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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경제용어
전생서공인(典牲署貢人)
정의
제물로 쓸 가축을 기르는 전생서 소속 공인.
개설
전생서(典牲暑)는 고려시대의 장생서(掌牲署)를 계승하여 1392년(태조 1년)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비할 당시에 전구서(典廐署)로 개편되었다가, 1460년(세조 6)에 희생을 전담하는 특성을 감안하여 전생서로 명칭이 바뀌었다. 『경국대전』이 반포될 당시 전생서는 종6품아문이었으나, 1797년(정조 21)에 판관(判官)을 새로 두어 종5품아문으로 승격되었다. 주로 국가와 왕실 제향에 쓸 희생을 기르는 일을 관장하였다. 대동법을 시행한 이후로는 희생 제물을 시중에서 구입해 바치는 공물주인을 관서 아래에 두었는데, 전생서공인(典牲暑貢人)은 이들을 가리켰다.
담당 직무
전생서는 조선초에 전구서로 운영되면서부터 제사에 쓸 염소[羔]·양(羊)·돼지·기러기[雁]·오리[鴨]·닭[鷄] 등을 기르는 업무를 맡아 보았다. 이후 경비로 쓸 여러 가축을 기르는 사축서와 종종 통합되었다가 폐지되었다. 희생 제물은 국가의 정통성과 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각종 제향에 쓰이는 물품이었기 때문에 가축을 기르고 번식시키는 것에는 막대한 책임이 부여되었다. 따라서 관원이 가축을 잘 번식시키지 못할 경우, 직책을 폐하고 전생서 창고의 노비들에게 일임시키는가 하면[『태종실록』 11년 6월 21일], 민간에서 기르는 가축을 빼앗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1년 6월 7일]. 또 가축을 먹이는 쌀과 콩·이엉 등이 너무 많이 소비되자 1416년(태종 16)에는 『농잠집요(農蠶輯要)』에 따라 먹이 주는 양을 제한하고, 중국산 돼지인 당저(唐猪)를 제외하고는 외방의 각 도에 보내 기르도록 하였다[『태종실록』 16년 5월 7일]. 이 밖에도 각 도 군현에서 돼지 따위를 공물로 거두어들이고, 사료로 쓸 곡초(穀草)와 사료 만드는 데 쓸 소목(燒木), 즉 땔나무도 역시 군현에 공물로 분정(分定)하여 거두어들였다.
그런데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군현에서 공물로 거두던 가축과 소목·곡초를 전생서에 속한 공인들에게 공물가를 지급하여 시중에서 구입해 들이는 방식으로 바뀌었다.『만기요람(萬機要覽)』에 따르면, 1807년(순조 7) 당시 선혜청에서 전생서에 지급한 원공물가는 대략 5,861석 3두에 달하였으며, 전생서공인은 이를 가지고 생 돼지·양·염소·황소와 같은 희생 외에도 이들에게 먹일 꼴과 곡초, 그리고 제물로 꾸미기 위한 장목(裝木)을 전생서에 바쳤다.
변천
18세기 들어 전생서공인 외에도 왕실 제향에 쓰이는 희생을 전문적으로 조달하는 공계인층이 등장하였다. 예컨대, 천아(天鵝), 즉 고니의 경우 천아주인(天鵝主人)이 별도로 창설되어 선혜청으로부터 직접 공물가를 받아 시중에서 천아를 구입하여 제향처에 공급하였다. 이는 조선후기 왕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제사를 통하여 확인하려는 의례정치가 강화되면서 희생을 제때에 안정적으로 공급받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다.
전생서공인과 천아주인 등 각종 공계인층은 갑오개혁기에 호조를 중심으로 재정기구가 일원화되고, 공납제가 폐지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0.
노혜경, 「18세기 典牲暑의 인적구성과 기능―黃胤錫의 『頤齋亂藁』를 중심으로―」, 『古文書硏究』 33, 2008.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태종실록』 11년 6월 21일
『태종실록』 11년 6월 7일
『태종실록』 16년 5월 7일
정철계공인(正鐵契貢人)
정의
선공감에 속하여 정철을 조달하던 공계인.
개설
정철(正鐵)은 조선시대 철갑옷과 총(銃)·포(砲)를 제작하는 원료로 쓰이는 한편, 병선(兵船)과 관곽(棺槨)에 들어가는 쇠못 재료로도 활용되었다. 시우쇠라고도 하였다. 정철계공인(正鐵契貢人)은 조선전기에 철산지에서 본색(本色)으로 상납하던 정철을 대동법 시행 이후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를 받아 전문적으로 조달하던 공계인(貢契人)을 일컬었다.
담당 직무
정철계공인은 궁궐을 짓거나 정부 각사의 건물 수리 등에 소비되는 정철을 조달하던 공인으로서, 선공감에 속해 있었다. 『공폐(貢弊)』가 작성된 1753년(영조 29) 무렵만 해도 선공감공인(繕工監貢人)이 정철을 조달한 것으로 보이나, 이후 수철계(水鐵契)·장인철계(匠人鐵契) 등의 공계인이 사료 상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선공감 산하에 정철계가 별도로 창설된 듯하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변천
조선전기에는 군기감과 선공감에 정철을 공물(貢物)로 바쳤기 때문에 중앙정부는 철이 많이 나고 땔나무가 풍부한 곳에 철장(鐵場)을 설치하여 철간(鐵干)으로 하여금 정련하게 하거나[『세종실록』 12년 12월 1일], 철장도회(鐵場都會)를 지정하여 감사로 하여금 도회의 주변 고을에서 생산한 철을 모아 상납하게 하였다[『문종실록』 1년 6월 16일]. 이렇게 정련한 정철은 군기감과 선공감에 공납하였으며, 일부는 지방 관아에서 소비하였다. 그러나 철장지(鐵場地) 주민들에게 정철을 공납하는 부담이 편중되었기 때문에 세조대에는 쌀로 대납하게 해 주었다.
