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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나라 청나라, 왜 한국사인가,
1. 총설
서기1125년 북방의 여진족을 통일한 아골타가 이끄는 금나라 군대는 일명 몽골준마(과하마)로 편성된 기마군단을 앞세워 요나라로 진군한다. 이어 고려를 3차례나 침공한 북방의 강대국 거란의 요나라를 순식간에 집어 삼킨다. 이어 한 대륙 상당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차이나족의 송나라 정벌에 나섰고 이 소식을 접한 송나라 조정은 공포로 공황상태가 되어 화친 제의를 하였지만 파죽지세로 휘몰아쳐 오는 금군을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금군은 송나라를 초토화 시키고 한대륙 서남부 구석으로 쫓아 버린다(서기1127년). 이 과정에서 송나라 왕 부자 희종, 흠종을 생포하는 혁혁한 전과를 올린다. 이 때 금군은 고구려 조의선인皁衣仙人들의 상징인 검은 옷을 입고 진군하였는데 공자교를 개량 발전시킨 주자학朱子學의 교주 ‘주자朱子’는 이 검은 옷을 입고 진군하는 금군이 자신의 황제를 생포하는 것을 목도하였고 이 후 검은 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로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때부터‘까마귀’를 증오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전통은 차이나족을 어버이로 모시고‘소중화’, 작은 중국을 자청한 이성계의 조선정권이 받들어 우리나라에도 오늘날 까지‘까마귀’라고 불리며 흉조凶鳥로 인식되고 있다.
12세기 초반 동아시아의 3국 강역도. ‘대륙에서8600년 반도에서600년’451쪽/이병화.한국방송출판 2002. 이 책을 기본으로 하여 고려군이 여진을 정벌하고 기록했다는 ‘북관유적도’와 삼국사기/잡지雜志/지리地理4 편의 ‘서경을 평양이라고 하고 평양을 장안(현재 한대륙 섬서성 서안의 옛이름)’이라는 부분과 기타 명나라 때 변조된 고려의 흔적이 남은 지명을 참고로 하여 그린 것이다. 아울러 서경을 호경이라고도 한다. 고지도를 보면 섬서성 현재의 장안을 호경이라고도 표시하고 있다. 또한 사천성에는 려강麗江이라는 지명이 보이는데 이는 ‘고려강’이 본래 지명이었다고 본다.
금군에게 생포되어 포로로 잡혀가는 송나라 왕 희종과 흠종부자 상상도( 이 사진과 이하 사진들은 한국방송의 역사특집 ‘만주대탐사’ 2부작 중,‘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에서 발췌한 것이다.)
한편 금나라가 차이나족 송나라를 초토화 시킨 지 약 5백년이 지난 서기1619년 요동의 ‘싸얼후’지역에서 다시 금나라의 후예 ‘후금’의 금누르하치가 이끄는 정예기마군단 팔기군 2만과 차이나족 명나라 군대 27만이 맞붙는다. 결과는 명나라 군대27만의 괴멸이었다.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27만 명나라군대를 휩쓸어 버린 비결은 다음과 같은 금누르하치의 평소 자신감에서 나왔다고 한다. “팔기군 기병 1만이면 세계를 제압할 수 있다.”
금누르하치는 이 전투에서 승리를 한 후 본격적으로 차이나족 명나라가 차지하고 있는 한 대륙 고토수복에 나선다. 금누르하치를 이어 대칸(Great Khan)이 된 청태종 금홍타이지가 결국 명나라를 멸망시키고 오랜 숙원사업인 고토수복의 위업을 달성한다. 이 과정에서 명나라를 어버이로 모시며, 오랑캐 명나라를 공격하는 청군을 배후에서 치려던 새끼중국인 정권, 이씨조선정권은 청태종이 이끄는 팔기군에게 괴멸되고 결국 ’삼전도의 예‘를 갖추고 항복하고 만다.
