢], 깨어나거나[覺], 기절하거나[悶], 성성하거나[醒], 혹은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능히 일으키거나, 능히 이욕(離欲)하거나, 이욕(離欲)에서 물러나거나, 선근(善根)을 끊거나, 선근(善根)을 잇거나, 죽거나[死] 태어나는[生] 등을 말한다. 謂分別所緣、審慮所緣,若醉若狂,若夢若覺,若悶若醒,若能發起身業、語業,若能離欲,若離欲退,若斷善根,若續善根,若死若生等。
무엇을 소연을 분별하는 것이라 하는가? 云何分別所緣?
일곱 가지의 분별 즉 유상분별(有相分別)ㆍ무상분별(無相分別)ㆍ임운분별(任運分別)ㆍ심구분별(尋求分別)ㆍ사찰분별(伺察分別)ㆍ염오분별(染汚分別)ㆍ불염오분별(不染汚分別)에 의한다. 由七種分別,如其所應。謂有相分別、無相分別、任運分別、尋求分別、伺察分別、染污分別、不染污分別。
유상분별(有相分別)이란 먼저 받아들인 대상[先所受義 대상[義]이란 범어 Artha의 의역(意譯)으로서 경계라는 뜻)에 대하여 有相分別者,謂於先所受義,
제 근(根)을 성취하고<신체가 완벽하게 결함없이 성장하여 구족한 것을 의미> 명언(名言)을 잘 아는 자(者)가 일으키는 분별을 말한다.諸根成就,善名言者,所起分別。
무상분별(無相分別)이란 먼저 끌어당긴 것[先所引 과거의 소연경(所緣境)에 생각없이 끌려가는 것을 의미])에 따르는 것이며, 명언(名言)을 잘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 등이 지니고 있는 분별을 말한다. 無相分別者,謂隨先所引,及嬰兒等,不善名言者,所有分別。
임운분별(任運分別)이란 현전(現前)의 경계에 대하여 경계의 세력에 따라서 자연스럽게[任運] 구르는 모든 분별을 말한다. 任運分別者,謂於現前境界,隨境勢力,任運而轉,所有分別。
심구분별(尋求分別)이란 제 법을 관찰(觀察)ㆍ심구(尋求)해서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尋求分別者,謂於諸法,觀察尋求,所起分別。
사찰분별(伺察分別)이란 이미 심구(尋求)하고 이미 관찰(觀察)한 것을 사찰(伺察)하고 안립(安立)해서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 伺察分別者,謂於已所尋求,已所觀察,伺察安立,所起分別。
염오분별(染汚分別)이란 과거를 되돌아보고 연연해하는 것과 함께 작용하고[俱行] 미래를 즐기는 것과 함께 작용하며 현재를 집착하는 것과 함께 작용하는 모든 분별과, 욕분별(欲分別)이나 에분별(恚分別) 혹은 해분별(害分別)의 하나 하나의 번뇌나 수번뇌(隨煩惱)에 따라 상응해서 일어나게 되는 분별을 말한다.染污分別者,謂於過去,顧戀俱行,於未來,希樂俱行,於現在,執著俱行所有分別,若欲分別,若恚分別,若害分別,或隨與一煩惱,隨煩惱相應,所起分別。
불염오분별(不染汚分別)이란 선(善)과 무기(無記)이며, 출리분별(出離分別)ㆍ무에분별(無恚分別)ㆍ불해분별(不害分別)의 하나 하나의 신(信) 등의 선법(善法)과 상응하거나 不染污分別者,若善若無記,謂出離分別、無恚分別、無害分別,或隨與一信等善法相應,
혹은 위의로(威儀路행(行)ㆍ주(住)ㆍ좌(坐)ㆍ와(臥)의 4위의를 일으키는 마음이라는 뜻)ㆍ공교처(工巧處 예술ㆍ가곡 등을 일으키는 마음이라는 뜻)) 및 모든 변화(變化 선정(禪定)ㆍ신통력(神通力)으로서 하나의 경계를 변화하는 마음을 뜻함)가 소유하고 있는 분별을 말한다.或威儀路,工巧處及諸變化,所有分別。
위와 같은 종류를 소연(所緣)을 분별(分別)하는 것이라고 한다. 如是等類,名分別所緣。
무엇을 소연(所緣)을 심려(心慮)하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審慮所緣?
여리(如理)의 소인(所引)ㆍ비여리(非如理)의 소인(所引)ㆍ비여리비불여리(非如理非不如理)의 소인(所引)을 말한다. 謂如理所引、不如理所引、非如理非不如理所引。
여리(如理)의 소인(所引)이란 진실(眞實)이 아닌 유(有)를 증익(增益)하는 4가지의 전도(顚倒), 즉 무상(無常)을 항상함[常]이라고 전도하고, 괴로움[苦]을 즐거움[樂]이라고 전도하며, 깨끗하지 않은 것[不淨]을 깨끗함[淨]이라고 전도하고, 무아(無我)를 아(我)라고 전도하지 않는 것이다. 如理所引者,謂不增益非眞實有,如四顚倒,謂於無常常倒、於苦樂倒、於不淨淨倒,於無我我倒;
또한 모든 사견(邪見) 즉 ‘베풀 필요 없다[無施與]’ 등의 모든 사견(邪見)의 행(行)과 같이 여러 진실유(眞實有)를 손감(損減)하지 않는 것이다. 법주지(法住智교법(敎法)에 의하여 생기에 되는 지혜를 의미))가 여실(如實)하게 제 소지사(所知事 알아야 할 대상의 현상들을 의미))를 요지(了知)한다거나 매우 청정한[善淸淨] 출세간의 지혜[出世間智]가 여실하게 소지(所知 알아야 하는 대상을 의미))의 제 법(法)을 깨달는[覺知] 이와 같은 것들을 여리(如理)의 소인(所引)이라고 한다. 亦不損減諸眞實有,如諸邪見,謂無施與等諸邪見行,或法住智,如實了知諸所知事,或善淸淨出世閒智,如實覺知所知諸法。如是名爲如理所引。
위와 서로 다른 것을 비여리(非如理)의 소인(所引)인줄 알아야 한다. 與此相違,當知不如理所引。
비여리비불여리(非如理非不如理)의 소인(所引)이란 무기(無記)의 지혜[慧]를 의지하여 제 법(法)을 구체적으로 관찰하는 것[審察]을 말한다. 非如理非不如理所引者,謂依無記慧,審察諸法。
위와 같은 것을 소연(所緣)을 심려(審慮)하는 것이라고 한다. 如是名爲審慮所緣。
무엇을 취함[醉;취한 상태]이라고 하는가? 云何醉?
의지(依止) 성품[性]이 약[羸劣]하기 때문에, 혹은 익숙하지 않은데도 (술을) 마셨기 때문에, 혹은 너무 자주 마셨기 때문에, 혹은 지나친 양을 마셨기 때문에, 곧 취해서 어지러운 것[醉亂]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謂由依止性羸劣故,或不習飮故,或極數飮故,或過量飮故,便致醉亂。
무엇을 미침[狂]이라고 하는가? 云何狂?