1464년(세조 10) 호조의 등록(謄錄)을 보면, 풍년에는 정철 1냥(兩)에 쌀 3승(升)으로, 흉년에는 2승으로 대납하게 한 조치가 나타난다[『세조실록』 10년 12월 7일]. 이후 철산지에서도 정철을 본색으로 상납하지 않고 쌀로 대납하는 관행이 17세기까지 확대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명나라 장수 경략(經略)의 요구로 정철의 산지와 철장의 소재지를 파악하여 무기를 직접 만든 일이 있었다[『선조실록』 26년 7월 29일].
하지만 광해군대에 화기도감(火器都監)을 설립하여 군기를 만들 때 정철을 본색으로 상납하지 않는 문제가 거론된 것으로 보아 전쟁이 끝난 뒤에는 정철을 쌀로 대납하는 방식으로 되돌아간 듯하다. 당시 화기도감에서는 정철을 쌀로 대납하기 때문에 중간에 중개료로 빠져나가는 세곡이 과다함을 지적하면서 각 도와 군현에서 정해진 값에 따라 정철을 쌀과 포로 바꾸어 거두는 것을 공식화하여 서울에서 사서 쓰는 방안을 제안하였다[『광해군일기』 6년 7월 25일].
광해군대에는 특히 궁궐 중수(重修)와 영건(營建)이 대대적으로 진행됨에 따라 건축용 자재로서 정철의 수요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민간에서 정철을 헌납한 자들에게 관직을 내려주기도 하였다[『광해군일기』 13년 9월 23일]. 그러나 국가적인 정철 수급 방식의 변화는 대동법을 통하여 큰 전환기를 맞이하였다.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산지에서 현물로 바치던 정철은 선공감이나 군기시에 속한 공물주인이 시장에서 조달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들은 호조와 선혜청에서 공물가를 지급받아 해당 관서에 정철을 진배하는 전문적인 청부상인이었다. 특히 정철계공인은 선공감에 속하여 건축용 자재로 쓰이는 정철을 납품하였다. 1753년(영조 29)에 작성된 『공폐』에는 선공감공인이 선공감과 영건도감에 정철을 진배하면서 겪는 고통을 하소연하는 상언(上言)과 그에 따른 비변사의 제사(題辭)가 실려 있었다. 아마도 고종대에 확인되는 정철계공인은 영조대 중반 이후 정철만을 전문적으로 납품하는 공계인으로 창설된 듯하다. 이들은 갑오개혁기에 공납제를 전면적으로 폐지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공폐(貢弊)』
『만기요람(萬機要覽)』
유승주, 『朝鮮時代鑛業史硏究』, 고려대학교 출판부, 1993.
안병우, 「조선전기 鐵物의 생산과 유통」, 『東方學志』 119, 2003.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貢人權·廛契 창설운동과 亂廛活動」, 『奎章閣』 10, 1987.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고종실록』 19년 1월 8일
『세종실록』 12년 12월 1일
『문종실록』 1년 6월 16일
『세조실록』 10년 12월 7일
『선조실록』 26년 7월 29일
『광해군일기』 6년 7월 25일
『광해군일기』 13년 9월 23일
정총(定摠)
정의
수취 총수를 정하고 풍흉에 관계없이 정해진 액수를 각 읍별로 상납하도록 하는 방법.
개설
18세기 접어들어 수취액의 감하(減下)를 주장하는 둔민(屯民)의 항조운동이 본격화되었다. 민의 저항으로 지대는 점진적으로 저하되었고, 군·아문의 둔전 지배력도 약화되었다. 이는 곧 둔전결수(屯田結數)의 감축으로 이어졌다. 군·아문에게 둔전결수의 감축은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현실에 대하여 군·아문이 취한 조치는 기준 연도를 중심으로 수취 총수를 정하고 풍흉에 관계없이 정해진 액수를 각 읍별로 수취하는 방법인 정총제(定摠制)의 채택이었다. 둔전별로 책정된 정총은 당해 연도 둔민들이 군·아문 등에 납부해야 할 지대총액에 해당하였다.
내용 및 특징
둔전의 소유 구조와 경영 형태는 복잡하고 다양하였다. 둔민은 둔전 경작을 통하여 형성된 사실상의 소유권을 근거로 군·아문에 대하여 지대 인하를 주장하였다. 군·아문의 입장에서 이 같은 둔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지만 수취량이 저하되어 결세 수준에 이르는 경향은 거스를 수 없는 추세였다. 군·아문에 대하여 끊임없이 항조(抗租)를 펼치고 수취를 거부하는 자들은 대부분 향촌 사회 내부에 세력 기반을 확고히 구축한 지주층들이었다.
정총제의 목적은 당해 농사의 형편에 구애받지 않는 안정적인 수취액의 확보였다. 수취 총액은 상총(上摠)·중총(中摠)·하총(下摠) 등으로 당해 연도의 풍흉에 따라 등급이 나누어져 책정된 경우도 있고, 농형과 무관하게 단일한 액수가 정해진 경우도 있었다[『고종실록』 14년 8월 20일]. 그런데 정총하의 수취 과정에서는 면·리 조직을 중심으로 한 향촌 내 제(모든) 세력의 역할이 더욱 두드러지게 되었다. 특히 군·아문이 둔감(屯監)이나 별장(別將)의 파견을 중단하고 수령수취제를 채택할 경우 더욱 그러하였다. 이제 중앙 군·아문의 주된 관심사는 정총의 확보였고 둔토나 둔민의 실태 파악은 사실상 각 읍에 위임되었다.
