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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8, 세미나(김정호: 한국의 비정규직 투쟁 전략) 발제문입니다.
발제자께서 일찍 보내셔서 대신 올립니다.
[대구포럼 발제]
한국의 비정규직투쟁 전략 연구
2018년7월28일
1. 전쟁과 비정규직투쟁
대구 포럼의 금년도 주제는 ‘전쟁’이다. 금주 본인의 발표도 마땅히 이 같은 주제와 관련된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본인은 ‘한국의 비정규직투쟁’과 관련한 주제를 선정하였다. 따라서 먼저 이것과 원래 포럼의 주제와의 관계를 설명해야 할 것 같다.
19세기 프로이센의 군사전략가 클라우제비치는 자신의 저서 <전쟁론>에서 “전쟁은 정치의 연속”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맑스주의에서 ‘정치는 계급관계’(레닌)라고 파악한다. 이 두 명제를 결합시키면, 전쟁은 ‘특수형식으로서의 계급투쟁’이라는 말이 된다. 즉 계급투쟁이 일정 발전단계에까지 이르게 되면 투쟁형식에 있어 질적인 전화가 생겨나고, 그것이 ‘전쟁’이라고 불리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현재 한국의 비정규직투쟁은 아직 그 정도로까지는 전면적인 발전을 이루지 못한 계급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많은 경우 현실에선 개별 단사차원의 투쟁에 머물기 때문에, 아직 전면화 하지 못한 즉 ‘정치투쟁’으로 까지도 발전하지 못한 계급투쟁 즉 경제투쟁인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본래 본 포럼의 주제인 ‘전쟁’과는 직접 상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직 정치투쟁 수준에도 못 미치는 투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본인이 이 같은 주제를 선정한 이유는 무엇이며, 또 다른 한편 이 자리를 빌려 감히 발표할 수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일까?
첫째, 그것은 아직 전면화하지 못한 계급투쟁일 뿐, 앞으로 ‘점차 전면화’ 할 수밖에 없는(한국사회에서는 특히) 계급투쟁이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투쟁이 전면화 한 뒤 그것이 전쟁(내전)적 상황으로 까지 갈지, 아니면 평화적인 방식으로 종결될지는 지금 여기서 예단할 문제는 아니다. 다만 전자의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는 말을 할 수 있을 뿐인데,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가 일반적으로 보여주는 바이기 때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현재 비정규직투쟁의 요구는 ‘정규직화’ 혹은 ‘노조탄압 반대’ 등 개별적이며 경제적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조금 뒤에 밝히겠지만, 한국의 비정규직문제는 성격상으로는 전 계급적이며 따라서 반드시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그러한데, 즉 그것은 우리사회의 기본모순인 재벌문제와 본질적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재벌체제의 주요한 ‘현상화’ 형식으로서의 그것은, 양적으로는 향후 더욱 광범위하고 전면적인 발전을 이룰 것이며, 질적으로도 더욱 가혹하고 심각한 착취를 동반하게 됨으로써 당사자들을 점점 더 생존의 벼랑 끝까지 내몰게 될 것으로 예측된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투쟁의 전면적 발전은 필연적이다.
둘째, 이 같은 이유 때문에 비록 본 포럼의 주제인 ‘전쟁’이라는 범주에서 얼마간 벗어나긴 하였지만, 이 주제가 갖는 ‘현실적 의의’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본 포럼의 원래 주제와 이 주제의 현실적 의의 간에는 일정한 모순이 존재한다. 본인은 금년도의 포럼 주제가 ‘전쟁’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 잘 알고 있다. 얼마 전 까지만 하더라도 북핵문제로 인해 한반도 주변에는 ‘전쟁’이라는 불길한 기운이 맴 돌았는데, 이 때문에 이 주제가 선정되었다고 들었다. 이제 4/27 남북 정상회담과 6/12 북미 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로 한반도는 화해무드에 접어들었으며, 이 바람에 일촉즉발의 긴장감도 많이 사라졌다. 때문에 애초에 선정된 주제 역시도 현실과는 일정한 괴리가 생겨났으며, 포럼이 선정한 ‘전쟁’ 개념은 이제 매우 추상적인 의미가 강해졌다. 이는 모두에게 좋은 일이다. 전쟁이 실제로 발발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적어도 한국인이라면 거의 없으리라 생각된다. 그러할 때, 우리에게 좀 더 현실적인 문제인 ‘비정규직투쟁’으로까지 주제의 외연을 넓히는 것은 그리 나쁜 일은 아니며, 오히려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된다. 즉 현실의 진행이 실제 전쟁 가능성에서 멀어지고 있는 만큼, 이론 차원에서도 ‘전쟁’ 범주의 외연을 아직은 개별적이긴 하지만 그러나 충분히 정치투쟁으로 전면화할 수 있는 계급투쟁인 비정규직문제로까지 확장하는 일이 나름대로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2. 비정규직투쟁의 중요성 --당면 변혁의 주요모순
이를 위해 먼저 한국에서 비정규직투쟁이 갖는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본인은 비정규직문제를 일정 시기 우리 사회의 부분적인 뜨거운 쟁점이기 보다는, 당면 변혁단계 전 기간에 걸친 주요모순이라고 간주한다. 이는 재벌문제를 기본모순이라고 간주하는 인식과 긴밀한 관련이 있다. 본인이 그것을 주요모순이라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재벌문제를 기본모순이라고 보는 이유에 대해선 논의의 확산을 피하기 위해 여기선 구체적 설명을 생략한다. 단지 ‘한국은 재벌주도 사회’라고 하는 우리의 상식적이고 보편적 인식으로 그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믿는다.)
