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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복의 삶과 영성
(발표자 : 명례성지 담당신부 이제민)
생애
1. 신석복의 삶에 대해서는 그가 순교했다는 것 말고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순교자 신석복은 1828년 명례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그가 언제부터 명례에 정착하였는지, 그가 언제 어디서 누구한테서 세례를 받았는지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그의 순교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소개된 글이 있다. “신 이냐시오(마르코의 잘못). 본디 밀양 사람이라. 대구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 39세요, 때는 대개 병인 2월 15일(양력 3월 31일)이더라.”
“신(석복) 이냐시오(마르코의 잘못)는 경상도 밀양사람이라. 봉교한 지 10 여년 후에 병인년 2월 초 1일에 대구 포교에게 잡혀 진영에서 추열할 때 매를 많이 맞아 상하고 갇혔더니, 외인 일가 영문을 정하여 제사(題辭)을 진영에 부치매, 영장이 다시 올려 묻되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하나이다.’ ‘너를 놓아도 하겠느냐?’ ‘나가도 하겠나이다.’ 놓지 아니하고 10여 일 만에 치명하니, 나이 39세라...”
“(치명일기) 795에 있는 ‘신 이냐시오’는 이냐시오가 아니라 ‘말구이오니 본명을 바꾸소서. 본디 밀양 명례 살더니, 병인 정월 x일에 창원 마포에 장사 간 후로 대구 영포 두 패 머리가 내려와 가산을 탈취하고, 수일을 수(소)문하여 장사 갔다가 온단 말을 듣고 포졸 등이 마주 가다가 감해 가산 지경에 이르러 행인 4-5인을 만나 성명을 차차 물으니 ‘내가 신가로다.’ 하거늘 즉시 수갑하여 밀양으로 와서 하룻밤 사이에 무수한 형벌을 하고 떠나가니, 형제와 두민과 포졸과 의논하여 전(錢) 80냥을 가지고 따라와 은근한 곳이 암치하고 (신석복) 말구께 통하거늘, 말구 그 형더러 말하되 ‘일 푼전(分錢)이라도 주지 마라.’ 하고 포졸들을 재촉하여 가거늘, 그 형들은 돈을 가지고 회로하고, 말구는 포졸들과 한가지로 가며 지경(地境)이 능욕을 받고, 대구 진영으로 가서 세 번 형벌에 전신이 성한 곳이 없어 유혈에 옷이 다 젖고 뼈가 부서지되 종시 배교치 아니하니, 다시 옥에 내려다가 수일 후에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병인 2월 초 2일(양력 3월 18일). 오 야고보, 말구와 한가지로 잡혀 대구에서 동시 치명. (말구의) 자식 이냐시오, 지금 명례 산다.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증참(증인) 외인 형, 죽었다.”
2. 신석복과는 달리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추측할 수 있는 자료가 있다. 그의 아내 김부연은 밀양 웁실 출신이다.(부 성명 金成祿) 신석복이 태어나기 1년 전에 일어난 정해 박해 소식이 밀양 웁실 지방에까지 퍼지자 그곳에 살던 신자들이 김해 등으로 피난하게 되었는데, 이때 김부연의 가정도 밀양으로 피난했을 수 있다.(그가 태어난 후일 수도 있고 그 전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부연의 부모는 이미 신자였다는 말이 된다., 김부연은 이곳에서 신석복을 만나 혼인하였을 가능성이 있는데 이 때 신석복은 이미 세례를 받은 신자였을 수도 있고, 혼인을 하고나서 그의 아내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였을 수도 있다. 병인치명사적에 의하면 신석복은 순교하기 10년 전에(10여년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1856년경) 이는 김부연과 부부의 연을 맺은 지 5-6년 후의 일이다.(신영순이 1851년생이므로 1850년경에 결혼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추측일 뿐 우리는 김부연의 세례명도 모른다. 그의 부모에 대해서는 더욱 모른다. 순교자 신석복이 체포될 당시 명례에 천주교 신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그가 순교한 후 그의 아내와 세 명의 자녀들은(자녀는 영옥,영순,영호 3명이며 순교자의 형제들은 5형제) 어떻게 살았는지 전해오는 것도 전혀 없다.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도 모른다.
3. 순교자 신석복은 소금과 누룩장수였다. 누룩은 명례에서 소금은 진해 웅천 염전에서 구하여 팔았다. (웅천 장터를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웅천과 인접한 곳에 신씨 집성촌이 형성되어 있는 두동 마을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해보지만 이는 확실하지 않다. 신석복의 가족은 김해 상동 출신이다.) 웅천 장터에 가기 위해서는 낙동강을 건너 가동-봉하-진례-장유율하-웅동을 거쳐야 하는데, 누룩과 소금을 지고 다니던 이 장삿길은 성서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 1866년 병인년 천주교 박해가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대구에서 포졸들이 이곳 명례에까지 들이닥치게 되었는데, 이때 순교자는 진해 웅천에 있었다. 포졸들은 명례에서 강을 건너 그가 돌아오는 길목을 지키다가 나루터에 접근한 그를 붙잡아 밀양을 거쳐 대구로 압송하여 처형하였다.