19세기 둔전의 수취는 수령을 중심으로 면·리 조직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며 그 기본단위는 리였다. 여기에 수취 총액을 관철하려 하는 중앙 군·아문과 어떻게든 이를 삭감하려 하는 지역의 둔민·수령 사이에 팽팽한 긴장 관계가 형성되었다. 정총제의 채택은 이제 둔전의 파악과 수취가 토지의 실제 상황을 파악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탄력성을 잃고 추상화된 결수를 기준으로 산정한 수취액을 관철하는 과정임을 적나라하게 반영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송양섭, 「18·19세기 둔전에 있어서 둔민의 저항과 정총제의 채택」, 『역사학보』 174, 2001
제용감공인(濟用監貢人)
정의
조선시대 제용감에 속하여 비단·포목 등을 정부 관서에 조달해 바치던 공인.
개설
조선전기에 제용감(濟用監)은 중국으로 보내는 사(紗)·나(羅)·능(綾)·단(段) 등 각종 비단과 포목, 그리고 왕실에서 소비하는 가죽, 포화(布貨)를 마련하는 일을 주관하였다. 1392년(태조 1) 문무백관의 관제를 정비할 당시 제용고로 운영하였다가, 1409년(태종 9) 정3품아문으로 승격되면서 제용감이라 하고, 감고(監庫)를 두어 나라의 창고 물품인 탕장(帑藏)을 관리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 들어 제용감의 운영에 변화가 나타났다. 진헌용 인삼을 마련하는 일은 더 이상 담당하지 않게 되었으며,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진헌용 비단과 포화·염색 재료 등을 직접 마련하지 않고 제용감 소속 공인을 통하여 조달받았다. 『대전통편』이 간행된 정조대 이후로 제용감은 정3품 정(正)과 종3품 부정(副正), 종4품 첨정(僉正)의 원액(元額)을 삭감하여 종5품아문으로 운영하였다. 제용감공인은 갑오개혁기에 선혜청을 혁파할 때까지 계속 존속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담당 직무
조선전기에 제용감은 중국에 진헌하거나 왕실 각 전(殿)·궁(宮)의 의복을 제작하는데 쓰이는 직물을 마련하고, 그것을 염색하는 일을 관장하였다. 조선전기 제용감 운영에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태종대에 제용고에서 제용감으로 승격되는 과정에서 공물아문 외에 정부 기금을 비축하는 탕장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이다. 조선초에 현물화폐로 쓰였던 질이 나쁜 포인 추포(麤布)를 대신하여 종이 돈인 저화(楮貨)를 유통시키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때 제용감에서 시중의 추포를 사들이는 대신 저화를 발급해 주는 역할을 하였다[『태종실록』 11년 1월 21일]. 이처럼 정부 차원에서 포목을 대신하여 저화를 유통시키는 정책을 펴면서 시중에서 저화의 값이 떨어지면 제용감의 잡물로 저화를 사들이기도 하였다[『태종실록』 15년 7월 14일].
제용감에서 진배하는 비단·정포·인삼·가죽류는 지방군현에 공물로 분정(分定)하거나 시중에서 무역으로 마련하였다. 그런데 조선후기에 대동법을 시행하면서 제용감에 속한 공물주인들과 역인(役人)들이 제용감에서 마련해야 하는 직물을 공물가를 받고 구입하거나 만들어 바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이에 제용감공인(濟用監貢人)들은 선혜청으로부터 공물가(貢物價)를 받아 각종 직물과 의복을 제작하여 진배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제용감의 고직(庫直)을 세우는 비용을 대고, 관원의 능라제복과 병풍을 과외로 바치는가 하면 국가의 길흉대례와 과장(科場), 즉 과거시험장이 열릴 때 자주 동원되었다. 이는 애초에 선혜청에서 지급받는 공물가가 물품 값이 아닌 시역(市役)을 수행하는 반대급부의 성격이 강하였던 점을 시사하였다. 이처럼 제용감공인은 제용감의 원공에 해당하는 각종 물품을 바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각사 소속 공인들과 마찬가지로 제용감에 할당된 국역과 기타 과외로 수행해야 하는 각종 역을 담당하였다.
변천
제용감공인은 갑오개혁기에 호조로 재정기구를 단일화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대전회통(大典會通)』
『공폐(貢弊)』
『만기요람(萬機要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송수환, 『朝鮮前期 王室財政硏究』, 집문당, 2000.
최주희, 「조선후기 왕실·정부기구의 재편과 서울의 공간구조」, 『서울학연구』 49, 2012.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실록연계
『태종실록』 11년 1월 21일
『태종실록』 15년 7월 14일
조예(皂隸)
정의
조선시대에 서울의 각 관청 및 종친, 공신, 고급 관료에게 배속되어 호위와 사령 등의 역할을 담당한 종9품 경아전.
개설
서울 각사의 하예를 정리(丁吏)·조예·갈도(喝道)라고 불렀다. 이들은 오건(烏巾)을 쓰고 옅은 붉은색 옷을 입었다. 승여사(乘輿司)가 조예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담당 직무
조예는 종친부·의정부·충훈부·중추부·의빈부·돈녕부·이조·호조·병조·형조·한성부·사헌부·개성부·충익부·승정원·장예원·사간원·경연(經筵)·성균관·훈련원·상서원·종부시 등 중앙관서에 배속되어 입역(立役)하거나, 종친과 관원에 배속되어 수종(隨從), 호위·사령 등의 잡역(雜役)에 종사하였다.
경기도·충청도·강원도·황해도의 4도에서 주로 선발되었다. 입역 기간은 길게는 1년, 짧게는 10일 또는 1개월이었다. 세조 이후에는 1개월 입역하고 2개월 휴번하였다. 즉, 1년에 총 4개월 입역하였다. 나장(羅將)과 신분이나 입역 조건이 비슷하여 조예나장(皂隸羅將)·나장조예로 통칭되기도 하였다.
