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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강요특강(8)- 칼빈 사상에서 죄의 비참함
부산 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지난번까지는 창조와 섭리, 선택과 예정론에서 나타난 하나님에 대하여 칼빈의 신론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자이시기 때문에 우리 피조물인 인간은 우주만물을 보면서 하나님을 경배하며 영화롭게 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어리석고 우준하게 되어 금수와 버러지 형상을 섬기는 자가 되었다고 봅니다. 따라서 일반계시인 자연만물로서는 하나님을 온전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특별계시인 말씀, 즉 성경을 우리에게 허락하셨으며 이 성경은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한 것으로 완전히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말씀임을 확인하였습니다. 이 하나님은 근본 본질은 하나이시나 경륜상 세 위격으로 나뉘어지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으로, 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우리가 번영할 때는 감사를, 고난을 당할 때는 인내를, 그리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서는 자유함을 갖게 하는 유용성이 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하나님은 우리를 작성하시고 예정 가운데 선택하여 구원으로 부르시고 결국은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성도의 견인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한 편 멸망의 자리에 설 사람에 대해서는 유기하셔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이중예정론을 확인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는 칼빈의 기독교강요 제2부 제1장 내지 제5장에 걸쳐 인간의 타락, 그 죄로 인한 비극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다만, 지난 제1부 중 제15장은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등에 관한 것이어서 편의상 이곳에서 같이 언급하기로 하겠습니다.
제15장 창조된 인간의 본성, 영혼의 기능, 하나님의 형상, 자유의지, 인간성의 원초적 순결(Ⅰ-15).
1. 타락한 인간의 본성 : 그 영혼은 거의 부패하였으나 아직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15.1-4)
(1) 하나님은 인간을 순결하게 창조하셨으므로 인간은 죄에 대한 책임을 창조주에게 돌릴 수 없다(15.1). 칼빈은 인간의 본성에 대하여 창조당시의 본성과 타락 후의 본성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우선 여기서는 창조당시의 본성을 다룬다. 그런데 창조당시의 본성에 대하여 칼빈은 인간이 흙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점에서 사실 인간의 교만이 견제되어 있다고 보며, 따라서 흙과 티끌에 지나지 않는 인간이지만 불멸의 영혼이 거주하는 집을 가진 존재라는 점에서 창조주의 관대하심을 자랑 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육체와 영혼의 상이점(15.2) 칼빈은 영혼(soul)과 육체(body)는 분명히 구별한다. 그러나 영혼을 실재가 아닌 하나의 운동으로 보는 것은 반대한다. 따라서 영혼은 분명 실재하는 것이며(벧전 2:25; 히 13:17), 성경은 영혼은 때론 영(눅 23:46)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칼빈은 양자를 나누지 않고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칼빈은 영혼을 마음 또는 지성의 좌소로 보기도 하는데, 이러한 영혼은 우리가 흙집에 살다가(욥 4:19) 죽을 때는 육신의 장막을 벗어난다는 말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육체와 구별된다.
(3) 하나님의 형상대도 창조된 인간(15.3) 하나님의 형상(imago Dei)대도 창조되었다고 할 때, 칼빈은 외형상의 모습(모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이 처음 받았던 완전함”, 바른 이해력을 충분히 소유하였고 감정을 이성에 종속시켰으며 일체의 감각을 적절한 질서에 따라 조절하는 창조주께서 그에게 주신 예외적인 은사라 본다.
(4) 하나님의 형상의 참 성질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고 말하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다(15.4). 칼빈은 하나님의 형상을 위에서 “아담이 처음 받았던 완전함”이라고 하였으나, 이러한 완전함이란 타락한 인간성에서는 찾을 수 없고, 다만 제2의 아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본다. 특히 칼빈은 완전함이란 바울사도가 우리가 회복해야 할 것으로(고전 15:45; 골 3:10; 엡 4:24) 첫째로는 지식으로, 둘째로는 순결과 의와 거룩함이라고 한 데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형상은 처음에는 지성의 빛과 마음의 바름과 모든 부분의 건전함에서 뚜렷이 빛나고 있다는 것이다.
2. 영혼의 유출에 관한 마니교도의 오류(15.5)
하나님의 본질이 인간의 영혼에 유출(유전)된 것인가? 마니교도나 세르베투스(Serbetus)조차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러나 칼빈은 인간의 마음은 하수구이자 각종 불결한 것들의 잠복소라는 것이다. 만약 인간의 영혼을 하나님으로부터 유출된 것으로 본다면 결국 이러한 불결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아야 하는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사도가 사도행전(17:28)에서 아라투스(Aratus)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할 때 이는 본체에 있어서가 아니라 특성에 있어서임,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다고 할 때 그 회복은 하나님의 동일본질로 만드시는 것이 아님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 본질회복을 통한 하나님이 될 수 있게 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3. 아담의 타락에 비추어서 비판받는 철학자들의 영혼관(15.6-8)
(1) 영혼과 그 기능(15.6) 영혼의 정의는 플라톤을 제외하고는 철학자들에게서 찾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즉, 그들은 영혼불멸의 실체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영혼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는 하나님과 연합함으로써 완성되는 행복을 찾아가는 것이다. 다만 칼빈은 영혼의 기능을 의지, 분노 및 욕망도 포함시킬 수 있지만, 그러나 이러한 개념을 포함시키는 것이 오히려 영혼의 능력을 오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오성(또는 지성)과 의지로 근본적 기능을 제한한다.