4. 신석복이 순교하자 가족들이 시신을 명례로 옮기려 하였으나 전주 이씨가 반대하여 강 건너 장방의 도둑골에 묻었다는 설이 있지만, 우리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이는 신빙성이 약하다. 우선 명례는 돌산이기에 묘를 쓸 만한 곳이 없다. 예나 지금이나 명례에 묘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전주 이씨를 비롯하여 명례 주민들의 묘도 명례에서 먼 어언동이나 강 건너에 있으며, 명례에서 돌아가신 강성삼 신부님의 묘도 삼랑진 미전에 썼다가 나중에 부산 용호동으로 이장했다. 현재 우리가 매입한 성지의 경계에 동네에서 전해오는 전설에 따른 처녀의 사당이 있는데 그의 묘도 어언동에 있다. 이런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순교자의 가족들이 이곳에 순교자의 묘를 쓸 생각을 하였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그의 가족은 처음부터 시신을 명례가 아닌 강 건너로 모셨을 가능성이 많다. 어쨌든 순교자는 교회의 무관심 속에 강 건너 장방의 도둑골에 110년을 묻혀 있다가 1975년 진영의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자유인 신석복 그리스도인 신석복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
1. 신석복은 웅천에서 명례로 돌아오다가 명례 나루터 맞은편에 있는 가동 나루터 근처에서 대구서 온 포졸들에게 잡혀 (김해에서 온 포졸들에게 잡혔다가 대구서 온 포졸들에게 인계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밀양을 거쳐 대구로 끌려갔는데, 그 동선이 주목할 만하다. 가동에서 배에 실려 명례가 아니라 강을 따라 삼랑진 쪽으로 내려가다 마산 나루터에서 내려 평촌의 주막에서 하루를 묵었다. (금동 주막에서 하루 묵었다는 설도 있는데 거리나 시간 등을 고려해 볼 때 5일장이 섰을 정도로 큰 평촌에서 묵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거기 묵는 동안 포졸들은 순교자의 석방을 빌미로 가족을 회유하여 돈을 요구한다.
순교자는 이를 알고 가족에게 “나를 위하여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라는 말을 남긴다. 당신이 순교하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다. 목숨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만약 오늘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나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내가 붙잡혀 가는데 나를 석방시키기 위해 그 정도의 성의(?)도 보이지 않는다면 교회도 가족도 원망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까? 신석복 순교자는 오히려 풀어주는 운동을 자기의 신앙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겼다. 어쩌면 그는 십자가를 지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예수님을 생각했을 지도 모른다. 그분은 당신이 원하셔서 십자가를 지셨다.
2.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는 순교자 신석복의 말은 초창기의 교부이자 순교자로 사도 베드로에 의하여 안티오키아 교회의 제2대 혹은 제3대 주교로 임명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주교(107년 순교)가 한 말을 상기시킨다. 그는 그리스도교 박해 때에 체포되어 로마로 이송되었다. 그를 호송하던 배가 정박하는 곳마다 그리스도인들의 환영을 받았으나 호송 책임자는 그를 아주 잔인하게 대하였다고 한다. 12월 20일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어 장렬하게 순교하였다. 로마로 끌려오는 동안에 여러 통의 편지를 썼는데, 그가 로마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면 이렇다.
“나는 모든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여러분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내가 하느님을 위해 기꺼이 죽으러 간다고 모두에게 알렸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하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내버려 두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
이 세상의 모든 쾌락도 지상의 모든 왕국도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세상 극변까지 다스리는 것보다 그리스도 예수와 일치하기 위해 죽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습니다. 내가 찾고 있는 것은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분이며 내가 원하는 것은 우리를 위해 부활하신 바로 그분입니다. 다시 태어나는 내 출생이 때가 가까웠습니다. 형제들이여, 나를 잊어버리십시오. 내가 이 생명을 얻는 데 방해하지 마십시오. 나를 죽음의 상태에 놔두려 하지 마십시오. 하느님께 가고자 하는 사람을 세상에다 던지지 마십시오. 물질로써 유혹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깨끗한 빛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내가 거기 닿아야 사람이 될 것입니다. 내 하느님의 수난을 본받는 자가 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아무라도 하느님을 자기 안에 간직한 사람이면 내가 원하는 바를 들을 것이며 나를 재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동정할 것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통치자들을 거들지 말라며 이어 말한다.