오늘날 차이나족(중공)이 차지하고 있는 땅은 만주 청나라가 넓혀 놓은 땅이다. 차이나족은 20세기 초부터 ‘멸청흥한'을 외치며 단결하여 손문이 괴수가 되어 결국 서기 1910년에 ‘신해반란(이른바 신해혁명)’으로 청나라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다. 그리고 모택동이 이끄는 중국공산당이 손문의 뒤를 이은 장개석의 국민당정권을 한 대륙에서 대만으로 몰아내고 한대륙을 다 차지하여 중공정권을 수립한다. 오늘의 차이나가 바로 여기서 나왔다.
그런데 이러한 금나라와 청나라를 현재 우리 국사책은 북방 오랑캐 여진족이 세운 나라로 취급하고 우리의 역사가 아닌 한대륙(소위 중원대륙)을 정복한 ‘정복왕조’로 묘사하여 차이나족의 역사로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금제국과 청제국은 차이나족의 역사인가,
2. 금나라 시조는 신라(고려)인의 후손
차이나측 사료와 한국의 사료를 보면 곳곳에 금나라를 세운 태조 아골타와 그 시조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다음과 같다.
1) 금사 본기 제일 세기의 기록
금의 시조는 이름이 함보였다. 원래 그는 고려에서 왔다. 그가 고려를 떠날 때 60대였다. 그의 형 아고는 불교를 숭상했는데 그와 함께 고려를 떠나기를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후손들이 다시 돌아와서 만날 곳이 필요하다. 나는 갈 수 없다.” 그래서, 동생인 보할리하고만 왔다. 그는 완안부의 복간수 근처로 갔다. 동생 보할리는 야뢰로 갔다. 그 후, 호십문이라는 부족이 갈소관이라는 곳을 태조께 바쳤는데 말하기를 그들은 시조와 같은 삼형제의 후손이며 그들은 아고의 후손이고 석토문과 적고내는 보활리의 자손들이라는 것이다. 후에 태조가 요의 군대를 국경에서 격퇴했는데. 요의 장군 야율사십을 사로잡고 태조는 두 명의 사절, 양복, 알답자를 보내 발해 사람들에게 항복을 요구하면서 “여진과 발해는 원래 한 가족이다.”라고 했는데 이것은 원래 다 같이 물길의 7부족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금나라 시조 함보가 그곳에 거주한지 오래다. 그 부족사람이 다른 부족사람을 살해하여 양쪽 부족이 악화되었고 서로 해결할 수 가 없었다. 완옌부 사람이 시조에게 말하기를 ‘만일 완옌부 사람을 위하여 이 원망을 풀어 두 부족으로 하여금 서로 죽이는 일이 없게 해 준다면 완옌부에는 시집을 안간 60세의 착한 처녀가 있으니 마땅히 배필로 삼아 완옌부의 사람이 되게 할 것이오’ 하니 시조는 것을 허락하고 스스로 나아가 타이르기를 ‘한 사람을 죽인 것 때문에 싸움이 끝나지 않고 다치는 사람이 더욱 많으니 난의 괴수 하나만 베어 죽이는 것으로 끝내면 부족 내에서 물건으로 보상할 것이다. 너희는 싸우지 아니하고 이익을 얻는 것이 좋지 않은가?’ 하니 저편에서 이 말을 따랐다. ...중략... ‘뒤에 두 아들을 낳으니 맏이 우루요, 다음이 위루였다. 또 주세판이라는 딸을 낳았는데 완옌부의 사람이 되었다.’
2)송막기문의 기록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며 완안씨다. 女眞酋長乃新羅人號完顔氏 /女眞之主乃新羅人號完顔氏.
3) 삼조북맹회편의 기록
“여진의 시조 건푸는 신라로부터 달아나 아촉호에 이르렀다. 돌아갈데가 없어 완옌부에 의지하여 완옌을 성씨로 삼았는데 나이60여세에 아직 처가 없었다. 그 때에 이들은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능멸하며 제도와 법도가 없었다. 건푸는 나무를 깎아 약속하는 의미를 세워 사람들에게 빚을 놓아 이자를 생기게 하고 농사를 부지런히 짓게 하였으며 가축을 도둑질 한 자에게는 형벌과 배상의 법을 마련하였다. (중략)이웃의 추장이 딸이 있었는데 나이 40여에 아직 미혼이었다. 소와 말, 예물을 가지고 건푸에게 시집을 갔다. 뒤에 여진의 여러 추장이 동맹을 맺고 그를 추대하여 수령으로 삼았다.”
