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공적(公的) 신앙고백 또는 세례 문답을 거쳐 강변교회의 성찬 회원이 된, 교우 가정의 2세 네 사람과 새로 교회에 가입한 한 가정을 격려하기 위해 2003년 11월 하순에 강변교회당에서 열린 환영회에서 낭독한 글입니다.
교회 안에서 쉼 없이 자라 온 후배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야흐로 성인의 문턱에 접어드는 것을 지켜보면서 '김홍전 목사님의 생애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을 한 가지만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지난해 성탄절에 우리 교회는 김홍전 목사님께서 지으신 오라토리오 「루디아」(참고 악보)를 연습하여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루디아」를 보면 작사 작곡 연대가 표시된 곳이 세 군데 나오는데, 한 곳은 1943년으로 되어 있고 나머지 두 곳은 그 이듬해인 1944년으로 되어 있습니다.1) 김 목사님은 1914년에 태어나셨으니까 만 서른 살 어간에 「루디아」를 처음 작곡하신 셈이 됩니다. 그러니까 「루디아」는 목사님께서 목회를 하실 때 작곡하신 중년기 이후의 작품이 아니고, 그분의 청년기의 작품입니다. 그러므로 이 오라토리오 「루디아」는 서른 살 어간의 한 평신도 청년이 구약 성경 룻기를, 또한 성경 전체를 얼마나 깊이 있고 생생하게 이해하고 있었는가를 보여 줍니다. 청년 김홍전이 「루디아」와 함께 「복 있는 자」, 「야웨 로이」 같은 아름답고 장엄한 시편 찬송을 작곡한 1943~44년은 해방 1~2년 전으로, 일본 제국의 억압과 수탈이 가장 가혹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일본이 일으킨 태평양전쟁(1941~45)이 한창이던 때였기 때문입니다. 한 나라가 전쟁을 일으키면 자국민도 살기가 힘들어지기 마련이니 하물며 그 나라 식민지 백성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겠는가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습니다. 일제의 무자비한 공출로 우리 동포들이 대부분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을 수 없던 시기였습니다. 국사 책을 펴 보니, 우리나라가 일본에 강제로 빼앗긴 곡식이 1943년에는 총 생산량의 55.7%였고, 44년에는 63.2%나 되었다고 합니다.2) 그러니까 그 시기에는 우리 농민이 추수한 곡식 열 가마니 중에서 대여섯 가마니 이상 되는 곡식을 고스란히 일본에 빼앗긴 셈입니다.3)
이러한 식민지 시절에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가슴에 가득했던 것은 왜인들에게 나라를 빼앗겼다는 비분강개와 실의였습니다. 당연히 그 마음속에는 강렬한 민족주의가 불타올랐습니다. 이상화 시인이 <개벽>지에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를 발표한 때는 국권을 빼앗긴 지 16년 남짓 되던 해인 1926년이었는데, 식민 체제는 그 뒤도로 20년 가까이나 계속되었으니 그 긴 세월 동안 생각이 있는 우리나라 젊은이들의 마음이 얼마나 비통했겠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이 일본 제국주의의 혹독한 압제하에서 이 나라 젊은이들의 가슴에 망국의 비애와 ‘빼앗긴 들’로 인한 울분과 좌절이 넘쳐흐를 때, 청년 김홍전의 가슴을 가득 채운 것은 (추측건대) ‘빼앗긴 들’이 아니라 ‘빼앗긴 들’의 슬픔을 딛고 넘어선 ‘보아스의 들’4)(참고 악보)이었습니다. 「루디아」의 작곡 연대를 통해 우리는 그렇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청년 김홍전은 신사 참배(神社參拜)와 일본식 성명 강요[創氏改名]를 거부하여 일본 순사들의 눈을 피해 칩거해야 했던 처지였다 하므로 실제의 생활 형편이 이삭이라도 주워 배를 채울 수 있었던 룻보다도 못했을 터인데, 그의 가슴속에는 비탄과 절망과 분노가 아니라 「보아스의 들」과 같은, 풍요로움과 평화와 안식이 가득한 찬송의 선율이 흐른 것입니다.5) 마치 어거스틴 선생이 찬란했던 로마 제국의 수도가 야만족의 발에 짓밟혀 불에 타 무너져 가는 와중에서 그 혼란과 파괴의 불길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도성(都城)>을 집필할 때 그의 마음을 가득 채웠던 것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견고한 하나님의 나라, 곧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히 11:10)이었던 사실과 마찬가지입니다. 