“입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마음으로는 세속을 원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나쁜 마음이 여러분 안에 자리 잡지 않도록 하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도착했을 때는 나를 믿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내가 부탁하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여러분에게 쓰는 말을 믿으십시오. 지금은 내가 살아서 이 글을 쓰고 있지만 죽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나의 지상적인 모든 욕망은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 물질을 사랑하기 위한 불은 내 안에 더 없습니다.... 내가 수난을 당한다면 여러분이 나에게 호의를 보인 것이고 수난에서 제외된다면 여러분이 나를 미워한 것입니다.” 그는 107년 원형 극장에서 사자의 밥이 되었다.
3.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는 순교자의 말을 단순히 교회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식으로 호교론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순교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이다. 이 말은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생과 사를 초월하여 사는 자, 자신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시킨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다.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자유를 보게 된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자유로운 삶의 모습을 본다.
순교자의 이 말은 점점 돈과 권력과 명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강한 메시지를 던져준다. 교회 안에서조차 부자 되게 해 달라, 하는 일마다 잘되게 해달라는 따위의 자기만을 위한 기도를 신앙의 이름으로 바치면서(믿으면 병이 낫는다. 믿는 대로 될 것이다.) 현대인은 점점 부의 노예가 되고 성공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불행한 것은 현대인은 자기 자신이 이런 믿음을 발하는 동안 점점 부와 권력과 명예의 노예로 변화되어가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교회가 이런 기도를 바치는 도구로 변질되고, 이런 노예들의 집단으로 변해가면서도 그 사실을 알아채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생사의 노예가 되어 복음이 주는 행복과 기쁨을 맛보는 삶을 살 수 없다. 누룩과 소금 장수로서 복음의 삶을 산 신석복의 영성은 현대인들이 갖추어야 할 영성이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누룩이다.
4. 신석복은 대구 감영에 끌려가서 포졸들에게 “나를 놓아준다 하여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며 끝까지 신앙을 지키다가 순교를 하였다. 그는 천주교에서 도대체 무엇을 발견하였기에 목숨을 걸고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그의 이 말은 단순히 천주교를 배반하지 않겠다는 뜻을 넘어선다. 그가 천주교를 배반할 수 없었던 것은 천주교에서 믿음과 또 믿음을 통해 얻은 자유와 영원한 생명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자기의 영광과 아버지와 거룩한 천사들의 영광에 싸여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루카 9,24-26) 신석복에게 천주교를 포기하는 것은 예수님을 포기하는 것이요, 자유와 영원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었다.
순교자 신석복이 순교 직전 남긴 두 마디 말, “나를 위하여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 마라.” “놓아준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이다.” 라는 말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자유를 누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본다. 그는 진정한 자유인이었고, 천주교를 통해서 이를 터득하였다. 이 두 마디는 따로 떼어놓을 수 없을 만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순교자의 두 마디 말을 들으며 우리 자신에게도 묻게 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을 통해 우리가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부냐 성공이냐? 건강이냐 힘이냐? 신앙을 통해 나는 나와 세상이 어떻게 변화되기를 바라는가?
5. 신석복 순교자를 비롯해서 순교자들은 하느님의 생명을 깨달으신 분들이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만이 살려고 하는데 반해 순교자들은 남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 목숨을 기꺼이 내어놓는 삶을 살았다. 순교자들은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의 평화를 위해서 자기의 존재를 없애는 누룩과 소금의 삶을 산 것이다. 예수님처럼 빵이 되어 자기 자신을 빵으로 내어놓으며 자신을 사라지게 하는 삶을 산 것이다. 우리가 순교자를 기린다면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일 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너무도 이기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자기만의 부를 쌓고 자기만의 권력과 명예를 위하여 신앙을 한다. 신앙의 이름으로 높은 자리에 오르려 하고, 남보다 높은 자리에 앉고 더 많은 재물을 얻은 것을 주님의 축복으로 생각한다. 자기들이 얻은 부와 명성을 가난한 자들과 나누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은 하느님을 부자의 하느님으로 만들고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존재로 만든다. 지금 우리 사회는 누룩과 소금을 필요로 한다. 우리가 빵(성체)을 먹는 존재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빵(성체)이 되기를 바란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생명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정작 생명의 원천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고에 사로잡혀 있고 무소불위의 교만이 극에 달하였다. 4대강 개발 등 사회의 복지를 위해 정부가 내 놓는 사업도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나온 것일 때가 많다. 돈만 벌 수 있다면 어떤 짓도 다 하겠다는 식으로 자연을 거스른다면 공멸이 있을 뿐이다. 자연이 죽으면 인간도 죽는다. 우리는 땅을 희생시키고 강을 희생시키고 자연을 희생시킬 것이 아니라 대자연을 위해서 우리의 욕심을 포기하고 우리 자신을 희생할 수 있어야 한다.
