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청[大廳]마루 원문보기 글쓴이: 금향최세현[서울]
강백천 [姜白川]
1898 전북 남원 ~ 1982 부산 |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
약 사
17세 때 박준필(朴俊匹)의 문하에서 대금과 정악을 배웠고, 이후 전용선(全用先)에게서 단소·가야금·양금·시조 등의 기본을 배웠다. 여러 창극단에서 대금을 불면서 소리더늠 대금산조의 명인 박종기(朴鍾基)와 교분을 갖고 독특한 대금산조를 이루어 나갔다. 1930년대 후반 남도민요에서 터득한 시나위풍의 가락을 중심으로 한 시나위더늠 대금산조를 완성했는데, 그의 대금은 현재 사용되는 산조 대금과 비교해 볼 때 장2도가 높은 것이 특징이다. 이와 같은 높은 키의 대금은 소리더늠 대금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대금보다 한 음이 높기 때문에, 계면성음의 선율을 연주할 때 더욱 효과적으로 음악을 표현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1951년 전추산(全秋山)과 함께 전주에 국악원을 설립하고 기악부장을 맡아 운영하였다. 1954년 다시 남원에 내려가 살다가 부산으로 이사한 다음 해인 1971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김동표(金東表), 송부억쇠(宋富憶釗), 이엽(李葉) 등의 제자를 길러냈다. [자료출처 : 사전]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형성
현재 전해지는 대금산조는 크게 박종기, 강백천이 판을 짠 소리더늠과 시나위 더늠 산조가 있다. 박종기와 강백천의 뒤를 이어 한주환이 대금산조로 이름을 날렸으며, 이생강, 김동진(본명 김동식), 서용석의 대금산조 또한 그 명성이 자자하다.
대금산조가 산조로서 완성된 것은 박종기 대에 이르러서 이지만 박종기 이전에 여러 대금 명인들이 존재하였고, 이들의 음악이 산조와 무관하지 않았음은 여러 증언 자료를 통해 증명되는 바이다. 가야금 산조의 명인이었던 한숙구와 그의 아들 한수동이 대금산조를 했다는 기록을 보아 박종기가 대금산조를 짜기 전에도 다른 이들이 대금 산조를 연주하고 있었음은 능히 짐작할 수 있으며, 박종기 보다 나이는 어리지만 오늘날 가야금 산조의 한 유파를 이루고 있는 최옥산(혹은 최옥삼 1905~1956)도 북한에서 그의 대금산조와 단소산조를 남기고 있어, 형성기의 대금산조는 현재와는 달리 아주 다양한 양상을 띠고 있을 것이라 보인다.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창작 동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이는 죽헌 김기수가 조사한 무형문화재 조사보고서 제86호 "대금산조"에 실려 있는 내용으로 아래와 같다.
강백천이 대금에 입문하여 정악 풍류 한바탕을 배운 다음의 일이다. 시나위란 말로만 들었을 뿐 어떠한 곡이요, 가락이고 장단이 무엇인지 실제로 부는 것을 듣도 보도 못하여 매우 안타깝게 여기다가 당시 대구에 사는 박사실이란 노인이 있어 시나위를 전한다 하기에 ?아 갔으나 이미 그 때는 생존치 아니 하였다. 이에 매우 실망한 강백천은 당시 나이 20여세였는데 어떻게 하든지 시나위를 한번 불어 보고 싶어 고심하든 끝에 남도 민요에 착안하여 "육자배기"를 대금으로 소리따라 불어보기 시작하였다. 이리 하다가 또 '살푸리' 장단에 맞추어 육자배기 가락을 흥에 맞게 변주하여 불어보니 그럴듯한 대금시나위가 되어 스스로도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곁의 사람들도 못내 즐거워 하였다고 그 대금시나위 초기 내력을 술회하고 있다.
이즈음 진도에 살던 박종기(강백천 보다 19세 연상)가 남원에 젊은 사람이 있어 대금 시나위를 잘 분다고 하는 소문을 듣고 한번 만나 보기를 희망하던 중 우연한 기회에 목포 에서 서로 처음 만나 보게 되었다. 이때 박종기와 강백천은 서로가 다른 나름의 허튼가락을 대금으로 마구 불어 오던 터였다. 여기서 깨닫고 의기 상통한 바 있어 서로 다짐 하기를 "가야금에는 산조가 있어 타는데 어찌 대금엔들 산조가 없을소냐"하고 각각 산조 역기를 약속하고 헤어졌다는 것이다.