(2) 근본적 기능으로서의 오성(또는 지성)과 의지(15.7) 칼빈은 인간의 영혼의 두 부분으로 오성(intellect)과 의지(will)를 말한다. 즉, 그는 오성은 대상을 식별하여 대상을 각각 시인하든가 시인하지 않든가 하는 것이며, 의지는 오성이 선이라고 인정하는 것을 선택하며 추구하고 부인하는 것을 거절하며 피하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본다. 그래서 그는 오성은 영혼의 지도자요 지배자이며 의지는 오성의 명령을 항상 유지하며 자신의 욕망에 있어서 오성의 판단을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만족하려 한다.
(3) 자유선택과 아담의 책임(15.8)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영혼에 마음을 주시어 선을 악에서, 정의를 불의에서 각각 가려내며, 또한 이성의 빛을 안내자로 하여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과 마땅히 피해야 할 것을 구별하도록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여기에 의지를 결합시킴으로써 의지로 하여금 선택할 수 있도록 하였다고 본다. 그래서 칼빈은 최초의 인간 상태는 이와 같은 탁월한 은사들로 뛰어난 품위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성과 지성, 사려분별, 판단은 지상생활을 하는 데 충분하였고 이로 인하여 하나님과 영원한 행복을 찾아 올라갈 수 있었다. 아니 자기가 원하기만 하였더라면 자유의지로 영생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도 가지고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아담이 자발적으로 파멸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인간의 원초적 순결성을 잃게 된 것이다.
제2부 그리스도 안에 계신 구속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지식: 처음에는 율법으로 조상들에게, 그리고 다음에는 복음으로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제1장 아담의 타락과 배반으로 인류 전체가 저주에 넘겨졌고 그 원상태가 부패하였다: 원죄론(Ⅱ-1)
1. 우리 자신을 알면 자기 신뢰가 없어진다(1.1-3)
(1) 자기에 대한 그릇된 지식과 바른 지식(1.1) 철학자 아폴로(Apollo)가 “너 자신을 알라”라고 한 것처럼, 칼빈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라 본다. 특히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은, 첫째로 창조시에 우리가 무엇을 받았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관대한 호의를 계속하시는가를 생각하게 하며(창조시의 우수성), 둘째로 아담의 타락 이후 불행하게 된 우리의 처지를 생각하게 된다(원상태에서의 타락)는 것이다.
(2) 사람의 본성은 망상적인 자기도취에 빠지는 경향이 있다(1.2). 하나님의 진리는 우리에게서 자기의 능력을 믿는 모든 자신을 빼앗으며 자랑할 만한 모든 원인을 빼앗고, 우리를 복종으로 인도하는 지식을 구하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인간의 맹목적인 자애(自愛)는 모든 인간의 천성이므로, 자기들의 천성에는 가증하다고 여길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사람들은 가장 순순히 믿어버린다. 따라서 사람들은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할 풍부한 능력을 타고났다는, 이 완전히 허망한 견해가 아무 외부의 지지가 없이도 일반적인 신뢰를 얻어, 자존심이 무능한 인간의 수치심을 대신하고 있는 것이다.
(3) 자기 인식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문제(1.3) 우리 인간의 시초의 고귀성을 잊지 않기 위하여, 첫째로 자기가 창조되며 귀한 천품을 받은 것은 무슨 목적이었나를 생각해야 하며, 둘째로 자기의 재능을, 아니 재능의 결핍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칼빈은 첫째 번에서 자기의 의무의 성격을 인식하게 되며, 둘째 번에서 그 의무를 실천하려는 능력의 한도를 알게 된다고 본다.
2. 아담의 죄로 인하여 인간이 시초의 천품을 잃었고 인류 전체가 파멸하게 되었다(1.4-7)
(1) 아담이 타락한 이야기는 죄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창 3장): 그것은 배신이다(1.4). 하나님은 아담의 복종심을 시험하고 기꺼이 하나님의 명령 하에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선악과시험을 하였는데, 자신의 한계를 잘 알지 못한 교만이 결국 시초의 상태로부터 멀어지게 하였으며, 이는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배은망덕이며 야심과 교만이 이를 만든 것이다.
(2) 최초의 죄가 원죄이다(1.5). 아담이 그의 창조주와 연결되어 있던 것이 그에게 영적 생명이 되었던 것과 같이, 창조주에게서 멀어진 것은 영혼의 죽음이 되었다. 이러한 영혼의 죽음은 아담 그 하나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는 바와 같이(롬 8:22) 그의 후손에 까지도 흘러들어 간 것이며, 이를 교부들은 ‘원죄’(original Sin)라 하였다. 그러나 칼빈은 다윗의 시편에서 “죄악 중에 출생하였음이여 모친의 죄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고 말한 것처럼, 원죄를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본다.
(3) 원죄는 모방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죄는 유전된다(1.6-7).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롬 5:12), “본질상 진노의 자녀”(엡 2:3)였다는 말씀 속에서 밝히 보이는 바와 같이, 인간의 죄성은 모방(imitation)이 아닌 것이다(1.6). 펠라기우스의 주장과 달리 자녀는 부모로부터 자연적인 육적 번식일 뿐이며 경건한 부모라고 해서 원죄라는 인간의 죄성은 차단되지는 않는다는 것이 어거스틴(Augustinus)을 이은 칼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죄책은 유전(transfer)이라는 자연에서 오며 성결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은총에서 온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유전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영혼이 유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3. 원죄는 본성이 부패한 것이며 벌을 받아야 하지만 창조된 본성(천성)에서 온 것은 아니다(1.8-11).
