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덕 성당, 신리 성지, 여사울 성지
1.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합덕 성당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2&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310&PSIZE=20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두 개의 첨탑은 신앙의 파수꾼인가?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리 275-2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합덕성당2길 22
전화번호 (041)363-1061 홈페이지 http://hdcatholic.or.kr
관련기관 합덕 유스호스텔
내포 지방은 예로부터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지였다. 합덕 본당은 바로 이 내포 평야에 복음을 밝힌 지 120여 년이 넘어 한국 교회의 산 증인이 된 유서 깊은 본당이다. 합덕 성당 인근에는 손자선 토마스(?-1866년) 성인의 생가이자 다블뤼(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주교의 주교관으로 사용되었던 초가집 주변에 조성된 신리 성지가 있고, 옛 동헌이 있었다고 전해지는 면천 사적지도 자리하고 있다. 합덕 삼거리에서 서야 고등학교 방면으로 조금 올라오다 보면 길 오른쪽 낮은 언덕 위에 마치 두 팔을 들어 환영하듯 두 개의 첨탑이 우뚝 서 있는 합덕 성당이 눈에 들어온다. 두 개의 첨탑으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상징하며 고딕 양식으로 1929년에 건립된 유서 깊은 성당이다.
합덕 성당의 전신은 1890년 충청남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양촌 성당으로, 퀴틀리에(Curlier, 南一良, 1863-1935년)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고, 1899년 현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성당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현재의 성당 건물은 1929년 제7대 주임인 페랭(Perrin, 白文弼, 1921-1950년 재임) 신부 때 준공된 것으로, 페랭 신부가 6.25 때 체포되어 순교한 슬픈 역사도 간직하고 있다.
페랭 신부 재임 때인 1926년 예산 본당, 1935년 서산 본당, 1938년 당진 본당이 각각 분리 신설되었고, 1961년 제8대 박노열 바오로 신부 때 신합덕 본당이 분리되면서 합덕 본당은 구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그 후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 본당으로 변경되었다.
성당 정면으로 난 계단에 올라 도톰한 언덕배기를 바라보면 빨간 벽돌과 두 개의 첨탑으로 세워진 성당이 그림같이 펼쳐진다. 계단 왼쪽으로는 성모동산이 조성되어 평화로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성당 정면에서 신자들을 반기는 예수성심상을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돌면 초가지붕 아래 설치된 본당 주보(主保)인 성가정상과 함께 너른 잔디광장이 펼쳐진다. 광장을 지나 성당 뒷마당으로 내려가면 야외제대와 또 하나의 잔디광장 그리고 성 황석두 루카(黃錫斗, 1813-1866년)와 6.25 순교자인 페랭 백문필 신부, 윤복수 라이문도 총회장, 송상원 요한 복사의 순교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다. 양들을 위해 끝까지 성당에 남은 백 신부는 1950년 8월 14일 고해성사 중에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피살되었고, 윤 회장과 송 복사 또한 백 신부의 곁을 지키기 위해 자진해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합덕 본당은 30년간 본당에 재임하다가 6.25 때 순교한 백문필 신부를 기념해 1957년 성당 옆에 ‘백 비리버 문필 신부 순교비’를 건립하였고,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순교비는 2005년 본당 설립 115주년과 순교 55주년을 맞아 그 옆에 나란히 세웠다. 그리고 순교비 옆에는 이 지역의 신자들을 하느님께 인도했던 백 신부를 포함한 네 명의 신부 묘소(유해는 2003년 대전가톨릭대학교 내 성직자 묘지로 이장하였다)와 백 신부와 함께 순교한 회장과 복사의 묘소를 조성하였다. 백 신부와 함께 순교한 두 평신도의 묘소에는 유해 없이 유물만 묻었다. 현재는 순교비와 묘소 모두를 성당과 구 사제관 사이 뒷마당, 야외제대 옆으로 옮겨 모셨다.
내포 교회 가운데서도 유서 깊은 공동체인 합덕 성당은 1998년 7월 28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성당 구내에 당진시와 함께 합덕 유스호스텔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2010년에는 본당 설립 120주년을 기념해 2월 21일 모태인 양촌 공소에 기념비를, 4월 12일 성당 내에 착한 목자 백문필 필립보 신부 흉상을, 12월 25일 성당 초입에 120주년 기념비를 건립해 제막식을 가졌다. 이어 2014년에는 성당 옆에 있는 구 사제관 복원공사를 마무리하고, 이듬해 성당 역사관으로 개관하였다. 또한 성당 입구를 정비하여 주차공간을 대폭 확장했다.