이처럼 청년 김홍전은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완전히 빼앗긴 지 5년째 되던 해이자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던 바로 그 암울한 해에 태어나 30여 년의 성장기를 내내 나라 잃은 백성으로 지낼 수밖에 없었지만, 기이하게도 그의 정신은 그 시대의 지배적인 사조요 정서라 할 민족주의나 허무주의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국권을 빼앗긴 식민지 시절에 이 나라 젊은이들의 가슴에 가득했던 것이 민족주의였다면, 해방 이후 동족상잔과 분단을 거쳐 1960년대부터 80년대의 말에 이르기까지 30년 동안의 기나긴 군사 독재 정권 시절에 이 나라 젊은이들의 가슴을 뜨겁게 채웠던 것은 민주화 또는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지난 100년의 대부분을 채운, ‘민족’과 ‘민주’ 또는 ‘민족주의’와 ‘민주주의’에 대한 추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난 뒤인 1990년대와 오늘 2000년대에 여러분 또래 젊은이들의 가슴에 가득한 것은 제가 보기에 ‘사적(私的)인 욕망의 추구’입니다. 여러분의 세대에게는 지금이 과거와 같이 ‘민족’이니 ‘민주’니 ‘민중’이니 하는 ‘공동체적 가치의 시대’가 아니라 ‘개인적인 취향의 시대’입니다. 여러분의 세대가 행동을 결정하는 주요인은 ‘그것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길이냐, 이 사회에 가치가 있느냐’가 아니라 ‘재미있느냐, 내가 하고 싶으냐’ 하는 각자의 취향입니다. 이 시대는 다원주의(多元主義)라는 그럴듯한 미명하에 개개인의 자질구레하고 이기적인 욕망의 추구를 한껏 옹호하는 시대입니다. 여러분이 대학생이 되는 이 시대는 ‘만인이 마땅히 추구해야 할 진리와 가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든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내게 진리와 가치가 된다’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실상의 몰가치의 시대요, 탈진리의 시대요, 탈권위의 시대입니다. 그야말로 둑이 무너지듯이 모든 방면에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참고. 삿 17:6; 21:25) 행하는 것이 유일한 행동 지침이 되고, 그러한 일종의 소아적(小我的)인 자유방임주의가 대세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세대의 또 다른 지배적 성향은 노골적인 배금주의(拜金主義)라 할 것입니다. 이 세대는 이 나라 누천년의 역사상 전에 없던 경제적 풍요와 난숙한 시장 경제 속에서 성장하면서 돈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어려서부터 체득하여 익히 알고 있는 영악한 세대이며, 그런 만큼 어려서부터 물신주의(物神主義)의 악영향을 흠씬 받아 얼마 안 되는 돈을 위해 몸과 영혼을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 괴악한 ‘바알 숭배자’들이 주위에 즐비한 세대이기도 합니다. 물론 재물을 사랑하고 숭배하는 풍조가 역사 가운데 새로운 현상은 아니겠지만, 인류가 오랜 세월 보듬어 온 정신적인 가치들이 벌거벗은 돈의 위력 앞에 이처럼 속절없이 무릎을 꿇고 백기를 든 것은 전에 없던 일이라 할 것입니다. 과연 이 시대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딤후 3:1-2)라고 말씀하신 현상이 확연히 나타나는 시대입니다.