먼저 지었던 업[先業]에 이끌렸기 때문에, 혹은 여러 가지 계[諸界]의 착란(錯亂) 때문에, 혹은 놀라고 두려워서 의지[志]를 잃었기 때문에, 혹은 말마(末摩 사혈(死穴) 또는 사절(死節)이라고 번역한다. 우리 몸 안에 사혈은 64곳 혹은 120곳이 있는데, 이 곳을 정통으로 맞게 되면 죽게 된다.)를 맞았기 때문에, 謂由先業所引,或由諸界錯亂,或由驚怖失志,或由打觸末摩,
혹은 귀신과 도깨비[鬼魅]에 홀려서 전광(癲狂 미치거나 지랄병이 생기는 것을 의미)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或由鬼、魅所著,而發癲狂。
무엇을 꿈을 꾸는 것[夢]이라고 하는가? 云何夢?
의지(依止)의 성품[性]이 약[羸劣]하기 때문에, 혹은 피로[疲倦]나 과실(過失) 때문에, 혹은 지나치게 먹는 것에 빠졌기[沈重] 때문에, 혹은 암상(闇相눈을 감고 흑암(黑暗)의 색상을 관하거나, 어두움에 대하여 관하는 것을 의미)을 작의(作意)하고 사유하였기 때문에, 혹은 일체의 사업(事業)을 휴식(休息)하였기 때문에, 謂由依止性羸劣,或由疲倦過失,或由食所沈重,或由於闇相,作意思惟,或由休息一切事業,
혹은 수면(睡眠)을 자주 익혔기[串習 습관이 될 정도로 자주 익히는 것을 의미]) 때문에, 或由串習睡眠,
부채질[搖扇]이나 명주(明呪)나 약이나 신통과 같은 다른 것<자신의 내부적인 것이 아닌 외부적인 영향을 받는 것을 의미>에 이끌렸기 때문에, 혼몽(惛夢)을 일으키는 것을 말한다. 或由他所引發,如由搖扇,或由明呪,或由於藥,或由威神,而發惛夢。
무엇을 깨어남[覺]이라고 하는가? 云何覺?
잠을 푹 잔 사람[睡增者]이 피극(疲極 피로가 다 없어진 것을 의미))을 이기지 못했기 때문에, 謂睡增者,不勝疲極故,
<잠을 너무 자서 더 이상 잠을 취할 수 없는 것을 의미> 할 일이 있는 사람[所作者]이 미리 잠 잘 시간을 잡았기 때문에, 有所作者,要期睡故,
혹은 다른 것<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나 다른 사람이 깨우는 등의 일을 말함>)에 이끌려서 꿈으로부터 깨어나는 것을 말한다. 或他所引,從夢而覺。
무엇을 기절[悶]이라고 하는가? 云何悶?
바람과 열로 어지럽기 때문에, 혹은 매를 맞았기 때문에, 너무 지나치게 설사[痢]를 계속하거나 출혈(出血)과 같이 쏟았기 때문에, 혹은 극히 과로했기 때문에, 기절[悶絶]에 이르는 것을 말한다. 謂由風、熱亂故,或由捶打故,或由瀉故,如過量轉痢及出血,或由極勤勞,而致悶絕。
무엇을 성성[醒; 깨어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醒?
기절하였다가 다시 벗어나는 것을 말한다. 謂於悶已,而復出離。
무엇을 신업(身業)ㆍ어업(語業)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發起身業、語業?
즉 신업(身業)과 어업(語業)을 일으키는 지(智; 이때의 지(智)는 지혜(智慧)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분별을 하는 지(智)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가 먼저 작용[前行]하기 때문에, 다음으로 욕(欲)이 생기기 때문에, 다음으로 공용(功用)이 일어나기 때문에, 다음으로 공용에 수순(隨順)함을 우선으로 하여 신(身)과 어(語)의 업풍(業風)이 구르기 때문에, 이것으로부터 신업(身業)ㆍ어업(語業)을 일으키는 것이다. 謂由發身、語業智前行故,次欲生故,次功用起故,次隨順功用爲先,身、語業風轉故,從此發起身業、語業。
무엇을 이욕(離欲)이라고 하는가? 云何離欲?
즉 이욕(離欲)에 수순하는 감각기관[根]을 성취하기 때문에, 謂隨順離欲根成就故,
<6근(根)이 다 구족되어 있는 것을 의미> 다른 사람으로부터 가르침[敎誨]을 받아서 따르기[隨順] 때문에, 從他獲得隨順教誨故,
그것<다른 이로부터 가르침[敎誨]을 받고 수순하는 것을 의미>의 장애를 원리(遠離)하기 때문에, 방편(方便)을 바르게 닦아서,
[正修 바른 실천을 의미] 전도 없이[無顚] 사유하기 때문에, 비로소 이욕(離欲)할 수 있는 것이다. 遠離彼障故,方便正修無倒思惟故,方能離欲。
무엇을 이욕(離欲)에서 물러나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離欲退?
즉 연근기[軟根; 하열(下劣)한 근기를 의미]의 성품[性]이기 때문에,
새로 선품(善品)을 닦은 사람이 그것(선품(善品)의 형상상(形狀相; 그것의 형상상(形狀相)이란 새로 닦은 선품(善品)에서 나타난 여러 가지의 형상(形狀)의 상(相)을 억념(憶念)ㆍ사유(思惟)하는 것을 의미)을 사유하기 때문에, 순퇴법(順退法)을 받아 행하기[受行] 때문에, 번뇌에 장애 받기 때문에, 나쁜 벗[惡友]에 포섭되기 때문에, 이욕(離欲)으로부터 물러나는 것이다. 謂性軟根故,新修善品者,數數思惟彼形狀相故,受行順退法故,煩惱所障故,惡友所攝故,從離欲退。
무엇을 선근(善根)을 끊는 것[斷]이라고 하는가? 云何斷善根?
즉 이근자(利根者)가 상품(上品)의 여러 악한 의요[諸惡意樂]들이 현행하는 법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 나쁜 벗[惡友]을 수순하게 되기 때문에, 謂利根者,成就上品諸惡意樂現行法故,得隨順彼惡友故,
<여러 악의 의요[諸惡意樂]들이 현행하는 법을 따르는 것을 의미>그 사견(邪見)의 전(纏; 상상품(上上品)의 사견(邪見)이 현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 전(纏)은 전박(纏縛)의 의미로서 번뇌를 일컫는다.))이 극히 매우 원만하게 되어 구경(究竟)에 이르렀기 때문에,彼邪見纏,極重圓滿,到究竟故,
그 일체의 악(惡)이 현행하는 가운데에 무외(無畏)를 얻기 때문에<여러 악의 의요들[諸惡意樂]이 현행하는 법에 대하여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 애민(哀愍)이 없기 때문에, 능히 선근(善根)을 끊는 것이다.彼於一切惡現行中,得無畏故,無哀愍故,能斷善根。
이 가운데 종자도 선근(善根)이라고 하고 무탐(無貪)ㆍ무진(無瞋) 등도 또한 선근(善根)이라고 하지만, 상속하는 것이 서로 다르기[相違] 때문에, 단지 현행(現行)의 선근(善根 선근(善根)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종자이고 둘째는 현행이다. 종자의 세력을 끊어서 현행하지 않게끔 하는 것을 끊는다[斷]고 한다.))만을 안립(安立)하여 선근을 끊는다[斷]고 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영원히 그 선근 종자를 뽑아 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此中種子,亦名善根,無貪、瞋等,亦名善根,但由安立現行善根,相違相續,名斷善根,非由永拔彼種子故。
무엇을 선근(善根)을 잇는 것[續]이라고 하는가? 云何續善根?