서해안에 인접한 합덕과 면천 지역은 주위에 많은 사적지와 명소들이 분포되어 있다. 홍성 · 해미 · 솔뫼 · 신리 성지 등이 근접해 있어 시간의 여유가 있으면 이들 중 하나를 연결해 함께 순례할 수도 있다. 또 덕산 도립공원과 온양 · 도고 · 덕산 온천 등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곳도 있고, 여름이면 만리포 · 몽산포 · 대천 등의 해수욕장에도 인파가 붐빈다.
합덕 유스호스텔은 인근 성지와 연계한 도보순례길 등을 통해 순교신심을 고양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근의 역사 유적과 문화 관광지를 탐방하는 가족 나들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오늘도 성당 마당 잔디 위에 앉아 소박한 웃음꽃을 피우는 신자들의 모습은 그 옛날 숨죽이며 믿음을 지켜 오던 당시의 조심스런 몸짓들을 역설적으로 상기시키면서 다시 한 번 순교자들의 피로 닦은 신앙의 터 앞에 고개를 숙이게 한다.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5년 12월 9일)]
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합덕 성당은 충청도 지역 교회의 중심인 내포 지방 한가운데 자리한 유서 깊은 성당으로 1890년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설립된 양촌 성당을 모태로 합니다. 1899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합덕 본당으로, 1961년 신합덕 본당을 분가하면서 구합덕 본당으로, 1997년 다시 본래의 이름인 합덕 본당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습니다. 두 개의 첨탑을 지닌 붉은 벽돌 건물인 합덕 성당은 사방 어디서든 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내포 지방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선조들의 순교정신을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또한 성당 구내에는 6.25 때 인민군에게 체포되어 순교한 페랭 백문필 신부와 그와 함께 잡혀가 순교한 윤복수 라이문도 총회장과 송상원 요한 복사의 순교비와 가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합덕 성당은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5호로 지정되었고, 2008년에는 성당 구내에 당진시와 함께 합덕 유스호스텔을 건립하여 젊은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신앙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습니다. 또한 합덕 유스호스텔은 인근 성지와 연계한 도보순례길 등을 통해 순교신심을 고양하는 거점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인근의 역사 유적과 문화 관광지를 탐방하는 가족 나들이에도 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2010년 12월 본당 설립 12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입구에 합덕 성당 기념비를 세웠고, 2015년 구 사제관 복원공사를 마무리하여 성당 역사관으로 개관했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10:00 교중미사, 순례자를 위한 미사는 미리 연락바랍니다.
평일미사 월 06:00 화 19:00 수 10:00 목 09:30 노인대학미사
금 10:00 토 17:00 주일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2.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신리 성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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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다블뤼 주교의 생생한 흔적이 남은 주교관을 바라보며
지번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신리 62-3
도로주소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 평야6로 135
전화번호 (041)363-1359 홈페이지 http://www.sinri.or.kr
충청남도 당진시 합덕읍에 위치한 신리 성지는 지금은 말끔하게 단장되었지만 불과 2000년대 초까지만 해도 구불구불한 길에 특별한 지형지물이 없어 택시 기사나 주민들에게 물어물어 찾아가야만 했다.
20-30평 정도 됨직한 자그마하고, 낡은 함석지붕으로 인해 조금은 초라해 보이는 공소 건물이 철조망에 둘러싸여 볼품없는 모습으로 서 있을 뿐이었다. 이곳이 바로 손자선 토마스(孫--, ?-1866년)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다블뤼 안(Daveluy, 安敦伊, 1818-1866년) 주교가 머물며 내포 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이었다. 마당에는 순교 복자 기념비와 성모상이 그 허전함을 달래주었었다.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이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왔다. 하지만 1866년의 병인박해 때 다블뤼 주교를 비롯한 여러 신부들이 체포되기 전에 피신한 이곳에는 거의 기적적으로 당시의 유물들이 보존되어 오고 있다. 원래 초가집이었던 생가가 해방 후 양철 지붕으로 개량되었고, 1964년부터는 강당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르렀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으로 조선 교구 제5대 교구장을 지낸 다블뤼 주교는 1845년 7월 하순 상해로 가서 한국 교회 최초의 방인 사제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와 함께 그 해 10월 12일 전라도 강경의 황산포(黃山浦)에 첫발을 내디뎠다.
