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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재즈 ‘덕후’가 겪어 본 ‘일종의’ 교육 이야기
_이병곤(제천간디학교 교장, 교사대학 이사)
_작성: 2016년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
나는 인제 녹슬은 펜과 뼈와 광기———————
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
이 가벼움 혹시나 역사일지도 모르는
이 가벼움을 나는 나의 재산으로 삼았다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 중에서
스물일곱 무렵이었다. 갑자기 모든 것들이 시큰둥해졌고, 나는 갈수록 옹졸해져갔다. 혁명은 실패했는데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하고 고백하던 김수영 시인의 마음 같았다. 그랬다. 1990년대 초반 무렵 우리의 ‘혁명’은 돌연 증발해버렸다. 여야 3당이 합당을 하더니만 수십 년 재야인사로 지낸 사람이 보수 집권당의 대통령으로 뽑혔고, 그 몇 년 전에는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무너졌다는 뉴스가 연일 떠다녔다. 복학해서 맞이한 캠퍼스. 새내기 후배들은 뭔가 ‘멋진 신세계에서 날아온 듯한 자유의 느낌’을 퍼뜨리며 광장으로, 도서관 앞으로 우우 몰려 다녔다. 나는 서태지의 ‘교실 이데아’를 머리로 들어 이해했는데, 몇 년 후배들은 몸과 마음을 통해 통째로 흡입했다. 나를 포함한 또래 학번들은 ‘민주주의를 참칭하던 구닥다리 꼴통 운동권 선배들’로 갑자기 확 밀려난 느낌이 들었다. 대상 모를 화가 치밀어 늘 마음속에 불길이 그득했다. 문득 그때까지 들어온 음악들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졌다. ‘나도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까?’ 하고 잠깐 고민에 빠졌다.
당시 나는 음반을 제법 모으고 있었다. 대학생 버스표 한 장이 100원 하던 시절, 2주일 정도 용돈을 아껴 2,000원쯤 나가는 LP 한 장을 사곤 했다. 하드록, 클래식, 팝송, 그리고 동아기획에서 제작한 우리 가요 앨범이 주요 수집 대상이었다. 하굣길에 광화문 <박지영 레코드 숍>에 들러서 한참동안 고른 음반 하나를 들고 부리나케 집에 간다. 새로 산 음반에 담긴 소리를 빨리 듣고 싶었다. 턴테이블 바늘을 검은색 소리골에 얹는 순간, 작은 방안 가득 울려 퍼지는 소리의 잔치. 비록 구닥다리 인켈 스피커를 통해 전해지던 소박한 소리였지만 그것은 무엇에도 견주기 어려운 혼자만의 달달한 탐닉이었다.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기형도의 시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모든 것이 권태로웠다. 심지어 박노해, 김남주, 백무산의 시 읽기가 힘겨워졌다. 무채색 껍질 속에 석류빛 같은 감성을 붓끝에 살짝 묻혀 수줍게 적은 듯한 기형도의 시가 마음에 스멀스멀 스며들었던 때가 그 무렵이었다. 무슨 연유인지 기형도는 단 한 권의 유고 시집을 남겨둔 채 스물아홉 나이에 다른 세상으로 떠났다. 그러던 어느 날 FM 방송을 듣던 중 내가 좋아하던 가수 한영애가 재즈 블루스에 바탕을 두어 노래한다는 말, 그리고 2인조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의 곡에 ‘퓨전’ 재즈적인 요소가 있다는 말을 들었다.
“재즈를 듣고 싶은데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지?”
친구가 대답했다.
“글쎄, 마일스 데이비스(Miles Davis) 정도가 괜찮을걸?”
처음 대면한 재즈는 마일스 데이비스의 앨범 '카인드 오브 블루(Kind of Blue)'였다. 재즈 음반은 수입조차 되지 않던 시절, 서대문 언저리 어느 레코드점 구석이었다. 팝송 테이프들과 섞여 잠들어 있던 음악 테이프 하나를 겨우 발견한다. ‘카인드 오브 블루’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테이프가 우연히 ‘거기에 있었던’ 거였다. 친구는 그저 마일스 데이비스를 추천했을 뿐 앨범 이름까지 내게 권했던 것은 아니었으니까. 1926년 미국 일리노이에서 태어난 이 흑인 트럼펫 주자의 이름이 나를 재즈의 문턱으로 이끈 최초의, 그리고 유일한 단서였다.