즉 이근(利根)의 성품[性]이기 때문에, 친한 벗[親朋友 여러 선의 의요[諸善意樂]들이 현행하는 법을 의미])을 보고서 복업(福業)을 닦기 때문에, 謂由性利根故,見親朋友,修福業故,
착한 장부(丈夫; 정법(正法)을 가르치는 스승을 의미)에 나아가 정법(正法)을 듣기 때문에, 詣善丈夫,聞正法故,
유예(猶豫 이럴까 저럴까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을 의미)가 생겨도 증(證 깨달음의 진리를 확신하는 것을 의미)을 결정하기 때문에, 도로 선근(善根)을 잇는 것[續]이다.因生猶豫證決定故還續善根
무엇을<『본론(本論)』에서 생사(生死)를 밝히는 것은 아래와 같은 구조로 설명된다.>
(一) 내분유정(內分有情)의 생사를 밝힌다.
1. 사(死)를 밝힌다.
(1) 여섯 가지 사(死)를 드러내어 해석한다.
(2) 여덟 가지 문(門)으로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설한다.
2. 생(生)을 열 네 가지 항목으로 밝힌다.
(1) 중유(中有)를 스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2) 생유(生有)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3) 본유(本有)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3. 공관루진(空觀漏盡)을 스물 세 가지 항목으로 밝힌다.
(二) 외분세계(外分世界)의 성괴(成壞)를 스물 네 가지 항목으로 밝힌다.
죽는다[死]고 하는가? 云何 死謂
수명[壽量]이 다했기 때문에 곧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니, 여기에는 세 가지가 있다. 즉 목숨이 다하고[壽盡], 복이 다하고[福盡], 불평등(不平等)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由壽量極故而便致死此復三種,謂壽盡故,福盡故,不避不平等故。
또한<이하 사(死)를 밝히는 두 가지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여섯 가지의 사(死)를 드러내어 해석한다.>
이것은 선심(善心)ㆍ불선심(不善心)ㆍ무기심(無記心)의 시사(時死 때에 맞는 죽음을 의미)와 비시사(非時死 때에 맞지 않는 죽음을 의미)가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當知亦是時、非時死,或由善心,或不善心,或無記心。
무엇을 목숨이 다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壽盡故死?
마치 어떤 사람이 감(感 과보(果報)를 받는 것을 의미)에 따라서 수명이 완전히 다하여 죽는 것과 같으니, 이를 시사(時死)라고 한다. 猶如有一隨感壽量滿盡故死。此名時死。
무엇을 복이 다했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福盡故死?
마치 어떤 사람이 자구(資具 생활에 필요한 도구)가 다 없어졌기 때문에 죽는 것과 같다. 猶如有一資具闕故死。
무엇을 불평등을 피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하는가? 云何不避不平等故死?
세존께서 “아홉 가지 인(因)과 아홉 가지 연(緣) 때문에, 수명이 다하지 않아도 죽는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如世尊說:“九因、九緣,未盡壽量而死。
어떤 것들을 아홉 가지라고 하는가? 何等爲九?
즉 양(量)에 맞지 않게 먹고, 마땅하지 않는 것을 먹고, 소화되지 않았는데도 다시 먹고, 살아있는데도 뱉지 않고, 익혀서 이를 지니고<발효된 음식, 즉 예를 들어 젓갈 같은 것을 말한다.>, 의약(醫藥)을 가까이 하지 않고, 자기에게 손해 되고 이익 되는 것을 알지 못하고, 때에 맞지 않고[非時] 양에 맞지 않는[非量] 범행이 아닌 것을 행하는 것이니, 이러한 것을 비시사(非時死)라고 한다. 謂食無度量,食所不宜,不消復食,生而不吐,熟而持之,不近醫藥,不知於己若損若益,非時非量,行非梵行。此名非時死。
무엇을 선심(善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云何善心死?
마치 어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이전에 닦았던 선법(善法)을 기억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이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때문에, 이러한 인연에 의해서 이때 신(信) 등의 선법(善法)이 마음[心]에 현행하는 것과 같으며, 내지 추상(麤想; 추상(麤想)이란 사유(死有)의 마지막에 일어나는 선(善)과 불선(不善)의 명료한 생각을 의미)이 현행하는 것과 같다. 猶如有一將命終時,自憶先時所習善法,或復由他令彼憶念,由此因緣,爾時,信等善法,現行於心,乃至麤想現行。
만약 세상(細想; 세상(細想)이란 정사(正死)의 전찰나의 마음으로서 선(善)ㆍ악(惡)의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무기심(無記心)을 의미)이 현행할 때는 선심(善心)이 곧 평등[捨]하여 오직 무기심(無記心)에만 머물게 된다. 왜냐 하면 그는 이때에 일찍이 익혔던 선(善)에 대해서도 기억할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할 수 없기 때문이다. 若細想行時,善心卽捨,唯住無記心。所以者何?彼於爾時,於曾習善,亦不能憶,他亦不能令彼憶念。
무엇을 불선심(不善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마치 어떤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이전에 익혔던 악법(惡法)을 기억하거나 혹은 다시 다른 사람이 그로 하여금 기억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는 이때 탐(貪)ㆍ진(瞋) 등과 함께하는 모든 불선법이 마음에 현행하는 것과 같다. 내지 추(麤)ㆍ세(細) 등의 상(想)이 현행하는 것은 앞에서 잘 설한 것과 같다. 云何不善心死?猶如有一命將欲終,自憶先時串習惡法,或復由他令彼憶念,彼於爾時,貪、瞋等俱,諸不善法,現行於心,乃至麤、細等想現行,如前善說。
또한 선심(善心)을 갖고 죽을 때[死時]는 안락하게 죽는 것이라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몸을 핍박(逼迫)하는 극히 괴로운 느낌[極苦受]이 없다. 악심(惡心)을 갖고 죽을 때는 괴로워하면서 죽는 것이라서,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몸을 핍박(逼迫)하는 매우 심한 괴로운 느낌[極重苦受]이 있다. 또한 선심을 갖고 죽는 자는 어지럽지 않은 색상(色相)을 보고 불선심을 갖고 죽는 자는 어지러운 색상(色相)을 본다.又善心死時,安樂而死,將欲終時,無極苦受逼迫於身。惡心死時,苦惱而死,將命終時,極重苦受逼迫於身。又善心死者,見不亂色相;不善心死者,見亂色相。
무엇을 무기심(無記心)의 죽음이라고 하는가? 云何無記心死?
