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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우스의 도시, 디온에서 마케도니아인 조르바를 만나다. (하편)
그를 따라서 디온 고고학박물관 안으로 들어서니 퇴근하지 못한 4-5명의 박물관 여직원이 데스크에서 우리부부를 맞이했다. 나는 “늦어서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정중히 머리 숙여 인사를 했다. 박물관 여직원 한명이 “두 분을 환영합니다. 천천히 구경하세요.”하고 말하며 1층 전시실을 손으로 가리켰다. 나는 거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나지막한 아랫계단으로 이어진 1층 전시실로 들어섰다. 디온 고적공원과 이곳에서 가까운 퓌드나(Pydna)에서 발굴된 유물을 주로 전시하고 있는 전시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으나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이곳만의 독특한 유물이 몇 가지 있다. 이를 소개하는 것으로 디온 여행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의 강은 강의 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피에리아(Pieria) 지방의 디온에는 강의 신, 바퓌라스(Baphyras)와 관련된 다음과 같은 신화가 전해져 내려온다.
고대 디온의 동쪽 성벽을 오른쪽에 끼고 흘렀던 헬리콘 강(Helicon river)은 이곳에서 가까운 올림포스 산에서 발원하여 마을이 있는 평원을 요리저리 지나 테라마이코스 만으로 흘러든다. 그 옛날에는 수량도 풍부해서 디온 사람들이 해운에 이용했지만, 지금은 수량도 크게 줄고 물줄기도 바뀌어 지금은 시냇물처럼 흐르고 있다. 로마제국의 전성기인 기원후 2세기경 그리스 출신의 여행가였던 파우사니아스(Pausanias)에 따르면, 디온 사람들은 이 강을 두 가지 이름으로 불렀는데, 올림포스 산에서 디온 마을 근처까지는 헬리콘 강이라 부르고 디온 마을에서 테라마이코스 만까지는 바퓌라스 강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렇게 하나의 강을 두고 구간에 따라 나누어 부르게 된 데는 고대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Orpheus)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14. 강의 신, 바퓌라스의 두상 고대 그리스의 강은 강의 신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올림포스 산에서 발원하여 피에리아(Pieria) 지방을 흐르는 강의 이름은 헬리콘 강이다. 이 강 이름이 디온에서 바퓌라스 강으로 불리게 된 데는 그리스 신화에서 오르페우스의 죽음과 관련이 있다고 전해내려 온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오르페우스는 제우스와 기억의 여신, 므네모시네 사이에서 태어난 9명의 무사이 가운데 한명으로 서사시의 후원자였던 칼리오페(Calliope)와 트라키아 지역의 왕이었던 오이아그로스(Oeagrus)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었다. 그는 음악의 신인 아폴로한테서 리라 연주를 배웠는데, 그의 노래와 연주는 너무나 아름다워서 숲속의 온갖 동물이 모여들어 그의 노래를 들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나무나 바위까지도 그의 주위에 모여 춤을 추었다고 한다. 아르고스 원정대에 참가했다가 돌아온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Eurydice) 요정과 사랑에 빠져 결혼했다. 결혼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리디케는 산책을 나갔다가 자신에게 반하여 달려드는 양치기 아리스타이오스를 피해 도망치다 그만 뱀에게 물려 죽었다. 오르페우스가 그녀를 애도하는 곡을 하자 슬퍼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오르페우스는 아내를 이승으로 다시 데려오겠다고 결심하고 저승으로 내려갔다. 오르페우스는 저승의 강의 뱃사공 카론(Charon)을 리라 연주로 감복시켜 그의 배를 타고 스튁스(Styx) 강을 건넜다. 저승의 문을 지키는 머리가 셋 달린 사나운 개인 케르베로스를 음악으로 울려서 복종시키고 저승의 왕인 하데스와 그의 아내인 페르세포네에게 아내를 돌려줄 것을 애원했다. 오르페우스의 연주를 듣고 하데스와 페르세포네는 물론 복수의 여신 네메시스까지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페르세포네는 에우리디케가 그의 뒤를 따라갈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그 대신 이승으로 나가기 전까지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고 일렀다. 오르페우스는 약속을 지켜 지상으로 나가는 출구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고 올라갔다. 출구에 이르러 지상의 빛이 보이자 이제 다 왔다고 생각한 오르페우스는 그만 약속을 잊고 에우리디케가 잘 따라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았다. 미처 명계를 다 빠져나오지 못한 에우리디케는 다시 저승으로 끌려 들어갔다. 오르페우스가 급히 손을 뻗어 아내를 붙잡으려 했으나 허공만 휘저을 뿐이었다. 두 번째로 아내를 잃은 오르페우스는 이레 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비탄에 젖었다.
15. 저승을 빠져 나가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 (에드워드 포인터Edward Poynter 그림, 1862년). 그림처럼 부부가 손을 꼭 붙잡고 나갔다면 오르페우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아내보다 몇 걸음 앞장서서 걸어 나갔음에 틀림없다.
지상으로 나온 오르페우스는 자신의 실수로 아내를 잃었다는 상실감에 빠져 여자를 일체 멀리하고 태양신 아폴로를 제외한 모든 신들의 경배를 경멸했다. 어느 이른 아침에 그는 신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트라키아의 판가이온 산에 있는 디오니소스 신전에 갔을 때, 디오니소스 신을 무시하고 아폴로가 가장 위대한 신이라고 말했다. 이에 화난 디오니소스는 자신을 추종하는 마에나드(Maenad)들에게 오르페우스를 덮치게 해 그를 여덟 조각으로 찢어 죽였다. 마에나드들은 오르페우스의 머리와 리라를 헤브로스 강(Hebrus river)에 던졌다. 오르페우스의 머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강을 따라 흘러 바다로 나갔고 레스보스 섬의 해안에 당도했다. 주민들은 예를 갖추어 오르페우스의 머리를 묻었고 그 후 레스보스 섬은 오르페우스의 가호에 의해서 많은 문인을 배출하게 되었다.
