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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과 미술 치료
그룹심리요법의 이론과 실제는 여러 형태의 기록을 통해 충분히 입증되어 왔지만, 미술 치료의 경우 덜 그래왔던 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사건들은 정신 재활 치료, 특히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내상의 희생자들의 재활 요법으로서의 그룹심리요법과 미술치료의 통합으로 이어졌다. 1942년, 태비스톡 클리닉(Tavistock Clinic)의 윌프레드 비온(W.Bion)은 노스필드(Northfield) 병원의 군사 훈련 및 재활 병동에서 200여명의 병사들을 치료하여 부대로 돌려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집단역동(group dynamics)"을 이용해 그 병사들이 집단 내의 갈등에 적응하고 대처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울 수 있게 했다. 비온과 그의 동료인 릭맨(Rickman)이 많은 환자들의 재활 치료에 성공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접근 방식은 당시 지배적이던 군 중심적 체계에서는 인정받지 못했고, 그들은 전출되었다. 1943년, 폴케즈(Foulkes)는 노스필드로 갔고 해럴드 브리저(H.Bridger), 조슈아 비어러(J.Bierer)와 톰 메인(T.Main)과 합류했다. 그들도 그룹심리요법을 사용했지만 전반전인 치료 철학과 통합시키는 데도 관심을 가졌고, 그들은 (비온, 릭먼과는 달리) 많은 성공을 거듭하며 계속 머물렀다. 전쟁 이후, 비온과 서덜랜드(Sutherland), 브리저는 태비스톡 클리닉으로 가서 헨리 에즈리엘(H.Ezriel)과 합류했다. 폴케즈는 모즐리(Maudsley)로, 메인은 Cassel 병원으로 가서 분석학 중심의 치료 공동체 개념을 발전시켰다. 비어러는 아들러의 개념을 기초 삼아 환자들 간의 친목 모임을 조직했다. 그는 치료 프로그램에서 환자 자신들이 기여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영국 사회 정신의학 협회 (British Association for Social Psychiatry)를 만들 책임이 있었다.
1952년, 폴케즈는 그룹정신분석학회(Group Analytic Society)를 결성하고, 저널 "그룹정신분석(Group Analysis)"을 간행했으며, 훈련법과 실제 적용 기준의 발전에 있어 중심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는 커트 르윈(K.Lewin)과 그 동료들이 사회심리학에서 도출된 중요한 발전을 이뤄냈다. 르윈은 한 개인의 에너지가 그를 둘러싼 사회적인 힘들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말했다. 제 2차 세계대전 직후 르윈은 인종 간 갈등이 비재한 다문화 집단을 이끄는 지역 공동체 지도자들을 훈련하는 데 그의 모델을 사용했다. 1950년엔 국립훈련연구소(The National Training Lab)가 만들어졌다. 이 연구소의 목표는 여러 상이한 직업적 배경을 가진 참가자들에게 훈련을 제공하여 그들이 집단 내에서 효과적으로 작용하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후의 "Encounter"운동과 1962년 캘리포니아의 "에살렌Esalen"의 발전으로 이어진 "감수성 Sensitivity" 운동의 시초였다. 여러 비슷한 기관들이 미국 전역 및 영국 등 다른 곳에서도 발전했다. 인카운터 운동은 1960년대 말~1970년대 초의 여러 영국 미술 치료사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Ruitenbeek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룹심리요법의 창시자로 주장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어느 특정한 한 사람이 그 창시자가 될 수 없으며 이는 매우 개방된 맥락에서 만들어지고 발전돼왔음을 지적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지난 20년 동안 어느 정도 상황이 명백하게 변화했음에도 불구하고, 보수적인 정신분석학자들의 변화하는 태도뿐만이 아니라 소위 정신질환의 치료가 이루어지는 사회학적 맥락의 변화 때문에, 개인의 정신분석은 아직까지도 프로이트의 업적에 묶여있으며, 많은 테크닉과 스타일은 그의 업적과 창조 정신의 일부분이다.