변천
입역하는 거리가 멀고, 또한 관청이나 관료가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예를 점유하는 일이 늘어나는 등 부역제의 문제점이 심각해지고, 성종 말년 이후에는 피역과 도망이 계속되면서 경인(京人)으로 대립(代立)시키는 조치가 취하여졌다. 이후 대립제가 점차 일반화되었다.
1506년(중종 1), 1507년(중종 2) 무렵에는 대역 번가(番價)가 정해졌다. 1개월 값은 면포 5필로, 1년에 20필이었다. 대립가(代立價)가 공정화하면서, 1543년(중종 38) 편찬된 『대전후속록』 「병전」 잡령조에서는 1개월에 2필 반, 1년에 10필로 규정하였다. 이처럼 16세기 이후에는 납포(納布) 대립제가 일반화되었다.
1746년(영조 22) 편찬된 『속대전』 「병전」 경아전조에서는, “대동청(大同廳)을 설립할 때 모두 폐지하여 보병(步兵)으로 삼고, 서울에서 급가하여 고립(雇立)하였다. 지금은 각 관청에서 사령(使令)이라고 통칭한다.”라고 하였다. 즉, 대동법 시행 이후, 서울에서 삯을 주고 사람을 고용하여 역을 지게 하는 방식이 규정화되었다.
실제로 1623년(인조 1)에 충청도·전라도·강원도에 대동법이 실시되었을 때, 충청도는 전지(田地) 1결에 쌀 4되, 즉 4승(升)을 거두어 그것으로 조예를 고립하였다. 이것은 조예의 운영에서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그리고 1637년(인조 15)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조예에게 지급하는 고립가(雇立價)는 호조가 4개월분, 선혜청이 8개월분을 부담하였다. 선혜청의 경우, 삼남청에서 각각 2개월, 경기청과 강원청에서 각각 1개월분을 부담하였다. 1개월분은 쌀 105석이었다. 1788년(정조 12)에 편찬된 『탁지지』에 의하면, 각 관아의 조예 고립가는 약간씩 차이가 있었다.
고립가는 월급제로 지급되었지만, 일급제의 성격을 띠기도 하였다. 고립 조건에 따라 원(元)조예·가(假)조예·고립조예로 나뉘었다. 원조예는 원립(原立)조예라고도 불렸는데, 월급제를 적용하는 고정 인력이었다. 가조예와 고립조예는 일급제로 고용되었으나, 거의 고정적으로 고용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속대전(續大典)』
『탁지지(度支志)』
강만길, 『조선시대 상공업사연구』, 한길사, 1984.
김옥근, 『조선왕조재정사연구』Ⅲ, 일조각, 1988.
이정철, 『대동법』, 역사비평사, 2010.
田川孝三, 『李朝貢納制の硏究』, 東洋文庫, 1964.
종실수세(從實收稅)
정의
둔전이나 궁방전 등을 대상으로 수취할 때 자연재해 정도를 반영하여 지대를 감면해 주는 것.
개설
둔전과 궁방전은 일반 민전과 달리 재해에 따른 지대 감면의 권한이 소속 기관에 있었다. 군·아문이나 궁방은 수입의 감소로 직결되는 급재(給災)에 대하여 인색하였다. 이에 따라 둔민은 일반 민전 지주와 마찬가지로 흉년이나 재해가 닥쳤을 경우 이에 대한 적절한 지대 감면을 요구하였다. 종실수세는 바로 이를 지칭하는 것으로, 국가권력의 지배하에 놓인 둔전과 궁방전이 궁극적으로 민전과 유사한 형태로 변화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내용·특징과 변천
18세기에 접어들어 국가 소유 둔전과 궁방전에서는 소유권과 지대 인하를 둘러싸고 둔민들의 저항이 더욱 격렬해졌다. 둔민의 저항을 가져온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급재를 둘러싼 문제였다. 전결세(田結稅)에 대한 급재 권한이 호조에 있었던 데 반하여, 대부분의 둔전과 궁방전은 호조의 원장부(元帳付)에서 제외된 면세전답이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재해 인정은 군·아문과 궁방의 재량에 맡겨져 있었다. 군·아문과 궁방이 재정 수입의 감소로 직결되는 급재에 대하여 인색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당연하였다. 한편 둔민 입장에서는 정총제(定摠制)로 수취 총액이 완고하게 굳어진 상태에서 흉년에 급재가 되지 않을 경우 사실상 파산 위기에 내몰리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는 일찍부터 둔민의 반발과 민원이 비등하였다. 이때 제기된 것이 바로 종실수세의 방법이었다.
종실수세는 둔전이나 궁방전의 재해를 현실 그대로 수세액에 반영하여 전세를 감면해 주는 것을 의미하였다. 이는 민전의 지주(地主)가 작인(作人)에게 흉년이나 재해가 닥쳤을 경우 이를 지대 수취에 반영하여 감면해 주는 것과 동일한 형태였다.
18세기 후반 이후 이러한 종실수세의 요구는 일상적인 것이 되고 있었다[『정조실록』 2년 1월 10일][『정조실록』 7년 1월 8일]. 특히 각 도의 감사들은 매년 말 재실분등장계(灾實分等狀啓)를 통하여 둔전과 궁방전에 대한 종실수세를 중앙에 요청하였다. 정부의 태도는 소극적이었지만, 급재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제기된 종실수세는 국지적으로나마 점차 확산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는 정총(定摠)의 강요와 둔민의 저항·파산의 악순환에 대한 정부의 불가피한 조치였다.