(1) 원죄의 정체(1.8) 칼빈은 원죄를 정의하여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인 것 같으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에(갈 5:19) “육체의 일”이라고 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칼빈은 이러한 죄로 인하여, 첫째 우리의 본성은 철저하게 타락하고 부패하였으며, 이 때문에 우리는 의와 결백과 순결 외에는 아무것도 용납하시지 않는 하나님께 당연히 정죄를 받고 있으며, 둘째 이 부패는 우리 안에 없어지지 않고 계속적으로 새로운 육의 열매를 맺는데, 이는 마치 뜨거운 용광로에서 불꽃과 불똥이 튀어나오며 샘에서 끊임없이 물이 솟는 것과 같다고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의 원죄는 죄책과 오염을 모두 포함한다.
(2) 죄는 인간 전체를 전복시킨다(1.9). 칼빈은 아담이 의의 원천을 버린 후에 죄가 영혼의 모든 부분을 점령했다고 말한다. 저급한 욕망이 그를 유혹했으며, 뿐만 아니라 말할 수 없는 불신앙이 바른 지성의 보루를 점령했고 교만이 심정의 밑바닥에까지 침투하였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상을 로마서 3장은 잘 표현하고 있다고 칼빈은 지적한다.
(3) 죄는 우리의 본성이 아니고 그 본성의 혼란 상태이다(1.10).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작품은 부패하지 않은 인간의 본성에서 찾아야 하며, 우리의 멸망은 우리의 육의 죄책이 그 원인이다. 따라서 죄는 오직 우리의 시초상태가 타락했기 때문에 온 것이므로, 이러한 타락을 하나님께 책임을 전가시켜서는 안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사람을 정직하게 지으셨으나 사람은 많은 꾀를 낸 것”(전 7:29)이기 때문이다(1.10). 그런데 이러한 인간의 타락은 본성(천성) 그 자체의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성이 부패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결코 죄의 조성자가 아닌 것이다(1.11). 하나님은 직접 죄의 원이도 아니시며 또한 죄를 일으키지도 않으셨다. 다만 우리 본성의 부패가 원인이다.
제2장 인간은 지금 선택의 자유를 박탈당한 채 비참한 노예의 신분으로 전락해 있다(Ⅱ-2).
1. 논제의 위험성들 : 입장을 확립한다(2.1).
(1) 죄가 처음 인간을 노예로 만든 후, 죄의 지배력은 모든 인류에 미쳤을 뿐 아니라 각 개인의 영혼도 완전히 점령했다는 것을 지금까지 확인을 하였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노예상태로 낮아진 후로 모든 자유를 빼앗겼는지, 그리고 자유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힘이 어느 정도인가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를 함에 있어, 첫째로 올바른 것이 전연 없다고 보게 되면 이 문제는 자기와 전혀 무관하다고 보게 될 것이며, 둘째로 이에 반하여 조금이라도 공로를 돌리면 반드시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게 되는 위험성을 내포하게 된다.
(2) 따라서 이러한 위험성을 피하기 위하여, 칼빈은 사람에게 남아 있는 선은 전연 없으며 극히 비참한 궁핍이 사방에서 인간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비록 그렇지만 없는 선을 추구하며 빼앗긴 자유를 추구하라고 가르쳐 주는 것이, 그 방법이 된다고 본다. 그래서 칼빈은 어거스틴이 반복해서 “자유의지는 옹호론자들에게서 힘을 얻기보다 그들에게 밟히는 편이 더 많다”는 말을 지지한다.
2.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자유의지론을 비판한다(2.2-9).
(1) 철학자들은 이해력의 힘을 믿는다(2.2). 영혼의 능력은 지성(知性)과 심정(心情)에 있다고 보는 칼빈은, 이 두 부분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 답한다. 철학자들은 이성이 지성 안에 있어 등불과 같이 모든 빛을 비춘다고 보면서, 지성에는 이성이 있으며 이성이 선하고 복된 생활을 하기 위한 주도적인 원리로 단언한다. 그리고 이들은 이성과 감각의 중간에 의지를 두면서 의지는 양자에 이끌려 행동하게 된다고 본다.
(2) 이와 같은 철학자들은 결국 의지의 자유를 주장한다(2.3). 통상 철학자들은 선행과 악행을 우리의 힘으로 좌우할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어떤 일을 할 것인가는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행운은 하나님께 구하되 지혜는 우리 자신에게 구하라는 것은 모든 인간의 생각이다”(Cicero)라고 말한다. 결국 이들 철학자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인간의 지성 안에 있는 이성은 바른 행위를 위한 충분한 인도자이며, 이성에 순종하는 의지는 악한 일을 하도록 감각의 선동을 받는 것이 사실이지만, 자유로운 선택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모든 일에 지도자인 이성을 따르면 결코 방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3) 교부들의 생각은 분명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의지의 자유를 인정했다. 자유의지란 무엇인가?(2.4). 초기의 교부들은, 첫째로 인간의 무력을 솔직하게 인정하면 그들과 대립관계에 있는 철학자들의 조롱을 받게 되고, 둘째로 선에 대해서 이미 무관심한 육에게 나태할 새로운 구실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인간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뒤를 이은 저자들 역시 별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자유의지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자유의지는 “선악을 구별하는 이성의 능력이며 선악을 선택하는 의지의 능력”(Origen), “은총의 도움을 받아서 선을 택하며 은총이 없을 때에 악을 택하는 이성과 의지의 능력”(Augustinus), “근직(謹直)을 위한 근직을 유지하는 능력”(Anselm) 등 다양하게 정의를 하였다. 그리고 토마스(Thomas Aquinas)는 “원래 자유는 의지에 속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자유의지는 ‘선택의 능력’이라고 불리는 것이 가장 적합할 것”이라면서, “이런 능력은 지성과 욕구의 혼합으로 생긴 것이지만 보다 욕구 쪽으로 기우러 진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칼빈은 자유결정의 힘의 자리는 이성과 의지라고 보아, 이 두 가지에 각각 얼마를 돌리는가를 다음과 같이 확인하려 하였다.