6. 이런 의미에서 순교자가 누룩과 소금 장수였다는 것은 대단히 상징적이다. 누룩과 소금은 성경의 주제이기 때문이다.
다음 주제가 이곳 명례성지의 주제가 되기를 기원한다.
- 나는 누룩 장수였다
- 나는 소금 장수였다.
- 누룩을 팔기 위해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는 신석복,
- 소금을 팔기 위해 다시 나룻배를 타고 낙동강을 건너는 신석복.
- 그 길에서 그는 박대식도 만났을 것이다.
- 신석복이가 체포되어 가면서 밀양과 대구에서 한 두 마디는 단순히 교회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영웅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의 영성을 표현한 말이다.
- “나를 위해 한 푼도 포졸들에게 주지마라”는 신석복의 말은 보물을 사기 위해, 진주를 찾아 나섰다가 이를 발견하고 이를 얻기 위하여 가진 것 다 판 자, 자기 자신을 처분한 자의 입에서 나올 소리다.
- 여러분이 나를 놓아 준다 해도.... 그리고 그는 자신을 처분했다. 영생을 얻기 위하여.
- 순교자 신석복은 복음화된 인간이다. 그는 누룩과 소금 장수로서 만물에서 하느님을 느끼며 살았고, 만물에게 하느님을 느끼게 해 주었다.
신석복의 후손들
1. 지금까지 한국의 성지와 사적지를 안내하는 책자에 명례에 대한 소개는 없었다. 명례가 속한 마산교구에서조차 성지를 소개하는 책자에 명례 이름이 빠져 있었다. 그동안 명례는 잊혀왔다. 순교자 신석복을 이야기할 때도 진영의 순교자 묘지만 이야기하고 명례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었다. 순교에 대한 이야기는 있었지만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그분의 아내와 자식, 그리고 그분이 명례서 웅천 또 웅천에서 명례에 이르기까지 만난 사람들과 자연에 대한 이야기는 우리의 순교 이야기에서 밀려낫다. 그는 누룩과 소금 장수로서 수없이 낙동강을 건넜을 것이며 명례와 웅천을 오가면서 순교자 박대식이 살았던 진례의 시례도 지났을 것이다. 자기보다 17세 나이가 많은 박대식도 많이 만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역사의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그가 ‘순교’자라는 것만 부각하여 기억하였다. 그의 순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그가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하느님을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것만을 상투적으로 강조할 뿐 정작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그의 삶에 펼쳐진 하느님과 교회에 대한 그의 관심은 기억을 하지 못하였다. 진영 공원묘지에 있는 순교자 신석복의 묘비에 그가 명례 출신이라고 적혀 있지만 ‘명례’는 ‘지명’일 뿐,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더 이상 살아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시간과 함께 그가 명례의 어디서 살았는지 기억 해주는 사람들도 사라지게 되었다. 2007년, 그의 생가 터를 발견했을 때 그곳은 냄새나는 축사로 변해 있었다. 병인년 박해 때 그를 체포하기 위해 대구에서 온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생가, 강 건너에서 체포되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한 집, 묶인 몸으로 강 따라 내려가는 그를 멀리서 바라보며 애를 태웠을 아내와 자녀들의 한이 묻어 있는 곳, 그가 신앙생활을 하였던 생가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축사가 세워졌다. 그가 순교한 지 겨우 100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분을 시성하기 위해 찬양의 노래를 부른다.
그가 순교한 후 30년이 지나면서 명례가 본당이 되었고(1897년) 강성삼 신부가 본당 신부로 부임했다(1898년). 그 30년간 신자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다. 기록에 의하면 1880년의 교세는 27명이었다. 그로부터 17년의 세월이 흐른 후 강성삼 신부님이 부임하던 해(1898년)의 신자 수는 거의 80명이 되었다. 강신부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에는 신자가 144명이었다. 경남에서 첫 번째로 본당이 설립될 정도였으니 엄청나게 신자 수가 불어난 것이다. 하지만 본당이 설립되고 나서 신자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 불어난 신자들은 무엇을 하며 살았을까, 미사는 어디서 드렸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강신부가 부임했을 때 순교자의 아내는 살아 있었을까? 살아 있었다면 60 후반의 나이였을 텐데 강신부는 그와 그의 자녀들을 어떻게 대했을까? 순교 당시 15살이던 영순(1851년생)은 46세가 되었을 것이다. 영순이가 마흔이 되어 장가를 들어 아들을 두었으니 강신부님이 부임했을 때 큰 아들 석균은 7살(1891년생)이었고 강신부님이 돌아가시기 1년 전(1902)에 둘째 아들 옥균이 태어났다. 옥균은 강신부님한테서 세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2. 신석복이 순교한 후 후손들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의 생가 터가 축사로 변해 버린 데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누구도 그의 삶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이는 신자 수가 불어 명례에 본당이 설립되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신자 아닌 전주 이씨 가문은 그를 역적으로 처형된 사람으로만 기억하였다. 천주교 신자들이 대우를 받지 못했다는 것은 많은 이야기로 전해내려 온다.