둔전과 궁방전에 대한 급재는 18세기 이후 민전에 대한 급재 방식인 초실(稍實)·지차(之次)·우심(尤甚)의 3등급에 준하여 소재 지역의 등급에 따라 수취량을 감면해 주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한편 종실수세를 둘러싸고 지역사회에서는 수령과 재지세력의 책동으로 군·아문과 궁방의 토지에 대한 장악력은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는 둔전과 궁방전이 이미 낡은 형태의 토지지배 방식이 되어 버리고 있음을 보여 주는 동시에 둔전과 궁방전이 점차 민전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되어 가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송양섭, 『조선후기 둔전 연구』, 경인문화사, 2006.
이영훈, 『조선후기 사회경제사 연구』, 한길사, 1988.
중국차관(中國借款)
정의
청국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증대시키고 경제를 효율적으로 침탈하기 위하여 제공한 차관.
개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국은 종래의 전통적인 조공 관계를 청산하고 무력에 의해 조선의 내정에 직접 간섭하는 일종의 제국주의적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청국은 재정고문을 파견해 조선의 재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제국주의의 경제침탈 방식인 차관을 이용해 각종 이권을 확보해 나갔다. 조선 최초 차관은 일본이 아닌 청국에 의해 도입되었고, 1894년까지 그 규모도 일본을 압도하면서 조선에 대한 경제적·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1882년 7월 임오군란을 진압한 청국은 조선을 실질적으로 종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을 강화시켜 나갔다. 청국은 무력으로 흥선대원군 정권을 붕괴시킨 다음 고문 등을 파견해 자국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오장경(吳長慶, [우창칭])과 위안스카이([袁世凱], Yuan Shikai)는 병권을, 재정고문으로 파견된 진수당(陳樹棠, [천수탕])은 재정권을, 이홍장(李鴻章)이 파견한 묄렌도르프( Möllendorff, Paul George von)는 외교권을 각각 장악하였던 것이다. 특히 1882년 8월 청국은 조선에 압력을 가하여 가장 불평등하고 자국의 특권을 강요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게 하고, 그 전문에 조선이 청국의 속방임을 명문화시켰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국은 제국주의의 전형적인 경제 침탈 방식인 차관을 조선에 제공함으로써 각종 이권을 확보해 나갔다. 당시 청국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시달리면서 이권을 빼앗기고 재정도 궁핍해지는 등 경제의 상황이 좋지 않았음에도, 개항 이래 독점적으로 진행된 일본의 조선에 대한 경제 침탈을 막고 청국 중심의 경제 침탈 기반을 조성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청국은 1882년부터 인삼·광산·해관을 담보로 차관을 제공하여 각종 이권을 침탈하고 조선의 해관을 장악하면서 조선의 내정에 깊숙하게 관여하는 기반을 다지기 시작하였다.
특히 갑신정변(1884년, 고종 21) 후 주차조선통리교섭통상사의로 파견된 위안스카이는 차관 제공의 실익과 영향력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청국차관이 가져오는 6대 이익을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1) 고종의 자주정책을 분쇄할 수 있다, 2) 조선의 재정을 조정하고 각종 이권을 획득할 수 있다, 3) 조선의 내치와 외교를 간섭할 수 있다, 4) 서양과 일본의 조선 간섭을 배제할 수 있다, 5) 청차관의 제공 독점으로 ‘상국(上國) 속방체제(屬邦體制)’를 유지할 수 있다, 6) 조선해관의 운영권과 수세권을 장악할 수 있다 등이었다.
이처럼 개항 이후 조선 최초 차관 도입은 일본이 아닌 청에 의해 이루어졌고, 1882년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까지 차관 제공 면에서 청은 일본을 압도하였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자본주의 침탈의 고도 전략인 차관공세를 청국이 실시하였다는 점이다. 차관 도입의 문제는 당시 민중의 시야에도 포착이 되었는데, 1894년 농민전쟁 당시 전봉준은 민중의 생활고와 직결된 조선 정부의 국채를 고발하고 나서기도 하였다.
내용
청국에서는 1882년 조선에 최초로 군사유학생 경비 마련을 목적으로 초상국(招商局) 차관 27,000량을 인삼세를 담보로 이자율 월 6~7%에 제공하였다. 이어 조선 정부는 해관을 창설하기 위하여 해관세, 홍삼세, 광세를 담보로 빌린 300,000냥을 비롯해서 기기 구입, 서로전선 가설, 외채 상환, 일본에 대한 방곡령 배상금 등 각종 명목으로 청국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왔다. 이러한 차관으로 조선에 대한 청국의 영향력은 크게 증대되었다.
변천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국이 패하면서 조선 내 청국의 영향력은 급격히 감소하였고, 이와 더불어 중국차관은 사라지고 일본이 주도하는 차관만이 조선에 제공되었다.
참고문헌
김정기, 「조선정부의 청차관도입」, 『한국사론』 3, 1976.
김정기, 「청의 조선정책(1876~1894)」, 『1894년 농민전쟁 연구』 3, 1993.
실록연계
지의계공인(地衣契貢人)
정의
궁궐의 각 전 바닥에 깔거나 제사 때 쓰는 지의를 조달하던 공계인.
개설
대동법 시행 이후 왕실의례와 관서행정에 필요한 다양한 경비물자를 서울의 공물주인에게 조달해 쓰게 되면서, 스스로 계(契)를 창설하여 선혜청(宣惠廳)으로부터 공물가(貢物價)를 받아 조달역을 지는 자들이 나타났다. 지의계공인 역시 도성민들을 중심으로 전문 계를 조직하여 장흥고(長興庫)에서 전담하던 지의(地衣)를 제작하여 바치던 공계인을 일컬었다.