이제까지 저는 민족주의나 민주주의가 좋지 못한 것이라고 말하려 한 것도 아니고, 신자는 자기 시대의 현실과 동떨어져 현실 도피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하려 한 것도 아니며, 김홍전 목사님에게는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마음이 없었다고 말하려 한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가난하고 억압적인 시대이든 풍요롭고 자유로운 시대이든 어느 시대나 그 시대의 지배적인 분위기가 있고 시대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신자의 마음에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 담겨 있지 않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공기처럼 자신을 둘러싼 그 시대의 분위기로부터 그릇된 영향을 받아 생을 낭비하기가 참으로 쉽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삼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을 주의하라”(6절)고 하셨습니다. 주께서 친히 주의하라고 당부하신 만큼, 그 ‘누룩’은 매우 위험하고 파괴적인 것이었음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사상은 그 시대 유대 사회를 주도했던 양대 흐름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러한 시대사조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했던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먹구름처럼 그 시대를 뒤덮은 그릇된 메시아관을 온전히 탈피하지 못했던 베드로는 메시아의 고난을 이해하지 못하고 가로막았다가 모골이 송연해질 만큼 준열한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23-24절). 그러므로 “너희는 ‘이 세대’(this age 또는 this world)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2)는 말씀과 같이, 시대의 분위기가 질곡으로 무겁든 풍요 속에서 가볍든 그 분위기에 영향을 받아 생을 낭비하지 않고 영원한 진리를 올바르게 좇으려면, ‘사람의 일’을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합니다.
여기에서 다시 김홍전 목사님의 청년 시절을 생각해 봅니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은 1910년부터 ‘일본 천황의 사진에 절을 하며 신사 참배에 참여하고 일본 천황이 사는 궁성을 향해 절을 하라고 강제하기 시작했는데, 1938년 이후로는 그 압력이 한국의 전 교회에 미치게 되었습니다.6) 그 부끄러운 1938년에 일본 순사들이 조성한 살벌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목사와 장로와 선교사 193명이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로 모여 모든 교회가 신사 참배를 하기로 공식 결의했습니다.7) 그러나 그 당시 만 24살의 평신도였던 청년 김홍전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지한 독서를 통해 일제의 신사(神社)가 적그리스도적 성격을 가진 우상임을 분명히 깨닫고 끝까지 신절(信節)을 지키면서 신앙의 깊이를 더해 갔습니다. 젊은 평신도 한 사람이 많은 목사와 장로들보다 나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늘 ‘김홍전 목사님’, ‘김홍전 목사님’ 하여 평소에 그분을 목사님으로만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로 그분이 목회를 시작하신 것은 만 50세가 되시던 1964년, 성약교회가 출범한 이후부터였습니다. 그러니까 만 50세가 되시기 전에는 평신도로서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탐구하면서 장성에 장성을 거듭해 가셨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평신도였을 때나 목회자였을 때나 어떠한 환경이나 시대 상황에 처하든지 그 시대가 강요하는 ‘사람의 일’에 기울어지지 않고 언제나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마음을 가득 채운 것입니다.8) 그러므로 김홍전 목사님이 목회자로 부름 받기 전 평신도로 지낸 50년의 생애는 같은 평신도인 우리에게 ‘너도 가서 그와 같은 정신과 태도로 살라’고 말없이 교훈하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으라고 하고(롬 8:29), 믿음의 선진들을 본받으라고 하며(히 6:12),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 준 하나님의 종들의 경건한 생애를 주목하여 보고 그 믿음을 본받으라고 가르칩니다(히 13:7). 아무쪼록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살고(빌 2:5), 아울러 김홍전 목사님이 청년이요 평신도였을 때부터 견지했던 그 정신을 본받아 살아가면 참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하나님의 말씀이 가득하여 그 거룩하고 생생한 깨달음으로 각자의 시대를 이기고 우뚝 서서 우리 교회가 성삼위 하나님의 이름을 환히 빛낼 수 있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 추신 1: 첫 번째 당부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선물로 주신 양대(兩代) 감독 목사님의 귀한 강설들이 책으로 출판된 것만 이제 66권이 되었습니다. 한 달에 한 권씩 정독한다 해도 꼬박 5년 넘게 읽어야 하는 적지 않은 분량입니다.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얻기 힘든 좋은 시기라 할 대학 4년 동안 성경 말씀과 함께 그 강설집들을 부지런히 탐독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아까운 기회를 놓치는 일이 아닐까요? 부쩍 장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는 일이 아닐까요? 그러니 대학생으로 지내는 동안 매 주일 배운 강설을 부지런히 복습하는 한편으로 적어도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신구약 성경을 통독하고 한 달에 한 권 이상씩 강설집을 독파하면 참 좋겠습니다. 그래야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말에 걸맞은 실력 있는 후배가 되지 않을까요?
