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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3장
3:1 주께서 다시 회당으로 들어가시니, 거기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있더라.
2 사람들은 주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는가를 지켜보고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주를 고소하려 함이더라.
3 그때 주께서 한쪽 손이 마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일어서라.”고 하시고
4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죽이는 것이 타당하냐?”고 하시나, 그들은 잠잠하더라.
5 주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며,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슬퍼하시고,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펴라.”고 하시자, 그가 손을 펴니 그 손이 다른 쪽 손과 같이 온전하게 회복되더라.
6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즉시 그를 대적해서 어떻게 죽일까 하고 헤롯 당원들과 함께 모의하더라.
이제 안식일에 일어난 또 다른 사건이 기술된다. 1장에서 그리스도께서는 회당에 있던 마귀들린 남자에게서 마귀를 쫓아내셨고 그때는 별 문제가 없었는데 이는 그 일이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1:27). 그러나 2:23-28의 대립 이후에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매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지켜보고 있었고 그들의 동기는 주를 안식일 위반으로 고소하기 위한 것이었고(2절) 또한 회중이 더 이상 주의 설교를 권위있는 말씀으로 듣지 않게끔 하고(1:22) 다시 자신들에게 돌아오게 하려는 속셈이었다.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이 거기 회당 안에 있었다(1절). 모든 눈이 그리스도께서 그 사람을 치유하시는지에 집중되었다. 예수께서는 그 사람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그 치유를 통해 자기 의로 가득 찬 종교 지도자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고자 하셨다(시 7:9; 잠 17:3).
"일어서라"(3절): 예수께서는 손이 마른 그 사람에게 "일어나서 앞으로 나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그는 주를 고소하기 위해 노리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 말씀하신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악을 행하는 것이 타당하냐? 생명을 구하는 것이 타당하냐, 아니면 죽이는 것이 타당하냐?"(4절).
12장에서 이 주제에 대해 더 살펴보겠지만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질문이 2:8-9과 같다는 것을 주의하라. 복음서들에서 일어나는 독특한 현상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께 뭔가를 질문하면 주께서는 항상 대답하시는데 예수께서 그 자들에게 질문하시면 그들은 답변하지 못한다(혹은 답변을 거부한다 - 4절 참고. 11:33)는 것이다. 이것은 큰 백보좌 심판석에서 죄인이 처하는 상황의 모형이다(롬 3:4, 19).
본문에서 예수께서 하시는 질문에 대해 정직한 사람이라면 해야 될 대답이 정해져 있지만 이 바리새인들은 이면의 동기가 있었기 때문에 입을 열지 않았다. 모세 율법에 따르면 안식일에 누군가에게 선을 행하거나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일은 불법이 아니었다. 잠 3:27은 이렇게 말씀한다: "선을 베푸는 것이 네 손의 권세에 있을 때, 마땅히 받을 자들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라."
이어지는 구절은 본문 막 3장과 특별히 관련된 내용이다: "네가 가진 것이 있거든 이웃에게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말하지 말라"(잠 3:28).
안식일 계명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할지니라"(레 19:18)는 계명을 부정하거나 우선하지 않는다. 여기 막 3장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은 그들의 "이웃"(한쪽 손이 마른 사람)의 처지에 대해 무관심했고 그들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께 "악을 행하는" 데 맞춰져 있었고 그들은 그 병자가 치유를 못 받더라도 상관이 없다고 여겼다. 그 태도는 네번째 계명에 대한 위반이었다.
5절: "주께서 노하셔서 그들을 둘러보시며." 오, 예수님, 그렇게 하시면 안됩니다. 화내는 것은 죄가 아닙니까? 물론 새로운 "성서들"은 그렇게 가르친다. 현대역본들은 마 5:22에서 "까닭없이"를 삭제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만들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의로 가득찬 그 위선자들에게 화를 내셨고(내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마 23장을 읽고 나서 내게 "신사적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 보라) 주께서는 이 외에도 한 번 이상 더 화를 내셨다(요 2:15). 그리스도께선 이유없이 화내신 게 아니기에 그것은 죄가 되지 않았다. 사실 사도들 가운데 여러분이 모범으로 따라야 하는 그 사도(고전 1:11)는 화를 내되 죄는 짓지 말라고 명령했다(엡 4:26). 여러분이 화를 내야 할 일들이 있는데 그렇다고 여러분이 인격적인 모욕을 당했을 때 상대에게 화를 내라는 뜻은 아니다.
여기 막 3장에서 여러분은 화낼 수 있는 바른 동기가 무엇인지 본다: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슬퍼하시고." 이 분께서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와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 불평하고 원망했을 때, 그리고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인해 이집트를 그리워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했을 때 그 백성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이시다. 여호와께서 육신으로 오신 분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율법을 무시하고 성부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그 백성에 대해 화를 내실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만일 하나님께서 펜사콜라, 모빌, 포트 월튼 비치, 뉴올리언스, 달라스, 뉴욕, 워싱턴 D.C., 애틀란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디모인, 시애틀, LA, 로마, 런던, 파리, 메카, 메디나, 베이징, 하이데라바드, 델리, 요하네스버그, 리오데자네이루, 멕시코시티 등의 거민들이 하나님의 값없는 구원을 거절하는 것 때문에 얼마나 화가 나 계시는지 보고 싶다면 큰 백보좌 심판석을 기다려 보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생명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가 그 사람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하더라"(요 3:36).