무척 차가운 느낌이었다. 낯선 ‘소리뭉치’들은 내게 이런 이미지로 다가섰다. 지금 무대 위로 안개가 자욱하게 서려있다. 천정에서는 푸른색 조명 수십 개가 안개 위로 퍼지듯 밝게 들이비치고, 아직 연주자는 안 보이는 텅 빈 공간 저 멀리서 가녀리게 들려오는 트럼펫 선율. 이것이 내가 첫 대면한 재즈의 느낌이었다. 무엇인가 냉랭하고 섬뜩한 기운이, 쓰윽, 가슴을 스쳐 지난 것 같았으니 그것은 내가 고막으로 저지른 일종의 ‘날카로운 첫 키스’인 셈이었다.
결코 버릴 수 없는 음악 카세트테이프들. 어느새 애장품이 되었다. 왼쪽: ‘카인드 오브 블루’ 테이프는 수십 번 반복해서 듣다가 늘어져서 버렸다. 비슷한 시기에 구입해 들었던 Dave Grusin의 ‘Homeage to Duke.’
오른쪽: 우리나라 재즈 역사의 산 증인이자 여성 재즈 보컬인 박성연 선생의 첫 앨범. 동시에 우리나라 최초의 재즈 앨범이기도 하다. 1988년에 제작되었다. 밴드 이름은 Jazz At the Janus. 그녀가 운영해온 야누스 재즈클럽은 서울교대 근처에서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카인드 오브 블루에 담긴 다섯 곡을 반복해서 들었다. 다른 앨범을 들어볼 선택 여지도 거의 없었지만 처음 맛본 '이 묘한 음악을 한번 이해해 보리라.' 하는 도전 정신도 얼추 작용한 것 같다. 야근하고 지쳐서 혼자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또는 비가 살짝 내리는 날 밤 강변도로 근처를 달릴 때 볼륨을 높게 틀고 집중을 하면 온전히 그 소리뭉치들 사이로 빠져들 수 있었다. 초기에 대략 50번 가까이 반복해서 들었더니 주요 선율을 거의 기억할 정도가 되었다.
몸으로 들어서 깨우쳐라
이렇게 시작된 재즈 듣기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깊어지고, 확장되었다. 재즈를 듣는 특별한 요령은 없다. 무식한 방법이 지름길이었다. ‘내’ 앞에 ‘그’ 음악이 있으면 닥치는 대로 반복해서 자주 듣는 거다. 당시 형편상 다양한 음악을 골라듣기가 어려웠다. 레코드 가게에 짬 날 때마다 들러서 혹시나 ‘실수로’ 수입된 재즈 테이프나 CD가 없나 싶어 찾으러 다녔다. 재즈 전문 방송 채널이나 인터넷, 유튜브 같은 우회 통로가 없던 시절, 재즈를 들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길 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았다. 재즈는 재즈만의 독특한 ‘어법’이 있는데, 그것에 익숙해지려면 자주 반복해서 듣는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재생 장치는 훨씬 더 편해졌을 뿐만 아니라 소리 품질은 더욱 더 좋아졌다. 턴테이블, 시디플레이어부터 시작했던 것이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맞춰 빠르게 재생 장치가 바뀌었다. 내 주머니 속에는 아이와(Aiwa) 미니 카세트, 아이리버(iRiver)의 엠피쓰리 재생기, 애플(Apple)의 아이팟, 그리고 최근의 휴대폰 음악 재생 프로그램으로 재생 장치가 변화해 갔다. 물론 그들 기기 안에 들어 있던 음악은 늘 재즈가 주류였다.
재즈에 익숙해지려면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 많이 들었던 사람 앞에서는 어떤 음악평론가도 ‘구라’를 칠 수 없다. 반복해서 자주 들어야 한다. 사람들이 ‘재즈는 어렵다’, ‘몰라서 못 듣겠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것은 평균 편견이다. 180도 생각을 바꿔야 한다. 알아서 듣는 것이 아니라 들어서 알아야 한다. 우리에게 재즈는 어렵다기보다 낯선 음악이다. 친해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 게다가 보컬 재즈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감상용 재즈는 가사가 없기에 더 낯설게 느껴진다. 그뿐인가? 독특한 코드 진행과 즉흥 연주 방식은 듣는 이를 더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 난관을 이겨내는 방법은 재즈와 관련된 책을 찾아 읽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고 재즈 선율에 내 몸을 맡긴다는 기분으로 그냥 들어주는 것이다. 대신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배경 음악으로 틀어놓고 흘려듣는 방식으로는 재즈와 깊게 사귀기 어렵다. 재즈라는 배 위에 자신이 직접 올라탔다 여기고, 그 배의 밑창에 등을 댄 채 누워보라. 그 배와 한 몸이 되어 파도의 너울을 느껴보라.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배를 탄 듯한 태도로 멀찍이 서서 재즈를 바라보기만 한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느낄 수 없다.