(4) 교부들이 생각하는 ‘의지’와 ‘자유’는 여러 가지였다(2.5). 진정한 의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과 영적 중생으로 돌리는 견해, 또는 의지를 감성적인 것과 심리적인 것, 그리고 영적인 것 세 가지로 나누고 처음 두 가지는 사람이 넉넉히 받았으며 마지막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가르치는 견해, 혹은 자유의지를 논할 때 먼저 사회활동과 외부적 활동을 위해서 자유의지가 얼마나 중요한가보다는 하나님의 법에 대한 복종을 촉진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견해, 또는 스콜라철학자들은 필연성으로부터, 죄로부터, 그리고 불행으로부터 자유를 말하면서 처음 것은 본성으로부터 내재하는 것이므로 빼앗을 수 없으나 다른 두 가지는 죄로 인해 잃어버렸다고 말하기도 한다. 한편 역사하는 은총과 협력하는 은총(2.6)으로 구별하기도 하는데, 칼빈은 사람이 선행을 행하기 위해서는 자유의미만으로 부족하고 특별은총이 필요하다는 점만은 인정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인이지만 강요를 받지 않고도 자기의 의지로 악한 행동을 하기 때문에 자유의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자유의지론을 확립하지 못한다(2.7).
(5) 어거스틴의 자유의지론(2.8) 어거스틴은 서슴지 않고 의지는 ‘부자유’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오직 아무도 감히 의지의 결정을 부정해서 죄를 변명하려고 하지 말라”고 하면서 “성령께서 감히 하시지 않으면 사람의 의지는 자유롭지 못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어거스틴은 “사람은 자유의지의 큰 힘을 받고 창조되었으나 죄를 지음으로써 잃어 버렸다”고 간략히 표현하였다. 칼빈은 교회의 저술가들이 모호한 말을 하기는 했으나, 어거스틴은 “우리의 것은 하나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해서는 안 된다”는 키프리아누스(Cyprianus)의 말을 자주 인용하였는데, 이 말은, 사람은 자기의 권리라고 할 것이 전연 없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지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칼빈은 이해하였다.
3. 모든 자기 긍정을 버려라(2.10-11)
(1) 자유의지론은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을 위험성을 항상 가지고 있다(2.10). 사람은 자기의 정당한 소유가 아닌 것을 조금이라도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때에, 사람은 반드시 허무한 자신(自信)으로 자기를 잃어버리며 하나님의 영예를 찬탈하여 신성 모독의 무서운 죄를 짓게 된다. 이에 반하여 진정한 겸손은 하나님께만 영예를 돌린다(2.11). 칼빈은 자애(自愛)와 야심이라는 병을 버리라고 요구하면서, 이 병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눈이 어둡고 자신을 과대평가 하는 것이라 한다(갈 6:3).
4. 사람의 천품은 완전히 소멸되지 않았다: 오성(悟性)(2.12-17)
(1) 초자연적인 천품(supernatural gifts)은 소멸되었고 자연적인 천품(natural gifts)들은 부패했지만, 사람과 짐승을 구별할 만한 이성은 남아 있다(2.12). 다만 이러한 오성 또는 이해력과 판단력이 의지력과 함께 다소 남아 있기는 하지만, 무력할 뿐만 아니라 깊은 암흑 속에 빠진 지성을 완전히 건전한 지성이라 할 수 없다. 그리고 의지가 타락했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라 칼빈은 지적한다.
(2) 지상의 일과 인간 사회의 형태에 관한 오성의 능력(2.13) 자연적인 천품의 부패로 인하여 건전한 지성을 기대할 수는 없으나, 사회생활상의 공정성과 질서에 대하여 보편적인 생각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있다는 것은 관찰할 수 있다. 그러므로 공정성과 질서를 지키는 것은 비단 교사나 입법가가 없어도 법의 씨앗이 모든 사람의 마음에 심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성의 빛이 있다는 점은 인정한다.
(3) 학술과 기예에 관한 지성(2.14) 학술(學術)과 기예(技藝)를 위한 인간의 지성은 인류에게 이성과 오성에 보편적으로 이해력이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증명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학술은 하나님의 선물이다(2.15). 그러나 이러한 학예에 관한 인간의 재능 내지 이성은 인류공동의 이익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개인들에게 주시는 가장 훌륭한 은혜 또는 은총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이점이 또한 사람을 동물과 구별하는 준거점이 될 수도 있다(2.17).
5. 그러나 중생하지 않으면 영적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린다(2.18-21).