금년 90세이신 박 발바라 할머니의 증언을 들어본다. 그는 18세에 전주 이씨 집에 시집을 와서 37세에 영세를 했다. 그때까지 딸을 4명 두었지만 아들이 없어 문중의 박대를 많이 받았다. 절에도 가고 별의별 노력을 다 해보았지만 37세가 되도록 아들을 얻지 못하였다. 그때 어느 천주교 신자가 “그런 짓 해 봐야 아무 소용없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했는데 하느님께 빌어야지.” 하는 말을 듣고 몰래 성당에 다니며 세례를 받았는데 - 기도 덕분인지 - 늦둥이 아들을 둘 낳았다. 그러고서도 그는 집안 어른 몰래 성당을 가야 했는데 이들의 눈에 안 띄게 먼 길을 돌아 성당에 다녔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이씨 집안이 천주교 신자를 좋아하지 않은 것은 천주학쟁이들이 대원군의 뜻을 거슬러 죄를 지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집안에 어떤 젊은이는 (그는 이름도 기억했지만 그 이름은 여기에 생략한다.)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는 이유로 매를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이사했다고 한다. 신석복이 순교하고 여러 세대가 지나도록 이런 일이 있었으니 당시 순교자의 가족에 대한 동네의 시선은 어떠했을까?
순교자의 손자 김옥균은 명례 공소 회장에 이어 밀양 본당 회장을 지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순교자의 후손인 줄을 몰랐다고 한다. 그는 죽은 다음 한 동안 밀양에 묻혀 있다가 최근에 그의 후손들이 그의 묘를 없앴다. 그의 양자 현준(석균의 둘째 아들)은 고성 이화 묘지에 묻혀 있다. 순교자의 후손에 대한 무심함은 그대로 순교자에 대한 우리들의 무심함이며 우리 신앙의 현주소이다.
우리의 순교 영성을 반성하면서 또 늦었지만 순교자의 후손들에게 죄스런 마음을 표하며 순교자가 살았던 명례리 1209번지를 거쳐 간 후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한다. 명례리 1209번지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의 가계를 정리하면서 신씨와 관련된 사람이 나타나면 거리에 상관없이 달려가 고증을 채집한 최종록 대건 안드레아의 공이 크다. 가계부가 정리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조금만 더 일찍 이 일을 시작했더라면 순교자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수집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3. 1828년도 명례리 1209번지에서 출생한 신석복은 평산 신씨이다. 그의 부친 립(笠)은 김해 상동면에 묻혀 있으며 할아버지 국희는 김해 생림에 묻혀 있다. 언제부터 신석복이 명례에 살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나는 석복이 소금 장수를 했기에 그의 가족이 신씨 집성촌이 있는 웅천과 인접해 있는 진해 두동에서 명례로 이주하지 않았을까 추측했지만 그의 가족은 김해 출신이다.) 신립은 5남 1를 두었는데 석복은 셋째다. 순교자가 웁실 출신인 김부연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때 20세 전후이며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아들은 영순인데 1851년생인 영순은 아버지가 죄인으로 죽어서인지 나이가 40이 되어서야(1891년경) 20세 연하인 강기연과 혼인한다. 이들은 석균(안드레아), 옥균(그레고리오), 훤균(야고보), 순균(바오로)의 네 명의 자녀를 두었다. 모두가 성당과 울 하나를 사이에 둔 명례리 1209번지에서 태어났다. 영순은 명례에서 죽었으나 동생 영호는 우곡리(웁실) 575번지에서 죽었다. 영호는 어머니의 고향에 묻힌 것이다. 그곳에 살다가 그곳에서 죽은 것인지 아니면 죽은 다음 그곳에 묻힌 것인지는 모른다. 부산 교구의 황태웅 신부가 그의 후손이다. 넷째 순균은 사제가 되었다. 장남인 석균(1891년생)은 네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장남 원담은 6.25동란 전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으로, 막내 현도는 미국으로 이민갔다. 그의 후손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이 없다.
영순의 둘째 아들 옥균(1902년생)은 세례명이 그레고리오였다. 옥균은 명례 공소 회장을 하다가 밀양이 본당이 되었을 때 밀양 본당 회장직을 맡았다. 그의 손녀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오갈 데 없어 사제관에 살았다. 그는 박영희(세실리아)와 혼인하여 아들 하나 딸 둘을 두었는데 아들은 3살이 되어 죽고 딸 정줄과 정자가 있다. 옥균은 아들이 없어 동생 훤균의 아들(현종)을 양자로 두었지만 딸들이 아버지를 모셨다. 정자는 지금 양산 요양원에 있는데 감차수(루카) 사이에 딸 3명과 아들 1명을 두고 있다. 정줄은 94세에 죽었다. 밀양 공원묘지에 묻혀있던 옥균의 묘는 몇 년 전 없앴다.