관습에 저항하는 민주적인 음악
재즈는 민주적인 음악이다. 음악적 아이디어만 풍부하면 그가 드러머이든, 피아니스트이던, 베이시스트이던 밴드의 리더가 되어 작품 활동을 할 수 있다. 아트 블레키(Art Blakey)라는 흑인 드러머는 그의 전설적 밴드 '재즈 메신저'를 30년 가까이 이끌면서 숱한 명반을 만들어 냈다. 일부 평론가들은 그의 작품 활동 못지않게 재즈 메신저를 통해 수많은 신인을 발굴해낸 ‘연주자 양성가’ 블레키의 공로를 더 쳐주기도 한다.
재즈는 주제음 제시부인 헤드(Head)로 시작하고, 개별 연주자들의 솔로(Solo)가 펼쳐진다. 물론 연주자가 솔로를 한다 해서 그 때 다른 동료들이 마냥 손을 놓고 있지는 않다. 솔로를 빛나게 하기 위한 반주가 동시에 진행된다. 개별 연주자들의 솔로가 끝나면 다시 모든 연주자들이 주제부를 재현하는 헤드(Head)가 뒤따르고, 잠시 후 곡이 마무리된다. 헤드 연주를 다른 말로 코러스(chorus)라 부르기도 한다. 즉, 재즈는 대개 <헤드—솔로—헤드>로 이어지는 구조로 연주가 펼쳐진다. 재즈 초심자에게 낯선 대목이 솔로 부분이지만 ‘덕후의 길’로 들어선 감상자가 더 흥미롭게 여기는 때가 바로 이 솔로가 펼쳐지는 지점이다. 잘 알려진 대로 재즈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가 즉흥연주(improvisation)인데, 이 연주법을 여한 없이 뽐 낼 수 있을 때가 바로 솔로 진행 시점이다. 재즈 ‘덕후’들은 솔로 부분에서 개별 연주자가 즉흥 연주를 하는 스타일, 기예, 창조적인 곡 해석, 동료 연주자들과의 호흡 등을 분별한다. 어제 연주했던 뮤지션이 똑같은 곡을 오늘 연주한다 해도 재즈에서는 동일한 결과가 나올 수 없다.
세 명이든, 여덟 명이든 재즈에서는 어느 한 플레이어가 다른 동료들의 연주 때문에 묻히는 일이 없다. 솔로 연주를 통해 자기 악기의 특성과 자신의 연주 기량을 마음껏 드러낸다. 색소폰 주자 소니 롤린스의 작품 ‘세인트 토머스(St Thomas)’ 중반부에는 칼립소 리듬이 풍부한 드럼 솔로가 2분 가까이 지속된다. 드럼 두 대를 배치해서 마치 리듬 배틀이 펼쳐지는 듯한 연주를 담아낸 음반도 있다. 이렇듯 연주자 각자의 기량이 중요하기 때문에 밴드 리더들은 자신들의 작품성을 드높일 최고의 실력파 연주자들을 찾아 헤맨다. 민주적인 형식을 지닌 재즈의 가치를 온전히 드러내기 위해 대담하고, 참신하며, 관습적인 연주에 물들지 않은, 최고의 음악적 재능을 가진 이들을 서로 원하는 것이다.