오르페우스의 죽음을 측은하게 여긴 제우스는 그의 리라를 건져 올려 하늘에 안치하여 별자리로 만들어 주었는데, 이것이 우리가 속한 북반구에서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초저녁에 은하수 서쪽에서 볼 수 있는 별자리인 거문고자리(Lyra constellation)이다.
16. 거문고 자리 북반구에서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초저녁에 은하수 서쪽에서 볼 수 있다.
또 다른 전승인 파우사니아스의 기록에 의하면, 디온이 있는 피에리아(Pieria) 지방의 여인들이 자신들의 구애를 무시한 오르페우스에 분노하여 그를 죽였다고 한다. 그를 살해한 여인들은 손에 묻은 오르페우스 피를 헬리콘 강에서 씻으려 했으나 강의 신은 살인의 흔적을 지우려는 행위에 동참하지 않았다. 헬리콘 강은 땅 밑으로 들어가 사라진 후, 조금 떨어진 디온에서 다시 솟구쳐 나와 바퓌라스 강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어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고 전한다.
디온에는 이집트의 대지모신인 이시스 여신을 모신 신전이 바퓌라스 강 옆에 자리 잡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에서 이집트 여신을 숭배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헬레니즘 시기의 그리스 역사를 잠깐 훑어봐야 한다. 기원전 330년,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우스 3세를 무찌르고 이집트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페르시아 제국의 광활한 영토를 그대로 이어 받았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1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큰 땅을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이어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자신의 후계자를 정하지 못한 채 바빌론에서 갑자기 사망하였다. 대왕이 지배하였던 그리스와 옛 페르시아 제국의 영토는 디아도코이(Diadochi.후계자)로 불리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부하장군에 의해서 네 조각으로 분할되었다. 그리스, 이집트,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에 각각 세워진 그리스계 왕조에 의해 전파된 그리스 문명은 토착문명과 융합되어 헬레니즘이라는 새로운 인류문명을 탄생시켰다.
디아도코이 가운데 한 명으로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의 시조가 된 프톨레마이오스 1세는 성공적인 통치를 위해 토착민인 이집트인과 이주민이자 지배계급인 그리스인의 통합이 필요했다. 그는 그리스 신화에서 지하세계의 왕이자 풍요를 상징하는 하데스에 비견되는 이집트의 오시리스(Osiris)와 신성한 소 아피스(Apis)를 결합시켜 세라피스(Serapis)라는 새로운 신을 만든 후, 오시리스의 아내이면서 태양신 호루스(Horus)의 어머니이자 모든 신들의 어머니인 이시스 여신과 함께 그의 백성들이 숭배하도록 하였다. 이집트 신인 세라피스와 이시스 숭배는 당시에 그리스인이 지배하였던 지중해 세계로 확산되었고, 지역에 따라서 이시스 여신은 데메테르, 아테나, 니케, 튀케, 아프로디테, 혹은 아르테미스와 같이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름으로 불리었다. 그리스인들이 이시스 여신을 열렬히 숭배하게 된 것은 이시스 여신이 갖고 있는 그리스 신들의 여러 속성 때문이었다. 즉, 그녀는 푸르른 신록의 여신, 곡식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이었고, 억울하게 죽은 남편 오시리스를 부활시킨 마법과 지혜의 여신이었으며, 처녀로써 아들 호루스를 잉태한 생명의 여신이었고, 왕권수호의 여신이자 하늘과 우주를 지배하는 여신이었으며, 바다를 항해하는 배를 안전하게 인도하는 항해의 여신이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헬레니즘 문화가 로마에 흡수되었을 때, 이시스 컬트는 로마 종교의 일부분이 되었다. 여신은 로마제국의 전 영토에서 숭배되었으며, 로마제국의 초기 황제였던 칼리굴라, 네로, 도미티아누스와 2세기에 들어 지중해 연안의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도록 만들었던 트라야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이시스 여신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4세기 후반인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이시스 숭배를 공식적으로 금지하면서 이시스 신전은 파괴되거나 교회로 개조되었다. 이후 이시스 숭배는 로마인의 생활에서 차츰 멀어졌지만, 모든 신의 어머니이며 오시리스를 부활시키고 호루스를 보호하여 왕좌를 되찾도록 한 마법의 힘과 지혜를 갖춘 이시스 숭배는 기독교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다고 한다.
17. 디온의 이시스 신전(원경) 기원후 2세기 로마제국의 최전성기 때 이집트 최고 여신을 모신 신전이다. 중앙의 이시스-로키아 신전의 왼쪽과 오른쪽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이시스-튀케와 아프로디테 여신을 모신 지성소가 있었다. 가운데 수로는 이시스 여신의 고향인 이집트 나일 강을 상징한다. 그리스인들이 이시스 여신을 열렬히 숭배하게 된 것은 이시스 여신이 갖고 있는 그리스 신들의 여러 속성 때문이었다.
디온의 이시스 신전은 이곳에서 가장 늦게 건립된 신전으로 기원후 2세기 로마제국의 최전성기 때 이집트 여신을 모시기 위해 지은 신전이다. 정식 명칭은 이시스-로키아 지성소(Sanctuary of Isis-Lochia)로 로키아는 아이를 출산한 젊은 부인의 수호자를 일컫는다. 이 신전 터에서 기원전 3세기에 제작된 아르테미스-에일레이튀이아(Artemis-Eileithyia) 여신에게 봉헌된 명문이 발견되었다. 그리스 신화에서 에일레이튀이아는 출산을 돕는 여신이다. 그런데 처녀성의 여신 아르테미스도 종종 출산의 여신인 에일레이튀이아의 속성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로 미루어 볼 때, 2세기 무렵 이시스 컬트가 유행하면서 원래 이곳에 세워진 아르테미스-에일레이튀이아 신전이 이시스-로키아 신전으로 대체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한다. 이시스 신전은 출입문이 동쪽을 향하는 세 개의 지성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정면에서 신전을 바라봤을 때, 한가운데에 이오니아식 기둥 네 개가 삼각형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테트라스타일 포르티코(Tetrastyle Portico)가 있는 이시스-로키아 지성소가 있었고, 오른쪽과 왼쪽에 이보다 규모가 작은 이시스-튀케(Isis-Tyche) 지성소와 아프로디테(Aphrodite Hypolympidia) 지성소가 있었다. 신전 정면에는 제단을 두었고, 제단 앞쪽에는 이시스 여신의 고향인 이집트의 나일강을 상징하는 수로를 동서방향으로 길게 배치하였다.