조선전기에는 장흥고에서 지의를 직접 제작하거나 공물로 받아 궐에 바쳤는데[『예종실록』 즉위년 12월 16일], 조선후기에 대동법이 시행되면서 지의의 진배 방식에 변화가 나타났다. 장흥고 소속 공물주인에게 공물가를 지급하여 지의를 조달해 바치도록 한 것이었다. 18세기 중엽에는 지의를 전문적으로 조달하는 공계인층이 창설되었는데, 이로 인하여 지의의 조달을 둘러싸고 장흥고와 지의계공인 사이에 갈등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담당 직무
지의는 헝겊으로 가장자리를 여미고 여러 개를 이어서 크게 만든 돗자리로, 궐내 각(各) 전(殿)의 바닥에 깔거나 제사가 있을 때 특별히 제작해 사용하였다. 지의계공인은 왕실과 정부 관서에 지의를 전문적으로 조달해 바치는 일 외에도 다른 공계인들과 마찬가지로 왕의 거둥이나 과장(科場) 설행과 같은 국역(國役)에 무상으로 동원되었다. 이처럼 지의계공인은 각종 국역에 동원되는 일이 많을뿐더러 공물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하여 18세기 후반부터 조정에서 공폐(貢弊)를 논할 때 자주 거론되었다.
변천
지의계공인은 고종대까지 계속 유지되었으나, 선혜청에서 공물가를 제때 지급받지 못해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대 공시인순막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이러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고종실록』 19년 1월 8일]. 갑오개혁기 호조로 재정기구가 단일화되고 선혜청을 중심으로 한 공물 조달 체계가 해체되면서 지의계공인은 다른 공물주인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럽게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경국대전(經國大典)』,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오미일, 「18·19세기 새로운 貢人權·廛契 창설운동과 亂廛活動」, 『奎章閣』 10, 1987.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진(陣)
정의
광해군·인조대에 왕자나 권력자들이 불법적인 방식으로 개설한 농장.
개설
광해군대에 왕실이나 외척·권세가 등이 일반 농민들의 비옥한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설치하고, 도망 노비나 피역민(避役民)을 모아 경작하는 농장이 널리 유행하였다. 이러한 농장을 당시에 ‘진’이라고 불렀다.
내용 및 특징
‘진’은 국가 재정 측면에서 큰 폐단들을 낳았다. 첫째는 전세(田稅)가 날로 줄어드는 것이었고, 둘째는 상당수 양민들이 피역하기 위하여 ‘진’에 투탁함으로써 다른 양인에게 부역이 가중되는 것이었다. 이렇게 전가된 부담을 견디지 못한 다른 양인들도 결국 파산하거나 유리함으로써 부역 부담자가 나날이 줄어들었다. 이 때문에 인조반정 직후에 ‘진’을 혁파하여 그 토지는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고, 진에 소속된 사람은 원래의 신역을 부담하도록 조치하였다.
이 조치로 권력자의 진은 거의 혁파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왕실, 즉 왕자나 공주의 사유지와 절수지였다. 인조 연간에 일어난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후 조선 정부가 부담하게 된 청나라에 대한 세폐(歲幣)는 국가 재정을 매우 악화시켰다. 관료들은 왕실 재정을 축소시켜 정부 재정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그것이 궁방의 절수지를 제한하거나 폐지하자는 주장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인조는 왕실의 사적인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재원은 당연히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관료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궁방의 절수는 오히려 확대되었다. 이때 관료들은 궁방의 절수지를 광해군대 유행하던 ‘진’에 빗대어 ‘대군진’이라고도 표현하였다. 그러나 1639년(인조 17) 이후 정치 상황이 변하고 국가 재정이 더욱 악화되자 인조의 입장도 변화를 보였다. 궁방의 절수에 대하여 일정한 제한을 가하는 데 동의한 것이었다. 이후 궁방 절수지에 대하여 대군진이라는 표현은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森岡康, 「大君陣」, 『朝鮮學報』 49, 조선학회, 1968.
첩가미(帖價米)
정의
공명첩을 팔아 마련한 곡식.
개설
첩가미는 조선 정부가 흉년에 부족한 진휼곡을 마련하기 위하여 공명첩을 발매하여 마련한 쌀이었다. 첩가미는 진휼청(賑恤廳)에 의하여 지역별로 분산·비축되다가 기민(饑民)에게 건량(乾糧)으로 지급되거나 죽을 쑤어 주는 밑천으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1. 첩가미의 모집과 관리
조선시대 흉년으로 기근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면 정부나 각도 관찰사는 진휼곡을 확보하는 일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이때 진휼청과 각도 감사는 진휼곡 모집의 한 방안으로 왕에게 공명첩 발매를 청하였다. 공명첩은 비변사의 논의 후 왕의 재가로 이조(吏曹)·병조(兵曹)에서 제작하여 해당 기관에 전달되었다. 진휼청이나 각도 감사는 넘겨받은 공명첩을 다시 각 군현에 분배하였다. 이에 지방 수령은 수하 향임(鄕任)·면임(面任) 등을 동원하여 다소 부유한 사람을 찾아가 공명첩을 구입하도록 권유하고 곡식을 모았다. 이와 같이 공명첩을 판매하여 마련한 곡식을 첩가미 또는 공명첩가곡(空名帖價穀)이라 하였다[『숙종실록』 44년 10월 11일].
첩가미는 공명첩이 판매된 도별로 분산되어 보관되었으며 진휼청에 의하여 총괄 관리되었다. 그리고 첩가미는 주로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밑천으로 사용되었다. 대체로 당해 연도에 수집된 첩가미는 죽을 쑤어 주거나 건량으로 나누어 주는 데 사용되었으며, 쓰고 남은 곡식은 환곡(還穀)에 편입되어 진자(賑資)로 비축되었다.