첫째, 비정규직문제는 한국 재벌의 축적방식과 긴밀한 내적 연관을 갖는다. 1987년 대투쟁을 경험한 후 기존처럼 군사독재의 힘을 빌려 노골적인 탄압을 통한 초과착취를 계속할 수 없게 된 재벌들은, 1990년대 들어 소위 '신경영' 전략을 채택하였다. 그것은 다름 아닌 비정규직을 대량 양산함으로써 기존의 저임금·장시간에 기초한 축적을 변형된 방식으로 관철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이점이야말로 한국사회의 비정규직문제가 서구 선진국이나 개발도상국의 그것과 다른 점이자, 전 사회적인 문제로 되어 날로 심각해지는 이유라 할 수 있다.
둘째, 비정규직문제는 현재 한국사회 최대 계급인 노동자계급의 절대 다수의 문제가 되었다. 한국의 노동계급은 2000만 명을 넘어서는데, 그중 비정규직은 그 절반이 넘는 56~60%의 비중을 차지하며, 수적으로는 대략 1100만 명에 이른다. 이는 단일 사회계층으로서는 최대이며, 이들의 문제는 노동운동 내에서 가장 중요한 현안문제일 뿐만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있어서도 최대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셋째, 비정규직문제는 한국사회 전반의 빈곤화와 빈부격차의 심화, 이로부터 계층 간 갈등의 가장 중요하고도 직접적인 요인이 되고 있다. 한국의 비정규직은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같은 일을 하면서도 절반 내지 그 이하의 임금과 심한 차별대우를 받는다. 또 이들은 4대 보험을 비롯한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위치함으로써 사회전반의 복지수준을 현격히 떨어뜨리는데 기여하고 있다. 이처럼 사회적으로 점점 절망적인 상황으로 내몰리는 수많은 비정규직 때문에 한국사회의 갈등과 불안 수준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넷째, 한국의 재벌문제는 비정규직문제를 매개로 해서 기타 사회문제를 한층 증폭시킨다. 예컨대, 교육과 청년실업 문제가 그러하며, 남녀 성차별 문제 역시 그러하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의 격차는 청년실업의 주요한 원인인데, 그것은 또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매개로 표출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 이 같은 비정규직의 비참한 삶을 피하기 위해 학생들은 일찍부터 입시준비에 매달려야 하는데, 이는 다시 복잡한 교육문제를 야기한다. 최근의 '미투'로 명명되는 성폭력 문제 역시도 많은 경우 비정규직문제를 매개로 표출된다. 직장 내 성폭력은 상 하급 간의 신분상 차이를 기반으로 발생하며, 정규직 상사와 비정규직 하급자 간의 심각한 차별은 그 같은 성폭력이 보다 손쉽게 발생할 수 있게끔 만드는 환경을 조성한다.
이렇듯 한국사회의 당면한 제반 현안 문제들이 본질적으로는 재벌문제에 기초하면서도, 그것이 막상 현실에서 표출될 때는 많은 경우 비정규직문제를 중간 매개로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비정규직문제를 현 단계 한국사회의 주요모순으로 규정한다고 할 때, 그렇다면 그 의의는 무엇일까? 우리는 비정규직문제를 통해 기본모순인 재벌문제를 인식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국 재벌문제 해결을 위한 통로로서도 역할을 한다. 즉 그것은 한국 재벌체제를 극복할 수 있는 수단과 해법 또한 제시한다는 것이다.
첫째, 재벌체제를 무너뜨릴 1100만 명에 이르는 가장 큰 '반재벌' 주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들은 현 재벌체제 하에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생존의 위협과 고통을 받는 존재들이며, 이 때문에 이들은 필연적으로 반재벌투쟁의 주력군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비정규직은 장차 한국의 재벌체제를 끝장 낼 '무덤 파는 자'라 할 수 있다.
한국의 비정규직운동은 한 가지 장점을 갖고 있다. 즉 그것의 '한 발짝 전진'이 힘든 만큼 반대급부로, 이 투쟁으로부터 훌륭한 투사들이 적지 않게 배출되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비정규직노조를 설립하고 자리 잡게 하는 과정은 지역과 공단을 오가는 수많은 선전전과 자택방문, 장기간 농성, 근로자지위 확인소송과 같은 법정투쟁 등 갖가지 방법을 다 동원하는 과정이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얻어지는 조합원 한명 한명은 잘만 훈련된다면 모두 훌륭한 반재벌 투사로 변신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무수한 반재벌투사를 배출할 것이다.
본인이 여기서 주된 관심을 갖는 바는, 이처럼 중요한 잠재적 발전 가능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현재 여러 가지 한계성을 비치고 있는 비정규직투쟁에 대해, 본래의 가능성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한 해결책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선 현실의 미성숙하고 불완전하며 미약한 개별투쟁에 대해 주목하여야 한다. 아래에서 구체적인 사례분석을 수행하도록 하자.
3.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 투쟁사례
현재 본인이 살고 있는 울산에서는 기이한 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평균 연령 65세나 되는 노인 여덟 분이 학교당국을 상대로 학교 정문 앞에 농성장을 치고 장기투쟁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투쟁은 얼마 전 만4년을 넘겼다. 이 때문에 이 싸움은 구미의 아사히글라스 등과 함께 이미 전국적인 비정규직투쟁의 상징이 되었다. 이처럼 길고 질긴 싸움은 다음과 같은 경과를 밟으면서 진행되었다.
[울산지역 연대노조 울산과학대지부 투쟁 경과보고 요약(2018.3.5.)]
[2014년]
03.00 – 임금교섭 시작됨. (임금인상 요구액 5,210원->6,000원으로 인상. 상여금 100%->200%로 추가 100%인상) 당시 2014년 최저임금=시급 5,210원이었으며, 시중노임단가=시급 7,916원이었다.