18. 디온의 이시스 신전(근경) 한가운데에 있는 이시스-로키아 신전은 이오니아식 기둥 네 개가 삼각형 지붕을 떠받치고 있는 테트라스타일 포르티코가 있었지만, 현재는 기둥을 떠받쳤던 기단부만 남아있다. 신전의 문간방인 프로나오스로 연결되는 계단에서 순례자의 발자국을 새긴 대리석 판석과 이시스-데메테르의 부조가 발견되었고, 계단 아래에서 하르포크라테스(아기 호루스) 석상이 발견되었다. 발견 장소에는 현재 모조품이 전시되어 있다.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석상은 기부자인 '루리아 알렉산드라'라는 여인의 석상이다.
이곳 이시스-로키아 신전의 프로나오스(Pronaos·고대신전에서 성소 앞 문간방)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베마타(Bemata)라 불리는 순례자의 발자국을 새긴 대리석 판석과 이시스 여신을 새긴 부조가 발견되었다. 순례자의 발자국을 새긴 대리석 판석은 기원 후 2세기 유물로 발자국 아래에 명문을 살펴보면, 작은 석판에는 사제의 이름이, 큰 석판에는 여인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곳의 베마타는 좌우 발자국의 크기가 달라 마치 부부의 발자국을 하나씩 새긴 듯하여 눈길을 끈다. 베마타는 이곳 말고도 스페인 세비야 박물관에도 여러 개가 전시되어 있는데 여기선 좌우 발자국의 모양과 크기가 거의 똑같다. 디온의 순례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 같은 잉꼬부부였을까?
19. 순례자의 발자국을 새긴 대리석 판석 순례자의 발자국을 새긴 대리석 판석을 ‘베마타’라고 한다. 디온의 베마타는 왼쪽과 오른쪽의 발자국 크기가 달라 마치 부부의 발자국을 하나씩 새긴 듯하여 눈길을 끈다. 디온의 순례자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와 같은 잉꼬부부였을까?
기원전 헬레니즘 시기에 제작된 이시스 여신의 부조를 살펴보자. 여신이 입은 옷의 오른쪽에 독특한 매듭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시스의 매듭(Knot of Isis)이라 불리는 타이트(Tyet)이다. 따라서 이 여신은 이시스임에 틀림없다. 또 여신은 오른손으로 보리나 밀과 같은 곡식 단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홀장을 들고 있다. 곡식 단과 홀장은 데메테르의 상징물이므로 이 여신은 이시스-데메테르라 불린다. 부조의 왼쪽 상단에는 다음과 같은 명문이 새겨져 있다. “세라피스, 이시스, 아누비스를 경배하며, 칼리마코스(Kallimachos)와 크레타(Kleta)는 방랑하는 여신(Wandering goddess)에게 감사의 공물을 바친다.” 세라피스, 이시스, 아누비스는 지중해 연안의 헬레니즘 왕국과 뒤를 이은 로마제국에서 널리 숭배된 이집트 삼신이다. 명문에서 언급한 방랑하는 여신은 이시스 또는 데메테르를 지칭한다. 그리스의 데메테르-페르세포네 신화에는 이보다 훨씬 오래된 이집트의 이시스-오시리스 신화에서 일부 줄거리를 차용한 듯한 장면이 몇 군데 나온다. 모든 신의 어머니인 이시스는 억울하게 죽은 남편 오시리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이집트 전역과 지중해 연안을 방랑하였고, 대지와 풍요의 여신 데메테르는 염라대왕 하데스에게 납치된 그녀의 딸 페르세포네를 찾기 위해 세상을 방황했다.
20. 이시스-데메테르 여신의 부조 여신이 입은 옷의 오른쪽에 독특한 매듭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이시스의 매듭(Knot of Isis)이라 불리는 타이트(Tyet)이다. 따라서 이 여신은 이시스임에 틀림없다. 또 여신은 오른손으로 보리나 밀과 같은 곡식 단을 들고 있고 왼손에는 홀장을 들고 있다. 곡식 단과 홀장은 데메테르의 상징물이므로 이 여신은 이시스-데메테르라 불린다. 사진 왼쪽의 네모 안에 그린 그림은 이시스의 매듭이라 불리는 타이트를 보인 것이다.
이시스 신전의 계단 앞에서 하르포크라테스 석상이 발견되었다. 하르포크라테스(Harpocrates)는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만든 헬레니즘 종교에서 침묵과 비밀의 신으로, 그 이름은 ‘아기 호루스’를 뜻하는 이집트어 하르-파-케레드(Har-pa-khered) 또는 하루-파-케레드(Haru-pa-khered)가 그리스화한 것이라고 한다. 아기 호루스는 고대 이집트에서 매일 새벽에 솟아오르는 새로 태어난 태양을 뜻한다. 호루스는 이집트의 대지모신인 이시스와 이집트 신이자 최초의 파라오인 오시리스의 아들로 아버지를 죽인 세트(Set)와 격렬한 전쟁을 치러 승리를 거머쥐고 이집트의 지배자가 되었다. 모든 이집트의 파라오는 승리의 호루스가 환생한 것으로 여겼다. 하르포크라테스(아기 호루스)는 벌거벗은 소년이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댄 모습으로 그려진다. 마치 “쉿! 조용히 하세요” 하는 표정을 짓고 있다.