Ruitenbeek는 미국과 같이 역동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사회에서는 전통적 관행은 존속하기 힘들거나, 혹은 그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결국 옛 것과 새 것이 합성된 새 모델이 등장한다고 말했다. 전통적인 정신분석의 틀 안에서의 실험은 힘들지만, 그룹심리요법은 그런 실험 방법의 적절한 뼈대를 제공했다. 예를 들자면 일정 시간동안, 일정한 접근 방법을 통해서 말이다.
개인 정신분석은, 부유한 사회 층에만 국한되었기 때문에, 변화의 압력과 현대 일상의 안정된 네트워크의 붕괴로부터 야기된 문제들에 대처 하는 데 효과적이지 못했다. 이는 사람들이 서로 이질감을 느끼게 하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없게 했다. 심리치료사라고 불리거나 자칭하는 많은 환자들은 사회로부터 발생한 원인에 기인한 문제들을 갖고 있는데, 개인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환자들의 문제들을 병적으로 취급해버리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는 특히 서로 다른 문화적, 인종적 배경에서 어떤 한 특정 사회로 온 환자들을 치료할 때 중요하며, 최근의 연구 결과는 이를 고려하지 않았을 때의 위험성을 드러낸다. 현재 연구되고 있는 과제의 결과들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신 질환이 인종차별과 박탈감에 대한 지성적 반응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룹심리요법은 탐구해야할 중요한 환경을 입증할 수 있고, 타협점을 찾을 수 있으며, 더 중요하게도, 다른 사람과의 친밀한 접촉을 통해서, 한 사람의 인생의 견디기 힘든 상황들을 바꿀 수 있다. 또한 그룹심리요법은 (신체 질환이나 정신적 장애로 제한되었다 할지라도) 이미 맺어진 관계들을 더욱 깊게 할 수도 있다. 아직 보통 치료사들과 위탁 기관들에게는 그룹심리요법의 가치가 잘 알려져 있지 못하다. 이는, 한 집단이 거론될 것에 대해 걱정하는 심리와 더해져, 그룹치료요법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개인 심리치료나 상담치료에 맡겨져 버린단 것을 의미한다. 더욱 애석하게도, 그들은 사실과는 달리, 집단치료를 받는 것이 개인 치료보다 못한 것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계속되는 건강관련 종사자들과 사회사업가들, 그리고 일반 대중의 그룹 심리요법 훈련을 통해서 그런 태도는 변화할 것으로 기대된다.
미술 치료는 영국에서의 발전에 있어 부분적으로 2차 대전의 사회재건 운동에 의존했다. 그러나 이미 20세기 초부터 예술가들이 일반 병원이나 정신병동에서 일하던 전통이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큰 수술을 했거나 결핵 등을 앓아 장기 입원한 사람들의 지루한 회복기를 달래주고 그들에게 창의적인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가끔 의사들은 환자들의 그림을 통한 정신 질환의 진단을 위해 이 예술가들을 부르기도 했다.
"미술치료"라는 용어는 1942년에 아드리안 힐이 서섹스 주의 에드워드 7세 요양소에 있던 회복 중인 결핵 환자들과 하던 일들을 묘사하기 위해 처음 만들어졌다. 그는 그림이 환자들에게 있어서 단순한 시간 때우기가 아니라 그들의 정신적인 상처와 불안감을 표현할 매체라는 것을 발견했다. 매우 활동적이며 유명한 인물이었던 힐은 미술 치료가 일반 병원과 정신 병원, 환자 요양소에도 쓰일 수 있게 하기 위한 성공적인 캠페인을 여럿 진행했다.