"그 역시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게 되리니, 그것은 그의 진노의 잔에 혼합하지 않고 부은 것이니라. 또 그 사람은 거룩한 천사들의 면전과 어린양의 면전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으리니"(계 14:10).
이 분이 "세상 죄를 제거하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이신 그 분이다. 자신들의 죄들을 위해 피의 대속을 이루신 이 분을 조롱하고 모욕하는 모든 죄인들은 불못에 던져질 것이고(마 25:41) 주께서는 거침없이 그렇게 하실 것이다. 이는 주께서 "악인에게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시 7:11).
들으라, 여러분, 만일 그 분이 하나님이 맞다면 완벽하셔야 하고 죄가 없으셔야 한다. 그런데 주는 온전히 거룩하실 뿐 아니라 조화로운 성품을 지니신 분이다. 그 뜻은 주께서 거룩하시다면 죄와 불의에 대해 영원히 참지 않고 분노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똑같은 방식과 정도로 사랑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그의 독생자를 주셨으니"(요 3:16)라는 말씀은 진실되다. 죄의 대속에 관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리아, 요셉, 침례인 요한, 베드로, 요한, 바울, 폴리캅, 이그나티우스, 마틴 루터, 윌리엄 틴데일, 존 낙스, 윌리엄 캐리, 아도니람 저드슨, 빅토리아 여왕, D.L. 무디, 그리고 윌리엄 부스를 사랑하신 것만큼 아돌프 히틀러, 요시프 스탈린, 테드 번디, 또르께마다, 네로, 칼리굴라, 징기스칸, 마호메트, 티무르, 교황 이노센트 4세, 교황 우르반 6세, 피의 메리, H. H. 홈스, 그리고 에드 게인을 사랑하셨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는 것과 상관없이 그들 모두를 하늘나라로 데려갈만큼 사랑하셨다고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순수, 진리, 공의를 사랑하는 것과 동등하게 더러움, 속임수, 사악함을 사랑하는 하나님이 있다면 그는 왜곡되고 변질된 하나님이다. 그런 하나님은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이 이런 분이라 말한다. "주께서는 정결한 눈을 가지셨기에 악을 차마 보지 못하시며 죄악을 볼 수도 없나이다"(합 1:13).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한다. "이는 주께서는 악을 기뻐하는 하나님이 아니심이니 악이 주와 함께 거하지 못하리이다...주께서는 죄악을 행하는 모든 자들을 미워하시나이다"(시 5:4-5).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미워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 자체를 미워하신다. 어찌나 미워하시는지 그를 영원한 지옥불에 태우실 정도이다(시 11:5-6; 마 25:41; 계 14:11, 20:10-15).
이 분이 성경의 하나님이시다. 현대 미국인들과 유럽인들은 이런 하나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 주께서는 완벽한 사랑과 은혜의 소유자이시지만 완벽한 미움과(그렇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한다 - 시 139:22) 심판의 주님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사랑의 하나님에 대해서 별 거부반응이 없지만 복수의 하나님은 "매우 다른 이야기"이다! 그러나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는 양 측면을 다 지니신 분이다(살후 1:7-8을 보라).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지옥에 보내지 않으려 하시는 주님께서는 그 목적을 위해 불의를 행하시거나 지름길을 택하지 않으신다. 여러분이 그 분의 진리의 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주께서는 공의를 위해 여러분을 지옥에 보내실 것이다. 현대 미국인들은 너무나 감성적인 기독교에 빠져 있어서 이런 하나님을 상상하기 힘들어 한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이런 분이며 여러분이 그 사실을 부정해도 달라질 것은 없다. 여러분이 그 분의 길을 싫어하여 거부하는 것은 자유지만 그것은 자신의 파멸을 초래하는 선택이다.
막 3:5로 돌아와서 - "그 사람에게 말씀하시기를 “네 손을 펴라.”고 하시자." 그리스도께서는 그 사람에게 불가능한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손이 말랐기에 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그는 믿음을 가져야 했다. 그는 자기에게 불가능한 일을 시도하는 믿음이 필요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의 죄인들에게 요구하시는 것도 이와 동일하다. 주께서는 2천년 전에 살았던 한 유대인 남자가 죄 없는 삶을 살았고 여러분의 죄들로 인해 로마의 십자가 형틀에 매달려 죽으셨고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셨음을 여러분에게 믿으라고 하신다. 여러분은 그 사건들을 본 적이 없음에도 믿어야 한다. 여러분은 그 일들을 "통제된 조건" 하에서 "실증적 증거"로 재현하여 볼 수 없지만 그래도 믿어야 한다. 여러분은 자신의 몸이 썩어 먼지로 돌아가거나 화장되거나 상어에 먹히거나, 혹은 폭탄에 날아가더라도 하나님께서 그 몸을 다시 복원하신다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인간의 관점에서는 이런 믿음을 갖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내가 소유하고 있는 믿음이 바로 그런 믿음이다.
그 유대인 남자는 그리스도께서 손을 펴라고 하시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순종했다. 그가 손을 폈을 때 치유를 받았다. 여러분은 이보다 나은 약속을 소유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안이 구원을 받으리라"(행 16:31).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요 1:12) 그 분과 같은 몸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요일 3:1-2).
이 치유에 대해 유대인 지도자들이 나타낸 반응은 어떠했는가? 6절 - "그러자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성경 교사들이었고 당대의 보수적 근본주의자들이었다. "...헤롯 당원들과 함께 모의하더라." 그들은 정치적 집단이었다. 헤롯 당원들은 신 17:15을 완전히 무시하고 거부한 자기 과시적인 성품의 에돔인 통치자를 "유대인의 왕"으로 받아들인 자들이었다. 그들은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자들이었다. 이것은 "종교적 우파"들이 정치적 "좌파"와 손을 잡고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상황이다. 2:12에서 설명했듯이 기적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놀랐던 그들의 마음은 곧바로 시기심과 살의로 가득차게 되었다(15:10).