즉 선(善)과 불선(不善)을 행한 사람과 혹은 행하지 않은 사람이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스스로 기억할 수도 없고 다른 사람도 기억하도록 할 수 없어서, 이때에 선심도 아니고 불선심도 아니면서 죽으니, 이미 안락하게 죽는 것도 아니고 괴로워하면서 죽는 것도 아닌 것이다. 謂行善、不善者,或不行者,將命終時,自不能憶,無他令憶,爾時,非善心、非不善心死,旣非安樂死,亦非苦惱死。
또한<사(死)를 밝히는 두 가지 가운데, 이하는 그 두 번 째로 여덟 가지 문(門)으로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한다. 지금 이 대목은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첫 번째로 죽을 때 3성(性) 가운데에 어떤 것을 먼저 일으키는가를 분별한다.> 선과 又行善、
불선不善을 행한 보특가라(補特伽羅;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범어 Pudgala의 음사어[音譯]로서 삭취취(數取趣)라고 의역(意譯)된다. 자주 윤회하면서 6취(趣)의 생을 취한다는 뜻이다. 이는 보통 유정(有情)의 이명(異名)으로 쓰이는 것)는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혹은 자연스럽게 앞서 익혔던 선과 불선을 기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기억하도록 한다. 不善補特伽羅,將命終時,或自然憶先所習善及與不善,或他令憶,
그는 이때에 과거에 많이 익혔던 가장 강한 힘에 그 마음이 치우쳐서 기억하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다 잃어버리게 된다. 만약 평등을 갖추어서 자주 거듭 익혔던 사람일 경우는 그는 이때에 처음 것을 따라서 스스로 기억하거나 다른 사람이 기억하도록 하는데, 다른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이것<자주 익혔던 사(捨)의 평등심(平等心)>만을 버리지 않는다. 彼於爾時,於多曾習力最强者,其心偏記,餘悉皆忘。若俱平等曾串習者,彼於爾時,隨初自憶,或他令憶,唯此不捨,不起餘心。彼
그는<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두 번째로 사인(死因)을 밝힌다.> 이때 두 가지 인(因)의 증상력(增上力), 於爾時,由二種因增上力故,而便命終,
즉 희론(戲論)에 즐겨 집착하는[樂著]하는 인(因)의 증상력(增上力 명언종자(名言種子)의 세력을 의미)과 청정함[淨]ㆍ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인(業因)의 증상력(增上力 업종자(業種子)의 세력을 의미)때문에 곧 목숨이 끊어지게 된다. 謂樂著戲論因增上力及淨不淨業因增上力。
이전의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세 번째로 선(善)ㆍ악(惡)의 상(相)을 밝힌다.> 업이 끌어당긴 과(果)를 다 받고 나서 불선업(不善業)을 행한 사람은 마치 꿈속에서 무량한 종류의 괴이한[變怪] 색상(色相)을 보듯이,
바로 이때<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이전에 지었던 모든 불선업(不善業) 소득(所得)의 불애과(不愛果)의 전상(前相)을 받는다. 受盡先業所引果已,若行不善業者,當於爾時,受先所作諸不善業所得不愛果之前相,猶如夢中,見無量種變怪色相。
이런 상(相 이전에 지었던 모든 불선업소득(不善業所得)의 불애과(不愛果)의 전상(前相))에 의지하기 때문에 박가범(薄伽梵)께서 “이전에 악(惡)ㆍ불선업(不善業)을 짓거나 증장(增長)시킨 적이 있는 이는
이 때<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마치 저무는 해가 산과 산봉우리에 걸려서 가려지고 거의 가려지기도 하고 아주 가려지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補特伽羅)는 밝음[明]에서 어두움[闇]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依此相故,薄伽梵說:“若有先作惡不善業,及增長已,彼於爾時,如日後分或山山峯影等懸覆遍覆極覆。”當知如是補特伽羅,從明趣闇。
만약 이전에 불선업(不善業)의 과(果)를 다 받고 나서 선(善)을 닦은 이는 위와 서로 다르다. 이와 같은 보특가라는 어두움에서 밝음으로 나아가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若先受盡不善業果,而修善者,與上相違,當知如是補特伽羅,從闇趣明。
이 가운데에 차별<이전에 불선업(不善業)의 과(果)를 다 받고 나서 불선(不善)을 닦은 보특가라(補特伽羅)와 선(善)을 닦은 보특가라(補特伽羅)의 차이점을 말하는 것>은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마치 꿈속에서 무량한 종류의 괴이하지[變怪] 않은 색(色)을 보고 가의상(可意相)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此中,差別者,將命終時,猶如夢中,見無量種非變怪色,可意相生。
만약 상품(上品)의 불선업(不善業)을 지은 사람은 이러한 괴이한 상[變怪相]을 보기 때문에, 땀이 흐르고 털이 곤두서며 손발이 떨리며[紛亂] 마침내 똥을 싸면서 허공을 더듬고 눈동자가 뒤집히면서 거품을 내뿜는다. 그는 이때에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괴이한 모습[變怪相]을 일으키는 것이다. 若作上品不善業者,彼由見斯變怪相故,流汗毛豎,手足紛亂,遂失便穢,捫摸虛空,翻睛咀沫,彼於爾時,有如是等變怪相生。
만약 중품(中品)의 불선업(不善業)을 지은 사람은 이때<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 괴이한 모습[變怪相]이 있기도 하고 혹은 없기도 하며, 만약 있더라도 전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若造中品不善業者,彼於爾時,變怪之相,或有或無,設有不具。
또한<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네 번째로 윤생(潤生)의 상(相)을 밝힌다.> 목숨이 끊어지려 할 때부터 아직 혼미한 상이 나타나지 않을 단계[位]에 이르기까지의 중생들은 又諸衆生將命終時,乃至未到惛昧想位,
오랫동안 익혔던 아애(我愛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집착하는 것을 의미)가 현행한다. 長時,所習我愛現行,
이 힘<아애(我愛)의 힘> 때문에 ‘나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곧 자신을 사랑[愛]하니, 由此力故,謂我當無,便愛自身,