그 후 그는 1866년 병인박해의 와중에 순교하기까지 21년 동안 조선의 선교사로 활약, 당시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가 되었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었다. 그는 이 중요하고도 어려운 일을 교구장으로부터 위촉받아 1857년부터 새 자료를 발굴해 프랑스어로 옮기고 목격 증인들을 찾아 순교자들에 대한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바오로(尹持忠, 1759-1791년)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가 될 수 있었다. 더욱이 1863년 그의 집에 불이 나 조선말과 한문으로 된 “치명일기”와 주석책 등 귀중한 자료들이 모두 타 버렸기 때문에 이 책은 한층 더 가치 있는 것이 되었다.
바로 신리의 주교관에서 수집하고 기록한 순교사 및 역사 자료 7권이 1862년 10월 홍콩의 리부아 신부를 통해 파리로 전해져 달레의 “한국 천주교회사” 두 권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연풍 출신의 성 황석두 루카와 함께 신리에서 “영세대의”(領洗大義), “성찰기략”(省察記略), “신명초행”(神命初行), “회죄직지”(悔罪直指),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 “천주성교예규”(天主聖敎禮規) 등과 같은 수많은 교회 서적들을 집필하고 출판했다. 이처럼 신리는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보고이자 최초의 근대적 출판 인쇄가 시작된 곳이다.
이 집에는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기 바로 전날인 1866년 3월 11일 고향의 부모님께 마지막으로 보낸 눈물겨운 최후의 편지가 기념으로 액자 속에 끼워져 있다. 이 편지는 만주의 베롤(Verolls, 方) 주교에게 보내 프랑스에 있는 부모에게 전달하게 한,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으로 올린 글(上書)이었다.
그는 1866년 베르뇌 주교에 이어 3월 11일 신리에서 1km 떨어진 거더리에서 붙잡혀 한양으로 압송되어 옥중에서 갖은 고문을 받고, 충청남도 보령의 수영(갈매못 해변)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참수되었다. 베르뇌 주교를 도와 9년 동안을 부주교로서 그리고 주교의 순교 후 조선 교구의 제5대 주교가 된 지 21일 만에 장엄하게 순교한 것이다.
그 후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복자위에 올랐고, 1984년 5월 6일에는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시성되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사적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손자선 성인 생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다.
2008년 12월 22일에는 ‘당진 신리 다블뤼 주교 유적지’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다. 2013년 4월 20일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에 대한 기공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가, 2014년 5월 6일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봉헌식을 가졌다. 지하 2층 지상 4층의 성 다블뤼 기념관은 다블뤼 성인의 유품과 교회서적 등을 전시하고 있고, 기념공원에는 신리 성지에서 잡혀간 다섯 성인을 기리는 야외 경당을 봉헌하였다.
2017년 3월 25일에는 성 다블뤼 기념관 지하 2층에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다. 원로 한국화가인 이종상 요셉 화백이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13점과 신리 성지 출신 순교성인 5위의 영정을 우리나라의 전통 채색 기법과 초상화 기법으로 제작해 봉헌하였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7년 6월 17일)]
신리와 갈매못 - 성인들의 체포와 순교지
여사울이 초기 교회의 못자리였다면, ‘신리’(당진군 합덕읍 新里) 일대는 박해 후기의 사적지였다. 내포 공동체는 거듭되는 박해로 수많은 순교자가 나왔지만 끈질기게 복음의 생명력을 이어가면서 언제나 새로운 지도자들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도 우리는 거더리(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출신의 성인 손자선(孫 토마스)을 기억하고 있다. 1866년에 공주 관아에서 자신의 살점을 물어뜯어 신앙을 증거한 분으로 너무나 유명하기 때문이다.
이 거더리와 붙어 있는 마을이 바로 신리이다. 현재의 행정 구역상으로는 두 마을이 구분되어 있지만 교회사의 기록에 나타나는 거더리와 신리는 결국 같은 지역으로, 성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체포되었던 박해 시대의 교우촌이었다.