(1) 우리의 오성의 한계(2.18)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통찰력에 대하여 인간의 이성은 무엇을 식별할 수 있을까? 칼빈은 영적 통찰력에는 ① 하나님을 알고, ② 우리에게 대한 아버지 같은 그의 호의, 즉 우리의 구원을 알며, ③ 하나님의 법을 표준으로 삼아 우리의 생활을 정돈하는 법을 아는 이 세 가지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칼빈에 따르면 처음 두 가지는 가장 위대한 천재들조차도 두더지보다 더 눈이 어둡다고 평한다. 따라서 사람의 오성에는 무한한 혼란만이 가득할 뿐이라는 오성의 한계를 칼빈은 지적한다.
(2)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4-5)의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지식에 관한 한 사람의 예리한 지식도 맹목에 지나지 않는다(2.19).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것은 이처럼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계시하셨기 때문이다(2.20). 그래서 바울사도는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3:3)라고 말했던 것이다. 성령의 비추심을 받아 마음이 새로워진 사람들의 앞에만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길이 열린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빛이 없으면 모든 것은 암흑이다(2.21). 바울사도는 그래서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구하노라”(엡 1:17)라고 했던 것이다.
6. 죄와 무지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만, 죄는 사리를 어둡게 하는 미망(迷妄)으로 생길 수 있다(2.22-25).
(1) 사람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를 가졌으므로 책임을 면할 수 없으나, 그 증거에서 바른 지식을 얻지는 못한다(2.22). 영적 통찰력의 셋째방면인 바르게 살아가는 원칙을 아는 것은 ‘의로운 행위에 대한 지식’이라 부를 수 있다. 의로운 행위의 표준은 자연법을 통하여 배울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자연법은 공정과 불공정을 식별하는 인간의 양심의 깨달음으로, 사람들에게 자신의 바르지 못한 행위에 대한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으려는 목적이 있다. 그런데 임의로 선악을 판단하는 때에는 그 판단은 분명한 것이 못된다(2.23). 즉, 원수를 죽이려고 계획하는 사람은 살인을 좋은 일로 생각할 것이며, 간음자는 일반적으로 정죄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간음을 자랑한다.
(2) 인간의 지식은 율법의 첫째 돌판에 관해서는 전연 무력하며, 둘째 돌판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경우에 무력하다(2.24). 즉, 인간은 첫째 돌판의 중요한 점들을 전연 따르지 않으며, 둘째 돌판의 교훈에 대해서도 성품이 가장 우수하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불공정하고 지나치게 거만한 지배를 벗어버릴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자연의 빛은 사람이 이 심연에 들어서기도 전에 꺼져 버리는 것이다.
(3) 그러므로 우리가 그릇된 길에 들지 않기 위해서는 날마다 성령의 도움이 필요한 것이다(2.25). 우리의 이성은 무수한 형태의 속임수에 압도되며 무수한 오류에 빠지고 무수한 장애물에 부딪치며 무수한 곤란을 만나기 때문에 도저히 우리를 바르게 인도할 수 없다. 우리 마음에 있는 이성은 어느 쪽으로 향하든 무참하게 허무에 빠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성에는 하나님께 속한 일을 이해할 능력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총이 필요하다고 했던 것이다.
7. 사람에게 선한 일을 결심할 힘이 없다(2.26-27).
(1) 선한 것과 가(可)한 것을 동등시하는 자연적인 본능은 자유와는 무관하다(2.26). 칼빈은 지금까지 의지의 자유와 관련하여 오성, 이성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제부터 의지의 문제를 다루려 한다. 이미 이성(reason) 또는 오성(intellect)의 한계를 인정하였으며,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는 오류투성이임을 칼빈은 확인시켰다. 그렇다면 그에 따를 때 결정의 자유를 특히 좌우하는 의지는 어떻게 이해할까? 칼빈은 선택은 오성보다는 의지의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보지만, 바른 이성으로 선을 식별하고 그것을 알고 선택하며 또 선택한 다음에는 그것을 따른다는 조건이 필요하다고 본다.
(2) 성령이 없이는 우리의 의지는 선을 사모할 수 없다(2.27). 우리는 모두 본성이 죄인이며, 따라서 우리는 죄의 멍에를 지고 있다. 따라서 어거스틴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그대들을 앞질러 일을 하셨다”는 고백과 같이, 성령의 도움 없이는 사람에게 선한 일을 결심할 힘과 능력이 없는 것이다.
제3장 사람의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은 오직 정죄 받을 일밖에 없다(Ⅱ-3).
1. 사람의 본성은 심히 부패해 있으므로 전적으로 그 지성과 의지를 갱신할 필요가 있다(3.1-5)
(1) 인간은 전적으로 육(肉)이다(3.1). 인간은 중생하지 않고는 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영적이 아닌 것은 모두 육적이다. 그런데 이러한 육적인 것은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것”(엡 4:22)으로, 여호와께서 영원한 빛이 되시지 않는 한(사 60:19), 인간의 생각은 모두가 미련하고 경망되며 헛되고 패악하기 때문에 인간의 오성은 여지없이 깨뜨려진 것이다. 그래서 로마서 3장이 사람의 부패를 잘 증언하고 있다(3.2). 즉,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하나도 없다”(롬 3:11-12; 시 14:1-3, 53:1-3). 그 이유는 우리의 본성이 부패했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은총은 정결하게 만들지 않고 다만 억제하는 때가 있다(3.3). 칼빈에 따르면 우리의 본성이 부패하였다고 할지라도 결코 지워질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사람의 마음에 새겨져 있는 것은 사실이며, 다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바로 알지 못하고 미신과 우상숭배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부패한 본성을 하나님의 은총이 완전히 회복시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내면적으로 우리가 정직한 행동을 하도록 억제하는 은총은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정직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인간성은 여전히 부패했다(3.4). 따라서 의지는 죄의 속박을 받아 노예 상태에 빠졌으므로 선을 향해서 움직일 수 없으며, 더더욱 선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다. 따라서 사람은 필연적으로 죄를 범하지만, 그 죄를 범하도록 강요되는 것은 아니다(3.5). 우리의 본성의 부패는 의지의 건전성을 박탈당하였기 때문에, 죄를 지으려는 강한 성향을 가지고 죄짓기를 재촉한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본성이 죄를 범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니다.