4)청나라 건륭제의 칙명으로 편찬된 ‘만주원류고’의 기록
“(아골타가 세운 나라를) 신라왕의 성을 따라 국호를 금이라 한다.”
“전해오는 역사책에 의하면 신라왕은 성이 김씨로 수십세를 이었다. 금의 선조가 신라에서 온 것은 의심할 바 못되며 건국할 때 나라 이름은 여기에서 취한 것이다.”
“금의 시조 합부哈富는 처음 고려에서 완안부로 거주하니 마침내 완안부 사람이 되었다. 안출호에 거주하였으니 금을 안출호라고 한다.”
아래 사진에서는 청나라 건륭제의 7대 손이라고 하는 김괄씨가 청나라 만주족 황실의 성씨로 알려진 한자식 이름인‘애신각라愛新覺羅’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만주실록에 나오는 ‘애신각라’에 대한 설명이다. 위 김괄씨가 풀이한 것과 대체로 들어맞는다. 청나라 역대황제의 이름 앞에는 모두 이 ‘애신각라’가 붙어있다. 예를 들어 청태종의 경우 ‘애신각라’홍타이지인데 풀이하면 ‘금을 성씨로 하는 홍타이지’가 된다. 즉 금(김)홍타이지이다.
만주실록에 전해오는 3선녀 설화이다. 만주실록에는 우리의 ‘선녀와 나무꾼’ 과 같은 ‘3선녀’ 설화가 전해온다. 왼쪽상단에는 버드나무가 그려져 있다. 버드나무는 고구려 시조 고주몽의 어머니 유화부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청나라 황실은 이 버드나무를 신성시하였고 차이나족이 동북방 한주(만주)지역에 들어가지 못하게 ‘유조변’즉 버드나무 울타리를 설치하였다. 이는 버드나무가 북방 한겨레에게는 부적과 같은 주술적인 상징성을 갖고 있어 한주(만주)는 청황실이 기원한 신성한 곳이니 더러운 오랑캐 차이나족은 출입을 금지 한다는 뜻이다.
5) 고려사 세가(世家) 권13 예종 10년(1115)의 기록
이달에 생여진 완안부 아골타가 황제라 칭하고 나라 이름을 금이라 불렀다. 그곳 풍속은 흉노와 같아서 여러 부락은 성곽도 없이 산과 들에 나누어 살았으며, 문자가 없어 언어와 결승(結繩)으로 약속하였다. 땅은 비옥하여 돼지 양 소 말이 많았는데 준마는 어떤 때는 하루에 천 리를 달린다고 한다. 사람들은 날쌔고 용맹스러웠고 아이들도 능히 활을 잡아당겨 새나 쥐를 쏘아 맞혔다. 커서는 모두 활 쏘고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가 싸우는 노련한 병사(勁兵)가 되었다. 그러나 각 부락이 서로 자웅을 다투어 통일되지 못했다. 혹은 말하기를 " 옛날 우리나라(신라 내지 고려) 평주의 승려 금준이 여진으로 도피해 아지고촌에 거주했는데 그가 금나라의 시조다"라고 하고 또 혹은 말하기를 "평주의 승려 김행의 아들 극수가 처음 여진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자와 결혼해서 아들을 낳으니 고을태사이고 그 아들이 활라태사다"고 한다.
“여진 사신이 고려에 와서 ‘옛날 우리 태사 영가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우리 조종이 대방(고려)에서 나왔으니 자손에 이르러서도 의리상 귀부함이 마땅하다’고 했고 지금 태사 오아속도 역시 대방을 부모의 나라로 삼나이다.”
6)금 태조 아골타가 고려 예종에게 보낸 국서의 기록
“형인 대여진금국황제는 아우 고려국왕에게 글을 부치노라. 우리의 조상은 한 조각땅에 있으며 거란을 대국이라 섬기고 고려를 부모의 나라라 하여 공손히 하였다.”