05. 말 - 6~7회 교섭 후 결렬
06.16 - 생활임금 쟁취! 를 걸고 파업돌입 / 학교 본관 로비에서 철야농성 시작
08.08 - 법원집행관과 충돌-김순자 지부장 등 조합원 3명 연행
08.28 - 학교 청소 대체인력 투입시작
10.02 - 1차 접근금지 가처분 선고
10.13 - 본관 농성장 단전, 단수 조치
10.16 - 교수, 학생, 교직원 500여명 동원해 현수막/리본 강제철거 및 본관 농성장 침탈시도, 지부장 실신 및 응급실 후송
10.20 - 본관로비 농성장 강제철거 (제1차) / 본관 뒤쪽 천막농성 시작
10.28 - 민주노총 울산본부 주도로 1차 울산노동자결의대회 개최. 울산과학대 정문 분수광장. 500여명 참여
11.18 - 2차 울산노동자결의대회. 울산과학대 정문 분수광장. 200여명 참여
11.19 - 마지막 교섭에서 사측 안 제시 (시급 5,580원, 상여금 인상 불가, 조합원 징계 등이며 민,형사상 고소, 고발은 학교 건은 취하불가, 업체 건은 취하 입장) 결렬
12.10 - 3차 울산노동자결의대회. 울산과학대 정문 분수광장. 200여명 참여
[2015년]
01.13 - 4차 울산노동자결의대회. 과학대 정문, 300여명 참여
01.28 - 5차 울산노동자결의대회. 과학대 정문 → 현대중공업 중전기문까지 행진
02.27 - 동구청장 주선으로 동구청에서 간담회 (총장: “교섭을 1주일에 두 세 번씩 적극적으로 해 보라, 안되면 중재에 나서겠다” 고 했으나 실제 내용적 중재는 없었음)
03월 초경 - 총장 중재로 동구청에서 교섭
- 교섭내용: 사측 제시안을 공식적으로는 시급 6,400원으로 인상안을 제시하고,
비공식적으로는 기존상여금 100% 삭제, 설 추석 명절 귀향비 100만원 삭제, 하기 휴가비 50만원 삭제 하자는 안이었음. 계산 시 사실상 당시 시급 5,210원을 6,400원으로 인상한 것 같은 착시효과를 노린 동결 안이었음. 따라서 교섭 결렬됨.
05.21 - 업체설명회와 농성장 강제침탈. 기존업체(SNS, 맨파워)가 가고, 새 업체로 교체.
05.29 - 김순자 지부장이 업체에 전화하여 질의 (“6월1일부터 정식근무 한다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고 물었으나, 직원은 “나는 모른다”고 답변한 후 담당자가 지부장에게 전화하여 “채용 종료되었다”는 통보를 받음. 사실상 해고통보.
06.16 - 전면파업 1주년 울산노동자결의대회. 과학대 정문. 약 300여명 참여
07.20 - 법원 집행관 돌고래 분수대 앞 농성장 강제철거(3차), 정문 앞 농성 시작
[2016년]
09.04 - 위원장과 지부장 상경, 국회의원 지원 서명 받기 활동 등 전개
09.23 - 과학대청소노동자투쟁지원을 위한 울산지역정당연대간담회
10.06 - 환노위 국정감사 참여(대구)
11.16 - 민주노총울산본부주관 과학대정문 촛불집회 5백여명 참여
[2017년]
01.10 - 더민주 을지로위원회 의원단, 김종훈 지역구의원 등 학교 이사장, 총장 면담. *문제해결위한 끝장교섭 약속
02.09 -4차 강제철거 집행, 각계 규탄성명서 발표 , 정문 오른쪽 인도에서 노숙농성돌입
03.09 -민주노총울산본부 과학대 투쟁 1천일 기념 투쟁결의 문화제
03.14 -더민주당 을지로위원회 국회의원단 3명 학교 측 총장면담.
* 학교측 “끝장교섭 약속 한적 없다” 발뺌.
06.05 -울산지역 고등학교학생회 연합 학생들 30여명 ‘YOU GO혁명’ 과학대 정문시위
07.03 -김종훈의원 우원식의원 간 소통, 정정길이사장에게 교섭촉구
08.01 -KBS1 9시 뉴스 과학대 상황 보도
08.03 -민주당 을지로위원회 교섭촉구기자회견 및 학교 측에 공문발송
08.09 -위원장 지부장 상경투쟁(정치권과 언론) / 고등학생 서명운동
08.17 -울산지역 장투사업장 지원대책위 목요집회 시작(과학대 정문)
08.28 -위원장과 지부장 국가인권위에 성희롱 진정서 접수 후 울산복귀
09.21 -팟캐스트 팥빵 김용민 방송에서 과학대문제 브리핑, 후원금 4,200만 원 넘겨
- 9차 목요집회
*과학대 재학생 결합 연대선언
*재학생 서명운동, 학내 대자보부착->학교측에서 제거->학교앞 현수막설치
*재학생과 고등학생 연대결합->소망리본 만들어 나누어 달기운동.
[2018년]
01.17 -18차 수요집회 (과학대 농성장 옆 촛불문화제)
-이후 혹한기 방학기간 쉬기로 함.
03.05 -현재 조합원 8명 + 전위원장 1명 등 9명이 농성 중.