2. 의지의 전환은 하나님께서 마음속에 주신 은총의 결과이다(3.6-14).
(1)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속 사업에서 나타나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단독으로 행하시는 일이다(3.6). 바울사도가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하노라”(빌 1:6) 한 데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착한 일의 시작”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며, 그 시작도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착한 일을 우리의 의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총이다. 바울사도는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2:10)라고 한 것처럼, 모든 선한 일의 시초는 둘째 창조에서 오며, 우리의 구원은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엡 2:5).
(2) 신자가 은총과 협력하는 것이 아니라 은총이 먼저 의지를 움직인다(3.7). 우리 본성의 부패는 우리를 올바른 길로 나아가게 하지 못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총의 일부와 우리의 본성의 협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은총 속에서 우리의 의지가 움직이게 됨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칼빈은 어거스틴의 말을 따라 “은총이 모든 공로보다 앞선다”는 점을 강조한다.
(3) 우리에게 유익한 것을 성경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한다(3.8). 선지서의,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이키는 방법으로 ‘굳은 마음’을 그들에게서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시며(겔 11:19, 36:26),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과 한 도를 주어…항상 나를 경외하리라”(렘 32:39)라는 말씀은 이 사실을 잘 증명해 주고 있다. 또한 우리의 축복의 시작과 계속과 결말이 하나님으로서만 온다는 것을 특히 성경에 있는 기도들이 밝힌다(3.9). 다윗이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시 51:10)라고 한 것은, 자기 마음속에 불결한 것이 속속 들이 차 있음을 고백하고 주님의 손으로 정하게 해 달라는 아니겠는가? 또 다른 시편에서 “아무 죄악이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시 119:133)라고 함으로써, 죄악과 싸울 힘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임을 간구하는 기도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활동은 우리가 모두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 첨가할 수 없는 현실을 만들어 주신다(3.10). 칼빈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움직이신 후에 거기에 대한 복종이나 항거를 선택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으나, 그는 하나님께서 의지의 방향을 효과적으로 결정하시는 분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이 이끄시는 사람은 이끌리기를 원하는 사람이다”라는 크리소스톰의 말은 그릇되고 세속적인 주장이라며 요 6:44의 주해에서 배척하였다.
(4) 견인(perseverance 堅忍)은 홀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로서 결코 우리의 어떤 행동에 대한 보상이나 보충이 아니다(3.11). 견인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는 선물이며 은총이다. 그런데 때로는 이 은총에 대하여 상급으로 생각하여 차별화 된 보상으로 이해하려는 견해가 있으나, 자칫 마치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과 협력할 고유의 힘이 있다는 가련한 망상에 빠질 수 있다고 칼빈은 비판한다. 따라서 칼빈은 하나님의 은총을 떠나서는 사람이 단 한 가지 선행도 자기에게 돌릴 수 없다(3.12)고 본다. 바울사도도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라고 했던 것이다.
(5) 어거스틴도 사람의 의지가 독립적으로 활동한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3.13). 칼빈은 현대의 펠라기우스파, 즉 소르본느(Sorbonne)의 궤변가들이 고대인들 전체가 이와 같은 칼빈의 견해에 반대했다는 것에 대하여, 반론으로 어거스틴의 견해를 들고 있다. 즉, 어거스틴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받거나 거절하거나 자유로 선택하도록 은총을 제시하실 뿐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속에 그 선택과 결심을 다 만들어내는 것도 바로 이 은총이며, 그래서 거기에 따르는 선행의 결과와 결실이다. 그리고 은총에 복종하는 의지는 은총이 만들어낸 의지에 불과하다”면서, “우리의 모든 선행을 실현하는 것은 은총뿐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어거스틴은 사람의 의지를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은총에 의존시켰다(3.14). 따라서 인간의 의지는 자유에 의하여 은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은총에 의해서 자유를 얻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총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께로 전향하거나 하나님 안에 머무를 수 없다.
제4장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어떻게 역사하시는가?(Ⅱ-4)
1. 사람은 사탄의 지배하에 있으나, 성경은 하나님이 사탄을 이용해서 버림받은 사람들의 마음을 굳게 하신다고 한다(4.1-5).