한편, 기민에게 지급된 첩가미를 환수하는 문제를 두고 숙종대에는 많은 논란이 일었다. 즉, 첩가미는 관작을 팔아 기민을 구제하는 곡식이므로 다시 기민에게서 환수하는 것은 구차스러울뿐더러 실제 도로 거두기도 어렵다는 입장이 있었다. 반면, 공명첩 구입자가 늘어나는 추세에서 계속 공명첩을 팔아 진휼곡을 마련하기 어려우므로, 나누어 준 곡식을 환수하여 후일 진휼하는 밑천으로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었다. 이러한 논란은 결국 진휼곡을 환수하지 않고 탕감(蕩減)해 주는 방향으로 정리가 되었다[『숙종실록』 12년 8월 25일].
2. 진휼 시 첩가미의 비중과 성과
첩가미가 각 도의 진휼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1787년(정조 11)의 사례를 통하여 짐작할 수 있다. 당시 각 도에서 진휼을 위하여 확보한 진자곡(賑資穀)의 종류와 진휼한 내용을 정리하면 아래 표와 같다.
<표 1> 1787년(정조 11) 각 도의 진자곡 확보와 진휼 내용
※ 단위: 기민 수는 명(名), 진자곡은 쌀·석(石). 괄호 안은 백분율(%).
위의 표에서 수령 자비곡은 지방관인 수령이 군현에서 자체적으로 마련한 곡식이며, 부민 원납곡은 부유한 백성이 자원하여 납부한 곡식을 일컫는다. 공명첩가곡의 비중은 전체 진자곡 중에서 대략 10% 내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첩가미는 진휼이 시작되기 전에 구급(救急)의 밑천으로 사용되거나 굶주린 백성에게 죽을 쑤어 주는 데 사용되었다. 또는 백급(白給)이라 하여 무상으로 지급되는 곡식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아사(餓死) 상황에 직면한 기민에게 첩가미는 가장 요긴한 진휼곡이었다.
변천
임진왜란 이후 첩가미를 재원으로 활용하고, 진휼에 적극 활용하던 방식은 19세기 전반까지 사료를 통하여 확인되었다. 그러나 중앙과 지방관아에서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환곡 규모가 증가하면서 첩가미의 모집과 운영은 점차 기능이 축소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일성록(日省錄)』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서한교, 「17·8세기 납속책의 실시와 그 성과」, 『역사교육논집』 15, 1990.
서한교, 「조선 현종·숙종대의 납속 제도와 그 기능」, 『대구사학』 45, 1993.
문수홍, 「조선시대 납속제에 관한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86.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정형지, 「조선 후기 진휼 정책 연구: 18세기를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실록연계
『숙종실록』 44년 10월 11일
『숙종실록』 12년 8월 25일
추증첩(追贈帖)
정의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사후 관직을 내리거나 품계를 올려 주는 임명장.
개설
추증(追贈)이란 관료로 근무한 사람에게 사후에 직급을 높여 주거나 관직 없이 죽은 사람에게 관직을 내리는 것을 말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공신, 충신, 효자나 학덕이 높은 사람 등이 사망하거나, 자손이 높은 관직에 오르게 되면 그의 3대 조상까지 관직을 주었다. 본래 고위 관료에게만 행해졌지만, 공명첩의 일종으로 추증첩이 판매되면서 일반 서민들도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공명 추증첩의 발매는 긴급한 군량·진휼곡의 확보를 위하여 조선후기까지 꾸준히 이루어졌으며 이러한 공명첩의 판매는 신분제 사회를 변화시키는 한 요인이 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은 개국 초부터 공신 본인과 그 부모, 관료의 3대 조상을 추증하는 제도를 시행하였다. 1396년(태조 5)에는 6품 이상으로 3대의 제사를 받들어야 할 사람은 3대의 돌아가신 어머니와 아버지, 즉 고비(考妣)를 추증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었다[『태조실록』 5년 5월 20일]. 이후 추증의 대상과 그 범위를 더욱 체계화하여 『경국대전』을 통하여 법제화하였다. 그 주요 내용은 종친(宗親)과 문관·무관으로 실직(實職) 2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자는 그의 선조 3대에 관직을 추증하되, 부모는 본인의 품계에 준하고, 조부모와 증조부모는 각각 1등씩 낮추어 주며, 사망한 처에게 남편의 관직에 따라 증직(贈職)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조선 정부는 전란과 흉년을 맞아 군량이나 진휼곡의 모집이 시급해지면서, 공명 추증첩을 일반인에게도 판매하였다. 선조대부터 숙종대까지 판매된 추증첩은 종류도 다양하고, 가격도 품직에 따라 달랐다. 1660년(현종 1)의 「모곡별단(募穀別單)」에 나타난 추증첩과 그 가격을 보면, 직장(直長)·참군(參軍)·금부도사(禁府都事)·별좌(別坐)는 쌀 5석(石), 좌랑(佐郞)·감찰(監察)은 쌀 6석, 정랑(正郞)·도사(都事)는 쌀 7석, 첨정(僉正)·경력(經歷)은 쌀 8석, 부정(副正)·상례(相禮)는 쌀 9석, 통례정(通禮正)은 쌀 10석, 판결사(判決事)는 쌀 15석, 참의(參議)는 쌀 17석, 좌윤(左尹)·우윤(右尹))·동지(同知)는 쌀 20석, 참판(參判)은 쌀 22석, 지사(知事)는 쌀 25석 정도였다. 그중 참판·좌윤·우윤·참의·판결사는 사족(士族)에 한하여 허락하였다. 또한 이미 참하(參下) 등의 품직을 가진 자가 쌀을 추가로 바치면 더 높은 품계를 받도록 하였다. 이러한 납속의 값은 흉년이 지속됨에 따라 내려갔다[『현종개수실록』 4년 9월 11일].
변천
추증첩은 몇 개의 품직을 제외하고는 양반이 아닌 상민·천민도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직첩의 남발이 우려되자, 공명첩 판매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한때 판매가 중지되기도 하였지만, 그 후에도 흉년을 당할 때마다 정책적으로 활용되었다.