재즈 감상의 참맛은 소규모 연주장이나 클럽에서 더 잘 느껴진다. 한 연주자가 솔로를 전개할 때 동료 연주자들은 집중 경청하면서 자기 악기의 조성과 리듬을 통해 솔로에 맞춰준다. 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면서 말없는 대화를 나눈다. 나는 해외 유명 재즈 아티스트를 초청해서 예술의전당이나 세종문화회관 같은 대형 콘서트홀에 세우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의 연주는 훌륭하지만 내가 충분히 교감할 수 없기에 그림 속 떡을 바라보는 아쉬움이 든다. 반면 작은 공연장에서는 연주자들이 직접 내 눈앞에서 음악을 ‘제작해 가는’ 장면을 지켜볼 수 있다. 서울에 작은 재즈 클럽들이 꽤 많아졌다. 해외 음대에서 재즈를 전공하여 돌아왔으나 아직은 무명인 실력파 재즈 뮤지션들이 그 작은 무대를 지키고 있다. 연주했던 밴드 멤버들이 중간 휴식을 취할 때 그들에게 맥주 한 잔씩을 사주면서 말을 건넬 수도 있다. 그게 진짜 재즈다. 내 곁에서 소박하고 진중하게 잔잔한 기쁨을 느끼게 하면서 머물러 있어주는 음악.
런던에서 진짜 ‘덕후’가 되다
재즈와 관련한 나의 ‘덕후질’ 초기, 졸지에 런던으로 교육철학 공부를 하러 떠나게 됐다. 재즈 향유층이 두터운 그곳에 가보니 다양한 정보와 이벤트들이 넘쳐났다. 재즈FM을 즐겨 들었고, 콘서트홀과 작은 재즈 클럽들은 가끔씩 방문했다. HMV를 비롯한 대형 음반 매장에는 재즈 섹션이 별도의 방으로 마련되어 있는데, 그곳 씨디 꽂이에는 수만 장 넘는 재즈 음반이 꽂혀 있었다. 음반 하나를 살 때는 펭귄출판사에서 발간한 재즈 음반 가이드(600페이지가 넘음. 음반 정보를 담은 사전에 가깝다)를 몇 번이고 체크한 다음 신중하게 골랐다. 그래도 듣고나면 ‘폭망’할 때가 종종 있다. 나중에는 Mole Jazz라는 중고 재즈 음반 전문 취급점을 알게 되어 그곳을 이용했다, 런더너들의 일상에 재즈는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동네 펍(Pub)이나 바, 혹은 클럽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재즈 밴드가 와서 공연을 벌인다. 유명 뮤지션들은 아니지만 소박하면서도 관록 있는 연주를 들려준다. 무대가 좁아 주로 트리오나 쿼텟으로 편성된 밴드를 초청하는데, 사람들은 별도의 비용 없이 동네 술집에서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재즈 리듬에 마음껏 몸을 맡긴다.
남쪽지방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렸네
이파리에 묻은 피와 뿌리에 고인 피
검은 몸뚱이가 남풍을 받아 건들거리네
이상한 열매가 포플러 나무에 매달려 있네
—빌리 홀리데이(Billie Holiday)의 곡 ‘Strange Fruit’ 중에서
아무리 재즈 문외한이라도 재즈계의 전설적인 흑인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라는 이름은 한번쯤 들어보았을 테지만 그이가 부른 곡 ‘이상한 열매’는 아주 낯설 것이다. 1939년에 빌리가 이 곡을 처음 부를 때 미국 사회가 술렁거렸다. 당시 남부 지방 백인들은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아 흑인들을 집단적으로 폭행했는데, 이 곡은 그런 끔찍한 만행을 고발하는 가사를 담고 있다. 집단 린치를 가한 흑인을 나무에 매달아 죽게 만들었기에 ‘이상한 열매’라는 노랫말을 붙였다. 이 글을 읽는 도중 유투브로 이 곡을 들어보시라. 설령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빌리 홀리데이의 호소력 짙은 음색이 고막에 닿는 순간 우리는 그녀의 삶과 흑인들의 설움을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흑인 재즈 보컬로서 빌리가 감내해야 했던 기구한 처지 역시 그대로 전해질 것이다.
재즈사를 들여다보니 흑인들의 한이 서린 인종차별의 역사를 피해갈 수 없었다. 만약 백인이 (천박한) 재즈 공연 무대에 서려면 얼굴을 까맣게 칠하고 나가야 했다. 흑백 인종이 섞인 밴드가 투어를 다닐 때 그들이 동시에 무대에 서지 못하게 강제했다. 말을 안 들으면 주최 측은 공연 취소도 불사한다. 1950년대 초반까지도 미국 남부의 일부 주에서는 끝까지 그런 관행을 고수했다. ‘블랙 뮤직, 화이트 비즈니스’라는 말이 유행했던 적도 있다. 흑인 뮤지션들은 먹고 살기 위해 최저 임금 수준에 못 미치는 급료를 받으며 밤샘 공연을 하거나 음반 녹음을 했는데, 이들에게 일을 시킨 백인 고용주나 레코드 회사 사장은 엄청난 수익금을 거둬들이며 자기들 잇속만 차렸다. 1940년대 최고의 아티스트이자 비밥 재즈의 효시자라고 추앙받는 색소폰 주자 찰리 파커. 그가 다이얼 레코드 회사에서 앨범 <러버 맨(Lover Man)>을 녹음하고 받은 돈은 4~5일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싸구려 마약 값 정도였다는 이야기가 아직도 전설로 남아 있다.