7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가시니, 갈릴리에서 온 큰 무리가 그를 따르고, 또 유대와
8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투로와 시돈 지방에서 큰 무리가 주께서 얼마나 위대한 일들을 행하셨는가를 듣고 주께로 나아오더라.
9 그때에 주께서는 군중이 자신을 밀어 붙이지 못하게 하려고 작은 배를 대기시키라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더라.
10 이는 주께서 많은 사람을 고쳐 주시므로, 병든 자들이 모두 주를 만지려고 밀치기 때문이더라.
11 또 더러운 영들이 주를 보고, 그 앞에 엎드려 소리질러 말하기를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하니,
12 주께서 자기를 알리지 말라고 그들에게 엄히 명하시더라.
다시 한번 주께서는 밀려드는 군중으로 인해 성읍에 계시지 못하고 갈릴리 바닷가로 나가셔야 했다. 7절에서"그(HIM)를 따르고"라는 언급을 보라. 카톨릭이 "하나님의 어머니 마리아", "우리의 공동 중보자" 운운하며 무슨 헛짓거리를 하더라도 복음서 본문에는 마리아가 거의 언급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복음서의 어떤 인물도 마리아를 추종하거나 그녀에게 기도하지 않으며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만 따라간다. 서신서로 넘어갈지라도 마리아를 따르라거나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라는 어떤 명령도 없다. 그러나 최소 네 번(고전 4:16, 11:1; 빌 3:17; 살전 1:6) 여러분은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를 따르라는 말을 듣는데(롬 11:13) 그 사도가 로마서를 쓴 저자이고(롬 1:1-7) 그 서신서는 베드로가 쓰지 않았다(갈 2:7). 누군가 여러분으로 하여금 여자 마귀를 믿게 해서 파멸시키려 하는 것이다(렘 7:18).
그리스도께 나아온 자들이 어디서 왔는지 보라: "갈릴리에서"(7절) - 이스라엘 북부; "유대와"(7절) - 이스라엘 남부; "예루살렘과"(8절) - 이스라엘의 수도; "이두매와"(8절) - 사해 남쪽에 있는 에돔인들의 땅; "요단 강 건너편과"(8절) -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살았던 요단 강 동편; "투로와 시돈 지방에서"(8절) - 갈릴리 북쪽의 지중해에 인접한 지역. 따라서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은 남쪽에서는 북부 아라비아와 북쪽으로는 레바논 땅, 그리고 동서로는 요단 강 양편에서 온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었다. 그러니 그 유대인 지도자들이 주를 제거하려 했던 것은 놀랍지 않다. 그들은 "포도원"을 자기들 소유로 남겨두기를 원했고(12장을 보라)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나쁜 소식"이었다.
이제 주께서 해변에 계신데 군중은 계속 몰려들었기에 주께서는 물 속으로 밀려나실 지경이 된다. 그래서 주께서는 눅 5장에서 하신 것처럼 "작은 배"(9절)에 오르셔서 군중과 자기 사이에 간격을 두신다. 본문은 눅 5장과 같은 상황이 아니지만(2:1 주석을 보라) 현실 세계에 익숙한 성경 독자는 이런 현상에 대해 놀라거나 모순이라 느끼지 않는다. "유명인사들"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둘러싸이기에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표준 절차"를 갖고 있다. 주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설교하실 때마다 자주 배에 오르셔야 했을 게 분명한 상황은 내가 볼때 전혀 놀라운 게 아니지만 복음서에 명시된 그런 경우는 2-3회 정도이다.
10절은 "병든 자들이 모두 주를 만지려고 밀치기 때문"이라 말씀한다. 왜 그런 것인가? "주께서 많은 사람을 고쳐주시므로" 그런 것인데 그 병자들은 주를 만지면 병이 낫는다고 생각했다. 눅 6:19은 그런 상황에 대해 잘 보여준다. 마 5장에서 "유출병"을 가진 여인이 주를 만지려 했던 이유도 그것인데 그녀는 본문 10절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들었고 자신도 따라 하려 했던 것이다.
10절과 5:28-29의 사건들로 인해 "성의"(The Robe) 같은 허튼 소리가 나왔다. 카톨릭은 그리스도의 의복(복음서에서 그리스도의 옷은 결코 "긴 옷"이라 불린 적이 없다. 이에 대해 15:24 주석을 보라)에 뭔가 마술적 힘이 있다는 이교적인 망상을 갖고 있는데 이는 그 옷이 그리스도의 몸에 닿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물 숭배"라는 카톨릭의 미신인데 마리아에게서 짠 모유를 담은 병이라던지 침례인 요한의 두개골 두 개(하나는 아이 때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성인 때 것이라고 한다!) 같은 저속하고 터무니없는 미신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의복에 어떤 기적적인 요소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가 행하신 치유의 능력은 하나님께서 그 안에 두신 믿음으로 인해 가능했다(5:34).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포피(A.D. 800년 교황 레오 2세가 샤를마뉴에게 주었다고 하는), 혹은 예수께서 얼굴을 닦으신 수건("에데사의 만딜리온")을 가졌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통해 여러분의 손 거스러미 하나도 낫게 할 수 없다.