7)납북 사학자 손진태의 ‘금태조는 황해도인야’라는 논문의 기록
금태조 아골타가 스스로 고려는 ‘부모 지방’이라 했고, 중국측 기록 ‘금지’에는 금나라 왕은 본시 신라인이요 호가 완안인데 완안은 한어로 왕이란 뜻이라고 기록돼 있다고 한다. 금태조가 신라인이라는 것은 이미 고려 때부터 전한 이야기여서 ‘고려사’에 기사가 너무 많다고 말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와서 실학자 이수광이 그의 ‘지봉유설’에서 “옛날 금의 완안씨는 본시 고려인이었기 때문에 고려에 매우 후하게 대했고 끝내 침범하지 않았다. 의주는 원래 고려 땅이라 금이 요를 멸한 뒤 고려에 돌려주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강화도 커발한 개천각에 모셔져 있는 금나라 태조 아골타-한단고기를 저술한 이유립 선생이 모시던 사당이다.
8)규장각 부제학을 역임한 김교헌(金敎獻)의 신단민사의 기록
김교헌은 자세하게 신라 왕손이 여진 땅에 가서 먼저 완안부의 지도자가 되고 어떻게 해서 금나라를 세우게 되었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그의 한국사 개설서인 ‘신단민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말갈이 발해에 속했는데 발해가 망하니 그 부락의 전체 이름을 여진이라 했다. 또 백두산을 동과 서로 나누어 서쪽은 숙여진이라 하고 동쪽은 생여진이라 했다. 요에 속했으나 생여진은 나라를 스스로 다스리는 제도 아래에서 임금을 태사(太師)라 했다. 그리고 신라의 종실 김준의 아들 극수(克守)를 맞아 왕위에 앉혔는데 부락의 이름을 완안(完顔)이라 하고 그들의 성이 되었다. 완안은 여진 말로 왕자라는 뜻이다.”
9)박은식 전서 ‘몽배금태조전’의 기록
“이에 무치생이 두렵고 송구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흐르는 땀이 등을 적시는지라 다시 말할 바를 알지 못하고 있는데, 황제가 특별히 온화한 가르침을 내리며 말씀하시기를,”
‘너는 조선의 유민(遺民)이 아닌가. 조선은 짐(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부모의 나라요, 그 민족은 짐의 동족이다. 짐은 지금 천국에 있는 고로 인간 세상의 일은 직접 간섭하지 않지만 하늘에서 오르 내리는 영명(靈明)이 인간 세상을 감찰하고 있으니 현재 조선민족이 떨어진 경우와 고통스런 정황을 보는 것이 매우 측은한 바가 있으나 하늘은 스스로 싸워 강한 자를 사랑하시고 자포자기한 자를 싫어하시니, 하늘의 뜻이로구나. 너희 조선 민족이 종시 과거의 죄악을 반성하지 못하고 스스로 강해지는 방도를 구하지 않으니 현상도 극히 참혹하거니와 다가올 비운이 어찌 끝이 있겠는가?’
구한말 역사학자 박은식 선생의 모습-그의 열정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꿈에서 금나라 태조가 나타나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조선과 한 핏줄임을 알리고 바른 역사관을 설하였다고 한다.
9)아골타의 조상이 되는 신라인 김행 金幸 또는 김준金俊
신라 마지막 왕 경순왕 김부金傅를 시조로 하는 부안김씨의 족보에는 김행이 마의태자 아들로 되어 있으며 형제 둘을 둔 것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김행은 두 형제를 고려에 두고 홀로 만주로 떠났다고 한다.
안정복의 ‘동사강목’에는 김준金俊이 여진으로 갔다고 한다.