그 때는 1942년, 즉 예술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리타 시몬이 우연히 조슈아 비어러가 만든 런던 북부의 환자들의 친목 클럽에서 일하기 시작 했던 때이기도 했다. 그녀의 아들러 심리학에 대한 커져가는 흥미와 그녀 자신의 연구는, 미술에 대한 깊은 식견과 더해져 미술 치료계에서의 그녀의 뛰어나고 긴 경력으로 이어졌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는, 병원 내에서 미술 치료가 심리치료의 한 형태로 이루어지지 않고 언어 소통으로 진행되는 치료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못하는 환자들의 중요한 표현 수단으로 쓰였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은 융 계열의 정신분석학자 아이린 챔퍼나운 박사와 그 남편이 1942년에 세운 위드메드 센터와 같은 사설 기관들에서 정신 역학적 치료 모델과 통합되었다. 다른 정신분석학자들도 그림들을 그들의 주요한 연구의 중요한 부분에 사용했다.
미술 치료는 "치료로서의 미술"과 "미술 심리요법"의 두 평행적인 요소로 발전되었다. 힐은 시각 미술 활동의 치료적인 잠재력을 강조했고, 챔퍼나운은 전이 현상에 관심을 두면서, 치료사와 환자, 미술 작품의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 두 요소들은 몇 년 간 어느 정도 융합되었으나, 미술 치료의 진정한 핵심에 관한 ("미술 치료"라고 할 것인지 "미술 심리요법" 이라고 할 것인지) 토론이 벌어지고 있다. (적어도 기록에 따르면) 오늘날의 미술 치료사들은 그림의 소통력과 의식적, 무의식적 작용의 통합을 돕는 능력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치료사와 환자, 대상물 간의 상호작용의 역학 관계에 대해 더 큰 중요성을 두고 있다.
오늘날, 미술 치료는 700여명의 등록된 회원을 가진 제한된 직업이다. 대학원 과정 이상에서야 훈련이 이루어지며 승인된 세 개의 프로그램은 모두 국가의 고등 교육 시스템 안에 속해 있다(골드스미스, 런던대의 허트포드셔 미대, 세인트 앨번즈, 셰필드 대학).
집단에서의 미술 치료의 이용
이번 섹션에서 나는 집단에서의 미술 치료 사용법의 주요한 발전을 영국과 미국의 예를 들어 대략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몇몇 미술 치료의 선구자들의 업적은 당시(1950년대)의 미대에서 볼 수 있었던 형태의 개방된 원룸(studio)에서 그룹 치료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들이 병원에서 일할 당시 대부분의 미술 치료사들은 자신들의 치료 집단과의 경험에 대해 자신감을 갖고 있었다. 병원에서의 그룹치료에서 환자들은 자유로이 왕래할 수 있었으며, 개방된 원룸에서 치료사가 참석한 상태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 치료사와 환자들의 상호 작용은 미술 선생님과 미술학도와의 관계의 재생산된 형태 같았다. 개인들은 그들의 작품들에 대해서 치료사와 함께 방 한 구석에서 속삭이며 토론하곤 했다. 환자들은 서로 공유하는 한 공간 안에서 다른 환자들의 작품에 대해서 아주 미세한 영향만을 받곤 했다. 그 공간은 그 자체로 개인적이지만 동시에 공적이며 공유될 수 있는 하나의 예술작품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자유로운 미술가와 치료사의 관계가 될 수 있었다.
(개방된 원룸 그룹과 상반된)미술 치료 집단들은 1960년대 말에 다른 구성원들의 존재의 효과의 치료사와 같은 부분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커지면서 등장했다. 미술 치료사들은 점점 "인카운터," 에살렌 등 앞에서 언급된 것들과 같이 미국에서 비롯된 집단 역학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일부는 대부분의 미술 치료사들이 경계하고 있던 "growth movement"를 일시적으로 미술 치료를 그만 둘 정도로 깊이 포용했다. 그런 융 계열의 미술 치료사들은 융의 예를 따르며 심리요법에 있어 그룹 요법을 사용하는 데 강하게 반대했다.