블랙 뮤직, 화이트 비즈니스
상식과 달리 재즈는 시작 초기부터 흑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재즈에 ‘흑인의 영혼’이 담겨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재즈는 ‘술과 마약 찌꺼기를 먹고 쓰레기 더미에서 피어났다’는 혹평을 들으며 성장한 음악이다. 미국 재즈사 100년을 통틀어 가장 훌륭했던 재즈 뮤지션들 몇을 떠올려 보았고, 그들이 음악을 시작하기 전에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지 확인해 보았다. 창녀, 소년원 수감자, 마약 중독자, 학교 중퇴자, 청소부들이었다. 그들이 사회 밑바닥에서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면서 온몸으로 겪어냈어야 할 수모와 고난을 상상해보라. 오늘날 남아 있는 1930년대와 1940년대 음반들이 웅변하는 대로 그들의 연주는 최상급이었으며, 그런 경지에 이르기까지 바쳤을 피나는 연습과 노고를 생각하면 숙연하기까지 하다. 이런 연유로 미국에서 ‘B급 검둥이 딴따라’ 취급을 받던 정상급 연주자들 가운데 상당수가 ‘최고의 재즈 뮤지션’ 대우를 해주는 유럽으로 1950년대~1960년대 사이에 이주했다. 시드니 베셰, 케니 클라크, 조니 그리핀, 듀크 조던 같은 이들이 대표적이다.
나의 ‘재즈 덕후’ 인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순간은 재즈 드럼계의 전설 엘빈 존스(Elvin Jones)를 만났던 때이다. 런던의 재즈 명소 로니 스코트 클럽에서 2002년에 열렸던 초청 연주회에서였다. 나는 일찌감치 클럽에 도착해서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엘빈의 연주 동작을 보는 것 자체가 드럼이라는 악기에 대한 이해를 확장시키는 경험이었다.
과연 엘빈은 ‘드럼을 치는 것’이 아니라 ‘소리를 빚어내고’ 있었다. 스내어 드럼의 중앙 부위, 가장자리, 금속 테두리, 심벌즈, 탐탐 북, 그리고 다양한 드럼 스틱과 브러쉬들을 이용했고, 연주곡들의 특성에 따라 그 모든 요소들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서른 살 정도 더 어린 협연자들의 프레이징을 정확하게 듣고 완벽하게 호흡하면서 때론 현란하게 때론 고요하게 각자의 악기로 대화를 나눴다. 그의 드럼 솔로는 (내가 음반으로 들었던) 젊은 시절에 견주어 전혀 변함이 없었으며, 폴리리드믹 주법 역시 힘차고, 정확하고, 명징했다.
심금을 두드렸던 엘빈 존스의 드럼 스틱
주말 재즈 클럽 연주는 밤 10시에 시작해서 새벽 2시에 끝난다. 그 때까지 꼼짝 없이 그의 연주에 빠져들었다. 엘빈이 일어나 관객들의 환호에 답할 때까지 나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엘빈은 무대 가장자리까지 걸어 나와 몸을 굽히더니 자신이 연주했던 드럼 스틱 하나를 내게 선물로 주었다. 엉겁결에 한 손으로 받아들며 악수를 청했다. “너무 훌륭한 연주였다. 당신의 사인을 받기 위해 음반을 챙겨두었는데 집에 놓고 나와서 너무나 아쉽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는 눈을 찡긋거리더니 “원래 사인은 마음속에 받아두는 것”이라 말을 받는다. 엘빈은 그 연주 2년 뒤인 2004년에 76세를 마지막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빈의 드럼 스틱은 연주 당시 드럼 가장자리의 금속 테두리에 부딪혀서 찌그러진 곳이 많다. 중앙에는 엘빈의 이름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다. 유명 연주자들은 드럼 스틱을 따로 주문 제작해서 쓴다는 사실을 그 때 처음 알았다.