(1) 사람은 악마의 세력 하에 있으며, 참으로 기꺼이 그를 따른다(4.1).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된 자가 아니면 결국 하나님의 보호아래 있지 않을 것이며, 이 경우 사탄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따라서 사탄의 간계에 사로잡혀 있는 자는 그의 의지를 사탄이 움직이는 데로 움직일 수밖에 없을 것이며, 이는 주님이 공정한 심판으로 사탄에 내 버려 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이를 가리켜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한다”(엡 2:2)고 하였다. 그런데 같은 사건 안에서 하나님과 사탄과 사람이 역사한다(4.2). 욥의 예를 보면 욥의 가축을 약탈하고 목자들을 죽인 자의 행위는 사탄의 역사이지만, 욥은 하나님의 역사를 기대할 뿐만 아니라 역사하고 계셨다.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목적과 방법에서 볼 때 같은 사건 안에서도 사탄과 하나님의 역사가 공존하는 것이다. 특히 마음이 ‘굳다’는 의미에 대하여(4.3) 칼빈은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시기도 하는가 하면, 또한 하나님은 자기의 진노의 실시자인 사탄을 시켜 자기의 심판을 집행하시기 위해서 뜻대로 사람의 목적을 정하며 의지를 격발하며 노력을 강화하시기도 한다고 의미로 이해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불경건한 자들을 대하시는 실례들을 볼 수 있다(4.4). 즉,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욥 12:20; 겔 7:26),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욥 12:24; 시 107:40), “내가 그의 마음을 강퍅케(굳게) 하고…바로가 너희를 듣지 아니할 터인즉”(출 7:3-4) 등에서 이러한 내용을 잘 볼 수 있다.
(2) 사탄도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4.5).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악령)”이 사울에게 접했던 것처럼(삼상 16:14, 18:10), 주께서 버림받은 자들을 섭리로 여러 가지 목적에 배정하실 때마다 사탄이 개입해서 그들을 선동한다. 그러나 사탄도 피조물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에 따르며 섬겨야 한다. 그러므로 사탄의 역사도 결국은 하나님의 섭리와 허락 속에 있는 것이다.
2. 외형적인 일에서 하나님의 섭리는 사람의 뜻을 이긴다(4.6-8).
(1)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은 행동에서 우리는 마음대로 할 수 없다(4.6). 그 자체로서는 의롭지도 부패하지도 않았으며 영적 생활보다 물적 생활을 지향한 행위에 있어 사람에게 어떤 자유가 있는가? 혹자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에게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기도 하지만, 칼빈은 모든 경우에 하나님이 우리의 자유를 지배한다(4.7)고 말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섭리의 길을 트고자 하실 때마다 외면적인 일에서까지도 사람들의 의지를 굽히며 돌리신다고 칼빈은 말하면서, 그 근거로 “듣는 귀와 보는 눈은 다 여호와의 지으신 것이니라”(잠 20:12)라는 솔로몬의 잠언을 들고 있다.
(2) “자유의지”의 문제는 우리가 결심한 것을 성취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자유로 결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4.8). 그래서 칼빈은 우리가 자유의지를 논할 때에는, 외부의 방해가 있더라도 사람이 결심한 일을 모두 실현하며 완수하는 것이 허락되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라, 그가 모든 점에서 판단의 선택과 의지의 경향이 자유로우냐고 묻는 것이다.
제5장 자유의지 옹호론자들이 보통 하는 항의를 논박한다(Ⅱ-5)
1. 상식적인 근거 위에 선 자유의지 옹호론에 대답한다(5.1-5).
(1) 상식적인 근거 위에 선 자유의지 옹호론자들은, 첫째로 에라스무스(Erasmus)나 펠라기우스(Pelagius)는 필연적인 죄는 죄가 아니며 자원적인 죄는 피할 수 있다(5.1)거나, 둘째로 상벌의 의미가 없어진다(5.2)거나, 셋째로 선악의 구별이 전폐될 것이다(5.3)거나 또는 마지막으로 모든 충고가 무의미할 것이다(5.4)라는 논거를 제시한다.
(2) 칼빈의 논박(5.1-5) 첫째논거에 대해서는 칼빈은 필연적이기 때문에 문제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명백한 정죄의 대상임을 간과해서는 안 되며 ‘자원적’이라는 말을 ‘자유’로 변경시키는 오류를 지니고 있다. 둘째논거에 대해서 칼빈은 어거스틴을 말을 인용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공로에 상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은사에 상을 주시는 것”이며, 죄는 우리의 것이지만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하며, 상이 있을 때에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주신 은사에 상을 주시게 된다는 것이다. 셋째논거에 대해서 칼빈은 바울사도의 말에 따라 모든 사람은 부패했을 뿐만 아니라 악으로 넘어졌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모든 사람이 똑같이 악 가운데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첨가한 것에 주의를 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종하는 능력이 죄인에 없다면 충고는 무의미하다고 말하나, 주님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요 15:5) 그렇다고 해서 떠나서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더욱이 충고에 따르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심판대 앞에서 그들에게 불리한 증거가 될 것이다.
2. 성경에 있는 율법과 약속과 책망에 대한 해석을 근거로 자유의지 옹호론에 대하여 대답한다(5.6-11).
(1) 하나님의 교훈들은 ‘우리의 능력의 척도’인가?(5.6) 율법은 우리의 연약함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한 것이며(롬 3:20), 율법이 실현하려는 목적은 우리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다(딤전 1:5). 그러므로 율법 자체는 복종을 가르치며 우리가 은총은 얻는 길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5.7). 이러한 은총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 그래서 율법은 우리를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명령하시는 것이며, 율법은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굳게 잡고 준행하며 그 명령을 지키라는 것과, 항상 하나님의 은혜 안에 머물라(행 13:43)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5.8).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과 사람이 나눠서 하는 일이 결코 아닌 것이(5.9).