21. 하르포크라테스 하르포크라테스란 ‘아기 호루스’란 뜻이다. 그리스계 이집트 왕조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만든 헬레니즘 종교에서 침묵과 비밀의 신이다. 아기 호루스는 벌거벗은 소년이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갖다 댄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시스-튀케 지성소에서 발굴된 이시스-튀케 또는 이시스-포르투나 여신상은 기원후 2세기 로마시대 작품이다. 여신은 왼손으로 풍요를 상징하는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Cornucopia)를 들고 있다. 이집트 최고의 여신 이시스의 이름 뒤에 기회, 운, 운명을 상징하는 그리스의 튀케 또는 로마의 포르투나 여신의 이름이 붙은 연유를 살펴보자. 이집트 신화에서 이시스 여신은 암소와 배의 방향타인 키와 관계가 있다. 그녀는 풍요와 재탄생을 가져다주는 신성한 암소이자 운명을 인도하는 여신이었다. 고대 이집트 신전의 벽면에 새겨진 오래된 이집트 텍스트에 의하면, 이시스 여신은 그녀의 신성한 키를 사용해서 인생이라는 배를 저어가는 이시스 펠라기아(Isis Pelagia)로 표현됐다. 이시스 펠라기아는 바다의 이시스(Isis of the sea)란 뜻이다. 모든 뱃사공들은 지중해를 건널 때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이시스 여신의 안내와 보호를 기원했다. 방향키라는 심볼은 지중해 세계에서 꽤 오랫동안 풍요와 번영을 상징하기도 했다. 헬레니즘 세계에서 방향키는 행운을 뜻하는 아가테 튀케(Agate Tyche· 영어로 Good Fortune)의 상징이었고, 아가테 튀케의 로마식 이름이 포르투나 여신이다. 그녀는 로마세계에서 매우 인기가 좋았다. 거의 모든 로마황제들은 제국의 영토에 행운을 가져다주길 바라면서 자신의 잠자리에 포르투나 이미지를 부적처럼 지녔다고 한다.
포르투나를 상징하는 심볼은 여신이 지배하는 세계를 뜻하는 ‘운명의 바퀴’, 풍요를 상징하는 ‘코르누코피아’, 운명을 결정하는 ‘방향키’, 도시의 번영을 상징하는 ‘성벽관(Mural crown)’이다. 포르투나가 특히 ‘이시스 포르투나’로 묘사될 때, 여신은 이집트의 신성한 암소 여신(the Divine Cow Goddess)인 하토르 여신이 썼던 양쪽으로 높이 치솟은 소뿔의 한가운데에 태양 원반이 있는 왕관을 썼다. 즉, 이시스 포르투나 여신상에서 풍요를 뜻하는 이집트의 암소와 행운을 상징하는 방향키가 하나로 통합된다. 튀케와 마찬가지로, 포르투나는 종종 장님으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포르투나 여신이 인간에게 주는 운이라는 선물이 행운이 될 수도 있고 액운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 모든 인간은 자신만의 포르투나를 갖는다.’라는 속담도 생겨났다. 사실 이시스가 튀케와 포르투나와 강하게 결속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시스는 장님하고는 거리가 멀다. 그녀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고 그녀를 숭배하는 자들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아차리는 여신이다. 헬레니즘 시대의 그리스인과 그 뒤를 이은 로마인들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장님 튀케, 혹은 장님 포르투나에게 소원을 빌기보다는 이시스 튀케, 또는 이시스 포르투나에게 빌음으로써, 자신들이 바라볼 수 있는 운명을 소원하였다. 즉, 그들은 숙련된 운명의 항해사이자 현명하고 친절한 이시스 여신이 방향키를 움직이는, 보다 상서로운 운명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22. 이시스-튀케 여신상 (왼쪽) 디온 박물관에 전시된 이시스-튀케 여신상. 왼손에 풍요의 뿔을 들고 있다. (오른쪽) 이시스-포르투나 여신을 그린 프레스코 벽화(이탈리아, 폼페이) 여신은 왼손으로 풍요의 뿔을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 운명의 방향키를 조정하고 있다.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은 미래를 알 수 없는 장님 튀케, 혹은 장님 포르투나에게 빌기보다는 이시스 튀케와 이시스 포르투나에게 빌음으로써, 자신들이 내다볼 수 있는 운명을 소원하였다. 그녀는 불교에서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들어주고, 자비를 베풀며, 소원을 들어주는 보살인 십일면 관음보살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어찌 좋아하지 않을 수 있을손가?
이시스-로키아 신전의 왼쪽에 있는 아프로디테 신전에서 기원전 150~100년 사이에 제작된 아프로디테 하이포림피디아(Aphrodite Hypolympidia) 여신상이 발굴되었다. 하이포(Hypo)란 영어로 아래(under)를 뜻하므로 아프로디테 하이포림피디아는 올림포스 산 아래에서 경배되는 아프로디테(Aphrodite worshipped under Mount Olympus)란 의미이다. 기원후 2세기에 새로 제작된 좌대에 새겨진 명문에는 디온에 정착한 로마 이주민과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어 자유시민이 된 안테스티아 이우쿤다(Anthestia Iucunda)란 이름의 여인이 아프로디테 여신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이곳에 아프로디테 지성소를 꾸미면서 새로 만든 좌대 위에 오래전에 만든 아프로디테 여신상을 옮겨놓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랑과 미의 여신은 허리를 살짝 옆으로 틀어 풍만한 엉덩이를 한쪽으로 내밀음으로써 여성스러움을 보여주고 있지만, 손가락을 펼친 왼손을 허리 아래 엉덩이에 당차게 얹고, 분실된 오른손은 머리 위로 높게 쳐 든 듯한 모습을 하고 있어 우리가 평소에 알던 섹시한 모습의 아프로디테가 아니라 마치 아테나 여신처럼 당찬 모습을 하고 있다. (아마도, 데메테르 여신이 들고 있는 홀장처럼 기다랗게 생긴 장식 막대기를 오른손에 들고 있었을 것이다.) 여신은 가슴 바로 아래에서 끈으로 묶은 얇은 키톤(Chiton)을 입고, 왼팔에 걸친 히마티온(Himation·망토)은 허리를 한번 크게 휘감은 후 여러 겹으로 주름이 잡힌 채 그녀의 두 다리 사이로 내려간다. 이러한 모습의 석상을 티에폴로 타입의 아프로디테(Tiepolo type Aphrodite)라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기에 널리 유행한 양식이다. 이 양식의 원형은 아테네 아고라에서 발굴된 아프로디테 여신상이다.