그 후 박종기는 소리더늠 즉 판소리 가락을 따라 엮은 대금산조를 만들게 되고 강백천은 시나위 더늠 즉 자기가 남도 민요에서 터득한 시나위풍의 새가락을 중심으로 대금산조를 엮었으니 이로서 오늘날 대금산조의 드 큰 맥의 창시자가 되고 있다. 이것이 1930년대의 일이다.
이는 강백천의 증언을 토대로 엮은 것이다. 이로 보면 강백천은 육자배기 허튼가락조로 박종기와는 다른 산조를 음악적으로 구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백천이 나이 20여세가 된 해는 대략적으로 1920년 이후이다. 박종기의 대금 음악이 유성기음반에 담기게 되고 산조의 한 장단의 이름으로 취입되는 시기는 1920년대 후반의 일로서 1929년 '일?죠선소리반'과 '콜럼비아'음반에 중모리와 국거리가 녹음되었다. 박종기가 한바탕의 산조를 30년대 중반 오케 음반에 남길 때에도 중중모리를 거쳐 자진모리로 가는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현행 대금산조의 틀이 짜여지지는 않았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당시의 강백천의 대금산조에서도 중중모리 자진모리의 구분이 애매하여 바로 이것이 대금산조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강백천 대금산조의 유형
대금산조를 아는 이들은 강백천류 대금산조에도 박종기 대금산조와 꽤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박종기가 자주 사용하는 몇가지 시김새를 강백천도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강백천이 적극적으로 박종기의 음악을 수용한 결과라고 생각된다.
박종기의 산조에서 보이는 '군로사령나가는' 대목 등의 판소리 선율을 강백천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흥미롭다. 이것이 바로 강백천 대금산조의 독특한 특징으로 인식되고 있다. 산조의 구성 틀과 진행, 그리고 시김새는 박종기 대금산조와 흡사하다. 강백천 대금산조의 음악을 실제로 분석하여 보면 계면조가 많은 부분을 차이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이것이 강백천 본인이 증언하듯이 시나위더늠의 근본이 되는 것이다 볼 수 있다.
강백천 명인은 1898년 전라북도 남원에서 출생하였다. 17세부터 박준필에게 대금과 정악풍류를 배우기 시작하고, 우리 전통음악의 명인 전용선에게 단소, 가야금, 양금, 시조 등의 기본을 배웠다고 한다. 1950년까지 남원에서 거주하였고 1951년부터는 전주에. 1954년에는 다시 남원에 내려가 살다가 1970년부터 부산에 살았다.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로 인정받았다. 강백천이 수학한 전추산 명인은 단소산조를 창시한 걸출한 인물이다. 전추산의 단소산조를 살펴보아도 계면성음이 절대적인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것이 강백천의 대금산조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이러하다면 전추산의 대금산조는 편재준에 전승되었으며 편재준의 대금산조 를 강백천류를 전승하는 김동표가 학습한 적이 있는 것도 우연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공교롭다.
강백천의 대금은 현재 사용되는 산조대금과 비교하여 볼 때 장2도가 높은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흔히들 이러한 대금을 시나위 대금이라고 하는데 보통 무악 반주나 민요 연주시에 사용하고 있다. 이와 같은 높은 키의 대금은 소리더늠 대금 연주자들이 사용하는 대금보다 한음이 높기 때문에 계면성음의 선율을 연주할 때 보다 더 효과적으로 음악을 표현 해 낼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강백천 대금산조의 음악적 구성 및 특징
이 음반에 수록된 강백천의 첫 번째 대금산조를 들어보면 산조의 다스름은 비교적 간단히 녹음되어 있고, 두 번째 녹음에서는 편집되었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세 번째 녹음의 대금시나위 뒤에 붙어 나오는 가락은 허튼 가락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다스름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이 다스름은 전용선의 단소산조 다스름과 흡사한 면이 있다. 강백천이 1951년 전주에서 전추산과 함께 국악원을 창설하여 기악 부장직을 맡은 바 있으며, 정읍 등지의 줄풍류를 간직한 전추산의 풍류의 영향을 받은 바 있으므로 그의 다스름에서는 향제 줄풍류식의 풍류가락과 시나위의 성음을 절묘하게 섞고 이를 바탕으로 산조의 내드름 격이라 할 수 있는 다스름을 이와 같이 연주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소리더늠의 산조가 중중모리, 자진모리를 정확히 분리해내고, 여러 소리적인 가락을 넣어 그 시간을 늘려온 것과는 반대로 강백천의 대금산조는 현재에도 20여분 남짓한 가락 그 원형을 본존해 오고 있다. 강백천 대금산조가 가지는 깊은 남도식의 성음과 절제된 가락의 미학은 소리더늠의 현란한 가락과는 다른 감동을 자아낸다. 이러한 성음은 강백천의 제자 김동식에 와서 절정을 드러낸다.
