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평창의 태기왕 전설
▶ 태기왕이란: 강원도 춘천, 화천, 원주, 평창, 횡성, 정선 등지에는 고대국가인 맥국이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은 삼국사기에서부터 고려사를 비롯해서 조선조의 각종 지리지에도 한 줄씩 춘천은 옛날 맥국의 도읍지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맥국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국가였는지 기록이 없어서 알 길이 없다. 현재는 대략 고조선의 유민이 남하해서 춘천에 도읍을 정하고 살지 않았을까 추정할 따름이다. 그런데 이에 얽힌 설화에 의하면, 춘천시 신북읍 일대에 도읍을 정하고 살던 맥국은 적의 침략을 받아 삼악산성을 쌓고 저항하다가 쫓겨서 용화산에 성을 쌓고 있었으며, 또 원주 등지로 피난을 했다가 횡성과 평창 일대에서 마지막 전투를 했는데, 결국 태기산에서 최후를 맞았다고 한다. 왕의 명칭도 태기왕이 유일하다. 어찌 되었건 맥국과 태기왕에 얽힌 전설과 지명 등이 현재 풍부하게 전하고 있다. 오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 전설의 내용: 춘천에서 세력을 떨치던 맥국의 태기왕(泰岐王)은 다른 부족국가의 침입을 받았다. 전투에 패한 태기왕은 부족을 이끌고 원주지방으로 이동했다. (태기왕 군사와 싸운 부족국가의 이름이 무엇이었으며 그 세력이 어떠했는지, 태기왕 전설에는 전연 나타나 있지 않다.) 원주로 패퇴했던 태기왕의 군사는 다시 강릉지방의 예국(濊國)과 최후의 결판을 내야 할 처지가 되었다. 뒤에는 북쪽에서 밀고 내려오는 적이 포진을 하고 있었고 앞에는 강릉지방의 예국 군사와 최후의 결판을 낼 전투 준비를 서둘렀다. 평창군 봉평면 덕고산(德高山)에 진을 치고 산성을 쌓아 병마를 훈련시켰다.
태기왕의 막하에는 용맹스럽고 지혜로운 삼형제(森炯齊)와 호령(號令) 두 장군이 기둥처럼 버티고 있었다. 삼형제 장군은 삼형제 봉우리에 진을 치고 3백 명의 군사로 적을 지키고 있었다. 호령장군은 호령봉(지금의 會令峰)에 군사 5백 명으로 일대를 이루어 진을 친 다음 적을 방비하고 있었다. 태기왕 막하의 삼형제 장군과 호령 장군이 적을 맞을 방비를 튼튼하게 하고 있을 때 예국의 군사가 쳐들어 왔다. 이때 예국의 군사가 실제 얼마였는지 전설에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예국의 대군은 먼저 호령 장군 진지로 쳐들어 왔다. 호령 장군과 그 군사들은 용감하게 싸웠으나 중과부적,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그 일부가 태기산으로 후퇴했고 예국의 대군이 태기산으로 몰려왔다.
호령 장군이 전사하고 군사들이 거의 전멸했다는 소식에 접한 삼형제 장군은 진을 쳤던 삼형제 봉우리의 진영을 버리고 군사를 몰아 태기산으로 달려왔다. 그러나 예국의 대군을 대적할 수가 없었다. 역시 중과부적이었다. 태기산성이 함락되고 전세는 이제 돌이킬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 졌다. 삼형제 장군은 급히 태기왕을 보호하면서 산성을 빠져나와 피신했다. 얼마 남지 않은 군사로 뒤를 막게 하고 태기왕을 모시고 피신 길에 올랐다. 그러나 예국군의 추격이 급박하여 태기왕 일행은 허둥지둥 옥산대(玉散臺: 지금의 안흥동)로 이동했으나 여기에서 맥국의 옥쇄를 잃어버렸다.(옥산대라는 이름은 이렇게 하여 생겨났다.) 옥산대에서 옥쇄를 잃어버려 맥국왕 태기와 삼형제 장군은 절망적이 되었으며 뒤따르던 군사도 사기를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추격이 잠간 멈춘 사이 태기왕 일행은 왕유(王留)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왕유라는 이름은 태기왕이 잠시 멈추었다는데서 비롯되었다.) 태기왕 일행은 왕유에서 잠시 휴식한 다음 길을 재촉하여 멸인(滅人: 지금의 綿溫)에 도착했다.
태기왕을 호위하던 군사는 죽고 흩어져 태기왕과 삼형제 장군과 몇몇의 군사만 남게 되었다. 완전히 절망에 빠진 태기왕과 삼형제 장군은 이제 더 희망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태기왕은 삼형제 장군에게 자결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삼형제 장군은 살아서 적으로부터 치욕을 당하기보다 깨끗이 죽는 것이 상책임을 고했다. 태기왕과 삼형제 장군은 마침내 평창군 봉평면 백옥포(白玉浦)까지 왔다. 백옥포에는 깊은 소가 있었다. 삼형제 장군은 태기왕의 옥체를 업고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태기왕과 삼형제 장군은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백옥포라는 이름은 백의장군인 삼형제 장군이 왕의 옥체를 업고 투신하였다 하여 백옥포라 불렸다고 전한다.)
태기왕이 삼형제 장군의 호위를 받으며 피신하던 때 무일리(無日里: 지금의 無夷里)에 이르렀더니 해가 저물었다. 태기왕 일행이 당도했을 때 해가 저물었다고 해서 해가 없는 고장이라고 했고 그래서 무일리라 불렀다. 후세에 와서 해가 없는 마을은 있을 수도 없고 해가 없으면 희망도 없는 암흑의 고장으로 황폐해버릴 것이라 하여 무이리로 고쳤다고 전한다. 태기산에 진을 치고 태기산에서 맥국을 다시 일으키려 했던 태기왕의 근거지라 해서 태기산(泰岐山)이라는 이름이 생겼다.(춘천 맥국의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