23. 아프로디테 하이포림피디아 여신상 (왼쪽) 디온 박물관에 전시된 아프로디테 여신상(기원전 2세기), (오른쪽) 아테네 아고라 박물관에 전시된 아프로디테 여신상(기원전 4세기). 아테나 여신처럼 당찬 모습의 아프로디테 여신상을 '티에폴로 타입의 아프로디테'라고 하는데 헬레니즘 시기에 널리 유행한 양식이다. 이 양식의 원형은 아테네 아고라에서 발굴된 아프로디테 여신상이다.
신에 대한 오만이나 무례, 지나친 자신감을 그리스어로 휘브리스(Hybris)라고 하는데, 네메시스는 휘브리스에 빠진 인간에 대하여 응징과 복수를 하는 정의의 여신이다. 네메시스란 이름 자체도 그리스어로 ‘인과응보’를 뜻하는 네메인(némein)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아테네에서 동북방향으로 20km를 나아가면 제1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터로 유명한 마라톤 평원이 나온다. 이곳에서 계속해서 12km를 더 나아가면 에우리포스 해협(Euripus Strait)에 접한 고대도시, 람누스(Rhamnous)가 있다. 기원전 5세기 무렵, 이 도시에 네메시스 여신을 모신 큰 신전이 세워졌기에 그녀는 람누스의 여신이란 뜻의 람누시아(Rhamnousia)로 불리기도 했다. 여신의 상징물은 사과 나뭇가지, 고삐, 채찍, 칼, 천칭, 배의 방향타 및 바퀴이다. 따라서 그녀는 바퀴, 방향타, 천칭, 또는 칼을 들고 있거나 날개달린 신으로 묘사되었다. 여기서, 바퀴와 방향타는 그녀가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녀는 천칭을 사용해서 인간의 행운과 불행의 정도를 측량하고 지나친 행운으로 인해 휘브리스에 빠져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을 응징하였는데, 그녀의 날개는 여신의 복수가 신속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또한 그녀는 인간이 신의 섭리, 질서, 공정함과 같은 신의 정의를 잃었을 때도 응징을 가했기에, 고대 람누스의 시민들은 네메시스 신전 바로 옆에 정의의 여신 테미스(Themis) 신전도 함께 세웠다. 근세 들어 제작된 테미스 여신과 네메시스 여신상은 둘 다 한손으로는 천칭을 들고 있고, 또 다른 손으로는 장검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되어 우리를 헷갈리게 만든다. 띠로 눈을 가린 모습으로 등장하는 것은 요즘의 일이라고 한다.
24. 네메시스 여신을 새긴 부조 여신의 왼손에는 인간 운명의 바퀴를, 오른손에는 천칭을 들고 있다. 그녀는 천칭을 사용해서 인간의 행운과 불행의 정도를 측량하고 지나친 행운으로 인해 휘브리스에 빠져 신의 영역에 도전한 인간을 응징했다.
이시스 신전 터의 북쪽 끝자락에는 좌대에 놓여 있는 커다란 여인상이 있다. 2세기 중엽에 디온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기부자인 루리아 안렉산드라(Loulia Frougiane Alexandra)라는 여인의 석상이다. 여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옷은 고대 그리스의 아르케익 시기부터 헬레니즘 시기(750-30 BCE)까지 남녀가 공통으로 입었던 히마티온(Himation)이라 부르는 의상으로 속옷 격에 해당하는 키톤(Chiton)이나 페블로스(Peplos) 위에 망토처럼 걸쳤다. 이 여인상은 가끔 이시스 튀케 여신상으로 잘못 소개되기도 한다.
25. 기부자 여인상 이시스 신전의 북쪽 끝자락 좌대에 세워져 있다. 2세기 중엽에 디온 주민들이 세운 것으로, 기부자인 ‘루리아 안렉산드라’라는 여인의 석상이다. 여인의 몸을 칭칭 감고 있는 옷은 고대 그리스의 아르케익 시기부터 헬레니즘 시기(750-30 BCE)까지 남녀가 공통으로 입었던 히마티온이라 부르는 의상으로 속옷 격에 해당하는 키톤이나 페블로스 위에 망토처럼 걸쳤다.
올림포스 산을 마주하고 있는 디온의 주인공인 제우스 힙시스토스를 모신 신전(Sanctuary of Zeus Hypsistos)은 데메테르 신전과 이시스 신전 사이에 놓여있다. 힙시스토스는 ‘가장 높은(the highest)’이란 뜻이므로 제우스 힙시스토스는 신들의 왕(God of gods)이란 의미이다. 로마시대에는 주피터 옵티무스 막시무스(Jupitor Optimus Maximus)라고 불렀다. 석상 앞쪽에 있는 기단에는 제우스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황소가 새겨져 있다. 마케도니아 왕들이 전쟁의 승리를 기원할 때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귀국했을 때 제사를 올렸다는 올림피아 제우스 신전(Sanctuary of Zeus Olympios)은 고적공원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로마극장 근처에 따로 있는데, 제단의 길이가 무려 25m에 달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원정을 위한 출정식 때 제우스신에게 희생제물을 바쳤다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26. 제우스 힙시스토스 석상 힙시스토스는 ‘가장 높은(the highest)’이란 뜻이므로 제우스 힙시스토스는 신들의 왕(God of gods)이란 의미이다. 석상 앞쪽에 있는 기단에는 제우스를 상징하는 독수리와 황소가 새겨져 있다.