셋째 아들 훤균은 일곱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모두가 명례리 1209번지에서 태어났다. 옥균의 양자로 입적된 넷째 아들 현종의 아들 순철(순교자의 5대손)이 지금 명례에 살고 있다. 현종은 고성 이화 공원묘지에 묻혀 있다. 명례리 1209번지의 마지막 신씨는 xxx 다.
순교자에 대한 죄
교회는 순교자 신석복만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도 죄를 지었다. 그의 생가 터를 발견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순교자 자손의 호적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뻐했던가. 순교자가 살았던 집, 순교자가 아들을 낳고 그 아들들이 또 아들을 낳은 집을 확인하며 우리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하지만 순교자가 태어나고 신앙생활을 한 - 그 집에 십자가가 달려 있었을까? 어떤 기도서를 사용했을까? - 집을 발견한 기쁨도 잠시, 그의 생가 터를 바라보면서 우리는 실망과 절망과 분노를 느껴야 했다. 그의 생가는 축사로 변하여 역한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 필요조차 없이 그를 시성시복하기 위한 기도문을 작성하여 신자들에게 배포하고 기도를 종용하는 교회가 원망스러웠다.
발견의 기쁨이 사라진 것은 그의 후손을 만나면서 더했다. 뒤늦게 순교자의 생가 터를 매입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후손들이 찾아오기 시작하였는데, 그들은 순교자의 생가를 지키지 못한 것에 죄책감을 느꼈다.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어떤 자매는 찾아 와서 울먹였다. 이제야 그는 순교자의 의미를 발견하고 아무런 생각 없이 처분한 생가의 소중함을 깨닫는 듯했다. 축사로 변한 순교자의 생가 터를 그들과 함께 바라보며 나는 교회가 그들에게도 큰 죄를 지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순교자 못지않게 그들에게도 죄를 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축사로 변한 순교자의 생가 터를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그들은 생가 터를 팔 때 순교자의 집을 판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순교자의 집이 아니라 자신들이 살던 집을 필요에 의해 팔았을 뿐인데 이제 보니 순교자의 집을 팔아버린 셈이 된 것이다. 순교자의 삶에 무관심은 그대로 그의 후손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났고 이들 후손에 대한 무관심은 그대로 순교자의 삶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순교자의 생가 터가 복원된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순교자의 후손들은 순교자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이 사실에 마음을 아파해야 할 사람은 그들에 앞서 교회이어야 한다. 그 집이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가도록 교회는 의식 없이 바라보기만 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후손들은 강 건너 도둑골에 쓸쓸히 묻힌 순교자의 무덤을 찾아 해마다 성묘를 했을 것이다. 그때 그들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교회 때문에 목숨을 잃은 순교자 아버지 할아버지의 무덤을 찾는 그들은 무심한 교회에 대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그들의 삶이 가난해진 것도 순교자 때문인데 교회는 그들에게 위로의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았다.
교회가 순교의 의미를 마음에 새겼다면, 그들을 시성하겠다는 마음이 진정 순교의 마음에서 우러나왔다면 후손들이 그 집을 팔고 떠나려고 했을 때 나서서 그 집을 거두어 보존하도록 해야 했다. 그런데 교회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순교자의 집이 팔린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 집이 축사로 변한 것은 후손들의 잘못이 아니라 교회의 무관심이었다.
후손들을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생가를 판 것은 그들이 아니라 우리였다. 교회였다. 우리가 팔았고 교회가 팔았다. 그들이 교회에 미안해할 것이 아니라 교회가 그들에게 사죄해야 한다. 교회가 그들을 보살피지 못한 것을 죄스럽게 여겨야 한다. 그때 생가를 팔지 않았다면 지금은 훌륭한 성지로 변해 있었을 텐데 하는 원망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그런데 지금도 교회는 여전히 무심하다. 교회는 순교자의 삶이 아니라 그를 성인품에 올리는 데만 관심이 있다. 그게 순교자가 원하는 일인 것처럼.