※ 추신 2: 두 번째 당부
『찬송』에 나오는 곡들 가운데 작곡 연도가 가장 이른 것은 「경배송 XXXIII」과 「헌상송 III」으로 1933년에 지어진 곡들인데 그때 목사님의 나이는 만 19살이었으니 바로 여러분의 나이와 같거나 비슷할 것입니다. 그 곡들에 표현된 정서와 자신의 정서를 비교해 보고 정진(精進)의 재료로 삼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 학기가 되기 전에 1940년대 전반기의 그 암담했던 시대 상황을 생각하면서 그 시기에 지어진 『찬송』의 가사들을 묵상해 보면 어떨까요? 예를 들면, 「경배송 I」과 「경배송 II」는 목사님께서 만 28세 때인 1942년에 작곡하신 것인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습니다.9)
* 참고 악보 : 경배송 I * 참고 악보 : 성삼위송 I 「경배송 I」 (『찬송』 43-45쪽 )
오 여호와 주께 비나이다 거룩하신 주여 이 죄인이 왔으니 오 자비의 주님 귀 기울이소서 이 궁핍하고 가난한 저를 나의 주 하나님 오 내 아바 아버지여 그 보혈로 주의 은혜로 정결 정결하게 씻으옵소서 나의 주 하나님 아바 아버지여 들으소서 곤고한 죄인 주 앞에 나와 비나이다 주 하나님 앞에 기도하나이다
「경배송 II」 (『찬송』 46-52쪽) A. 주님 주님 주를 찬양하나이다 주의 거룩하신 사랑 영원한 사랑 주여 주여 우리의 하나님 거룩한 독생자 주시었네 오 주여 주여 주여 그 사랑 제 마음속에 가득하게 나타내 주옵소서
B. 하나님 앞에 절하나이다 우리의 주님 사랑이시니 영광의 주님 우리 하나님께 절하며 찬양하나이다 경배하나이다 주 하나님 앞에 경배하나이다 주 하나님 앞에 영원한 사랑 찬양하나이다 주님 앞에 경배하나이다 하나님 앞에 절하나이다 우리의 주님 사랑이시니 영광의 주님 우리 하나님께 절하며 찬양하나이다 하나님께 주님께 주님께 아멘
(「성약출판소식」 43호, 2004.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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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오르바가 나오미의 곁을 떠나간 뒤에 나오미가 룻에게 ‘너도 돌아가라’고 하니까 룻이 자신의 신앙과 결심을 밝히는 노래인 「어머니 같이 가리다」의 작사․작곡 연대가 1943년으로 나타나 있고(『찬송』 412~414쪽),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는 모두 내게 나오라”로 시작하는 친숙한 성경 구절(마 11:28-30)에 아름다운 선율을 입힌 「주께로 오라」의 작곡 연대와(418~421쪽) 나오미가 고국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노래 「아, 내 고향」의 연대가 1944년으로 되어 있습니다(428~430쪽). 물론 「루디아」는 처음 작곡된 이후로 『찬송』이 출간된 1982년까지 계속 보완되었다고 합니다. 이 오라토리오 속에 연도가 표기되지 않은 곡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혹시 그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가사와 곡조의 기본 골격은 1943~44년 이전에 이미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총 3부로 구성된 이 오라토리오에서 저작 연대가 명기된 세 곡이 모두 중간 부분(2부 후반과 3부 초반)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 중간 부분 이전에 나오는 서른 쪽(382~411쪽)의 뼈대는 1943~44년이나 그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고, 뒷부분에 해당되는 열일곱 쪽(441~457쪽)의 내용도 그 중간 부분의 내용과 별 다름없이 나오미의 귀향을 노래하는 것으로 보아 모두 비슷한 시기에 작곡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사이사이에 들어간 짧은 곡들 가운데 일부는 후대에 삽입된 것이라고 합니다.