위에서 알 수 있듯 2014년3월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투쟁이 발발한 이래 그간 사회 각계의 연대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우선 민주노총울산본부는 200~500명 규모의 연대집회만 해도 7~8 차례 주도하였으며, ‘과학대 투쟁 1천일 기념 투쟁결의 문화제’를 여는 등 다양한 형태의 지원을 보내주었다. 또 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이 학내 서명운동을 하고 학내 대자보를 부착하는 등 직접적인 연대행동을 하였다. KBS1은 뉴스시간에 이 투쟁소식을 보도하였으며, 울산MBC와 울산KBS에서도 몇 차례 관련 보도를 하는 등 중앙과 지역 언론에서도 적지 않은 관심을 가져 주었다. 특히 팟캐스트 팥빵 김용민이 생방송에서 과학대투쟁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한 후, 전국에서 후원금이 4,200만 원이나 걷히는 등 적지 않은 성과를 거두었다. 또 해당 관할지역의 동구청장과 더블어민주당 을지로위원회 의원단, 김종훈 지역구의원 등이 학교 이사장과 총장 면담 등을 주선하는 등 지역 행정기관과 집권당 실세를 포함한 중앙의 정치인들까지도 개입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간단한 것처럼 보이는 울산과학대 문제는 아직까지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만 4년을 넘기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4. 장기화의 원인― 양 부대 간 ‘균형’의 성립
우리는 위에서 정정 4년간에 걸친 긴 투쟁의 출발점은 매우 평범하고 단순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생활이 어려우니 ‘800원’ 더 임금을 인상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듯 단순하고 소박한 요구 때문에 그토록 긴 세월의 싸움을 지속해야 했으며, 또 한국 노동운동과 전 사회가 주목하는 투쟁으로 변모 되게 되었을까?
우선, 투쟁 주체 역량의 미약함을 들 수 있다. 즉 현 8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힘을 가지고서는 어찌되었든 간에 학교 당국을 굴복시킬 수가 없었다. 이것은 개별단사 차원의 비정규직투쟁이 가지고 있는 보편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둘째는, 현대중공업이라는 재벌과 관련된 투쟁이기 때문이다. 울산과학대 배후에는 학교재단을 사실상 소유하는 현대중공업재벌이 있으며, 후자야 말로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들이 싸워야할 진정한 대상이다.
셋째, 이렇듯 겉으로 보기엔 현저한 힘의 불균형 속에서도 나름대로 지금까지 투쟁이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투쟁주체들의 강고하고 완강한 의지 (이는 대단히 소중한 요소이다. 이 측면에서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투쟁은 비정규직투쟁의 새로운 전형을 창출하고 있는 중이다!) 외에도, 주변의 연대와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지금의 과학대투쟁은 필연적으로 ‘대리전’의 성격을 띠면서 상대적으로 힘의 균형이 형성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을 좀 더 살펴보도록 하자.
우선 1987년 대파업 이래 한국의 노동자계급은 이미 '조직된 부대'로 변모되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 전국에는 민주노총, 산별노조, 지역·업종노조 등 여러 형태의 상급단체가 존재한다. 이 때문에 단위 사업장 비정규직들이 일단 노조를 결성하게 되면 그것은 즉각 이러한 상급단체를 통해 다른 노조들과 유기적인 관계를 형성한다. 상급단체는 자신의 하급조직의 싸움에 관여하지 않을 수 없으며, 어떠한 형식으로든 그 책임을 분담하게 된다. 지금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와 구미 아사히노동자들이 수년씩의 장기투쟁을 벌일 수 있는 이유도, 배후에 바로 이 같은 상급단체의 지원이 있기에 가능하다.
이리하여 현실의 비정규직투쟁은 점차 양 주력부대 즉 재벌과 민주노총과의 '대리전' 내지는 '전초전'적인 성격을 띠어가게 된다. 현재 각지의 비정규직투쟁이 완강하고 장기화하는 양상을 보이는 것도, 양 본대의 이 같은 대리전적 성격에 기인하는 측면을 무시할 수 없다. 양 진영은 인적·물적 지원을 지속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기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한다. 이렇듯 싸움이 장기화하고 점차 확대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다. 이들 각각의 비정규직투쟁이 비록 그 자체로서는 소규모일지라도,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는 전국적 내지 전 계급적인 쟁점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어느 한쪽이 싸움에서 지게 되면 전반적으로 불리한 상황에 몰리게 된다. 예컨대 자본 측에서 일단 비정규직의 요구를 수용하게 되면 그 사례가 점차 확산되어 마침내는 통제 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 결과는 비정규직에 대한 실패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정규직에 대한 통제까지도 실패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왜냐하면 비정규직의 확대를 통한 정규직 포위와 고사 전략은 현 재벌 경영전략의 요체인데, 그 작전이 결국 모두 실패로 돌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정은 노동 측에서도 비슷하다. 비정규직투쟁이 하나씩 밀릴 경우, 그것은 곧 이어 좀 더 큰 규모의 투쟁과 대공장 전략사업장 투쟁에 있어 불리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더군다나 그동안 지역과 상급단체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어렵사리 인적·물적 지원을 수행해온 장기투쟁일 경우에는 그 후유증이 더욱 심하다. 이러한 투쟁이 실패할 경우 주변의 사업장과 노동운동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타격이 적지 않으며, 이 때문에 장기투쟁 사업장은 노동 측에서도 더욱 포기할 수 없게 된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비정규직투쟁들이 양대 진영 간의 대결의 장으로 변하고 그 대리전적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정규직투쟁이 이러한 양상으로 전개 될수록,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립 그리하여 그 실체인 재벌을 겨냥하는 반재벌투쟁의 성격은 더욱 분명해 진다. 현재 울산과학대 청소노동자투쟁이 그 같은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 싸움은 처음 용역업체와 학교재단을 상대로 한 청소노동자들의 몇 백 원 임금인상을 요구한 싸움으로 출발하였지만, 곧 사용주 측의 탄압으로 원직복직 요구가 가미되었다. 점차 투쟁이 장기화하면서, 그 배후에 있는 현대중공업 재벌을 직접 타격하지 않고서는 4년째 접어들고 있는 이 지긋지긋한 싸움을 끝낼 수 없다는 인식이 마침내 투쟁주체와 지역단체들 사이에 팽배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들이 내거는 슬로건이 달라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그것은 학교 주변에 둘러친 그들의 플랭카드를 통해서도 잘 드러난다. 애초에 보이지 않던 "현대중공업재벌 해체하라!"와 같은 요구가 내걸리기 시작한 것이다. 지역 내에서도 아직 추상적인 수준이긴 하지만 '총파업'이 거론되고 있으며, 현대재벌과 총력전을 벌이기 위한 '울산지역공동대책위' 결성이 추진되고 있다. 후자는 지역 내 노동운동과 진보운동의 역량을 총결집시키기 위한 조직적 준비라고 할 수 있다.