이와 같이 금나라 시조가 한국인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기록한 사료는 상당하다. 위 사료를 요약하면 이름만 다를 뿐이지 신라 또는 고려인인 신라 금씨를 가진 사람이 고향을 떠나 만주로 가서 여진사람과 일가를 이루었고 여기에서 나온 자손이 아골타이고 이 사람이 금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만주의 어느 만주족 마을에서 벌어진 굿판이다. 이를 보면 우리의 가면놀이와 닮아 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무당사제가 있다. 우리의 풍물 굿과 같은 것이다. 가면이 곰과 호랑이어서 우리의 ‘단군설화’를 연상시킨다. 이 들은 지금도 고구려 벽화에 나오는 고구려식 구들장 난방장치를 하고 산다. 청태종이 명나라 정벌을 하면서 구들장(온돌)으로 따듯하게 하여 겨울 혹한의 추위를 견뎌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3. 금나라의 지배세력은 발해인
금나라 개국과정을 보면 발해인의 활약상을 볼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표, 곽약사, 대호, 장호 등인데 이들은 발해 유민들로서 금나라 개국의 일등공신이며 금나라의 치안을 담당하는데 크게 활약한 인물이라고 한다. 더구나 금나라 황제들이 발해계였다는 사실이다. 금나라 3대 희종황제는 폭정을 심하게 하였는데 해릉왕이 희종을 죽이고 금나라 4대 황제가 된다. 해릉왕은 금태조의 서얼 장자인 요왕 종간의 아들이고 모친은 대씨성을 가진 발해의 여인이라고 한다. 해릉왕은 이후 발해 출신인물을 대대적으로 기용하여 자신의 황권을 강화시켰다. 그러나 그는 한 대륙을 완전히 수복하고자 한 대륙 서남으로 도주한 남송南宋 을 정벌하였는데 이것이 무리한 원정이 되어 결국 금 태조 아골타의 아들인 예종과 이씨성을 가진 발해 여인과의 사이에서 난 세종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금나라 세종은 금나라 치세 중 가장 뛰어난 황제로 칭송을 받았는데 앞서 언급하였듯이 이 세종의 외가가 발해계였다는 사실이다.
발해인 장호는 금나라가 차이나족 송나라를 초토화 시키고 현재의 북경에 서울을 정하면서 오늘날의 자금성과 같은 대규모 금나라 황실 궁궐을 짓는데 총 책임자였다고 한다. 이는 대제국 발해의 유민으로서 대제국을 경영해 본 경험에서 나온 것이라고 한다.
고구려 각저총에 나오는 씨름과 같은 씨름을 하고 있는 금제국, 청제국의 후예 만주족 젊은이들
혜릉왕과 세종대에 활약한 발해관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해릉왕 때 활약한 관료는 도단태후 살해를 맡은 점검 대회충, 어사대부로서 해릉왕의 신변경호를 맡은 고정, 왕안형을 살해한 유충, 희종살해를 계획한 고희정이다. 다음으로 세종의 치세에 활약한 발해관료는 해릉왕에 의해 제명당했으나 세종 때 다시 발탁된 비서승 대영, 세종의 외척으로 정책공인 이석, 원로대신으로 장호, 절도사로서 장현소, 장여필, 고간, 고덕기, 고희정이다.
결국 금나라를 세운 세력도 고려인(신라인)의 후예들이고 그 지배세력도 발해세력이 주축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금나라는 발해 왕비족과 신라 후예의 연합정권이었고 이는 차이나족보다는 한국의 역사에 훨씬 더 가깝다.
5. 금나라 태조의 선조, 금준의 고향 땅 평주와 고려의 강역
‘고려사 세가’와 박은식 선생의 ‘몽배금태조전’ 에는 금나라 태조의 선조 금준이 평주사람이라고 한다. 그러면 평주는 현재 어디인가, 국내에서는 두 가지 설이 전해온다. 황해도 평산 平山이 평주라는 견해, 함경도 영흥이라는 견해이다. 그런데 차이나족 자료‘중국고금지명사전’ 209쪽을 보면 다음과 같이 나온다고 한다. ‘평주平州는 진나라가 유주를 나누어 다스린 곳인데 지금의 요령성 열하, 조선朝鮮의 땅이다(晉分幽州治今遼寧熱河朝鮮之地).’ 또한 차이나족 고지도를 보면 하북성에 ‘평’ 지명이 보이기도 한다.