시성시복에 대하여
1. 지금 우리 교회는 그분의 삶을 뒤돌아보기보다는 그분이 순교하였다는 사실만 부각시키며 그들을 시성하는데 너무 힘을 쏟는다는 생각이 든다. 삶이 없는데 어떻게 순교가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가 그분의 순교를 기억하면서 시성하고자 애를 쓴다면 순교에 이르기까지의 그분의 삶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그분이 성인품에 오른다면 순교하기까지의 그분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이다. 순교자의 삶에는 관심이 없고 그를 성인품에 올리는 것으로 순교자에 대한 예를 다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어쩌면 축사로 변한 순교자의 생가 터가 그대로 지금 우리 교회의 모습인 것 같아 때로는 슬픔을 느낀다. 겉은 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는 모습, 복음화를 외치지만 복음의 내용을 모르는 모습, 이것이 어쩌면 우리의 모습이다. 한국교회가 지금 추진하고 있는 124명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성 시복 이 성취되어 124명의 순교자가 탄생한다면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성인을 보유하는 나라가 된다. 이로써 우리 선조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되었다고 자부심을 가진다면, 시성이 이 자부심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부끄러운 그들의 후손이 될 것이다. 그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은 그들을 성인품에 올리고 이를 기뻐하는 우리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도 그들처럼 순교의 정신으로 세상을 살기를 바란다. 순교하기까지 산 그들의 삶을 우리도 살기를 원한다. 이 운동이 진심이기 위해는 순교자의 생가가 축사가 되도록 몰랐던 우리의 신심을 부끄럽게 여기며 속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시성시복을 위한 기도보다 우리 교회에 더 절실한 것은 그들이 산 순교의 삶을 사는 것이다. 그들이 우리의 선조라는 자랑이 아니라 그들에게 부끄러움 없는 후손이 되는 것이다.
순교는 아무나 하지 못한다. 생사를 초월하여 삶을 사는 자만이 순교를 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가 그런 삶을 살기를 바란다. 돈과 권력과 명예와 인기에서 자유로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 삶만이 참된 삶이고 복음화된 삶이라는 것을 깨닫기를 바란다. 우리의 자부심과 기쁨은 그들을 성인품에 올린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처럼 순교의 삶을 살겠다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순교자를 현양하면서 자문해야 할 것은 나도 저 순교자들처럼 교회를 위하여 우리 사회를 위하여 조국을 위하여 순교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2. 성인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성인품에 올랐기에 그들이 성인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성인품에 오르지 아니하여도 성인이다. 성인으로 산 그들의 삶을 후예들이 존경하고 추앙하는 것을 보고 교회가 그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가 그들을 시성하겠다고 열성을 피우는 것을 보면 일단 성인품에 올려놓고 성인으로 모시겠다는 마음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 같아 걱정스럽기도 하다. 우리가 시성을 위한 기도를 바친다면 우선적으로 그들의 삶을 본받으며 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순교자 신석복을 진정 성인으로 모시고자 한다면 그분의 일생을 존경하는 마음이 우선적으로 우리에게 일어야 한다.
그래서 질문이다. 순교자 신석복은 정말 나에게, 우리에게 성인인가? 성인이라면 그분의 어떤 면 때문인가? 우리는 순교에 이르기까지 그분의 삶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분이 어디서 태어나 어떤 경유로 신자가 되었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분의 생가가 축사로 변하도록 우리는 몰랐다. 우리의 마음은 그분을 아직 성인으로 모시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마음으로는 그분을 성인으로 모시지 않으면서 성인품 올리는 일에만 매달리는 것은 그분이 시성 시복되고 나면 그분의 성인됨을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는 모순이다. 그를 시성하겠다는 우리의 마음이 진심이라면 성인품에 오르지 아니하여도 우리는 그들을 성인으로 공경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그들을 성인으로 받들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삶에 무관심했던 우리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순교자 신석복이 시성되는 날을 기뻐하기 전에 그의 삶의 터가 축사로 변하여 냄새를 피우도록 몰랐다는 사실을 먼저 부끄러워해야 한다. 순교자를 성인품에 올리기 위해 기도를 독려하면서도 그가 태어나고 살고 신앙생활을 하던 집을 냄새나는 축사로 방치한 것을 속죄해야 한다. 우리가 정말로 순교자가 성인품에 오르기를 원한다면 그분의 삶도 함께 기려야 할 것이다.
성인들이여 우리를 부끄럽게 하여 주십시오. 당신처럼 순교의 삶을 살 마음은 없이 당신을 성인품에 올리면 당신들도 기뻐하리라 생각하는 우리의 속된 마음, 명예욕과 허영에 젖어 있는 우리들을 부끄럽게 하여 주십시오.
우리가 오늘 그들을 성인품에 올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면 그들이 산 삶을 우리가 오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순교의 정신으로 살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기 위해서이다.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도 이것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성인품에 오르는 것보다 우리가 그들의 삶을 본받아 순교의 삶을 사는 것을 더 원할 것이다. 순교할 준비 없이 당신들을 성인품에 올리는 것이 우리의 과제일 수 없다.