시간이 갈수록 스틱 위에 새겨진 엘빈 존스의 이름은 색이 바래져가지만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그의 연주 장면은 더욱 더 또렷해진다.
두 번째 인물은 미국에서 노숙인들과 함께 인문학 코스를 펼쳐서 큰 주목을 받았던 작가이자 교육실천가인 얼 쇼리스 선생이다. 나는 2006년에 그의 저서 <희망의 인문학>을 번역 출간한 적이 있다. 얼 쇼리스와의 만남은 그 해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국제 세미나에서 이뤄졌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희망수업'이라는 주제로 개최된 이 세미나를 조직하는 과정에서 사전에 얼 쇼리스와 수십 차례 이메일로 의사소통을 하게 됐다. 모든 일정 협의를 마친 뒤 한국으로 출국하기 2주 전쯤에 쇼리스 선생이 이메일로 물었다.
“메일 주소가 jazznut*로 시작되던데, 그대는 정말 재즈를 좋아한다는 뜻인가?”(*nut는 ‘~에 미친’이란 속어).
이 질문으로 인해 우리는 재즈에 대한 여러 가지 견해와 정보를 주고받았다. 문학과 철학에 정통한 작가 얼 쇼리스 선생이 재즈에 대해서도 깊은 애정과 이해를 갖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 반가웠다. 안 그래도 존경스러웠는데, 이에 더하여 친근함까지 느껴졌다.
얼 쇼리스, 재즈를 사랑했던 이타적 휴머니스트
쇼리스 선생이 한국을 방문한 당시는 70세였다. 임파선 종양을 심하게 앓고 있었기 때문에 사실 장거리 비행을 하면 안 되는 처지였으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동양 최초로 서울에서 노숙인을 위한 인문학 프로그램인 한국형 클레멘트 코스를 개설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감지한 얼 쇼리스는 자신의 교육철학과 교육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공유하고자 먼 길을 마다 않고 달려왔다.
만나고보니 그의 건강 상태는 정말 좋지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15개는 족히 넘을 듯한 알약들을 모두 챙겨 먹어야 했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층계를 오를 때는 다섯 계단을 지날 때마다 한 번씩 30~40초 정도 숨을 돌려야 다음 움직임이 가능했다. 하지만 일주일을 체류하면서 한국 청중들을 앞에서 강연을 하거나 노숙인들과 워크샵을 진행할 때 ‘괴력’이 뿜어져 나왔다. 자기주장 설파에 거침이 없었고, 자신감과 보편적 인류애가 넘쳐나는 스승 같았다. 대화 도중 한 순간도 위트와 농담을 잊지 않았다.
얼 쇼리스가 조수석에 타서 다음 장소로 이동할 때 우리는 재즈 이야기를 더 나눴다. 신기하게도 그는 나와 똑같이 하드밥(Hard Bob) 재즈에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으며, 불꽃같은 연주 인생을 살다가 요절한 존 콜트레인을 존경한다고 말했다. 나는 “내 방에 콜트레인의 1965년 연주 장면이 담긴 대형 흑백 사진을 걸어놓고 있다”는 말로 화답했다.
재즈가 남겨 준 신기한 인연들
인천공항으로 그를 맞으러 갔을 때가 생각난다. 우리는 처음 만났으나 오래 사귀었던 사람처럼 얼싸안았다. 첫 식사 자리에서 얼 쇼리스는 가방을 부스럭거리더니 씨디 음반 하나를 꺼내서 내놓았다. 자신이 살던 뉴욕시 외곽에서 재즈 연주자로 활동하고 있는 친구의 앨범이라고 했다. 음반 앞표지에는 얼 쇼리스가 내 이름으로 미리 받아 둔 그 친구 연주자의 사인까지 새겨져 있었다.
얼 쇼리스는 똘똘 뭉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실행력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싹트는 진정한 우정은 피부 색깔이나 나이를 뛰어넘어 철학과 취향의 일치에서 비롯된다는 사실도 느끼게 해주었다. 그는 2012년 뉴욕시에서 76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공교롭게 쇼리스는 엘빈 존스와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두 사람은 떠나기 전 내게 잊지 못할 유품 하나씩을 남겨준 셈이 되었다.
애초에 내가 받은 글 주제는 '재즈와 교육'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것이었다. 막상 글을 쓰려니 난감했다. 무엇을 어떻게 연결시켜 이야기를 해야 하나? 재즈로 무엇인가를 교육시키려 한다면 누구보다 재즈 뮤지션들부터 말릴 것이다. 생각을 거듭하다가 몇 가지 의미는 찾아볼 수 있을 것 같아 아래와 같이 정리해 보았다.