이 아애我愛 때문에 중유(中有)의 생보(生報; 중유(中有)의 생보(生報)는 두 가지로 풀이할 수 있다. 첫째는 중유(中有)는 즉(卽) 생보(生報)라고 해석하는 지업석(持業釋)이며, 둘째는 중유(中有)와 생보(生報)를 다르게 보는 상위석(相違釋)이다.)를 건립하는 것이다. 由此建立中有生報。
예류과(預流果) 및 일래과(一來果)의 경우에도 이때 아애(我愛)가 또 다시 현행한다. 그러나 이 예류(預流) 및 일래과(一來果)는 이 아애(我愛)에 대하여 지혜력(智慧力)으로써 자주 추구하여 제지[制]하고 집착하지 않으니, 마치 씩씩한 장부가 힘 없는 약한 이와 씨름하여 그를 제압하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 도리(道理)도 또한 이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불환과(不還果)의 경우는 이 때 아애(我愛)가 다시 현행하지 않는다. 若預流果及一來果,爾時,我愛亦復現行。然此預流及一來果,於此我愛,由智慧力,數數推求,制而不著,猶壯丈夫,與羸劣者,共相捔力,能制伏之。當知此中道理,亦爾。若不還果,爾時,我愛不復現行。
또한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다섯 번째로 지절(肢節)이 풀리는 것을 밝힌다.>
지절(肢節 5체4지(五體四支)의 뼈 마디마디를 의미이 풀리는 것은 又解肢節,
천(天)과 나락가(那落迦; 지옥)를 제외한 그 밖의 생을 받는 곳[生處]에는 모두 다 있다. 여기에도 첫째 무거움[重]과 둘째 가벼움[輕]의 두 가지가 있다. 무거움이란 악업(惡業)을 지은 것을 말하고 가벼움이란 선업(善業)을 지은 것을 말하는데, 북구로주(北拘盧洲)에서는 모두가 다 가벼움이다. 除天、那落迦,所餘生處,一切皆有。此復二種,一重,二輕。重,謂作惡業者;輕,謂作善業者。北拘盧洲一切皆輕。
또한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여섯 번째로 근(根)이 사라지는 점(漸)ㆍ돈(頓)의 시(時)를 밝힌다.>
색계(色界)에서 죽을 때는 모두 감각기관[根]을 갖추지만 욕계(欲界)에서 죽을 때는 대상에 따라서 감각기관이 있되, 갖추기도 하고 갖추지 않기도 한다. 又色界沒時,皆具諸根;欲界沒時,隨所有根,或具不具。
또한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일곱 번째로 사(死)의 명칭의 차별을 밝힌다.>
청정해탈(淸淨解脫 번뇌를 해탈하여 청정해진 것)하여 죽는 이는 선에 어울리는 죽음[調善死]이라고 하며, 불청정불해탈(不淸淨不解脫)하여 죽는 이는 선에 어울리지 않은 죽음[不調善死]이라고 한다.又淸淨解脫死者,名調善死;不淸淨不解脫死者,名不調善死。
또한 <이하는 뜻에 따라서 여러 가지를 해석하는 것 가운데, 여덟 번째로 죽을 때 몸을 버리는 차별의 상(相)을 밝힌다.> 목숨이 끊어지려고 할 때에 악업(惡業)을 지은 사람은 식(識)이 소의(所依; 신체)의 위쪽부터 버리게 된다. 즉 위쪽부터 식기 시작하여[冷觸] 이렇게 점차 버려서 심처(心處; 심장)에 이르게 된다. 又將終時,作惡業者,識於所依,從上分捨,卽從上分,冷觸隨起,如此漸捨,乃至心處
선업을 지은 사람은 식(識)이 소의(所依)의 아래쪽부터 버리게 된다. 즉 아래쪽부터 식기 시작하여 이렇게 점차로 버려서 마침내 심처에 이르게 된다. 다음에 식(識)이 심처를 버려야만 심처에서 부터 식기 시작하여 두루 소의(所依)로 번져나감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造善業者,識於所依,從下分捨,卽從下分,冷觸隨起,如此漸捨,乃至心處。當知後識唯心處捨。從此冷觸遍滿所依
무엇을(이하는 생(生)을 중유(中有)ㆍ생유(生有)ㆍ본유(本有)의 세 가지로 밝히는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중유(中有)에 대하여 스물 두 가지 문(門)으로 밝힌다.) 태어남[生]이라고 하는가? 云何生?
아애(我愛;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첫 번째로 중유(中有)의 인연(因緣)을 밝힌다.) 곧바로[無間] 이미 생겼기 때문에, 무시이래[無始]로 희론(戲論)을 즐겨 집착한[樂著] 인(因; 희론(戱論)의 언어에 의해서 훈습되어진 종자, 즉 명언종자(名言種子)를 의미한다. 이는 제 법(法)의 자과(自果)를 생기게 하는 친인연(親因緣)이며, 여기서의 인(因)은 종자를 의미한다.)을 이미 훈습(薰習)하였기 때문에, 청정함[淨]ㆍ청정하지 않음[不淨]의 업인(業因)을 훈습하였기 때문에, 由我愛無閒已生故,無始樂著戲論因,已熏習故,淨不淨業因,已熏習故,
그 소의(所依)의 체(體; 중유(中有)의 색심오온(色心五蘊)의 소의(所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체(體)를 의미한다.)는, 彼所依體,
두 가지 인(因; 무시이래[無始]로 희론(戱論)을 낙착(樂著)한 인(因)과 정(淨)ㆍ부정(不淨)의 업인(業因)을 말한다.)의 증상력(增上力)에 의하기 때문에 자기의 종자[自種子; 명언종자(名言種子)를 말한다.])로부터 由二種因增上力故,從自種子
즉 이곳 중유(中有)에 이숙(異熟; 선업(善業)으로 부르게 되는[所感] 가애(可愛)의 과보(果報), 또는 악업(惡業)으로 부르게 되는[所感] 불가애(不可愛)의 과보를 의미)이 卽於是處,中有異熟,
곧바로[無間; 사유(死有) 다음 찰나에 간격 없이 곧바로 중유(中有)가 생기는 것을 의미)태어나게 된다. 無閒得生,
저울의(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두 번째로 생사(生死)의 동시(同時)를 밝힌다.) 양쪽 끝이 오르락내리락 하는 시(時)와 같이 (생유[生有]는) 사유(死有)와 동시(同時)이다. 死生同時,如秤兩頭,低昂時等,
그래서(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세 번째로 중유(中有)가 제 근(根)을 갖추는 것을 밝힌다.) 이 중유(中有)는 반드시 감각기관들[諸根]을 갖춘다. 而此中有,必具諸根。
악업(惡業)을(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네 번째로 중유(中有)의 상상(相狀)을 밝힌다.) 지은 사람이 얻는 중유(中有)는 검은 양[黑羺]의 빛깔과 같거나 혹은 캄캄한 밤과 같으며, 선업(善業)을 지은 사람이 얻는 중유(中有)는 흰옷의 빛깔과 같거나 혹은 청명한 밤과 같다. 造惡業者,所得中有,如黑羺光,或陰闇夜;作善業者,所得中有,如白衣光,或晴明夜。
또한(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다섯 번째로 중유(中有)는 매우 깨끗한 천안(天眼)으로 경(境)을 대함을 밝힌다.) 이 중유는 매우 청정한 천안(天眼)이 작용하게 된다[所行].