기원후 2세기에 제작된 레다와 백조Leda and the swan 신화에 바탕을 둔 대리석상도 전시되어 있다. 에로틱한 내용의 이 신화는 본 비반트였던 로마인들이 무척 좋아했는지 레다와 백조를 주제로 한 수많은 프레스코 벽화, 테라코타와 석상을 남겼다. 그리스 신화에서 레다는 스파르타의 왕 틴다레오스의 아내였다. 바람둥이 제우스는 레다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그녀와의 교합을 노리던 제우스는 독수리에게 쫓기는 백조로 변해서 레다의 품에 안겼고 그녀와 교합하는데 성공했다. 제우스와 동침한 그 날 레다는 남편하고도 동침했는데 나중에 알을 두개 낳았다고 한다. 한 개의 알에서 헬레네와 폴리데우케스가 태어났고, 또 하나의 알에서 카스토르와 클리템네스트라가 태어났다. 어머니를 뛰어넘는 그리스 최고의 미녀로 자란 헬레네와 이에 못지않게 예뻤던 자매 클리템네스트라는 나중에 트로이 전쟁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비극의 주인공이 된다.
27. 레다와 백조 대리석상 (왼쪽) 레다의 집에서 발굴된 작품(디온 고고학박물관) (오른쪽) 기원전 1세기 중반 그리스 원작을 복제한 기원후 2세기 로마시대 작품 (베니스 국립고고학 박물관)
템플론(Templon)을 장식했던 칸막이 돌을 구경해 보자. 3세기 중반이후, 로마제국의 국력이 쇠잔해짐에 따라서 그리스 땅에 이웃한 이민족의 침입이나 지진과 홍수와 같은 자연재해로 인해 디온의 위세는 점차 기울기 시작했다. 디온이 마지막으로 영화를 누린 것은 교회가 디온을 주교석으로 임명했던 4세기 무렵이었다. 4-5세기에 걸쳐 디온에 주교 교회(The Episcopal Basilica)가 건설되었다. 비잔틴 교회는 (서쪽방향)출입구-나르텍스(Narthex)-회중석(Nave)-후진(Apse)(동쪽방향)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진에는 성례를 치루는 제단을 두었고 이를 회중석(신도석)과 분리하기 위해 일종의 울타리를 설치했으며 이것을 템플론이라 부른다. 왜 이 울타리를 템플론이라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두어 가지 설이 있다. 그 하나는 그리스 신전을 일컫는 단어인 템플(Temple)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10세기경에 아테네 아고라에 세운 비잔틴 교회인 거룩한 사도교회(Church of the Holy Apostles)의 템플론을 살펴보자. 교회건물의 동쪽 끝에 있는 반원형 부분을 압시스(Apsis·영어: Apse·우리말: 후진)라고 부르는데 이곳에 제단을 두었다. 사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이 제단 앞에 돌 울타리가 쳐진 것을 볼 수 있다. 즉, 제단 앞에 일정한 간격으로 돌기둥이 세워져 있고 돌기둥의 주두(Capital) 위에, 우리네 한옥으로 치면 주심도리에 해당하는, 아키트레이브(Architrave)를 얹어놓은 것이 마치 템플의 일부를 보는 듯하다하여 템플론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템플론의 아래쪽에 문양이 새겨진 칸막이돌이 설치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디온 박물관에 전시된 템플론 칸막이 돌이 바로 이 용도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칸막이 돌에 새겨진 문양은 로마인들이 좋아했던 십자형 꽃문양이다. 앞에서도 이야기를 했지만, 이 꽃문양은 우리네 고려청자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칠보무늬의 원형이다. 필자가 쓴 첫 여행기인 “산딸나무와 터키여행”에서 우리나라 고고학 사상 처음으로 밝혔지만, 우리나라나 중국에서 칠보무늬라 부르는 이 꽃문양은 사실은 로마의 꽃문양이 실크로드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28. 템플론과 칸막이돌 (왼쪽) 10세기경, 비잔틴 제국이 그리스 아테네에 세운 첫 교회인 거룩한 사도교회의 템플론. 템플론은 사제가 제식을 거행하는 제단 영역과 신도들이 앉아있는 회중석을 구분하기 위한 설치물이다. 템플론 기둥 아랫부분에 칸막이 돌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오른쪽 위) 디온 박물관에 전시된 템플론 칸막이 돌에 로마인들이 매우 좋아했던 십자형 꽃무늬가 장식되어 있다. (오른쪽 아래) 우리나라 고려청자에 흔히 사용됐던 칠보무늬를 투각한 고려 청자베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두 문양은 완전 판박이다.
너무 늦은 시각이라, 1층 전시실을 주마간산으로 구경하고 우리는 그만 나갈 요량으로 안내 데스크에 서서 기다리던 박물관 여직원들에게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나서 출입문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런데 여직원 가운데 한명이 살짝 웃으면서 이층에도 전시실이 있으니 더 구경하란다. ‘아니, 이층에도 전시실이 있었어?’하는 생각과 함께 구경하고픈 마음이 순간 일어났지만 이 늦은 시각에 직원들에게 민폐를 너무 끼치는 듯하여 나는 괜찮다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 여직원은 다시 손으로 2층을 가리키며 천천히 구경해도 된다며 한 번 더 관람을 권하는 것이었다. 두 번씩이나 권유를 받았기에 나는 미안함을 거두고 그녀에게 정말 고맙다고 말하곤 계단을 통해 전시실로 올라갔다.
이층 전시실도 일층과 마찬가지로 그리 넓지 않은 직사각형 공간이 하나로 탁 틔어 있었고, 아래층과 비슷하게 이런 저런 석상이 진열되어 있었는데, 전시실의 한쪽 모서리 바닥에 널따랗게 펼쳐진 메두사 모자이크가 내 눈길을 끌어 당겼다. 디오니소스가 로마인들의 인생관인 카르페 디엠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이라면, 메두사는 잡귀를 쫒고 액을 막아주는 서양 도깨비였다. 로마인들은 자신의 집을 메두사 또는 디오니소스를 그린 프레스코 벽화나 모자이크로 치장함으로써 그 둘을 자신들 가까이에 두는 것을 좋아했다.