따라서 금나라태조 아구타(아골타)의 선조 금행金幸(또는 금준)이 고려인이라는 점에 주목해 보면 그의 고향이 현재 한주(만주) 요령성 열하 또는 하북성 어느 지역이라고 하고 있으니 고려의 강역이 하북성 또는 요령성 열하에 까지 미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려의 영토 공험진이 현재 북만주지역에 표시되는 것과 함께 계산해 보면 고려의 영토는 현재 국사책이 그리는 것과 같이 북한 신의주와 원산만을 잇는 이하 지역이 아니라 한주를 포함하여 북경까지 넘본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다.
윤관장군의 고려군 17만명이 북만주 ‘공험진’으로 여진족 토벌에 나서고 있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요나라와 오랜 전쟁을 끝내고 태평성대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요나라의 국경에는 언제 또 전쟁이 벌어질지 몰라 상비군을 배치 시켜놓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북만주의 여진족 토벌을 위해 별도로 17만 정예 병력을 편성한 것이다. 이는 고려의 국력이 얼마 컷는지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이조시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상비군조차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아 의병으로 개전초기 버티고 나중에는 명나라군대를 끌어들여 겨우 막는 신세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려는 실로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 대제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일설에 의하면 고려가 유사시 즉각 동원할 병력이 40만이 넘었을 것이라고 한다. 이만한 병력을 보유하려면 얼마의 인구와 영토가 있어야 하는지 계산해 볼 때 ‘대륙고려’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대제국 고려의 증거’이성근/한솜미디어 2008.)
고려군이 여진족을 토벌하고 9성을 쌓은 후 여진과 고려의 경계를 정하는 비석을 세우고 있다. 좌측그림에 흰 비석을 세우는 그림이 보인다.
고려는 서기1107.12.에 윤관장군의 고려군 17만명으로 북만주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함경북도 종성에서 북쪽으로 700백리 떨어진 공험진이라는 곳에 9개성을 쌓고 돌아온다. 나중에 금나라 태조 아골타의 형, 오야속이 ‘자신들은 고려가 부모나라고 우리는 거기서 왔으니 9성을 돌려주면 부모나라로 섬기고 고려 쪽을 향해 기왓장 한 장도 던지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몇몇 문헌 조사만으로도 고려는 대륙을 차지하고 있던 대제국이었음을 가늠 할 수 있다. 특히 백제와 같이 완전히 개방된 바다를 지배한 해양제국이었다. 당대 세계최고의 조선술을 바탕으로 세계최고의 선박을 건조하여 바다를 지배한 대제국 고려였다. 그렇기에 고려의 전함이 세계최초로 함포를 장착하여 해전에 사용할 수 있었고 강력한 태풍에도 견뎌 낼 수 있었던 것이다.
6. 동북공정을 위해 자신들의 위대한 영웅도 버리는 폐륜정권 차이나 중국 공산당
중국 공산당 정권은 자신들이 현재 차지하고 있는 한 대륙의 역사는 ‘중국의 역사’라는 기치 하에 수많은 이질적인 민족들이 수천년에 걸쳐 세운 왕조와 역사를 차이나족을 중심으로 하나의 ‘중국역사’로 재편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을 저지하고 ‘중화제일주의’ 패권을 이어가려고 한다. 이는 국가중점사업으로 강력히 추진되고 있다. 이러한 기조하에 한대륙 각 방향별로 각종‘ 공정’을 저지르고 있는데 동북방에서의 공정은 ‘동북공정’이라고 한다. 이미 완료한 다른 지역의 공정 즉, ‘서남공정’ 과‘ 서북공정’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이 공정은 엄연히 독립 국가를 이루고 살던 민족들을 차이나족의 일개 소수민족으로 편입하여 궁극적으로 차이나의 2등 민족으로 흡수해 버리겠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핵심은 아래와 같다. 동북방의 역사 즉 우리 한반도를 포함 한주와 몽골지역의 모든 역사는 차이나족 중국의 역사인데 현재 이 지역을 독립한 국가들이 차지하고 있다. 이는 불법이며 반드시 빼앗아 와야 하는 중국 땅이다. 따라서 잃어버린 땅을 수복한 후 이 땅에 살고 있는 민족들은 당연히 차이나족의 구성원인 소수민족이고 이 지역은 차이나의 일개 성으로 편입되어야 한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우리 반도한겨레를 포함 몽골한겨레의 뿌리를 뽑아 멸망시키겠다는 것이다.