이렇듯 장기화하는 투쟁, 전체적으로 보면 가장 큰 사회집단을 이루지만 그러나 개별 사안만 볼 경우 거대한 재벌에 맞서기엔 턱없이 미약한 비정규직의 주체역량을 보면서, 우리는 전체 비정규직운동에 대한 전략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정규직투쟁을 과연 어디에서부터 풀어 가야 할 것인지에 관한 고민이다.
5. 비정규직투쟁, 어디에서부터 시작할 것인가?
일견 비정규직들은 가장 직접적이고 심각하게 재벌체제의 고통을 온 몸에 받고 있기에 반재벌 투쟁의 선도적 주체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이는 표면상의 모습에 불과하다.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비록 심각한 생활상의 고통과 열악한 작업조건에 처해 있지만, 약점 또한 적지 않다. 이들은 소규모 영세 사업장으로 분산되어 있고 유동이 심하며, 이 때문에 조직이나 의식면에서 대공장 노동자에 비해 많이 뒤쳐진다. 당연히 이들의 투쟁력 역시 그러한데, 단독적으로는 좀처럼 사업주를 굴복시키지 못하고 그들 간의 연대 또한 생각만큼 쉽지 않다. 이에 따라 한번 싸움이 벌어지면 투쟁이 장기화하고 소모를 많이 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 또 이들이 수행하는 '비정규직투쟁'은 정규직화 요구 혹은 노조탄압 등과 관련된 즉자적 요구 수준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부분이어서 그 본질인 반재벌투쟁으로까지 상승 하는 데는 어려움이 적지 않다. 과연 이 같은 불리한 조건에 있는 비정규직노동자를 어떻게 조직할 수 있으며, 반재벌투쟁의 주체로까지 불러일으켜 세울 수 있을까?
여기서 잠시 눈을 돌려 중국의 과거 경험을 보도록 하자. 중국은 중국공산당의 지도로 신민주주의혁명을 완수하고 1949년10월 신 중국(지금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하였다. 그 전까지만 하더라도 중국은 반식민지반봉건 사회였는데, 5억 명의 인구 중 80% 정도의 절대 다수는 농민이었고, 도시 프롤레타리아 계급은 겨우 5%에 지나지 않았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절대 다수인 농민을 주체로 세우지 않고서는 중국사회의 변혁을 완수한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중국에선 어떻게 이러한 거대한 농민들을 변혁의 주체로 세울 수 있었을까?
당시 중국 농민의 존재조건은 일견 현재의 한국 비정규직노동자와 비슷한 점이 있다. 중국 농민들은 반식민지반봉건 체제부터 가장 큰 고통을 받는 존재이었다. 제국주의 침탈의 일차적 희생양이었으며, 반봉건적 지주제와 군벌의 가혹한 억압과 수탈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었다. 다른 한편 농민들은 전국 각지 수많은 촌락으로 흩어져 있었으며 고립된 채 상호 연락이 어려웠다. 또 대부분 문맹으로서 의식상으로도 깨어있지 않았다. 이 같은 농민들을 조직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들을 변혁의 주체로 세울 수 있었던 비결은 다름 아닌 계급연대 즉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농민에 대한 집단적 지원을 통한 농촌에서의 '토지혁명'의 전개였다. 중국공산당은 1927년 4월 장개석의 쿠테타로 제1차 국공합작이 깨지자 '홍군'이라는 자체 무장부대를 조직하여 농촌으로 들어갔다. 군벌의 힘이 잘 미치지 못하는 농촌에서, 이들 홍군은 토착 지주들이 조직한 자경부대를 몰아내고 농민들에게 토지를 나누어 줌과 동시에 그들을 무장시켰다. 그리하여 토지를 획득한 농민들은 다시 홍군에 지원함으로써 공산당이 이끄는 무장 대오는 더욱 확대되게 된다. 이처럼 토지혁명을 중심으로 한 노농연대의 모델은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으며, 마침내는 유명한 '농촌에 의한 도시 포위' 전략이 실현되어 신민주주의 혁명을 완수하게 된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적 사례로부터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만약 중국의 변혁적 지식인과 활동가들이 처음부터 농촌에서 시작했더라면, 그리하여 그들이 개별적 차원에서 농민들과 결합했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광범위한 농민 속에 파묻혀졌을 뿐 그렇게 쉽게 그들을 조직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그들은 먼저 도시에서부터 시작해서 당시 선진적 계급인 도시 프롤레타리아를 우선 조직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다시 농민운동을 지원하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 즉 당시 중국 농민을 토지혁명의 진정한 주체로 불러일으켜 세우기 위한 '선도적 주체'는 다름 아닌 도시 프롤레타리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국사회에 있어서 볼 때, 비정규직문제를 풀기 위한 이 같은 선도적 주체를 우리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여기서 우리는 대기업 정규직노동자들에게 눈길을 돌리지 않을 수 없다. 한국의 대기업 정규직은 무엇보다도 단위 사업장 내에 밀집한 거대한 수적 규모와 산업에 있어 전략적 위치 때문에, 자본과 정권에 대해 가장 큰 타격을 주고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한국 내 유일무이한 집단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 때문에 그들은 노동운동 및 전체 변혁운동에서 볼 때 일종의 '전략역량' 이라 불릴 수 있으며, 군사무기로 치자면 핵무기와 같은 존재이다. 