3. 시성의 기도가 진심이기 위해서 순교자의 삶을 축사에 버려둔 우리의 부끄러운 마음을 먼저 고백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 이곳에 우리의 손으로 순교자의 성전을 세우고자 한다면, 순교자의 순교를 영웅적으로 기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순교자와 그들의 후손에 무심했던 우리의 죄스런 마음을 고백하면서, 죄 없으면서도 우리를 위해 당신을 속죄의 제물로 바치신 그리스도를 따라 순교하신 순교자의 삶을 우리의 삶에 기억시키기 위해서이다. 명례는 우리에게 신앙이 무엇인지를 다시 일깨워 줄 것이다. 우리가 순교의 정신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해 줄 것이다.
결론
1. 2011년은 우리에게 의미 있는 해가 될 것이다. 2010년 말 매입 한 축사가 금년 4월 중순경 이전을 완료하고 6월 초순경엔 축사 건물이 완전 철거되었다. 6월 6일에는 축사 주인이 살던 집을 사제관으로 개보수하여 제가 입주했으며, 6월 10일에는 안명옥 주교님께서 여러 후원회 회원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순교자의 생가 터와 사제관을 축복하였다. 그전 2월 24일에는 명례성당이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526호로 지정되었다. 이 모든 일이 순교자 와 신앙선조들이 묵묵히 이 땅을 지켜 왔고, 그 정신을 이어받고자 후원회 회원이 되신 여러분들께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성으로 후원 해주신 덕분이라 생각한다. 자발적으로 후원회에 가입해주신 여러 회원들의 도움으로 순교자의 생가 터를 매입한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순교자의 영성과 복음의 향기가 이곳 명례 언덕에서부터 온 누리로 퍼져 나갈 수 있도록 명례동산을 아름답게 꾸미는 일이다. 우리가 순교자의 생가 터를 성지로 조성하는 것은 이곳에 순교자가 살았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분의 순교 영성을 오늘에 살리면서 우리 자신과 이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해서이다. 명례 언덕에 기념 성당만 우뚝 서고 복음화의 일이 뒷전으로 밀린다면 성전이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명례 성지를 성역화하고자 하는 것은 이 시대가 순교자의 정신과 영성을 절실히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가 진정 남을 위하여 자기를 희생시키는 누룩과 소금의 역할을 느끼는 공간으로 새롭게 탄생하기를 바라면서 우리는 명례를 성지로 가꾸고자 한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얻은 부를 가난한 이들과 나누고,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으로 얻은 명예를 천대 받는 이들과 나누며, 그들 안에서 우리에게 평화와 행복과 기쁨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하고,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비우고 나누고 희생하는 삶을 사는 기도를 바치는 성지로 꾸미고자 한다. (그러므로 이곳에 세워질 성전은 속죄의 성전이 될 것이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심포지엄을 가지는 것은 이곳 명례에서 우리들 신앙의 원동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이곳 명례가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출발하는 원천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청하기 위해서이다. 안락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이 마구간처럼 변해버린 우리들 마음이 진정한 신앙인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모태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여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는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 모두를 우리 신앙의 조상들이 보여준 신앙의 원천으로 초대하고자 한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은 단순히 교회를 배신하지 못하여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다. 그들에게 순교는 인생의 목표였다. 그들은 순교(십자가)를 향하여 살았다.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침으로써 생사를 초월하여 계시는 생명의 창조주 하느님을 만났다. 그들은 그리스도처럼 생명을 빼앗는 폭력에 저항하지 않고 오히려 죽음을 통하여 자신을 성부께 봉헌하였다. 순교자의 죽음은 그리스도의 죽음에 실제로 참여한다. 순교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부께 자기를 봉헌하는 행위이다. 순교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묻히며 함께 부활하게 될 것이다(로마 6:3-11).
2. 우리는 이 땅의 복음화를 기원하며 지난 3월 3일 명례복음화학교를 열었다. 목요반과 토요반으로 나누어 함께 공부하고 있다. 이 학교가 우리 모두의 관심이 될 수 있도록 기도하여 주시기 바란다. 그동안 성지조성을 위해 기도하며 후원해주신 후원회 회원 여러분에게 그리고 여러 봉사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3. 명례 성지를 위하여 후원회 회원 또는 자원봉사자가 되어 주신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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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신석복이 순교하자 가족들이 시신을 명례로 모셔와 마지막으로 그 살던 집을 돌아보고 강 건너 장지로 옮기려 하였는데 동네 어른들이 이조차 반대하여 고향에 들리지 못하고 강을 건넜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있게 들리는군요. 좋은 지적에 감사합니다. (이럴 경우 장지를 왜 순교자와 아무 연고가 없는 강 건너 도둑골로 정했을까 하는데에는 여전히 의문이 남지만.) 그런데 주선씨는 누구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