금나라에 대항하여 송나라를 지킨 차이나의 민족영웅‘악비’장군
그런데 이 동북공정의 이론적 토대인 ‘역사공정’에서 이들의 음모는 파탄이 나고 있다. 이미 금나라와 청나라의 역사가 우리 한국사임이 드러났음에도 저들은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으며 자기네 역사라고 한다. 이외에 대표적인 사례는 금나라 군대에 맞서 송나라를 연명시킨 송나라 장군 ‘악비’에 대한 중국 공산당 정권의 무자비한 공격이 그것이다. 악비장군은 사력을 다해 금군으로부터 송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다. 그래서 차이나족은 위대한 영웅으로 추앙해 왔다. 그리고 악비장군을 살해한 두 사람을 나체석상으로 무릎 꿇게 만들어 놓고 침을 뱉고 비난을 하고 있다.
‘역사공정’을 시작하면서 이들은 큰 모순에 봉착하게 된다. 북방의 금나라 역사를 차이나족의 역사로 편입시킨다면 금나라와 싸운 악비장군은 더 이상 영웅의 반열에 있으면 안 된다. 자기 동족에게 대항한 인물로 격하시켜야 한다. 만약에 악비를 계속 위대한 영웅의 반열에 두면 금나라는 더 이상 차이나족의 역사가 될 수 없다. 금나라는 차이나족에게는 적이 되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공정권은 국내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악비’ 장군을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고 선언한다.
위에 빨갛게 밑줄 친 부분을 보면‘악비는 민족영웅이 아니다’라고 써있다.
7. 결론
차이나족의 문헌과 금사 그리고 고려사 등의 수많은 사료에서는 분명히 금나라와 청나라는 차이나족의 역사가 아니라 한겨레의 한국사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이들 나라의 풍속과 전통에서도 그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사책은 이들 나라를 차이나족의 역사로 보고 우리국책에 담아놓지 않고 있다. 차이나족은 이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이 금나라, 청나라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켜 버렸다. 이를 위해서 민족영웅이라고 하는 ‘악비’ 장군조차 더 이상 민족영웅이 아니라고 한다. 이들은 자기 조상을 부정하면서 까지 정치적 패권을 달성하려고 하고 있다. 지구상에 오랑캐가 있다면 폐륜을 서슴치 않는 차이나 공산당정권이라고 할 것이다. 이들은 이미 ‘문화대혁명’이라는 전력前歷를 갖고 있다. 공산주의 사상에 반대된다는 이유로 ‘홍위병’을 앞세워 전통역사문화유적과 유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훼손하였다. 그래놓고 이제는 역사공정을 하면서 중화민족의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전략에 따라 파괴 훼손한 유물과 유적 유산을 천문학적인 재정을 투입하여 다시 복구시키고 있다. 이들이야 말로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파렴치한 오랑캐들이라고 할 것이다.
역사는 단순한 과거가 아니다. 중공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독도침탈에서 보듯이 지금도 살아남느냐 도태되어 사라지느냐의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역사는 개인에게도 ‘나’자신으로서 살아가게 하는 정체성을 심어준다. 해외로 입양된 아이가 커서 기어이 자기를 낳아준 부모가 누구인지 이억 만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국을 찾아 뜬 눈으로 밤을 보낸다. 이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본능적인 몸부림이다. 하물며 그 부모를 있게 한 역사가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어떻겠는가, 당장 자신에게 상관없는 이야기 같으나 결국 자신의 삶의 모든 영역을 휘감고 영향을 미친다. 여기에 왜 우리가 우리의 바른 역사를 알아야 하는지 그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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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