11-12절에 대해서는 앞서 1:24-25에서 이미 설명했기에 넘어가겠다.
13 그후 주께서 산으로 올라가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을 부르시니, 그들이 주께로 나아오더라.
14 주께서 열둘을 정하셨으니, 이는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내보내어 전파하게 하시며,
15 또 병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세를 지니게 하려 하심이더라.
16 그후 주께서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덧붙여 주시고,
17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에게는 보아네게란 이름을 덧붙여 주셨으니, 이는 천둥의 아들들이라.
18 또 안드레, 빌립, 바돌로매, 마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다대오, 카나안인 시몬과,
19 유다 이스카리옷이니, 그는 주를 배반한 자라. 그들이 집으로 들어가자,
주께서는 7-12절에서 발생한 상황으로 인해 자연스럽게 제자들을 임명하시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의 제한을 갖고 계셨다. 주께서 자신의 무소부재성을 포기하신 적은 없지만(요 3:13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지상에 계실 때 예수께서는 여타 사람들과 동일한 제약을 갖고 계셨다. 주께서는 배고프고 목마르셨고 피곤도 느끼셨다. 인간으로서 예수님의 몸은 동시에 여러 곳에 있을 수 없었기에 주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임명하시어 그들로 주를 대신해 설교하게 하셨고(14절) 그들에게 주와 동일한 권세를 주셔서 "병들을 치유하고, 마귀들을 쫓아내는" 일을 하게 하셨다(15절).
"주께서 열둘을 정하셨으니"(14절). 주께서는 지상 과업을 성취하시기 위해 권세를 나누어주시는데 이것은 "수여자"가 "사명자"에게 손을 얹는 안수 의식으로 행해진다(행 6:6, 13:3을 보라). 제자의 숫자가 열둘인 이유는 그들이 이스라엘을 위한 사명자들이기 때문이며(마 10:6) 열둘은 이스라엘 지파의 숫자이다(야곱의 열두 아들들). 물론 열두 제자들이 실제로 열두 지파 출신은 아니지만(민 13장의 정탐꾼들과 달리) 제자들 각각은 지파들을 대표했다(참고. 마 19:28).
그 열두 제자들은 마 10:2에서 "사도들"이라 명명된다. 그 뜻은 "파송된 자"("내보내어 전파하게")이다. 나중에 사도는 교회의 공식 직분이 되었고(엡 4:11) 다른 직분들과 마찬가지로 사도직은 남자만 받을 수 있었다(롬 16:1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사도직은 특별한 직분이었고 사도들은 표적들을 행할 수 있었는데(막 16:17-18 참고. 고후 12:12) 오늘날에는 그런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다(계 2:2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활동한 것을 알 수 있다: 첫째 그룹은 열두 사도들(유다를 대신한 맛디아를 포함해서 - 행 1:20-26), 그리고 둘째 그룹은 "주의 아우인 야고보"(갈 1:19), 바나바(행 14:14), 또 당연하지만 바울(고전 1:1)이다. 여러분이 사도들 전체의 명단을 확인하고자 하면 고전 4:2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이제 제자들 각각에 대해 기초적인 정보를 놓고 설명하도록 하겠다. 마 10장, 본문, 눅 6장, 그리고 행 1장에 등장하는 사도들의 명단에서 베드로는 항상 첫번째로 거명되는 제자이다. 교황들이 베드로가 사도들 중에 수위권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이유 중 하나가 그것이다. 그 주장은 몇 가지 사실을 간과한 데서 나온 것이다:
1) 베드로는 사탄이라고 불린 유일한 사도이다(마 16:23).
2) 그는 행 15장의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임에서 최고 지도자 위치에 있지 않았다(행 15:13).
3) 베드로는 자신이 단지 장로들 중 하나라고 말한(벧전 5:1) 반면 예수 그리스도께 대해서는 "목자장"(벧전 5:4)이라고 높였다.
4) 베드로가 아닌 바울이 여러분의 모범이 된다고 제시되며(고전 11:1) 베드로가 바울과 의견 충돌을 빚었을 때 베드로는 책망을 들었다(갈 2:11).
베드로가 두 개의 이름을 가졌음을 보라: "시몬"의 의미는 "움직이는 모래"이고 "베드로"는 "돌"(요 1:42)이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회심의 상징이다(2:14 주석을 보라).
여기에 교황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왜곡하는 부분이 또 하나 등장한다. 베드로라는 뜻이 진정 "돌멩이"나 "돌"이라면 그는 교회를 떠받치는 반석이 될 수 없다(마 16:18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가 반석이라고 증거했고(고전 10:4, 3:11; 엡 2:20) 베드로도 그렇게 말했고(벧전 2:6-8) 예수 그리스도 자신도 그렇게 말씀하셨다(마 21:42-44; 막 12:10; 눅 20:17-18).
다음으로 나오는 두 제자는 한 쌍인데 야고보와 요한이다. 1:19에서 배웠다시피 그들은 형제이며 그들의 아버지는 세베데이다. 그들은 베드로를 따라오는데 이는 그 셋이 그리스도의 유명한 "이너서클"(5:37, 9:2, 14:33)이기 때문이다. 안드레가 그의 형제 베드로와 분리되어 18절에 언급되는 이유가 그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함께 언급되는 또다른 이유는 그들이 항시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10:35에서 그들은 그리스도께 함께 나아와 주의 왕국에서 왼쪽과 오른쪽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청한다.