음반 첫 번째 강백천 대금산조의 장단 구성을 보면 진양이 7장단, 중모리가 22장단, 중중모리/자진모리가 32장단에 해당한다. 비교적 짧은 산조로 볼 수 있으나 이 녹음은 문화재 지정 당시 그 자료로 녹음한 것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진양은 우조로 시작하는데 저음에서 다루치면서 계면으로 조를 바꾼다. 이러한 조바꿈은 다른 대금산조에서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고음에서 저음으로 내려갈 때 사용되는 글리센도에 이어 박종기가 유성기음반에 사용한 오른손 잔가락이 돋보인다. 전체적으로 그 구성이 세련되었다는 느낌보다는 한에 절규하는 듯한 투박한 연주자의 심성이 돋보인다. 강지게 하는 시김새를 사용하고 있으며,계면조로 바뀌는 것을 명확히 해주는 6공을 열고 흘려주는 음이 출현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퉁소산조를 본인의 대금산조에 결부시킨 한범수가 구사하는 중모리의 느낌을 강백천의 대금 산조에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대금의 최고 음역에서 흘려주는 음 등과 한을 토해 내듯 하게 끊어내는 음들은 그의 산조가 이미 절정에 와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느낌은 필자가 한주환의 대금연주에서도 경험한 바가 있는 바 강백천의 대금연주가 단독으로 창작되어 전승된 것이 아니고 창작과정 중에서도 여러 대금 명인들의 특징을 고루 흡수하여 발전한 것이라는 것을 말해준다.
중중모리의 가락을 들어보면 소리더늠 산조에서도 궁히 찾아볼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자진모리 부분을 풀어나가는 강백천 대금산조는 여타 소리더늠 대금산조와는 확연히 다름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강백천의 대금시나위도 매력적이다. 다스름 앞에 나오는 대금 시나위를 살펴보면 첫음을 대금의 통음인 본청 음으로 시작하여 전형적인 계면성음의 구성진 가락으로 시작하는데, 이 선율은 앞서 대금산조의 자진모리에 풀어주는 가락과 흡사하다. 강백턴 명인은 대금산조, 대금시나위 이외에도 허튼가락을 기가 막히게 구사하는 분이었다. 그의 허튼가락은 1985년 김호성이 엮은 50장의 한국전통음악 카세트테이프에 '젓대 : 허튼가락'으로 수록되어 있다. 엮은 이 김호성은 다음과 같이 그 음악을 평가하고 있다.
"젓대 산조의 인간문화재였던 강백천 옹은 자연의 소리를 젓대산조에 바로 옮기는 분이었다. 그는 성악에도 일가견이 있으며, 그의 대금 가락은 특출한 남도흥타령 가락을 마치 노래하듯 이 산조로 옮겨 남도 가락의 진국을 표현한 곡이다. 산조 전의 다스름이 더 멋지고 깊은 한의 소리를 다 담은 젓대소리이다."
강백천 대금산조의 전승
강백천은 1971년에 중요무형문화재 대금산조 예능 보유자로 인정받고, 부산에 정착하여 살면서 많은 후학들을 길러내었다. 보유자 인정 이전부터 배워왔던 김동식과 김동표를 전수생으로 한 것을 비롯하여, 뒤이어 송부억쇠와 이엽을 전수생으로 가르치다 1982년 작고 하였다. 김동진은 강백천이 배출한 후륭한 예술가였다. 대금을 좋아하는 이라면 그의 음반 한 장 없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의 대금이 가지는 매력은 대단하였다.
1938년 9월 14일 전라남도 화순읍 동북리에서 출생한 김동진은 14세 되던 해 강백천에게 가야금산조를 배우고 16세(17,18세라 하기도 한다)되던 해 정읍 출신 신달용으로부터 줄풍류를 배웠다. 대략 20세쯤 강백천에게서 대금산조를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강백천에게 대금산조를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김동진은 한주환, 편재준의 대금산조의 연구도 하였다고 한다.