29. 메두사 모자이크 디오니소스가 로마인들의 인생관인 카르페 디엠을 상징하는 신화적 인물이라면, 메두사는 잡귀를 쫒고 액을 막아주는 서양 도깨비였다.
메두사 모자이크 맞은편 공간에 디온 박물관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의 파이프 오르간(Hydraulis)이 전시되어 있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는 디온 박물관에 가면 이 악기 실물을 꼭 봐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는데 막상 박물관에 도착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그리스 보물과 마주치는 순간, 이층 전시실을 보고가라고 거듭 권했던 박물관 여직원이 정말 고마웠다. 이 파이프 오르간은 1992년 여름에 ‘디오니소스의 승리’ 모자이크가 발견된 빌라의 맞은쪽에 있는 2세기말 건물터에서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 오르간은 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반악기이자 현대 서양에서 사용되는 교회 오르간의 선조이다. 디온의 파이프 오르간은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 시기에 알렉산드리아의 기술자였던 크테시비우스(Ctesibius)가 발명한 악기와 매우 비슷하다고 한다. 이 파이프 오르간은 종종 수력 오르간(Water organ)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이 악기가 마치 공기가 아닌 물로 소리를 내는 것으로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30. 디온의 파이프 오르간 기원전 1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지금까지 발견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건반악기이자 현대 서양에서 사용되는 교회 오르간의 선조이다.
디온의 고대 오르간은 (1) 공기를 공급하는 피스톤이 달린 두 개의 펌프, (2) 소리를 내는 파이프에 일정압력의 공기를 공급하기 위한 프니게우스(Pnigeus), (3) 24개의 건반, 그리고 (4) 길이가 서로 다른 24개의 굵은 파이프와 16개의 가는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서, 프니게우스는 원래 고대 그리스에서 사용되었던 토기로 만든 휴대용 오븐을 말하는데, 원뿔 형태의 깔때기를 뒤집어 놓은 형상의 용기가 마치 프니게우스를 닮았기에 그와 같은 이름이 붙은 듯하다.
프니게우스는 물이 반 이상 채워진 실린더 용기 안에 담가두었는데 아래쪽에 구멍이 뚫려 있어 이곳을 통해 물이 자유롭게 들락거린다. 피스톤이 달린 펌프와 프니게우스 윗부분은 공기공급 관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어, 펌프질을 하면 압축된 공기가 관을 타고 프니게우스 내부를 꽉 채운다. 이와 수직방향으로 또 다른 가느다란 관이 건반의 공기 저장소(Air chest)에 연결되어 있어서, 프니게우스 내부를 채운 일정압력의 공기는 건반의 공기 저장소로 이동한다. 공기 저장소는 팬 플루트처럼 소리를 내는 기다란 파이프가 연결되어 있는데, 연결 길목에서 건반의 슬라이더가 공기통로를 가로막고 있다. 건반을 누르면 슬라이더가 빠지면서 압축공기가 기다란 파이프로 흘러들어가고, 파이프에 뚫린 구멍으로 공기가 일부 빠져 나올 때, 파이프 길이에 비례한 특정 옥타브의 소리를 내게 된다.
파이프가 오랫동안 균일한 소리를 내려면, 일정압력의 공기가 건반의 공기 저장소에 오랫동안 충분히 공급되어야 했는데 이 역할을 물통에 담긴 프니게우스가 담당했다. 즉, 일종의 커다란 공기 주머니인 프니게우스 내부에 차있던 공기의 일부가 건반의 공기 저장소로 빠져나가면 프니게우스 내부의 공기압력이 낮아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프니게우스 내부의 낮아진 공기압과 물의 압력이 평형을 이루기 위해 프니게우스 내부에 차 있던 물의 높이가 상승한다. 물 높이가 상승하게 되면 프니게우스 내부의 공기는 다시 압축되어 공기압은 이전 수준으로 회복되고 건반의 공기 저장소로 일정압력의 공기를 계속해서 공급하게 된다.
고대 그리스의 파이프 오르간은 소리가 크고 멀리 퍼져나갔기에 주로 야외 대중공연에서 사용되었다고 하며, 기원후 5세기까지 서양에서 사용되었다. 고대 문헌기록과 디온의 실물을 참고하여 복원한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들어보면, 팬 플루트처럼 감미롭고 목가적인 소리에 마음이 촉촉해진다.
31. 디온 파이프 오르간의 구조 디온의 오르간은 (1) 공기를 공급하는 피스톤이 달린 두 개의 펌프, (2) 소리를 내는 파이프에 일정압력의 공기를 공급하기 위한 프니게우스, (3) 24개의 건반, 그리고 (4) 소리를 내는 파이프로 이루어져 있다. 복원된 고대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를 들어보면, 마치 팬 플루트처럼 감미롭고 목가적인 소리에 마음이 촉촉하게 젖는다.
디온 박물관의 이층 전시실 구경도 대충 마치고 우리 부부는 퇴근하지 못하고 일층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물관 직원들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다음 건물 밖으로 나왔다. 주변은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리고 가로등불이 환하게 골목길을 비추고 있었다. 박물관 정문까지 우리를 배웅한 남자 직원에게 근처에 호텔이 있는지 물었다. 그는 박물관 맞은편 가게 앞 테이블에 앉아 맥주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네 명의 주민에게 큰 소리로 뭐라 물었다. 주민들이 일제히 손을 앞으로 가리키면서 뭐라고 말한다. 아마 이 앞에 호텔이 있다는 뜻 같았다. 나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박물관 직원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차를 몰아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아까 박물관을 찾으려고 이 골목길을 세 차례 오르락내리락 했었는데 호텔처럼 생긴 건물을 본 기억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골목길 좌우를 열심히 살피면서 앞으로 나갔지만 호텔을 발견하지 못하고 결국 또 다시 6개의 골목길이 마주치는 교차로에 이르렀다.