그는(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여섯 번째로 죽을 때 아애(我愛)가 현행(現行)하는 것과는 다름을 밝힌다.) 이때 이전의 아애(我愛)와 같은 종류[類]로는 다시 현행하지 않는다. 又此中有是極淸淨,天眼所行,彼於爾時,先我愛類,不復現行,
식(識)이(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일곱 번째로 중유(中有)의 당생(當生)의 형(形)을 밝힌다.) 이미 머무르기 때문에(식(識)이 이미 중유의 몸을 받아서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상속하여 머무르기 때문에 자아(自我)의 단멸(斷滅)을 두려워하여 자체(自體)의 아애(我愛)를 집착하지 않지만 경계에 대한 애(愛)를 일으킨다는 뜻이다.) 그래서 경계에 대해서 희론(戲論)의 애(愛)를 일으키며 태어날 곳에 따라서 곧 그 형류(形類)의 중유中有가 생긴다. 識已住故。然於境界,起戲論愛,隨所當生,卽彼形類中有而生。
또한(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여덟 번째로 중유(中有)의 안(眼)을 밝힌다.) 중유의 눈[眼]은 마치 천안(天眼)과 같이 장애가 없어서 오직 태어날 곳[生處]에만 이른다. 又中有眼,猶如天眼,無有障㝵,唯至生處,
마치(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아홉 번째로 중유신(中有身)이 가는 곳을 밝힌다.) 신통(神通)을 얻은 것과 같아서 나아가는 곳에 장애는 없지만, 역시 오직 태어날 곳[生處]에만 이른다.所趣無礙,如得神通,亦唯至生處。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번째로 중유(中有)는 이취(異趣)를 보지 않음을 밝힌다.> 이 눈에 의해서 자기와 같은 종류의 중유(中有)의 유정(有情)을 보고 그리고 자신이 태어날 곳을 본다. 又由此眼,見己同類中有有情,及見自身當所生處。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한 번째로 중유(中有)는 선업(先業)의 선(善)과 악(惡)에 따라서 눈으로 정(淨)과 예(穢)를 보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밝힌다.> 악업을 지은 사람은 눈으로 아래를 청정하다고 보고 얼굴을 숙이고 가며, 천취(天趣)로 가는 이는 (머리를) 위로 하며, 인취(人趣)로 가는 이는 (머리를) 옆으로 한다.又造惡業者,眼視下淨,伏面而行,往天趣者,上,往人趣者,傍。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두번째로 중유(中有)의 수명(壽命)을 밝힌다.> 이 중유가 만약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꽉 찬 7일 동안 머무르지만 태어날 연[生緣]을 만났을 경우에는 결정할 수 없다. 又此中有,若未得生緣,極七日住,有得生緣,卽不決定。
<중유(中有)가 생연(生緣)을 받는 날짜가 결정되지 않음을 의미> 만약 7일이 되어도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할 경우에는 죽어서 다시 태어나 7일 동안 머물게 되고, 이와 같이 계속하여, 아직 태어날 연[生緣]을 만나지 못했을 경우에는 49일 동안 머물게 된다. 이 이후부터는 결정적으로 태어날 연[生緣]을 만난다.若極七日,未得生緣,死而復生,極七日住。如是展轉,未得生緣,乃至七七日住,自此已後,決得生緣。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세 번째로 중유종자(中有種子)가 전전하는 것을 밝힌다.> 7일에 죽어 버린 이 중유는, 又此中有,七日死已,
혹은 곧 이것의 종류<인간 세상>로 태어나고, 혹은 나머지 업이 전전하기 때문에 중유(中有)의 종자(種子)가 계속할 경우<계속 중유(中有)로 전전하는 중유(中有)를 말한다.>에는 곧 다른 종류로 태어난다.或卽於此類生,若由餘業可轉。中有種子轉者,便於餘類中生。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네 번째로 중유(中有)의 이명(異名)을 해석한다.> 이 중유는 여러 명칭이 있다. 어떤 경우는 죽음[死]과 태어남[生]의 두 가지 종류[類]의 중간에 있으면서 태어나기 때문에 중유(中有)라고 하고, 냄새를 찾아가고 냄새를 먹이로 삼기 때문에 건달박(健達縛;건달바/음악의 신)이라고 이름한다. 又此中有,有種種名。或名中有,在死生二有中閒生故;或名健達縛,尋香行故,香所資故;
의(意)를 의지로 삼아서 태어날 곳[生處]에 가기 때문에 의행(意行)이라고 이름한다. 이것은 몸이 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며, 심연(心緣)으로 가는 것을 (설하는 것이) 아니다. 或名意行,以意爲依,往生處故,此說身往,非心緣往
어떤 경우는 생유(生有)를 일으키기 때문에 취생(趣生)이라고 이름한다. 중유는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다섯 번째로 중유(中有)의 3계(界) 존재여부(存在與否)를 밝힌다.> 무색계(無色界)를 제외한 모든 태어나는 곳[生處]에 있음을 알아야만 한다. 或名趣生,對生有起故。當知中有除無色界一切生處。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여섯 번째로 중유(中有)의 취향(趣向)의 상(相)을 밝힌다.> ‘악업(惡業)을 지었다’란 양ㆍ닭ㆍ돼지 등을 잡은 것을 말한다. 又造惡業者,謂屠羊、鷄、猪等,
그 한 가지에 따라도 불율의(不律儀 계율(戒律)에 반하는 행위(行爲)에서 생기게 되는 악(惡)의 무표색(無表色)을 말한다.)의 중동분(衆同分)에 머무르기 때문에 나락가(那落迦;지옥)를 부르는 악(惡)ㆍ불선업(不善業)을 짓고 증장하게 된다. 隨其一類,由住不律儀,衆同分故,作感那落迦惡不善業,及增長已。
그는 이때 마치 꿈속과 같이 스스로 그 업을 받게 되는 태어날 곳[生處]에서 도리어 이와 같은 종류의 유정(有情)과 양 등을 잡는 일을 보게 되는데, 전에 익혔던 것이기 때문에 기뻐서 내달린다. (이때) 바로 태어날 곳[生處]의 경계[境]의 물질[色]에 의하여 장애를 받아 중유(中有)는 사라지고 생유(生有)가 이어서 일어난다. 彼於爾時,猶如夢中,自於彼業所得生處,還見如是種類有情及屠羊等事,由先所習,憙樂馳趣,卽於生處,境色所礙,中有遂滅,生有續起。