결국 추증첩의 판매는 고위 관료나 양반에게 제한되지 않았고, 직첩을 구입한 하층민의 경우 품직을 호적에 기입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양반을 사칭하고 그것을 호적에 기록하여 신역(身役)을 면하는 한편, 양반 행세를 하는 하층민이 늘어남에 따라 신분제의 변동이 점차적으로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회통(大典會通)』
이성무, 『조선 초기 양반 연구』, 일조각, 1980.
박종기, 「고려시대 추증 제도」, 『한국학논총』 31, 2009.
서한교, 「17·8세기 납속책의 실시와 그 성과」, 『역사교육논집』 15, 1990.
서한교, 「조선 후기 납속 제도의 운영과 납속인의 실태」, 경북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5.
탁지정례(度支定例)
정의
개설
『탁지정례(度支定例)』는 1749년(영조 25)~1752년(영조 28)에 왕실과 정부관서의 지출 규모를 줄이기 위하여 조선전기 횡간(橫看)의 참용례(參用例)로서 간행되었다. 조선전기에는 공안과 횡간에 의거하여 공물을 거두어들이거나 소비하였다. 17세기 초에 대동법의 시행으로 현물공납이 토지세로 전환되면서 지방관아에 비치된 공안(貢案)은 그 기능이 유명무실해졌다. 지방에서는 대동세를 거두는 기준과 상납 방식에 따른 규정을 새롭게 마련해야 했는데, 『대동사목(大同事目)』에는 공안을 대신하여 대동세를 수취해 올리는 한편으로 고을에 일정량을 유치해 두어 지방 재원으로 활용하는 세부 방안을 제시하였다.
문제는 중앙에 상납된 대동세를 공인들에게 공물가로 지급하여 왕실과 정부관서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하는 데 중앙에 비치된 기존 공안을 그대로 활용하였다는 점이었다. 한편 왕실과 정부관서에서 물품을 소비할 때에는 기존의 전례나 등록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아 중앙의 경비 지출 방식을 정비할 필요가 생겼다. 이에 영조대 중반에 횡간의 기능을 보완하는 『탁지정례』를 간행하게 되었다.
내용 및 특징
1748년(영조 24) 10월 박문수는 호조에 정해진 예가 없어 판서가 일을 헤아리지 못하면 비용이 늘어나게 되는 폐단을 지적하고 호조의 정례를 마련할 것을 청하였다[『영조실록』 24년 10월 14일]. 그리고 한 달 후 왕이 거처하는 대내(大內)로 바치는 온갖 물품에 대하여 호조에서 매번 지급한 비용을 조목별로 아뢰고 그중 함부로 늘린 것이 과반이나 되는 상황을 영조에게 아뢰었다. 이에 영조는 직접 그대로 둘 것은 두고 없앨 것은 없앤 후 ‘한 부(部)의 주례(周禮)를 이루었다’고 평가하였다[『영조실록』 24년 11월 4일]. 이후 1749년(영조 25) 2월과 3월에 권수(卷首)와 왕의 말씀인 윤음(綸音)이 내려진 후 왕실의 공상 물자를 정비한 『탁지정례』 「각전각궁례」가 완성되었다. 이후 『국혼정례』와 『각사정례』 그리고 『상방정례』가 『탁지정례』의 다른 버전으로 순차 간행되었다. 이처럼 영조대 중반에 정례류를 대대적으로 간행한 일차적인 배경은 중앙의 재정 부족과 불필요한 경비 증가를 들 수 있다. 실제로 『탁지정례』 「각전각궁례」가 간행된 후 연간 100,000냥에 가까운 공상 물자가 감축될 것으로 예상되었다(『영조실록』 25년 2월 14일 1번째기사). 그러나 이와 더불어 『탁지정례』를 간행한 정치적인 이유 역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영조는 재위한 지 25년째가 되는 해 1월에 왕세자의 대리청정을 팔도에 반포하였다. 영조가 당시 왕위를 물려주는 사위(嗣位)의 준비 단계로서 대리청정 구도를 조성하였던 것은, 왕세자로 하여금 불안정한 탕평의 구도를 조율할 수 있는 감각을 지니게 하려는 의도가 컸다. 또한 사위 후 겪게 될 당론의 갈등 속에서도 일관된 정책 흐름을 유지할 수 있도록 법제, 의례, 각종 식례(式例)를 정비하는 조치를 병행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
변천
영조대 중반에 간행된 거질의 『탁지정례』는 이후 고종대에 『육전조례』가 간행되는 무렵까지 지출례로 계속 활용되었다. 다만 영조대 후반부터 『탁지정례』에 누락된 지출 항목을 보완해야 한다는 논의가 이어져 『공상정례』·『상제촉정례』와 같은 정례가 추가로 간행되기도 하였으며, 1776년(정조 즉위년)에는 제도의 진상물종과 수량을 정비한 『공선정례』가 간행되어 공물뿐 아니라 외방진상에까지 지출례를 마련하였다. 이러한 정례서는 1826년(순조 26) 『탁지정례』를 당대 실정에 맞게 조정한 『예식통고』의 간행을 마지막으로 이정 작업이 일단락되었다.
참고문헌
『탁지정례(度支定例)』
『국혼정례(國婚定例)』
『상방정례(尙方定例)』
『영남대동사목(嶺南大同事目)』
『전라도대동사목(全羅道大同事目)』
『호서대동사목(湖西大同事目)』
『만기요람(萬機要覽)』
최주희, 「18세기 중반 『탁지정례』류 간행의 재정적 특성과 정치적 의도」, 『역사와 현실』 81, 2011.
최주희, 「영조대 중반 균역법 시행논의와 『선혜청정례』의 간행」, 『한국사연구』 164.
최주희, 「조선후기 宣惠廳의 운영과 中央財政構造의 변화-재정기구의 합설과 지출정비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