예수께서 그들을 "보아네게"라 부르신 것을 보라. 그 이름의 뜻은 "천둥의 아들들"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성정 때문에 그런 이름을 주신 것인데 그들이 어떤 성격이었는지 알려면 눅 9:54을 보라. 요한은 "천둥의 아들"로 시작해서 "사랑받는 사도"(요 21:20, 24)로 마쳤다. 그의 거친 성품을 변화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교제였다.
18절: "안드레, 빌립". 그들은 유능한 구령자였다. 베드로를 그리스도께 데려온 제자는 안드레였고(요 1:40-41) 안드레는 오병이어를 가진 소년을 그리스도께 데려와 주께서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시는 데 관여했다(요 6:8-9). 요 1:45에서 빌립은 나다나엘을 그리스도께 데려왔고 그는 5천명을 먹이시는 기적 중에도 이름이 거론된다(요 6:5-7).
또한 빌립은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께 하나님을 보여주시라고 청한 제자이기도 하다. 그 요청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자유주의자들과 마호메트교도들이 결코 모르는 유명한 자신의 신성에 대한 선언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빌립아, 내가 너희와 그처럼 오랜 시간을 있었는데 네가 나를 모르겠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그런데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소서.’라고 말하느냐?"(요 14:9).
다음으로 "바돌로매, 마태" 두 명을 보자. 마태는 2:14의 레위이다(참고. 마 9:9). 바돌로매는 종종 요한복음에서 나다나엘과 동일인으로 언급된다(요 1:46-49, 21:2).
이제 "도마,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보자. 이 사람은 요 20:24-29의 저 유명한 "의심많은 도마"이다. 그는 "디두모"라고도 불렸는데 그 헬라식 이름의 뜻은 "쌍둥이"(요 20:24)였다. 요 20장 이외에 요 11:16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기꺼이 죽고자 하는 제자로 등장하며 요 14:5-6에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리스도의 유명한 선언을 이끌어내는 역할을 한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사도들 중 두번째 야고보이다. 2:14을 주석하면서 그가 마태와 형제일 가능성이 있다는 언급을 했었다. 어떤 주석가들은 막 15:40의 "작은 야고보"가 본문의 야고보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데 이는 그 구절의 마리아가 결혼한 남자의 이름이 "클레오파"(요 19:25)라서다. 클레오파라는 이름은 히브리어 알패오를 헬라어로 옮긴 형태라고 추정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작은"이라는 뜻이 키를 가리킨다고 해석하는데 그가 최소한 "세베데의 아들 야고보"보다 키가 작았거나 아니면 제자들 중 가장 키가 작았을 것이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이 야고보가 갈 1:9의 "주의 아우인 야고보"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하기 바란다. 그 인물에 대해서는 6:3에서 다룰 것이다.
도마와 야고보 다음으로 "다대오, 카나안인 시몬"이 등장한다. 다대오에게는 이름이 두개 더 있는 것이 복음서들에서 확인된다. 그의 "성"은 다대오였고 이름은 "렙배오"(마 10:3)였다. 마 10장, 본문, 눅 6:16과 행 1:13의 사도 명단을 비교해 보면 다대오에게 세번째 이름이 있었던 게 확실하다: "야고보의 형제 유다"(이 야고보는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이 유다가 유다서의 저자인 듯 하다(유 1장: 유다서 주석서 서문에서 그 서신서의 저자에 다룬 부분을 보라). 요 14:22에서 다대오는 "이스카리옷이 아닌 유다"라 불리면서 "배반자 유다"(눅 6:16)와 구별된다. 다대오가 유다라는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그의 회심과 관련되었을 수 있고 이는 레위가 마태라는 이름을 받은 것과 유사할 것이다. 만일 마태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형제 관계가 맞다면 제자들 가운데 세 명이 한 형제였던 게 된다: 마태(레위), 야고보, 유다(다대오).
"카나안인 시몬"은 눅 6:15과 행 1:13의 "셀롯이라 하는 시몬"과 동일인으로 보인다. 셀롯들은 로마 점령군과 싸우는 전사 집단이었는데 그들은 1940년대에 영국 점령군과 싸웠던 "스턴갱" 같은 자들이었다(죽음의 재 같은 땅 이스라엘이라는 책을 보라). 로마인들은 그들을 테러리스트로 간주했다. 시몬이 "카나안인"이라 불린 것은 그가 카나안인 혈통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라(예. 마 15:22) 그에게 카나안땅이 로마인이 아닌 유대인의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성경에서 약속의 땅을 카나안이라고 부르지만 로마인들은 "팔레스타인"이라 불렀다. 팔레스타인은 필리스티아를 라틴어로 옮긴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급진적 "시오니스트"를 부르셔서 그의 로마에 대한 테러 활동들을 용서하시고 그를 설교자로 변모시키셨다. 반면 예수께서는 로마를 위해 일하는 유대인 세리를 부르셔서 그도 제자 삼으셨다. 정치적으로 마태와 시몬은 양극단이었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을 때 서로를 사랑하게 되었다(요 13:34, 15:12, 17).
이제 19절에서 "유다 이스카리옷"이 다른 제자들과는 별도로 언급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히 그가 그리스도의 배반자였기 때문이다. 그가 사복음서에서 처음 등장하는 대목마다 배반자가 그에게 붙는 대명사이다. 마 10:4; 막 3:19; 눅 6:16; 그리고 요 6:71에서 그러하다.