송부억쇠는 김동진의 대금산조와 강백천 대금산조와 바디가 다르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번 음반에 수록된 김동진의 음악을 들어보면 이에 대한 명쾌한 답변이 내려질 수 있다. 먼저 산조 장단 구성에 잇어서 김동진의 산조는 중중모리와 자진모리가 확연히 구분되어 소리더늠 산조와 맥을 같이 한다. 둘째 김동진 대금산조의 가락이 한주환류 대금산조의 가락짜임새와 같으며, 조를 사용하는 방법도 거의 흡사하다. 하지만 대금산조에서 중요시되는 성음은 분명 강백천 대금산조와 같은 줄기를 가진다. 이것이 김동진의 대금산조의 주요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대금산조가 현재 대금산조 연주자들에게 미친 영향은 통계나 숫자로서 제시할 수는 없으나 음반 매체를 통한 그의 대금산조 보급으로 오늘날 유명 연주가들의 산조 음악에서 김동진 대금산조의 성음을 문득문득 발견하게 되는 것이 우연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떤 이들은 문화재 이수자 심사 과정에서 스승 강백천이 오른손으로 대금을 부는데 비해 김동진은 왼손으로 대금을 분다하여 이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바디가 어느 정도 스승의 본 바디와 달라져 있는 것이 주요한 이유였을 가능성이 더 크다 하겠다. 그의 대금산조에 많은 영향을 준 이로는 그의 큰형 김동준이 있다. 그는 판소리의 명창이자 고법분야의 무형문화재로서 당대 대금 명인들의 산조를 반주한 경험이 있었으며, 대금산조 속에 밝은 이였다. 큰형 김동준으로부터 다른 이들의 대금산조 정화를 구음으로 전수받아 강백천 대금산조를 더욱 풍부하게 한 것이다. 중년에는 부산, 경주, 용인민속촌 등지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고, 후에 서울에서 활동 하였다. 후일 후두암으로 고생하다 당시 선생을 후원하기 위해 제작된 그의 대금산조 테이프만 남기고 1989년 2월 10일(음) 서울 자택에서 운명을 달리하였다. (중략)
현 강백천 대금산조의 의발을 전해받은 이는 김동표이다. 그는 93년 8월에 기능보유자로 지정되어 강백천의 대금산조를 정식으로 계승 하였다. 그는 1941년 전북 전주 동래산동에서 태어났으며, 17세 되던 해 고창 성내에서 편재준 선생에게서 6개월간 대금산조를 진양에서 중모리까지 배웠다고 한다. 18세에 우리국악단에서 2년간 반주활동을 했으며, 그의 셋째형인 김동진에게 강백천류 대금산조를 진양, 중모리, 중중모리까지 배웠다고 한다. 20세에는 진경국악원에서 악사로, 22세에는 임춘앵여성국극단에서 25세에는 국극사로 32세에는 부산의 동래국악원에서 악사로 활동했다고 한다. 35세에 부산에서 정식으로 강백천의 문화에서 3년 동안 전수생이 되었으며, 2년간의 조교를 거쳐 보유자 후보가 되었고,93년 정식으로 기능보유자로 임명 받았다. 현재는 허튼가락연구실(한울 국악원)을 운영하여 후배들을 육성하고 있다.(중략)
김동진이나 김동표의 대금산조는 모두 산조대금으로 연주하고 있다. 이는 강백천이 대금 산조에 사용한 시나위대금보다 2도정도 낮은 대금이다. 이에 따라서 강백천 대금산조의 멋과 맛이 변질된 느낌이 있으며, 성음 및 세부적인 장식음 표현에서 강백천의 연주와 벗어남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현재 대금산조는 시간이 길어지고 , 그의 근본 원인은 점점 많은 가락을 추가함에 있고, 엇모리, 휘모리와 같은 장단을 추가하여 그 근본적인 틀 또한 변화되고 있는 것이 발전 추세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강백천 명인의 연주 그대로를 복사하여 연주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며, 이를 토대로 하여 21세기의 새로운 산조가 만들어져야 하는 시대적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20여분에 해당하는 강백천 산조를 40분이 넘도록 만들어 내려고 한다면 강백천류 대금산조에 꼬리표처럼 붙어 다니는 시나위더늠이라는 간판을 떼어내어야 한다.
앞서 간략한 산조 음악 분석에서 살펴보았지만 강백천 대금산조가 시나위 하나만으로 만들어 진 것이 아니며, 그가 직접 증언한 바와 같이 민요, 시나위 등이 얼기설기 조합되어 형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나위더늠 산조라 하여 소리더늠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 것은 아니며, 산조의 조 구성과 가락 구성에 있어 시나위더늠과 소리더늠을 어떻게 유기적으로 결합시킬 것인가가 강백천류 대금산조의 당면한 과제인 것이다.
[자료 : 강백천류 대금산조 | 이진원(한국고음반연구회)]
[출처 : 한무리어울마당 http://cafe.daum.net/hanmooryminist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