다블뤼 주교는 1845년 10월, 한국에 입국한 이래 주로 내포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한국 순교사와 교회사 자료 수집에 열중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저 유명한 다블뤼 주교의 “비망기”(備忘記)가 이 곳 신리에서 작성될 수 있었다. 그러나 1863년 주교의 거처에 화재가 발생하여 오랫동안 수집해 놓았던 귀중한 자료들이 타 버리고 말았다. 다행한 것은 다블뤼 주교가 그 전에 이미 순교사와 교회사를 정리하여 프랑스로 보낸 점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났을 때, 다블뤼 주교는 신리(거더리)에 있는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머물고 있었다. 손 회장은 바로 손자선 성인의 숙부이다. 주교는 그 때 이웃에 있던 오매트르(Aumaitre, 吳) 신부와 위앵(Huin, 閔) 신부를 불러오게 하여 피신할 방도를 의논하고 헤어졌는데, 3월 11일 포졸들이 거더리로 몰려와 주교와 복사인 성 황석두(黃錫斗, 루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어 위앵 신부가 멀지 않은 소재(예산군 봉산명 금치리)에서 체포되었고, 오매트르 신부가 거더리에 들렀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다블뤼 주교 일행은 서울로 압송된 후 몇 차례의 신문에 이어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게 되었다. 이 때 제천 배론에서 체포된 성 장주기(張周基, 요셉) 회장이 그들 일행에 포함되었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새 처형 장소로 결정된 ‘갈매못’(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 수영)으로 이송되어 3월 30일에 순교하였다. 굳이 이곳까지 순교자들을 끌고 와서 처형한 이유는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 여사울의 이존창 생가 터와 신리의 주교 댁은 오랫동안 잊혀져 오게 되었다. 그러나 신리의 주교 댁만은 인근 교우들 때문에 성 손자선이 태어난 곳이며, 다블뤼 주교의 거처라고 알려져 왔다. 이에 합덕 본당의 페랭(Perrin, 白) 신부는 1927년에 교우들의 협조를 얻어 이를 매입한 뒤 순교 기념비를 건립하고 축성식을 갖게 되었다. 당시까지도 신리 성지는 초가집이었으나, 훗날 지금과 같이 함석지붕을 새로 이었다고 한다.
이처럼 여사울은 내포 교회가 시작된 곳이며 신리는 내포 교회가 박해를 극복해 나가던 교우촌이었고, 갈매못은 성인들의 순교 터였다. 이들은 한국 천주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는 역사의 끈으로 이어져 왔으며, 그 끈은 오늘의 교회를 지탱해 주고 있는 생명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체포되기 직전에 다블뤼 주교가 동료인 만주 교구장에게 쓴 1866년 3월 10일자 서한에서 순교자의 마지막 행로를 짐작할 수 있게 한다.
교구장 베르뇌 주교와 선교사들이 체포되었습니다. 피할 길이 없습니다. 내 차례도 올 것이니, 제가 싸움터에서 견디어 낼 수 있기를 하느님께 청합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
_______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신리 성지는 박해시대의 교우촌으로 손자선 토마스 성인의 생가이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인 성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가 머물며 내포지방의 선교활동을 지휘하던 주교관이자 교구청으로 사용된 초가집이 복원되어 있는 유서 깊은 사적지입니다. 이곳에서 다블뤼 주교는 초기 순교자들의 행적과 교회사를 정리하여 “비망기”(備忘記)를 작성해 파리로 보냄으로써 한국 교회사의 귀중한 사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각종 교회서적을 집필하고 출판함으로써 근대적 출판 인쇄를 시작하였습니다. 또한 다블뤼 주교는 동료 선교사와 함께 주교관 인근 거더리에서 체포되어 갖은 고문 끝에 보령 갈매못에서 성 금요일에 순교하였습니다.
이토록 유서 깊은 신리 성지는 2002년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그 중요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대전교구는 2003년 말 다블뤼 주교가 쓰던 옛 주교관을 교회사적 고증을 거쳐 본래의 초가집으로 복원하고, 2004년 성역화를 본격화하면서 기념성당의 첫 삽을 뜨고 부지매입과 진입로 확장, 편의시설 확충 등을 거쳐 2006년 5월 6일 2년 가까운 공사 끝에 완공한 성 다블뤼 안토니오 · 성 손자선 토마스 기념성당 및 사제관과 복원된 주교관에 대한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2008년 12월에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6호로 등록되었고, 2009년 기념성당 외벽에 순교자들의 부활을 주제로 대형 부조상을 설치하고 다음해 7월말 야외성당(다블뤼 광장) 공사를 마무리하였습니다. 2014년 5월 6일에는 다블뤼 주교 시성 30주년을 기념해 새로 건립한 성 다블뤼 기념관과 순교자 기념공원 봉헌식을 가졌고, 2017년 3월 기념관 지하 2층에 신리 교우촌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성직자와 순교자들의 행적을 그린 순교 기록화 등을 전시한 국내 유일의 순교미술관을 개관하였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11:00 미리 전화 주시면 미사 시간 조정이 가능합니다.