‘아니 도대체 호텔이 어디에 있지?’하고 나 혼자 중얼거리듯 말하곤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데, 어디선가 ‘휘익~ 휘익~’하는 휘파람 소리가 밤의 정적을 깨고 희미하게 들려왔다. 머리를 돌려 소리가 나는 뒤쪽을 살펴보니 휘파람 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깜깜해서 보이진 않았으나 우리에게 호텔 위치를 알려주셨던 주민들이 내는 휘파람 소리임에 틀림없었다. 순간 이 휘파람 소리가 무슨 뜻인지 알아채고, 차를 천천히 후진시켜 박물관 쪽으로 다시 갔다. 주민 가운데 한분이 일어나 내 차 옆으로 오더니 바로 코앞에 있는 오른쪽 건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차문을 열고 바라보니 전혀 호텔처럼 생기지 않은 디귿자형 이층 건물이었다. 그는 호텔로 가더니 대문을 몇 차례 두드렸다. 조금 뜸을 들이고 한 남자가 나오는데 두 분이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나에게 돌아와서 하시는 말씀이 “저 분이 호텔 여주인에게 전화를 할 것입니다, 그녀가 10분 후면 도착할 것 같으니 길옆에 주차를 하고 짐을 들고 호텔 문 앞에 가 계세요”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를 친절하게 안내해준 네 명의 마을주민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호텔 앞에서 여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10여분 후에 호텔 여주인이 승용차를 급히 몰고 우리 앞에 나타났다. 중년의 그녀는 환히 웃으면서 우리를 호텔 이층 방으로 안내했다. 호텔 방값은 아침식사비를 포함하여 하룻밤에 70유로였는데 일단 방이 넓어서 좋았고 따뜻한 색조의 방안 분위기와 깨끗한 침구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오늘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12시간을 돌아다녀서 그랬는지 이날 밤은 세상모르게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 날 아침, 호텔 앞마당 식탁에 차려진 아침식사를 맛있게 들고 커피를 마시면서 새소리만이 들리는 조용한 디온의 마을풍경을 마음속에 담아두었다. 호텔 맞은편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디오니소스의 승리 모자이크가 전시된 박물관 별관의 흰색 벽이 보였다. 코앞에 있는 이 별관의 일층에 디오니소스 모자이크가 전시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만사를 제치고 들렀을 텐데 지금도 이 모자이크를 직접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기만 하다. 서쪽의 올림포스 산 꼭대기는 흰 구름으로 두텁게 덮여있어 신비스러움을 자아냈고, 높은 산 아랫마을이라 그런지 9월 중순임에도 아침공기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서늘했다. 호텔 일층에는 여주인이 운영하는 그리스 전통공예 공방이 있었다.
32. 디온에서 하룻밤을 묵은 호텔 (Safetis Apartments) 호텔 방값은 아침식사비를 포함하여 하룻밤에 70유로였는데, 일단 방이 넓어서 좋았고 따뜻한 색조의 방안 분위기와 깨끗한 침구류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나이 지긋한 여주인은 무척 상냥했다.
33. 호텔 앞 거리풍경 서쪽의 올림포스 산 꼭대기는 흰 구름으로 두텁게 덮여있어 신비스러움을 자아냈고, 높은 산 아랫마을이라 그런지 9월 중순임에도 아침공기는 정신이 번쩍 들만큼 서늘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호텔방으로 올라와 짐을 꾸리면서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방명록에 디온박물관 직원과 주민들의 친절에 감사한다는 글을 남겼다. 여주인과 작별인사를 나누고 호텔을 나섰다. 나는 어제 저녁 우리에게 환상적인 디온 고적공원 투어와 박물관 관람을 할 수 있도록 친절을 베풀어준 조르바와 작별인사를 나누고 싶어 승용차를 몰고 디온고적공원 주차장으로 갔다. 디온은 대중교통으로 찾아가기가 쉽지 않은시골마을인데다 이른 아침이라서 관광객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공원 안내사무소 옆 잔디밭에는 야외 테이블이 몇 개 놓여있었는데 일단의 남자들이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혹시 이들 중에 조르바가 있을까싶어 두리번거리면서 찾았으나 보이질 않았다. 출입문이 열려있는 안내사무소 입구로 가서 안쪽을 기웃거려 보았으나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혹시나 그를 만날까싶어 하릴없이 주차장에서 5분 정도 기다려보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어제 저녁, 그와 헤어질 때 명함교환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시간도 아침 10시를 훌쩍 넘겼기에 나는 멀리 꼬레아에서 온 동방박사를 친절하게 영접해준 조르바에게 마음속으로 감사인사를 전하고 다음 목적지인 베르기나로 출발하였다.
우리는 어제 저녁, 디온으로 들어올 때 이용했던 아스팔트 포장길로 가지 않고 고적공원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비포장 시골길로 접어들었다. 시냇물 같은 강줄기를 따라 나무가 무성한 바퓌라스 강을 건너자 시멘트로 포장된 시골길이 나타났다. 너른 평원에는 포도나무처럼 보이는 넝쿨나무가 지지대에 얹혀 재배되고 있었는데 허공에 매달린 동그란 열매를 자세히 살펴보니 키위였다. 우리는 시골길을 벗어나 남쪽 아테네에서 북쪽 테살로니키까지 연결된 E75 고속도로에 올라탄 다음, 이곳에서 90km 정도 떨어진 마케도니아 왕국의 첫 수도였던 아이가이(Aigai.베르기나의 옛 지명)를 향해 달려갔다.
34. 올림포스 산과 디온 풍경 서쪽의 올림포스 산 꼭대기는 흰 구름으로 두텁게 덮여있어 신비스러움을 자아낸다. 너른 평원에 포도나무처럼 보이는 것은 키위였다.
* 디온 박물관의 위치는, 2019년 5월28일에 필자가 구글맵 측에 기존 위치가 잘못됐음을 알리고 위치 수정을 요청하여 바로 잡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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