2) 국사편찬위원회 1종도서연구개발위원회, <고등학교 국사(하)>, 교육부, 2001년, 141쪽의 표, ‘미곡 생산량과 강제 공출량’.
3) 1942년에 지어진 「경배송 I」의 가사, “오 여호와 주께 비나이다……이 궁핍하고 가난한 저를……정결하게 씻으옵소서……곤고한 죄인 주 앞에 나와 비나이다” 가운데 ‘궁핍’, ‘가난’, ‘곤고’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이 시인이 처했던 일제 강점기의 참혹함을 ‘간접적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4) 『찬송』 441~443쪽에 나오는 「보아스의 들」의 분위기는 매우 밝고 평화로우며 그윽합니다. 추수를 마친 만족과 넉넉함 속에서 고이 잠든 보아스에게 루디아가 다소곳이 나아가 청혼했던 그 아름다운 밤을 연상하게 합니다. 우리 교회에서 혼인 예식 후 신랑․신부가 퇴장할 때 멘델스존이나 바그너의 결혼 행진곡 대신에 이 「보아스의 들」을 연주하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작곡자 가족의 증언에 의하면, 이 곡은 해방 이전에 작곡된 곡이라고 합니다.
5) 김헌수 목사님도 10년 전에 같은 지적을 한 일이 있습니다. “1942-44년은 일제 말기로…(중략)…암울한 시기였다. 그러나 신사 참배를 하지 않아 생명의 위협을 받았던 저자가 이 시기에 지은 찬송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노래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예배 찬송에 관하여-김홍전 목사님의 저작과 『찬송』을 중심으로’, 「성약출판소식」 제10호, 1993.2.15. 이 글은 김홍전 목사님의 『찬송』을 이해하는 데 매우 요긴한 좋은 글입니다.)
6) 간하배(Harvie M. Conn), 『한국장로교신학사상』, 개혁주의신행협회, 1997년 개정판, 83-84쪽.
7) 김영재, 『한국교회사』, 개혁주의신행협회, 1998년, 212-214쪽.
8) 예를 들어, 우리 교회의 어린이들이 아주 잘 부르는 찬송 가운데 “우리는 예수님이 참말 좋아요 예수님 아니시면 살 수 없어요 예수님이 우리를 이뻐하시고 언제든지 우리와 함께 계시네” 하는 가사가 있는 「경배송 XXVIII」과 “언제나 저를 이뻐하시고 제가 찬송하면 들으시니 예수님 이름 불러 찬송합니다” 하는 가사가 있는 「경배송 XXIX」처럼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어린아이의 심정’을 노래한 찬송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은 1944년에 나온 것이고, “우리 주님 앞에 구주 예수 앞에 그 영광 찬양하며 나왔나이다” 하는 가사로 시작하는 「경배송 IV」와 「영광송 I」, 「송영 IV」는 동족상잔으로 온 나라가 포연(砲煙)에 휩싸였던 1952년에 나온 것입니다.
9) 「성삼위송 I」과 「경배송 I」은 김홍전 목사님이 만 37세가 되기 직전인 1951년 10월에 미국의 Central Conservatory of Chicago에서 명예 음악박사 학위를 받으실 때 제출한 교향곡 『Symphony in D minor』에 포함되어 있는 곡이기도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