유다는 다른 면에서 독특한 면이 있다. 그는 갈릴리 출신이 아닌 유일한 제자였다. 그의 성인 이스카리옷은 "크리욧 사람"이라는 뜻이다(이스 - "사람"; 카리옷 - "크리욧"). 성경에는 크리욧이라는 장소가 두 개 있다. 첫번째 크리욧은 유다에 있고(수 15:25) 두번째는 모압에 있다(렘 48:24, 41; 암 2:2). 나는 유다가 모압의 크리욧 출신이라 간주한다(그리스도의 생애 중 그 지역은 페레아의 유대인 속주에 포함돼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아는가? 모압의 크리욧에 대한 언급 직후에 성령께서 이런 말씀을 주셨기 때문이다:
"모압의 뿔이 잘렸고 그의 팔이 부러졌도다. 주가 말하노라"(렘 48:25).
렘 48:25의 "뿔"은 어떤 사람을 가리키는데("그의"를 주목하라) 그는 팔이 부러진 자이다. 나는 성경에서 "작은 뿔"로 언급되는 자가 있고 그의 팔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가 적그리스도이다.
"내가 그 뿔들을 살펴보았더니, 보라, 그것들 가운데서 또 다른 작은 뿔이 나오더니, 먼저 나온 뿔 세 개가 그 앞에서 뿌리째 뽑혔더라. 또 보라, 이 뿔에는 사람의 눈 같은 눈이 있고 또 큰 일들을 말하는 입이 있더라[계 13:4-5을 보라]"(단 7:8).
"양떼를 버려 둔 우상 목자[킹제임스성경은 실수하지 않았다. 거짓 목자가 우상 숭배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 계 13:14-15에 나온다]에게 화 있으리라! 칼이 그의 팔과 그의 오른눈에 임하리니, 그의 팔은 바싹 마르고그의 오른눈은 완전히 어둡게 되리라"(슼 11:17).
적그리스도는 살후 2:3에서 "멸망의 아들"이라 불린다. 왜 그런가 하면 요 17:12에서 그리스도께서 유다를 그렇게 부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다 이스카리옷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이며, 그 이유 때문에 나는 유다의 크리욧이 아닌 모압의 크리욧이 그의 출신지라고 여기는 것이다.
게다가 유다는 단순한 인간이 아닌 특별한 존재였다. 요 6:70-71을 보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시기를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니라.”고 하시니라. 주께서는 시몬의 아들 유다 이스카리옷에 대해 말씀하셨으니, 이는 그가 열둘 가운데 하나로 주를 배반할 자였음이라."
이 본문에 보면 (단수 a) "마귀"가 등장하는데 그는 그(THE) "마귀"(곧 사탄, 1:32 주석을 보라)가 아니다. 이 마귀는 유다 이스카리옷이었다. 따라서 유다는 인간적 혈통을 갖고 있었음에도("시몬의 아들") 마귀적 근원 또한 갖고 있었다. 그는 "마귀"였고 마귀의 화신이었다.
이것을 살후 2:7에서 "불법의 신비"라 부르는데 이 신비는 딤전 3:16의 "경건의 신비"와 대조를 이룬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새로운 "성서들"에서는 성육신을 말씀하는 이 분명한 본문이 삭제되었다)인 것과 반대로 적그리스도는 사탄이 육화된 자라는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셨던 것과 대조적으로 적그리스도는 멸망의 아들이었다. 살후 2:3의 "멸망"은 단지 저주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를 가리키는 말이다. 계 9:11에서 그 자는 "아폴루온"이라는 이름으로 드러난다. 아폴루온은 타락한 천사들 중 하나로서 끝없이 깊은 구렁의 마귀들을 다스리는 자이다.
1:24에서 말했다시피 예수께서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그를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보내시는 때는 지금이 아니라 재림 때이다(계 20:1-2). 그러나 그 때보다 앞서 구렁으로 내려가 있는 마귀가 있는데 그가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유다가 목매달아 자살했을 때 그는 지옥이 아닌 "그 자신의 거처"(행 1:25), 곧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 내려갔다.
여러분은 17:8에서 말씀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아는가? "네가 본 그 짐승[멸망의 아들]은 전에 있었다가[유다는 계시록의 저자 요한과 함께 지상에 있었다]지금은 없고[요한이 계시록을 쓸때 그는 지상에 없었다], 앞으로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나와서[유다의 영인 아폴루온이다. 그가 대환란 중 적그리스도로 돌아올 것이다] 멸망으로 들어갈 자라[재림 때 적그리스도는 불못에 던져진다 - 계 19:20 - 사탄은 사슬에 묶여 끝없이 깊은 구렁에 들어간다]."
본문 막 3:19에서 유다가 다른 제자들과 분리되어 언급된 이유가 이것이다.
20 무리가 다시 모이니 빵을 먹을 겨를도 없더라.
21 주의 친구들이 이 소문을 듣고 주를 데려가려고 오니, 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미쳤다.”고 함이라.
22 또 예루살렘에서 서기관들이 내려와서, 말하기를 “그가 비엘세붑에 들렸다. 그는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고 하더라.
23 그때 주께서 그들을 부르시어,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사탄이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24 한 왕국이 서로 대립하여 갈라지면, 그 왕국은 서지 못하고,
25 한 가정도 서로 대립하여 갈라지면, 그 가정은 서지 못하며,
26 사탄이 스스로를 대적하여 일어나 갈라지면, 그는 서지 못하고 패망하게 되느니라.
27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서 그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나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약탈할 수 있느니라.