그것(中有)이 없어지려고 할 때는 앞서 사유(死有)와 같이 어지러운[紛亂] 색(色; 변괴상(變怪相))을 본다.彼將沒時,如先死有,見紛亂色,
이와 같이 나머지 생겨나고[生]ㆍ사라지는[滅] 도리는 앞과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如是乃至生滅道理,如前應知。
또한<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그것 (중유中有)이 생겨날 때, 오직 화생(化生)이며, 6처(處;6근)를 구족(具足)한다. 又彼生時,唯是化生,六處具足。
다시 (중유中有) ‘나[我]는 그와 재미있게 즐기며 즐거움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기예(伎藝)를 익히리라’고 말하면서 이러한 마음을 일으키면서도 여기(지옥)로 나아간다. 그는 이때 전도(顚倒)되어 여러 가지 사업(事業)을 짓고 냉(冷)ㆍ열(熱)을 느낀다. 復起是心,而往趣之,謂‘我與彼,嬉戲受樂,習諸伎藝。’彼於爾時,顚倒謂‘造種種事業,及觸冷熱。
만약 망견(妄見)을 여의면 이와 같은 상모(相貌)에도 오히려 취욕(趣欲 6도 윤회하려는 욕구)이 없었을 텐데 하물며 그곳(지옥)으로 가겠는가. 만약 거기로 가지 않으면 마땅히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若離妄見,如是相貌,尚無趣欲,何況往彼。若不往彼,便不應生。
이와 같이 나락가(那落迦; 지옥)처럼 다른 나락가(那落迦; 지옥)와 흡사한 아귀[鬼]의 취(趣) 가운데 태어나는 것도 이 영귀(癭鬼)와 같다고 알아야만 한다. 또한 나머지 아귀[鬼]ㆍ방생(傍生)ㆍ인(人) 등 및 욕(欲)ㆍ색계천(色界天)의 중동분(衆同分)에서 생(生)을 받으려고 할 때 태어나야 할 곳[當生處]에서 자기와 동류(同類)의 가의(可意)의 유정(有情)을 본다. 이 때문에 그는 기쁨[欣樂]이 일어나서 태어날 곳[生處]에 가서 곧바로 걸리게 된다. 如於那落迦如是,於餘似那落迦鬼趣中生,當知亦爾,如癭鬼等。又於餘鬼、傍生、人等及欲、色界天衆同分中,將受生時,於當生處,見己同類可意有情。由此於彼,起其欣欲,卽往生處,便被拘㝵
죽고 태어나는[死生] 도리(道理) 또한 앞의 경우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死生道理,如前應知。
또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열 아홉 번째로 3처(處)의 현전(現前)에 의하여 모태(母胎)에 들어가는 것을 밝힌다.> 세 가지[三處]가 현행하기 때문에 모태(母胎)에 들어갈 수 있다. 又由三處現前,得入母胎
즉 첫째는 그 어미[母]가 조적(調適)하면서도 때를 만나야 하고, 一其母調適而復値時
둘째는 부모가 화합하여 함께 애염(愛染)을 일으켜야 하고, 二父母和合俱起愛染
셋째는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현재전(現在前)해야 한다. 三健達縛正現在前
다시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스무 번째로 세 가지 장애가 없을 때, 중유(中有)가 모태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밝힌다.> 세 가지 장애, 즉 산처(産處)의 과환(過患)의 소작(所作)ㆍ종자(種子)의 과환(過患)의 소작(所作)ㆍ숙업(宿業)의 과환(過患)의 소작(所作)이 없어야 한다. 復無三種障礙,謂產處過患所作,種子過患所作,宿業過患所作。
무엇을 산처(産處; 자궁)의 과환(過患)이라 하는가? 云何產處過患?
아이 낳는 곳[産處]이 풍병(風病)과 열병(熱病)으로 핍박(逼迫)받거나, 혹은 그 안(자궁)에 마맥과(麻麥果; 태아가 자라는 것을 장애하는 보리씨와 같은 일종의 혹을 말한다.)가 있거나, 謂若產處,爲風、熱,癊之所逼迫,或於其中,有麻、麥果,
혹은 그 문(門; 산문(産門))이 마치 차라(車螺)와 같은 형상 <산문(産門)이 넓은 것>이거나 굽은 형상이거나 더럽거나 탁한 경우이다. 이와 같은 종류가 산처(産處)의 과환(過患)인줄 알아야만 한다. 或復其門如車螺形,有形有曲,有穢有濁,如是等類,產處過患應知。
무엇을 종자(種子; 부모)의 과환(過患)이라고 하는가? 云何種子過患?
아비[父]는 부정(不淨)을 내고 어미[母]는 그렇지 않거나, 혹은 어미[母]는 내고 아비[父]는 내지 않거나, 혹은 둘 다 내지 않거나, 혹은 아비[父]의 정(精)이 썩었거나, 혹은 어미[母]의 정(精)이 썩었거나, 혹은 둘 다 썩었거나 하는 경우이다. 이와 같은 종류가 종자(種子)의 과환(過患)인줄 알아야만 한다. 謂父出不淨非母,或母非父,或俱不出,或父精朽爛,或母,或俱,如是等類,種子過患應知。
무엇을 숙업(宿業)의 과환(過患)이라 하는가? 云何宿業過患?
아비[父] 또는 어미[母]가 자식을 얻을[感] 업(業)을 짓지 않고 증장(增長)하지 않았거나, 혹은 둘 다 짓지 않았거나, 혹은 그 (中有) 유정(有情)이 부모를 얻을 업을 짓지 않고 증장(增長)하지 않았거나, 혹은 그 中有의 부모가 다른 자식을 얻을 업을 짓고 증장(增長)하였거나, 혹은 그 유정이 다른 부모를 얻을 업을 짓고 증장하였거나, 혹은 대종엽(大宗葉; 불공역(不空譯)의 『왕법정론경(王法政論經)』에서는 종족(種族)으로 번역한다. 본가(本家)와 분가(分家)가 왕성한 일족(一族)을 대종엽가(大宗葉家)라고 부른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자신과 부모(父母)가 다른 것을 의미한다.)을 얻을 업, 또는 비대종엽(非大宗葉)을 얻을 업을 말하니, 이와 같은 종류가 숙업(宿業)의 과환(過患)임을 알아야만 한다. 謂或父或母不作不增長感子之業,或復俱無,或彼有情不作不增長感父母業,或彼父母作及增長感餘子業,或彼有情作及增長感餘父母業,或感大宗葉業,或感非大宗葉業,如是等類,宿業過患應知。
만약 이와 같은 세 가지의 과환(過患; 위에서 밝힌 산처과환(産處過患)의 소작(所作)ㆍ종자과환(種子過患)의 소작(所作)ㆍ 숙업과환(宿業過患)의 소작(所作)을 말함)이 없고, 若無如是三種過患,
세 가지[三處; 위에서 밝힌 중유(中有)의 모(母)가 조적(調適)하면서도 때를 만나야 하는 것과 중유(中有)의 부모(父母)가 화합(和合)하여 함께 애염(愛染)을 일으켜야 하는 것과 건달박(健達縛)이 바로 현재전(現在前)해야 하는 것을 말함]가 현전(現前)하면, 모태에 들어가게 된다. 그는 곧 중유의 처소에서 자기와 같은 종류[同類]인 유정(有情)이 기뻐하는 것[喜戲] 등을 보고 태어날 곳[所生處]에 나아가려는 욕구를 일으킨다. 三處現前,得入母胎。彼卽於中有處,自見與己同類有情,爲嬉戲等,於所生處,起希趣欲。