평일미사 월 07:00 화 11:00 수 11:00 목 11:00 금 11:00
토 11:00 성모신심미사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3. goodnews - 성지 - 대전교구, 여사울 성지
http://maria.catholic.or.kr/sa_ho/list/view.asp?menugubun=holyplace&ctxtOrgCode=71&ctxtGyoguCode=12&Orggubun=71&ctxtHigh=&ctxtLow=&curpage=1&ctxtOrder= name1 &ctxtOrderType=&ctxtOrgNum=2308&PSIZE=20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가 살던 곳
지번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22-4
도로주소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여사울길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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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李存昌, 1759-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신례원 본당의 공소를 거쳐 2008년 성지본당으로 지정되었으며, 주민의 상당수가 천주교 신자로 구성되어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복자 김진후 비오(金震厚, 1739-1814년), 성 김대건 안드레아(金大建, 1821-1846년)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 신부의 출생지인 솔뫼와 인근의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살았다.
농민 출신으로 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의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 프란치스코 하비에르(權日身, 1742-1792년)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신부로서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복자 윤유일 바오로(尹有一, 1760-1795년)와 지황 사바(池璜, 1767-1795년)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 하여 마침내 복자 주문모 야고보(周文謨, 1752-1801년)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혔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하였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크게 성장했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대건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토마스(崔良業, 1821-1861년)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어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고, 그 해 4월 복자 정약종 아우구스티노(丁若鍾, 1760-1801년)와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바위에서 42세를 일기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월 22일 ‘예산 여사울 이존창 생가터’라는 명칭으로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였다. 이존창의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다. [출처 :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4년 12월 20일)]
여사울 - 신앙의 못자리(이존창의 생가)
천안에서 예산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곳에서 우회전하여 서해안의 합덕 쪽으로 향하다가 십 리쯤 되는 곳 오른편에서 여사울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곳에는 현재 이존창 생가 터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생가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두 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합덕 성당이 나오며, 성당을 조금 지나 왼편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신리 교우촌이 나온다. 이처럼 이 지역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유명한 사적지들을 자주 만날 수 있으니, 바로 이곳이 내포(內浦)라 불리던 충청도 교회의 요람지였다.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이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1776년에 양근 지역의 유명한 남인 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중인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다음과 같이 여사울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자기 스승(권일신)에게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척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때부터 내포 지방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312면).
고향으로 돌아간 이존창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결과는 곧 내포 공동체의 설립으로, 차령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어 나갔다. 또 이존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에 끼여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사울 이존창의 집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집회소이자 숙소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존창은 자주 시련과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연이어 고통을 받게 된 그는 배교와 회두를 거듭하였다. 특히 처음 박해 때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교회 기록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내포 교우들에게 가장 슬프고도 가장 창피스런 배교였다.”라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낱같은 흉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9월호(내용 일부 수정)]
_____________ 모바일용 요약 설명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여사울 성지는 조선시대에 충청도 서북 지역을 지칭하는 내포 지역의 사도인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의 생가 터가 있는 곳입니다. 상당한 경제력을 지닌 양인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이존창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한 후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선교에 매진할 뿐만 아니라, 가성직제도의 어긋남을 깨달은 뒤 주문모 신부를 영입하는 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1791년 신해박해 때 체포되어 혹독한 고문 끝에 배교를 하기도 했지만 그 뒤 홍산으로 이사한 후 지난 날의 잘못을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고 전교에 힘썼습니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그 어느 곳보다 교세가 커졌고 또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했습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다시 체포된 이존창은 공주 황새바위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습니다. 이렇듯 여사울은 초기 내포 천주교회의 출발지이자 중심지로서 대전교구의 뿌리가 된 곳입니다.
내포 지역과 여사울 성지의 중요성을 인식한 대전교구는 교구의 뿌리인 여사울 성지를 개발하기 위해 2002년부터 신례원 성당을 중심으로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여 주변 부지를 매입하고 진입도로를 넓히는 한편 십자가의 길과 강당을 추가로 조성하였습니다. 2008년 1월 성지본당으로 지정하고, 그 해 12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등록되면서부터 성역화를 본격 추진하여 생가 터 앞 강당 자리에 이존창 루도비코 곤자가 순교자 기념성당을 신축하고, 기존의 공소 건물 뒤에는 사제관과 수녀원을 건립하였습니다. 스페인풍의 기와를 얹은 순교자 기념성당은 2010년 10월 16일 봉헌식을 가졌습니다.