첫 번째는 내가 잘 모르던 대상을 파악하고, 이해를 심화시켜가는 방식을 나름대로 찾았다는 경험이 중요하다. 계기가 무엇이었든 새로운 형식의 음악에 마음이 끌렸고, 그 흥미를 꾸준히 이어나가면서 하나씩 발견하는 맛을 깨달았다. 재즈를 들으면서 전문가들의 비평, 칼럼, 저서, 신문 기사가 실리면 읽거나 스크랩했다. 음반을 사서 모았고, 반복해서 들었다. 그 과정에서 서서히 내가 좋아하는 유형의 재즈가 무엇인지 가닥이 잡혀갔다. 재즈 관련 서적은 50여 권 이상 읽었는데, 주로 재즈사에 관한 것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재즈 아티스트의 일대기를 다룬 것, 또는 음반 비평에 대한 것이었다. 재즈 페스티벌에 초청받아 나오는 아티스트들의 연주를 직접 보기 위해 참여했고, 시간 날 때마다 재즈를 연주하는 바, 클럽, 펍을 방문했다.
평생 재즈를 스토킹하는 즐거움
나는 피아노 레슨을 단 한 시간도 받아 본 적 없으니 음악 이론이나 연주에는 문외한이다. 고교 시절에 밴드를 한답시고 베이스 기타를 조금 만져보긴 했지만 그건 다른 사람의 연주를 듣고 외워서 합주할 때 실수하지 않도록 흉내 내던 수준이었다. 그렇기는 하나 일천한 내 음악 지식이 재즈 감상을 방해하지는 않았다. 되레 재즈를 너무 이상화, 고급화 하는 태도를 경멸한다. 현재 50대 이상의 대한민국 국민들이 '뽕짝'을 사랑하듯이 미국과 유럽의 장년 세대들은 재즈를 사랑한다. 그들이 공부해가며 재즈를 듣는다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재즈 안에 수십 갈래의 다른 길이 있다. 가령 작곡을 포기한 듯 자유로운 1960년대의 프리재즈와 댄스홀에서 춤을 추기 좋게 작곡되었던 1930년대의 주류 빅밴드재즈는 도저히 같은 음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색다르다. 1980년대 포스트밥(Postbop) 이후 신세대 재즈 음악인들은 선배 세대들과 다르게 재즈의 형식과 내용을 창조해내기 위해 부단한 실험을 계속해가고 있다. 새로운 재즈가 나타나면 나는 '어라? 이게 또 뭐지?' 하면서 조금씩 더 듣고, 공부하고, 새롭게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이면서 그것을 내 곁에 두려고 애쓸 것이다. 내가 애호하는 대상을 평생토록 공부하며 쫓아다니는 것,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 또 어디 있을까 싶다.
형식에 안주하지 않는 실험 정신
두 번째는 역경 속에서 피어나는 자유로운 정신의 가치를 배웠다. 미술사나 건축사를 보면 새로운 양식의 출현이란 새 시대의 꿈틀거리는 정신을 반영하기 위한 몸부림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즈사 역시 그러하다. 블루스에서 출발한 재즈는 초기의 소박함에서 벗어나 형식미를 갖춘 감상용 재즈로 발전하기까지 숱한 연주자들의 실험 정신이 투영된 공동 창작물이나 다름이 없다. 실제로 이런 주장을 하는 '과감한' 음악학자는 없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정말 그렇다. 재즈는 누군가 '이러이러하다'고 그 의미를 고정시키려는 순간 저 멀리 도망가 버린다. 재즈 뮤지션들은 재즈를 관습적이지 않은 음악 형식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수많은 실험을 도입했다.
남미의 리듬을 받아들여 보사노바재즈를 탄생시켰고, 록 밴드가 사용하는 전자기기를 대거 채택해서 록 퓨전재즈를 만들었다. 재즈의 실험 정신을 극한으로 밀고나가는 경우도 많았다. 세실 테일러 같은 피아니스트는 공연 도중 해머로 자신의 피아노를 박살내버리는 퍼포먼스를 프리재즈라는 이름 아래 감행했다. 스티브 튜레는 수 백 가지의 고동을 악기로 개발하여 독특한 사운드로 새로운 재즈를 선보인다. 세계 각국의 민요를 끌어와 재즈와 접합하는 경우도 점점 많아지고 있다. 월드뮤직과 재즈는 지금도 왕성하게 만나고 있으며, 국내에서는 김덕수 사물놀이패나 명창 안숙선 선생이 서양 재즈 뮤지션과 함께 공연하거나 음반을 남기기도 했다. 이렇듯 재즈는 끝없는 실험 정신을 바탕으로 지금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는 음악이다.