(2) “너희는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14),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사 1:19)라는 말씀에 따라 성경의 약속들은 의지의 자유를 전제한다고 논적들은 생각하지만(5.9) 이는 사랑받은 가치가 조금도 없는 자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교훈으로 자기의 뜻에 대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호소이다. 그리고 또한 그들은 의지가 자유롭지 못하다면 성경에 있는 책망들은 무의미하게 된다고 그들은 항의하지만(5.11),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빌 2:12-13)라고 한 경고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한다. 이들의 논거에 따르면 결국 구원이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의 결정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이들의 사실상 논거였다.
3. 성경의 특수한 구절들과 사건들을 근거로 한 논법에 대답한다(5.12-19).
(1) 반대자들은 “내가 오늘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신 30:11-14)는 말씀에 따라, 자유의지의 근거를 내세우지만(5.12) 율법에 의한 구원은 율법을 온전히 성취한 자에게만 주어진다는 점에서 이미 로마서 10장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는 불가능하다. 그리고 하나님이 사람들의 행동을 ‘기다리신다’(호 5:15)는 것은 자유의지를 전제로 주장하지만(5.13), 이 말씀은 이 백성이 완고해서 경고와 권고와 책망에 아무 효과도 없으므로, 하나님은 잠깐 물러서서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을 조용히 내버려 두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이들은 말하기를 이 행위들은 ‘우리의’ 아니가(5.14)라고 반문하겠지만, 행위는 하나님이 주셨으니 ‘우리의’ 것이요 하나님이 고무하셨으니 하나님의 것이다(5.15).
(2) 반대자들은 스스로 죄를 다스리라는 의미에서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창 4:7), 하나님의 자비의 도움을 받을 때 더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롬 9:16) 는 등의 성경구절을 들기도 한다(5.16-19). 특히 칼빈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 관련하여(눅 10:30) “사람의 지성은 하나님의 의에서 완전히 소외되었기 때문에, 그 생각하고 원하고 행하는 것은 불경하고 패악하고 악취가 나고 불순하고 부끄러운 것뿐이다. 사람의 마음은 죄의 독소가 속속들이 배어 있기 때문에, 그 호흡에서 나오는 것은 악취뿐이다. 어떤 사람은 간혹 선한 외관을 보이지만, 그 지성은 여전히 위선과 간계에 싸여 있고, 심정은 내면의 패악성으로 결박되어 있다”는 말로 이 논의를 마치고 있다.
[특강 8 정리]
제1부 제15장에 확인된 칼빈의 인간론은 창조시의 본성에 기초한 것으로, 창조시의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자유롭고 온전한 인간이었습니다. 다만 불멸의 영혼이 거주하는 집이 흙으로 지어졌다는 점에서 더 이상이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할 수 없는 존재임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달리 그의 교만으로 인하여 범죄 하였고, 이로 인하여 전 인류는 파멸의 길에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본성은 창조시의 본성과 달리 부패한 본성을 아담의 원죄로부터 유전되게 되었으며, 모든 인류는 파멸과 죽음의 비참함에 직면하게 된 것이며, 누구도 이러한 죄 앞에서 의로운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특히 칼빈은 여기서 말하는 타락은 악을 창조 자체의 기본틀로 보는 영지주의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창조시의 본성은 완전하였으나, 인간이 고의적으로 자신이 흙임을 망각하고 교만의 죄를 범함으로 인하여 영광스런 극장을 손상시킨, 본성의 부패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2부 제1장부터 5장까지는 이렇게 타락한 인간은 창조시의 본성을 잃고 그 본성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스스로 어떠한 능력과 노력으로도 본성의 부패에 대한 회복은 물론 자유의지의 회복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칼빈은 특히 이곳에서 인간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오랜 논쟁에 대하여 긍정론자들의 논거에 대하여 다양한 성경적 근거와 교부 어거스틴의 견해를 중심으로 반박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은 영혼과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로, 영혼의 능력은 칼빈에 따르면 지성과 심정에 있다고 봅니다. 다만 이러한 지성도 그 내용을 이성과 오성을 그 내용으로 하지만 타락으로 인한 부패된 본성상 온전할 수 없다는 점, 그리고 성령의 도움 없이는 온전한 심정에 기초한 선한 일을 행할 의지의 작용도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따라서 인간에게 남아 있는 것은 부패한 본성에서 나오는 하나님의 정죄만 있을 뿐이며, 하나님의 은총이 아니고서는 자유의지에 따른 의로운 행동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만, 칼빈의 논의에서 하나 유의해야 할 것은 인간의 본성이 원죄로 인하여 타락하고 부패하였다고 할 때 우리는 ‘전적으로 부패’하였다고 하지만, 칼빈은 여기서 말하는 부패란 ‘부패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지 ‘부패의 정도’를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왜 자신의 기독교강요 중 인간의 자유와 관련된 부분을 무려 6장(한글판은 총 155페이지)에 걸쳐서 논의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좀 알 필요가 있습니다. 당시 구원론과 관련하여 어거스틴 시대의 펠라기우스파, 그리고 루터로 시작되는 종교개혁 시대의 에라스무스, 칼빈시대의 펠라기우스파라고 할 수 있는 소르본느(Sorbonne)의 궤변론자 등으로 대표되는 소위 자유의지 긍정론자들은 구원의 문제를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이 아닌 “내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라는”, 구원론에 대한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심각한 폐해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인류의 파멸상태를 극복할 수 있는 것은 중보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뿐이며, 이러한 믿음은 나로부터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임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원죄를 무엇보다 중요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유의지의 사실상의 부정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구원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은혜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2011년 9월 16일 부산한우리교회 구모영장로 작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