미사시간 안내
주일미사 일 11:00
평일미사 화 20:00 10월-3월에는 19:30 수 11:00 목 11:00
금 11:00 토 11:00
* 미사시간이 변동될 수 있으니 성지나 관련기관으로 전화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4. 천주교 대전교구 - 60주년 행사자료
http://www.djcatholic.or.kr/home/pds/60th_notice.php?enter=v&idx=12893&page=1&s=&k=
<위 게시된 내용 중 주요 부분 소개>
2-1. 3차 도보성지순례 합덕,신리,여사울성지
합덕 성당
합덕 성당은 1890년 설립되었다. 처음에는 양촌 성당으로 불리었으나 현 위치로 옮겨 오면서 합덕 성당으로 개칭되었다. 1961년 합덕읍 운산리에 신합덕 성당이 생기게 되어 구합덕 성당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나 1997년 다시 합덕 성당으로 본이름을 되찾았다.
이 성당은 엄밀한 의미에서 성지는 아니지만 신앙의 유산을 찾기에 충분한 곳이다. 현 성당은 1929년에 완공되었고, 뒤뜰에는 성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신학생의 스승이었던 이 매스트르 신부의 묘와 그 외 3분의 성직자 묘가 있었으며 제 7대 페랭신부가 1950년에 납치 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합덕 성당은 성소의 못자리로도 유명하다. 사제 30명, 수녀 54명, 수사 5명(수사, 수녀는 1990년 통계)을 배출하였다.1998년 7월 16일 충청남도는 이 성당을 충남 지방 문화재로 지정하였다.
(합덕성당. 사무실:031-363-1061.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275)
오시는 길(7page 참조)
신리 성지
신리성지는 조선천주교회의 요람이다.
충청도 내포지방의 중심부에 자리한 신리는 한국천주교회 초기부터 끊임없이 예비자, 신자, 순교자가 배출되었다.
성지 내 초가집은 손자선(손토마, 1866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 성인의 생가이다. 동시에 조선교구 제5대 교구장 다블뤼 안토니오 주교(안주교, 1866 오천 갈매못에서 순교)의 주교관이자 조선 교구청이었다. 안주교는 이곳에서 끊임없이 찾아드는 교우들에게 성사를 베풀고 신앙 진리를 가르치는 한편, 각지에서 활동하는 선교사제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뿐만 아리나 초창기의 한글 교리서 저술과 간행, 조선교회의 상황과 순교사적들을 수집 정리하여 파리외방전교회로 보내는 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이 자료들이 훗날 한국천주교회사와 순교사의 토대가 된 이른바 <다블뤼 비망기>이다.
본디 “천주강생 1815년”에 지어진 생가는 박해시대 이래로 여러 차례 소유주가 바뀌었고 그 구조 또한 개조를 거듭해 왔다. 1964년부터는 강당의 형태로 개축되어 공소로 사용되었으나 본당 중심의 사목이 강화되면서 방치되기에 이른다.
이후 성지개발이 본격화 되고 한국교회사연구소로부터 생가의 옛 사진이 발견됨에 따라 원형 복원을 위한 본격적인 조사가 전문가들에 의해 진행된다. 2004년 마침내 손 성인의 생가이자 안주교께서 사시던 주교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복원된 생가(주교관)의 기둥과 뼈대는 옛날 그대로이다. 대들보, 서까래, 주춧돌, 문지방 디딤돌, 집 지은 연도를 적은 상량문 등 상당 부분의 실물들이 그대로 사용되어 성인들의 숨결과 손 때가 그대로 묻어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신리성지는 순교자들이 태어난 집과 마을, 거닐던 길 그리고 경작하던 농토도 그 지명들과 함께 그대로 유지되어 순교자들의 자취를 생생히 느끼게 한다. 특히 손자선 성인의 생가와 함께 안주교와 오신부, 민신부 그리고 황석두 루카 등 성인 네 분이 붙잡힌 ‘거더리’의 집(신리 99번지)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더해 준다.
신리성지는 이처럼 순교자들의 고향인 동시에 순교자들의 안식처이기도 하다.
손자선 성인의 순교 이후 그 시신이 신리의 선산에 묻혔다. 그리고 이름이 알려져 있는 33분의 순교자 외에도 성지 인근에는 ‘32기의 목이 없는 무명 순교자 묘’와 ‘14기의 손씨 가족 무명 순교자묘’, 그리고 해미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지는 묘 3기가 있다. 이 묘들은 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연차적으로 발굴되어 대전리 공동묘지에 초라하게 보존되어 있다.
(순교 성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