이제 "마귀"였던 한 사도에 대한 언급에 뒤이어 어떤 본문이 나오는지 보라. 주께서는 사도들을 선정하신 후 어떤 집으로 가셨는데 1:33과 2:1-2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몰려드는 군중들로 인해 저녁 식사를 할 시간도 없었다.
21절은 이렇게 말씀한다. "주의 친구들이 이 소문을 듣고 주를 데려가려고 오니, 이는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가 미쳤다.”고 함이라." 이 "친구들"은 주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제자들이 아니다(참고. 눅 12:4; 요 15:15). 이 친구들은 주께서 돌았다고 생각하기에 집으로 끌고 가려고 온 것이다. "그가 미쳤다", 말 그대로 그들은 주께서 제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행 26:24).
21절의 이 "친구들"의 정체가 무엇인가? 31절을 보라: "그때에 주의 형제들과 모친이 와서 문 밖에 서서 주께 보내어 주를 부르니." 이 시점에 와서 예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과 혈육인 가족들을 구별하셨다(33-35절). 왜 그런 것인가? 주의 형제들이 주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요 7:5). 그래서 21절에서 주를 사랑하는 그의 가족들("주의 친구들")은 주께서 정상이 아니라 생각해서 끌고 가려 했던 것이다. 그들은 주를 그들의 가족으로서 단순한 한 인간으로 보려 했지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지 않았다.
22절에서 서기관들이 그리스도께 붙이는 혐의는 결론적으로 "미쳤다"는 것이다: "그가 비엘세붑에 들렸다. 그는 마귀들의 통치자를 힘입어 마귀들을 쫓아낸다"(22절). 요 10:20에서도 주의 대적들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마귀들리고 미쳤는데."
여기서 나는 마귀들림과 정신병의 관련성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을 것인데 그 주제에 대해서는 9:22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 말할 것은 한 가지인데 어떤 정신병은 마귀에 의해 초래되는 경우가 있고 어떤 정신병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서기관들이 예수님을 마귀들렸다고 한 이유는 주께서 자신이 하나님이라 선언하셨기 때문이다(요 10:30-33). 예수께서 정말로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그는 역사상 가장 끔찍하고 비열한 사기꾼이거나 혹은 완전히 미친 사람일 것이다. 어떤 재치있는 사람이 말하기를 주께서는 수란(a poached egg: 껍질을 벗기고 더운 물에 살살 집어넣어 5분 동안 익히는 계란) 같은 분이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거짓말쟁이이거나 미치광이, 혹은 자신이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시다.
"그가 비엘세붑에 들렸다." 이 "B"라는 철자는 성경에서 나쁜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J"는 좋은 의미를 가졌다: 여호수아, 유다, 여호사밧, 예수 그리스도 등. 이는 "J"라는 철자가 하나님의 성호인 여호와(Jehovah)의 첫 글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꼐서 렘 22:24-28에서 여코냐를 "코니야"로 부르시는 이유는 여코냐가 매우 사악했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호를 그 사람과 연관시키기를 거부하셨기 때문이다. 여코냐의 "여"는 여호와의 축약 형태이며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성호를 그 사람에게서 떼어버리셨다.
"B"는 이와는 다른 의미를 가졌는데 관련된 용어로 이런 것들이 있다: 바알, 발락, 발라암, 바아사, 바벨, 바빌론. 이 단어들은 모두 바알(또는 사 46:1; 렘 50:2, 51:44에서 벨이라 불린다)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바알은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로 저주를 받게 한 거짓 신인데 그것은 태양신 숭배와 관련이 있었다(판 2:13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바알은 카나안/페니키아 종교에서 숭앙되는 신으로서 그 숭배 의식에는 성행위가 수반되었다. 바알과 아스토렛 숭배에서부터 로마 카톨릭 종교가 기원하기도 했다.
바알이라는 뜻은 "주인"이고 그것은 명백히 여호와 하나님과 대비되는 거짓 주이다(고전 8:5을 보라). "비엘세붑"은 필리스티아인들의 신이었다(왕하 1:2). 그 뜻은 "파리들의 주"였는데 비엘세붑은 불결함의 신이었고 그리스도 당대의 유대인들은 사탄의 별칭으로 그 이름을 불렀다("마귀들의 통치자").
본문의 "마귀들"이 날개들을 가진 작은 날짐승인 파리들과 연관되는 것에 주목하라. 따라서 마귀들은 타락한 천사들이 아니다. 성경에 나오는 천사들은 날개가 달려있지 않다. 성경의 천사들은 사람처럼 등장한다(판 13:6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만일 마귀들이 타락한 천사들이라면 일곱 마귀가 한 여자 안에 들어가거나(눅 8:2 주석을 해당 주석서에서 보라) 천 마리의 마귀가 한 사람 안에 들어갈 수(막 5:1-13 주석을 보라)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마귀들이 새의 크기이거나(4:4, 15) 날벌레 크기라면 사람에게 들어올 수 있다.
예수께서는 서기관들의 이 비방(주께서 사탄의 권세로 마귀들을 쫓아낸다는 비방)에 대해 "비유"로 답하셨다. 성경의 비유는 영적인 진리들을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이야기들이다. 세 가지 비유가 본문에 등장하는데: 1) 서로 대립하여 갈라지는 왕국(24절), 2) 서로 대립하여 갈라지는 가정(25절), 3) 강한 자를 결박하고 그 집을 약탈하는 것(27절)의 세 가지이다.