이 같은 전략역량을 누가 장악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계급투쟁의 양상은 크게 달라진다. 한국에서 이 같은 대기업 정규직의 역량을 무시하고서 다른 어떤 과제를 해결하기가 힘들며, 이는 비정규직문제를 푸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대기업 정규직은 얼핏 보면 현 재벌체제의 상대적 수혜자이고, 노동귀족화 하였기 때문에 결코 반재벌투쟁이나 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투쟁에 있어 선도적인 역량이 되지 못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현상에 불과하다. 한국 대기업 정규직이 비정규직문제에 관심을 갖고 그 투쟁에 동참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지금 한국사회는 신식국독자 후기 체제의 위기가 본격화될 시점에 접어들고 있다. 이는 제4차 산업혁명의 성과가 날로 가시화되고 그 속도가 빨라지고 있음에도 낡은 '재벌체제' 때문에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없는 한계 때문에 그러하다. 그리고 또한 그동안 한국 재벌체제 유지의 중요한 한 축을 이루었던 한미동맹이 미국 패권의 쇠락으로 그 기축이 흔들리고 있으며, 남북화해무드가 진척됨에 따라 재벌체제와의 모순이 가중되고 있다는 점 등 때문에서도 그러하다. 이로부터 한국 재벌의 마지막 생존을 위한 발악은 대규모 신 구조조정으로 표출될 수밖에 없으며, 이 때문에 대기업 정규직들은 아마도 자신의 미래일 수밖에 없는 비정규직문제에 대해 시간이 갈수록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대기업 정규직으로부터 시작할 경우 다음과 같은 이점이 있다. 우선 물리적 지원의 측면에서 볼 때, 대공장 정규직은 한국 재벌체제가 갖는 원-하청 간의 위계적 수탈체계를 거꾸로 활용하여 비정규직 지원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예컨대, 원청 대기업은 하청 중소기업에 대한 업무상 비밀들을 많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 같은 경영관련 정보들은 언뜻 사소한 것일지라도 하청 비정규직투쟁에 중요한 도움을 주는 경우가 적지 않다. 또 대부분 원청 재벌 대기업들은 하청의 노조설립과 활동에 직간접적으로 개입하면서 갖가지 탄압을 막후에서 지휘하는데, 이에 대해 원청 정규직은 하청 노동자들과의 긴밀한 연계 속에 이 같은 재벌의 막후 행위를 폭로하고 그 중지를 직접적으로 요청하면서 견제활동을 전개 할 수 있다. 한발 더 나아가 비정규직노조를 탄압하는 하청 사업주에게는 일감을 주지 말도록 압박하는 싸움도 전개할 수도 있다. 그밖에 비정규직투쟁의 가장 큰 곤란 중의 하나가 '재정문제'인데, 이들은 영세하기 때문에 항상 투쟁기금의 부족에 시달린다. 이 경우 수적으로 우세한 대공장 노동자들의 재정지원은 큰 도움이 된다. 이들이 다만 몇 천 원씩만 각출한다 해도 삽시간에 수백 수천만 원을 모금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정규직들은 또 필요할 경우 일반 노조원을 대상으로 '현장실천대'를 조직하여 집회와 시위 등 직접적인 물리력을 동원함으로써 재벌과 정권에 대해 보다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지원행동을 펼칠 수 있다.
이 같은 물리적 측면의 지원 외에, 이미 정규직 노동자들 중에 상당수 존재하는 선진 활동가들을 통해 비정규직에 대한 선전과 교육 같은 정신적 측면의 지원을 수행하는 것 역시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이는 비정규직투쟁이 단순히 정규직화 요구를 넘어서 '반재벌투쟁'이라는 본격적인 변혁적 운동으로 성장하는데 있어 관건적 요인이 될 수 있다. 때문에 비정규직투쟁에 결합하는 정규직의 선진 활동가들은 이 작업을 의식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비정규직 대중들에게 한국 비정규직문제의 본질이 어디에 있는지를 가르쳐 주고, 문제의 근원적 해결을 위해선 '반재벌투쟁'이 불가피하다는 점, 그리고 이를 위한 새로운 정치세력화 운동과 그 방법 등에 관해 교육을 하여야 한다. (물론 이 같은 교육을 위해선 ‘교육자’ 즉 정규직 활동가들이 먼저 학습 받아야 한다.)
위의 양측면의 지원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비정규직투쟁은 비정규직이라는 신분을 인정한 전제위에서 수행하는 고용·임금 조건의 개선, 노조건설과 그에 대한 탄압분쇄 등과 관련된 비정규직투쟁과, 반재벌을 목표로 하는 비정규직투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정규직 선진부대는 여기서 '낮은 수준'의 비정규직 투쟁에 대한 지원 단계에서부터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첫째, 비정규직노조를 안정시키고, 그 대오를 확대할 수 있는 기초 작업을 진행할 수 있다. 둘째, 대오가 안정화한 기초위에서, 이들을 의식적으로 고양시켜 반재벌 주체로 양성하는 교육을 비로소 진행할 수 있다. 이 양자는 밀접히 결합되어 있다. 비정규직 조직률이 채 3%를 넘지 못하는 그간 통계가 보여주는 것처럼, 비정규직 조직화가 어려운 것은 그 투쟁주체들이 아직 사업장 내에 채 뿌리 내리기도 전에 탄압에 의해 속속 무너지는 취약한 '초기적 상황'과 관련이 있다. 이 때문에 이 단계에서부터 물리적 지원을 중심으로 한 대기업 정규직의 조직적이고 집단적인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 그럴 때만이 ‘정신적 측면’의 지원을 통해 반재벌 의식을 고양할 수 있는 기회 또한 주어진다. 양자는 모름지기 초기부터 긴밀히 결합되어야 한다.