중년을 지나 장년으로 접어드는 요즘 나는 자꾸 어디에선가 뿌리를 내리고 싶은 욕망이 강하게 일어난다. 떠도는 일이 이제 조금 지쳐간다는 마음이 꾸물꾸물 올라온다. 정말 오랜만에 '국민연금'을 내며 살고 있는 요즘 아련한 행복감에 젖어들려고 한다. 하지만 재즈는 정착하고 싶은 그 순간이 바로 떠나야 할 시점이라고 계속 내게 속삭인다.
정말 그랬다. 잘 나가던 빅밴드 재즈 시절에 일부 의식 있던 재즈맨들이 모여 고픈 배를 움켜쥐고 연습실이 있던 다락방으로 떠나지 않았더라면 비밥(Bebop)이라는 새로운 장르는 개척되지 않았을 것이다. 비밥을 정점으로 한 감상용 재즈 음반 시장이 안정적으로 형성되었던 1950년대 말 더욱 혁명적인 아이디어를 가졌던 오네트 콜맨이나 존 콜트레인의 극한적 실험이 없었더라면 프리재즈 스타일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무엇인가 정합적인 것을 의심하고, 안락한 상태를 근심한다. 침묵이나 관습을 경계하며, 실속 있는 실천을 제외한 근사한 언어 치장들을 경원시한다. 현실을 변주하거나 즉흥 연주하는 것, 어디에서도 발 내리지 않고 새로움을 찾아 유랑하는 것, 그게 바로 재즈의 역사가 증명해 보이는 자유정신이라 믿는다.
그윽한 아름다움, 재즈의 은신처
세 번째는 세상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아름다움 가운데 한 형식을 내가 누리고 있다는 그윽한 기쁨이다. 재즈는 모두 아름답다. 지직거리는 유성기에 담긴 1920년대의 소박한 재즈도 좋고, 하몬드(Hammond) 전자 오르간을 비롯해 전기 기타 소리 가득한 1970년대 초반의 록 퓨전재즈도 기막히다. 아무런 형식 없이 자유로운 발상으로 화성을 파괴하면서 전개되는 프리재즈 역시 반복해서 듣다보면 나름의 고민과 불규칙적인 미가 담겨있다. 또한 재즈는 누가 뭐라도 의연하게 흐른다. 캐논볼 애덜리의 블루스 필링 가득한 테너 색소폰 연주, 혹은 얼마 전 작고한 스텐리 터렌테인의 색소폰 연주를 듣고 있으면 유유히 흐르는 여유로움과 유장함, 달관과 낙관을 만끽할 수 있다. 그들의 연주에 빠져 있다 보면 재즈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기란 끔찍하다.
재즈 감상은 약간 취향이 까다로운 애인과 연애하는 느낌으로 진행해도 좋겠다. 상대를 소유하려고 하면 도망간다. 연애를 제대로 즐기려는 사람은 먼저 상대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석한다. 그런 노력을 통해 한걸음씩 그가 (혹은 그녀가) 마음을 열어 내게 접근해 오는 느낌을 즐겨보자. 세상에 이 정도로 약간은 까다롭고 아름다운 연인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내 노력 여하에 따라 평생 그 연인과 마음 나누면서 즐겁게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윽한 기쁨이 아닐 수 없다. 반드시 재즈가 아니어도 좋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래도록 기쁨 누리면서 애지중지할 대상을 가졌으면 좋겠다. 재즈는 우리에게 말한다. 아름다움과 연애를 하라고. 우리 삶은 생각보다 그렇게 긴 것이 아니라고 말이다.
길을 걸었죠
수 천 대의 바이올린 연주 소리를 들었어요
어쩌면 당신이 안녕하고 인사하는 소리였을지도 모르지요
내가 들었던 그 음악은
안개 속에서 당신이 제게 다가오는 그 순간이었을지도
—사라 본(Sarah Vaughan)의 곡 ‘Misty’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