앞의 두 가지 비유들은 간단하면서 의미가 명료하다. 어떤 왕국이 "서로 대립하여 갈라지면" 그것은 내전이라 부른다. 어떤 가정이 "서로 대립하여 갈라지면" 그것은 이혼, 의절, 상속권 박탈 등으로 부를 수 있다. 사탄이 자기 수하인 악령들을 쫓아낸다면 그것은 자신의 기반을 허무는 일이다.
"개종"(한 종교에서 다른 종교로 옮기는 것)에 관해 말하자면 어떤 유대인이 카톨릭으로, 감리교도가 이슬람으로, 성공회 교인이 불교로 개종한다고 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마귀가 떠나는 게 아니다. 그것은 사탄 편에서 볼때 "위장", 곧 기만과 연막일 뿐이다. 그 바리새인들은 마귀를 그들의 아비로 모시고 있었고(요 8:44) 그들이 아테네나 로마로 배를 타고 가서 몇몇 제우스 숭배자들과 쥬피터 숭배자들을 랍비들을 따르는 유대교로 개종시켰다 할지라도 그 개종자들은 구원받지 못했고 오히려 두 배의 저주만 임했다.
"위선자인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 너희에게 화 있으리라! 이는 너희가 한 사람의 개종자를 얻으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얻고 나면 그를 너희보다 두 배나 더 악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기 때문이라"(마 23:15).
따라서 어떤 은사주의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낸다"거나 로마 카톨릭 사제가 "엑소시즘"을 행한다 해서 사탄이 사탄을 대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것은 종교 서커스장에서 쇼를 벌이며 순진한 사람들을 속이는 짓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때 그 목적은 그 마귀들린 사람을 자유롭게 하고 그들이 구원받고 중생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마귀들린 사람을 고쳐줄 때 그 사람은 한 왕국에서 다른 왕국으로 옮겨졌는데(골 1:13) 그는 새로운 가정에 속하게 되는 것이다(엡 2:19). "강한 자"는 그의"물건"을 약탈당한다(막 3:27).
27절은 그 당시 즉각 성취되지 않은 내용으로서 보다 예언적인 구절이라 할 수 있다. 이 비유에서 "강한 자"는 분명 마귀이고 "그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약탈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계시록에 보면 예수께서 재림을 말씀하실 때 자신을 "도둑"에 비유하신다(계 3:3, 16:15). 바울과 베드로는 재림에 대해 언급할 때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살전 5:2; 벧후 3:10)라 말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두 강도" 사이에 마치 도둑처럼 십자가에 매달리신 것이다(15:27).
예수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그는 사탄의 모든 소유들 가운데 가장 값나가는 것들을 "훔쳐가려고" 오시는 것이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사람이라면 바로 여러분이 그 보물들이다. 사탄은 고후 4:4에서 "이 세상의 신"이라 불린다. 주를 광야에서 시험할 때 마귀는 그리스도께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자신에게 속했으며 "내가 원하는 자에게 줄 수 있느니라"고 말했고(눅 4:5-6) 예수께서는 그 제의를 거절하셨다. 따라서 마귀의 "물건"은 잃어버린 죄인들과 세상의 정치적인 왕국들을 포함한다 할 수 있다. 마귀가 왜 구령자들과 복음 전도자들을 그렇게 대적하는지 모르겠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라. 누군가 여러분의 집에 쳐들어와 여러분의 아이들을 유괴해 간다면 그 유괴범에게 고맙다고 하겠는가? 여러분이 죄인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할 때마다 여러분은 마귀의 자녀들을 유괴하는 것과 같고(엡 2:2) 마귀는 그것을 매우 싫어한다.
바로 지금 크리스찬들은 마귀의 "집"에 여전히 살고 있고 사탄은 여전히 그들을 일정부분 제어할 권세가 있다. 주께서 더 지체하신다면 어느날 여러분은 마귀에게 완패당할 것이다. 왜 그런가? 여러분이 여전히 사망에 굴복하는 죄의 몸 안에 살고 있고 마귀는 하나님께 "죽음의 세력"를 받은 자이기 때문이다(히 2:14). 물론, 마귀가 성도에게 할 수 있는 일이 한정되어 있음을 우리는 안다. 사탄은 주님의 허락 없이 하나님의 자녀의 육체적 생명을 앗아갈 수 없지만(욥 1-2장을 보라) 어쨌건 그는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이다.
여러분이 궁극적으로 죽음을 이기는 이유는(고전 15:54-55) 여러분이 마귀와 싸워 이기신 분 안에 들어가 있기 때문(고전 12:13)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낮추시고 죽음에까지 순종하셨으니"(빌 2:8), 그러나 그는 죽음에 머물러 계시지 않았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무덤에서 나오셨을 때 주께서 "정사들과 권세들을 벗겨 내어"(골 2:15) 이기셨다고 말씀한다. 따라서 영적인 의미로 말해서 "묶임"과 "약탈"이 갈보리와 부활에서 일어났지만(딤후 1:10) 완전히 문자적 의미에서의 "약탈"과 "묶임"은 미래에 오게 될 것이다(롬 16:20).
어느 날 휴거가 일어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마귀의 "집"에서 완전히 꺼내어 주의 "아버지 집"(요 14:2-3)으로 데려가실 것이다. 환란기의 끝에도 같은 사건이 있을텐데 그때는 환란 성도들이 그렇게 될 것이다(마 24:42-44). 주께서 사탄의 가장 귀중한 "물건"(구원받은 죄인들!)을 강탈해 가신 다음 주께서는 지상 재림으로 나타나셔서 "강한 자"를 묶으시고(계 20:2) 그 자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를 차지하실 것이다(계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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