정규직의 이 같은 비정규직에 대한 지원은 정규직운동 자신의 문제를 푸는데 있어서도 유리하다. 지금처럼 재벌 대자본의 정규직에 대한 대규모 정면공격이 시작되기 전 상황에서, 현장정파를 비롯한 선진 활동가들을 단련시킬 수 있으며, 대공장노조가 자신들의 문제에만 골몰하고 '노동귀족화‘ 한다는 사회적 비난 역시 벗어날 수 있다. 이는 이후 사측의 본격적 구조조정이 시작될 무렵 이에 맞서기 위해 꼭 필요한 사전 정지작업이다. 그 같은 대규모 구조조정이 정작 현실화 될 때, 대공장 정규직들은 지금과는 달라진 우호적인 여론 속에서 자신의 최대 무기인 '총파업' 과 같은 강력한 수단을 마음껏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록 선진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비정규직투쟁에 대한 지원일지라도, 대공장 일반 조합원들에 대해 사전교육의 효과도 거둘 수 있다. 표면상의 사내 평온에 젖어 전투준비를 게을리 하는 안일 한 자세에서 벗어나, 이들에게 다가오는 투쟁을 위한 심리적 무장을 시키는 게 가능하다. 비정규직문제는 곧 자신의 문제라는 점, 현 한국 재벌체제에 대한 근본적 비판, 그 유일한 해결책은 소수 재벌총수에 의해 점유된 거대한 생산수단을 전 민중적 소유와 통제로 바꾸는 것이라는 점 등을 대자보와 소식지, 또는 노조 정규교육의 기회를 통해 조합원 대중들에게 알릴 수 있다. 더 나아가 조합원 대중들에게 비정규직투쟁의 지원을 위한 '현장실천대' 활동에 적극 참여할 것과, 재정지원을 위한 모금활동에의 동참 등 구체적 행동을 호소할 수 있다. 평소 이 같은 비정규직과의 연대 경험의 축적 없이 막상 자본이 구조조정이란 칼을 빼들었을 때 그 때 가서야 사상과 조직 준비를 하려고 하면 때는 이미 늦는다.
이하에서 현대자동차 사례를 통해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연대 가능성의 진일보한 확인, 그리고 현대차 비정규직운동이 본격 궤도에 오르기까지의 초기 정착과정에서 정규직이 어떠한 역할을 수행하였는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6. 두 번째 사례--현대자동차 비정규직투쟁
2002년과 2003년은 현대차 비정규직운동이 태동하는 시기이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의 현실은 한마디로 무법천지였으며 하도급업체 사장의 천국이었다. 연월차, 상여금, 잔업, 특근 시 통상시급 적용 문제 등 하나도 지켜지는 것이 없었으며, 사내하청 노동자들 역시 자신의 월급 명세서를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기본적으로 파견근로였기 때문에 업체사장은 업체 전체의 라인의 공수와 돌아간 시간을 곱해서 그 총액을 현대차로부터 받아오고, 하청노동자들에게는 자기가 알아서 나눠주는 방식이었다. 이처럼 불법 부당대우 문제는 하청노동자들의 끊임없는 이직을 불러와서 비정규직노조 창립 당시에는 근무기간이 1년이 넘은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정규직 조합원들 역시 잠시 스쳐지나가는 정도로 그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현대차 비정규직들의 상황이 오늘날의 반월·시화, 대구성서공단 등 전국 주요공단의 비정규직들 상황과 별반 차이가 없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불법 부당대우와 그에 따른 상상 이외의 저임금이 폭로되면서 정규직노동자들, 특히 활동가들이 이들에 대해 애정과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2003년 3월19일 아산공장 사내하청 노동자 한 명이 병원에서 업체 사장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들에게 습격을 받아 아킬레스건을 잘리게 된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사건은 정규직 활동가들이 사내 비정규직문제에 적극 참여하게 되는 기폭제가 되었다. 이 사건의 여파로 5월2일 '현대자동차비정규직투쟁위원회'가 만들어지고, 7월.8일 마침내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노동조합 창립총회가 5공장대의원회 사무실에서 열리게 되었다. 설립당시 발기조합원은 128명 정도이었으며, 위원장으로는 '비정규직인권선언'을 발표한 안기호씨가 선출되었다. 하지만 이는 앞으로 가야할 긴 여정의 첫 출발에 불과하였다. 대략 1만여 명에 이르는 전체 비정규직 수에 비하면 가입 조합원수가 매우 미미하였으며, 비정규직 대중들은 여전히 회사의 눈치를 보면서 감히 가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때문에 비정규직노조가 점차 가중되는 회사 측의 탄압에 맞서 제대로 정착하기 위해서는, 정규직들의 계속적인 보호와 지원, 그리고 적절한 계기를 포착한 투쟁을 통해 비정규직 대중들에게 자신감을 심어줄 필요성이 있었다. 해가 바뀌면서 그 계기가 찾아오게 된다.
2004.9.22. 금속연맹과 현대차 비정규직노조 등이 공동으로 노동부에 제기한 불법파견 집단진정 (일명 5.27' 집단진정)에서 노동부는 이들의 고발 내용을 모두 인정해 불법파견 판정을 내린다. 이 사건을 계기로 현대차 불법파견 철폐투쟁이 본격화되는데, 이후 그 투쟁은 '장엄하고 완강' 하게 진행되었다. 2005년 1월부터 5공장 노동자들로부터 시작된 비정규직노조의 투쟁은, 1월19일 5공장 탈의실 점거농성투쟁으로 결사항전의 대오를 구축한 후, 이후 235일간이라는 장기간의 농성투쟁을 벌이게 된다. 현자노조 역시 1월24일 정기대의원대회를 통해 '불법파견 원하청 연대회의'를 구성함으로써 정규직 노조의 비정규직 지원을 위한 형식 틀이 갖추어지게 된다.