그는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스물 한 번째로 중유(中有)가 부모(父母)에게 전도(顚倒)를 일으키는 것을 밝힌다.>
이때 그 부모가 함께 사행(邪行)하여 나오는 정혈(精血)을 보고 전도(顚倒)를 일으킨다. 전도(顚倒)를 일으킨다는 것은 부모가 삿된 행[邪行]을 행하는 것을 볼 때, 부모가 삿된 행[邪行]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착각[倒覺]을 일으켜서 자기가 스스로 행하는 것이라고 보고, 자기가 스스로 행한 것을 보고 나서 곧바로 탐애(貪愛)를 일으키는 것이다. 彼於爾時,見其父母共行邪行,所出精血,而起顚倒。起顚倒者,謂見父母爲邪行時,不謂‘父母行此邪行’乃起倒覺‘見己自行’見自行已,便起貪愛。
만약 지금 여자가 되고자 하면 그는 곧 아비[父]에게 회탐(會貪; 아비가 어미에게 탐애(貪愛)를 일으키는 것과 똑같은 탐애를 일으키기 때문에 회탐(會貪)이라고 함)을 일으키며, 지금 남자가 되고자 하면 그는 곧 어미[母]에게 탐애[貪]를 일으키는 것도 그러하다. 곧 가까이 가서는 여자일 경우에는 어미[母]에게서 그가 멀어지려고 하고, 남자일 경우에 있어서 아비[父]에 대한 마음도 또한 이와 같다. 若當欲爲女,彼卽於父,便起會貪;若當欲爲男,彼卽於母,起貪亦爾。乃往逼趣,若女於母,欲其遠去;若男於父,心亦復爾。
이러한 욕구를 일으키고[生] 나서는 혹은 남자만을 보고 혹은 여자만을 보면서 점점 그 처소 (태(胎))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부모의 다른 부분을 보지 못하고 오직 남녀의 근문(根門)만을 보아서 곧 이 곳 태胎에 걸리게 된다. 生此欲已,或唯見男,或唯見女,如如漸近彼之處,所如是如是,漸漸不見父母餘分,唯見男女根門,卽於此處,便被拘㝵。
죽고 태어나는[死生] 도리(道理)도 이와 같음을 알아야만 한다. 死生道理,如是應知。
박복자(薄福者)일 <중유(中有)에 대한 스물 두 가지 문(門) 가운데에, 그 마지막으로 박복(薄福)ㆍ다복(多福)의 중유(中有)에 대하여 밝힌다.> 경우는 하천한 집에 태어나려고 하면서, 그는 죽을 때[死時]와 태 안에 들어갈 때[入胎時] 곧 여러 가지 어지러운[紛亂] 소리를 듣고도 헛되이 스스로 숲ㆍ대나무ㆍ갈대 등의 속으로 들어간다고 본다. 若薄福者,當生下賤家,彼於死時,及入胎時,便聞種種紛亂之聲,及自妄見入於叢林、竹葦、蘆荻等中。
다복자(多福者)의 경우는 존귀한 집에 태어나려고 하면서, 그는 이 때 <사시(死時)와 입태시(入胎時)> 곧 스스로 어떤 적정(寂靜)하고 미묘하고 가의(可意)의 소리를 듣고도 헛되이 스스로 궁전 등을 오르는 가의상(可意相)이 나타남을 본다. 若多福者,當生尊貴家,彼於爾時,便自聞有寂靜、美妙、可意音聲,及自妄見昇宮殿等,可意相現。
이때 부모의 <이하는 생유(生有)를 두 가지로 밝힌다. 첫째는 식지(識支)의 맨 처음에 의탁(依託)하는 것을 밝히고, 둘째는 종자(種子)의 구(具)ㆍ불구(不具)를 밝힌다.> 탐애(貪愛)가 모두 지극하여 결정적으로 최고일 때에, 각각 한 방울씩 짙은 정혈(精血)을 내는데, 두 방울은 화합하여 모태 안에서 마치 끓인 우유가 응결된 것처럼 한 덩어리로 합성(合成)한다. 爾時,父母貪愛俱極,最後決定,各出一滴濃厚精血,二滴和合,住母胎中,合爲一段,猶如熟乳,凝結之時。
이곳 모태母胎에 일체종자(一切種子)의 이숙에 포함되는[異熟所攝] 집수소의(執受所依)인 아뢰야식(阿賴耶識;8식)이 화합하여 의탁하게 된다. 當於此處,一切種子異熟所攝,執受所依阿賴耶識,和合依託。
‘화합하여 의탁한다’란 무엇인가? 云何和合依託?
여기에서 모태母胎 나온 짙은 정혈(精血)이 한 덩어리로 합쳐지면 전도(顚倒)의 연(緣; 중유(中有)의 맨 마지막 마음에 애에(愛恚)의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전도(顚倒)라 하고 중유의 마지막 신(身)을 전도(顚倒)의 연(緣)이라고 한다.)과 함께 중유(中有)도 같이 사라진다는 것이다. 사라짐과 동시에 곧 일체종자의 식(識)의 공능력(功能力) 때문에 다른 미세한 근(根)과 대종(大宗)이 있어서 화합하여 생기며 그리고 나머지 유근(有根)의 동분(同分)은 정혈과 화합하여 뭉쳐 나오게 된다.謂此所出濃厚精血,合成一段,與顚倒緣,中有俱滅,與滅同時,卽由一切種子識功能力故,有餘微細根及大種,和合而生,及餘有根同分精血和合摶生
이 시기를 식(識)이 이미 머물러서 결생상속(結生相續)한다고 설하는 것이며, 곧 이것을 갈라람위(羯羅藍位; 화합, 태에 들어간지 처음 7일)라고도 하는 것이다. 於此時中,說‘識已住結生相續’卽此名爲羯羅藍位。
이 갈라람(羯羅藍)에는 제 근(根)의 대종(大種)이 있는데, 오직 신근(身根)과 신근(身根)의 소의처(所依處)인 대종(大種)이 함께 생긴 것이다. 곧 이 신근(身根)과 함께 생기는 제 근(根)의 대종력(大種力) 때문에 안(眼) 등의 제 근(根)이 차례로 생겨나게 된다. 此羯羅藍中,有諸根大種,唯與身根及根所依處大種俱生,卽由此身根俱生諸根大種力故,眼等諸根,次第當生。
또한 이 신근(身根)과 함께 생겨나는 제 근(根)의 소의처(所依處)인 대종력(大種力) 때문에 제 근(根)의 의지처가 차례로 생겨나게 된다. 이 제 근(根)과 소의처(所依處)가 구족(具足)하여 생기기 때문에, 득원만의지성취(得圓滿依止成就)라고 하며, 또한 이 갈라람(羯羅藍)의 색(色)은 심(心)ㆍ심소(心所)와 안위(安危)를 함께하기 때문에 의탁(依託)이라고 한다. 又由此身根俱生根所依處大種力故,諸根依處,次第當生,由彼諸根及所依處,具足生故,名得圓滿依止成就。又此羯羅藍色與心心,所安危共同故,名依託。
심(心)ㆍ심소(心所)의 의탁력(依託力) 때문에 색(色)은 없어지지 않고, 색(色)의 손해[損]와 이익[益]때문에 그것도 또한 손해하고 이익하기 때문에 그것을 안위공동(安危共同)이라고 설명한다. 由心心所依託力故,色不爛壞,色損益故,彼亦損益。是故說彼安危共同。
또한 이 갈라람(羯羅藍)은 식(識)이 최초로 의탁하는 곳이므로 육심(肉心; 심장心臟)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식(識)이 이곳에 맨 처음 의탁하기 때문에 이곳을 가장 마지막에 버리는 것이다. 又此羯羅藍識最初託處,卽名肉心,如是識於此處,最初託,卽從此處,最後捨。(유가사지론 1권 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