현대자동차 사측이 불법파견 특별교섭을 거부하고 있는 가운데서 상기한 '원하청 연대회의'는 5월31일 8차 회의에서 비정규직 조직화 방침을 결의한다. 6월17일까지 사업부 공동투쟁단을 구성하여 6월 중에 집단적인 가입 방식에 의한 비정규직노조 지회로 조직화한다는 결의가 채택되었다. 그에 앞서 노조는 그 전해인 2004년6월 임시대의원대회에서 "정규직 노동조합이 비정규직노조 조직력 강화 및 확대를 위한 조합원 가입 운동을 전개한다"고 결의한 바 있다. 또 그 구체적인 실천방안으로, "선거구별 대소위원이 주축으로 비정규직을 모아내고, 비정규직 노동조합 간부들이 설명회를 개최하며, 그 과정에서 원하청 노동조합이 비정규직 집단가입을 유도한다"고 결의하였었다. 이제 본격적인 실행에 들어간 것이다. 이리하여, 6월9일 1공장 의장1부에서 정규직 대의원회 주도로 처음으로 비정규직노조 집단 가입을 받았다. 의장1부부터 시작된 집단가입은 21일 의장3부, 22일 의장2부로 이어졌다. 의장1부 총 396명의 비정규직 중 244명(가입률 62%)이 가입했으며, 22일에는 도장1부에서도 30여명의 조합원이 가입했다. 이밖에도 1,2,3공장 도장, 차체 등 비 의장 부분, 4공장, 5공장, 변속기, 시트사업부 등 곳곳에서 집단가입을 조직해 7월7일 현대 울산공장에서 총 2002명으로 비정규직노조 조합원이 늘어나게 되었다. 아산지회 300명, 전주지회 600명까지 포함하면 3000명에 육박하는 조직력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결국 지난 2년간의 모진 탄압을 뚫고 버텨온 비정규직노조는 드디어 튼튼한 대중적인 토대를 갖추게 되었으며, 향후 불법파견 철폐투쟁의 태풍의 눈으로 대두되게 되었다. 조합원 집단가입으로 투쟁의 진지를 확보한 비정규직노조는 새롭게 가입한 조합원까지 포함한 대의원선거를 치룬 후, 7월20일 파업찬반투표를 실시해 투표자 대비 92%(재적대비 61%)의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하면서 본격적인 투쟁국면으로 진입하였다.
이렇듯 뜨겁게 타올랐던 2005년 비정규직투쟁은 비록 이상욱 노조집행부의 회사에 대한 타협적인 태도로 소기의 결실을 보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이 때 남겨진 불씨는 결코 완전히 꺼진 것은 아니었다. 이후 2010년 대법원의 불법파견 확정판결을 계기로 다시 한 번 타올라 마침내는 2014년 사측으로부터 단계적 정규직화라는 약속을 받아내게 된다.
이상의 사례에서도 볼 수 있듯, 현대차 비정규직노조가 독자적으로 설 수 있기까지에는 정규직노동자 특히 대의원, 현장위원(소위원) 등을 비롯한 선진 활동가들의 역할이 대단히 관건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당시 어용적인 이상욱 정규직노조 집행부의 철저한 외면과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비정규직투쟁을 함께하였으며, 이들의 적극적 동참이 있었기에 노조를 그 정도나마 견인할 수 있었다. 정규직 대의원과 현장위원들은 사업장별로 비정규직의 집단적 노조가입이 가능하도록 사측과 관리자들의 방해로부터 현장을 지켜주었다. 이 밖에 5공장 농성장을 함께 사수해준 5공장의 대·소위원들, 2월부터 5공장 농성장에 합류해 끝까지 함께했던 윤성근 전위원장, 현장투 등 제 정파조직 동지들, 각 사업부 소위원 동지들, 당시 소위원으로 비정규직 잔업거부 시 라인정지로 해고당한 3공장 강병태 동지(이 동지는 이후 비정규직 해고동지들과 함께 원하청 해복투를 구성한다) 등 이들의 지원투쟁은 2005년 현대차 비정규직투쟁이 불꽃처럼 피어오를 수 있게 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지금까지 현대차 사내하청과 관련한 비정규직투쟁만을 중심으로 서술하였지만, 만약 정규직 활동가들의 의식상 전환만 이루어진다면 그 밖의 사외 하청계열사의 지원투쟁이나 다른 업종에 대한 지원투쟁으로의 확대 발전도 얼마든지 가능하리라고 본다.
소결. 우리는 앞에서 비정규직문제를 풀기 위해 어디에서 시작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 경우 비정규직으로부터 시작할 경우 이들의 영세성과 고립분산성 그리고 이에 수반되는 낮은 계급의식이라는 장애 때문에 문제 해결이 오히려 더디어 질 수 있음을 지적하였다. 비정규직노조가 일정 정도 '자립'할 수 있을 때까지의 초기 과정이 관건적이며, 이 때 대공장 정규직의 지원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여 진다.
첫댓글 현장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한 발제입니다. 전쟁이라는 주제에 가장 부합하는 주제이기도 하고요. 앞으로 우리는 새로운 계급투쟁으로 정규직과 비정규직 문제를 한국의 제벌구조를 해체하면서 풀어야겠지요. 재벌형성은 근현대사만 잠시 살펴보더라도 정치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다 죽어가기전에 이 노동자문제를 해결해야합니다. 아 아!
저는 토요일 비정규직노동으로 참여가 불투명 합니다만 발제물로 공부 하겠습니다. 지체할 시간이 없습니다. 모두 뭉쳐야 할 때인것 같군요. 더위에 건강 조심 하십시오.
조만간 뵙겠지요?
무더위도 꿋꿋이 잘 넘기시고 곧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