"공연예술"의 등장과 미술 학교 교과과정의 다교과간 융합은 일부 미술가들로 하여금 치료사로서의 그들의 일들과 이런 접근법들을 통합하게 하기도 했다. 그룹 요법에 흥미를 갖게된 예술가들은, 어떤 그룹의 무의식적 주제는 집단 구성원들이 만든 이미지로부터 투영되어 생기며 강한 집단의식을 형성하게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1970년대에는, 좀 더 공식적인 형태로 예전의 그룹과는 달리 일정한 시간과 장소를 지정해놓은 작은 그룹 치료가 생겨났다. 이 그룹의 구성원들은 뚜렷한 소속감을 보였고, 그로 인한 책임감 등을 기대했다. 새로운 소그룹들을 형성하는 데 있어예전의 원룸 그룹에 있었던 비정형성이 결여되어 있고 강한 감정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에, 저항에 부딪히기도 했다.
요즘에는 많은 미술 치료사들이 그룹 방식으로 일하지만, 아주 적은 수의, 그룹심리요법에 훈련된 사람들만이 이 여러 모델들을 합성하려고 노력한다. 이는 미술 치료와 그룹심리요법을 모두 가르치는 골드스미스 대학의 미술심리요법 병동과 주로 관련되어 있다. 골드스미스 대의 미술 그룹심리요법 학위는 집단 역학, 다자간 집단 치료 모델을 강의와 실습의 기초로 사용하며 모든 미술 치료사 과정 학생들의 그룹 실습을 포함한다.
이런 강조점들은 처음, 즉 1970년대 중반부터 골드스미스의 훈련에 포함되었다. 나는 미술 치료를 골드스미스에 소개한 직후인 1975년에 집단분석 훈련을 시작했다. 안드레아 길로이와 제니 워터하우스가 1년 정도 후에 연구진으로 참가했고 그룹 미술 치료 워크샵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1979년 미술 치료사 게리 맥닐리가 Institute of Group Analysis(IGA)에서 훈련을 마친 직후 합류하면서 집단 분석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후에, 미술치료사 조안 우디스와 샐리 스케이프가 합류했고, 골드스미스의 미술치료 학위를 갖고 있으며 핸더슨 치료 공동체에서 수년간 일한 제인 더들리가 합류한 그룹 중심의 팀을 만들면서, 맥닐리에 이어 샐리 스케이프가 워크샵 리더의 자리에 올랐다.
요즘에는 모든 미술 치료 훈련이 연구 과정 전반에 운영되는 미술 치료 훈련 워크샵의 주요한 요소인 그룹 방식과 관련되어있다. 이 것은 대개 그룹 단위로 일하는 것이 요구되는 미술 치료사들의 특성상, BAAT의 훈련, 교육 위원회가 필수 코스로 공언한 중요한 것이다.
미술 치료 그룹의 최근 발전사항 맥닐리(McNeilly)는 그가 1970년대 말에 IGA에 있는동안 체계화한 "집단역학적 미술치료"라는 과정을 설득력있고 흥미를 유발하도록 써냈다. "미술 치료의 지시적, 비지시적 접근법"이라고 명명된 맥닐리의 논문은 1983년, 미국 잡지인 The Arts and Psychotherapy에 처음 발표되었고, 이후 1984년 12월에 Inscape 지에 발표되었다. 맥닐리는 마치 "레시피 책"처럼 치료사가 대상 집단에 함께 나눌 특정한 감정적 테마를 주는 미술 치료의 관행을 비판했다. 그의 비판은 "Art Games and Structures for Groups"과 "Art Therapy for Groups" 두 책자의 출판으로 이어진 매리언 립먼(M.Liebmann)의 "조직화된 미술치료 그룹" 연구에 부분적으로 그 논거를 두었다. 나는 이제 맥닐리의 비판과 뒤이은 토론의 근거를 이해하기 위해 립먼의 업적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1979년, 립먼은 그녀의 석사학위 논문을 위한 연구의 일부로 40인의 미술치료사들의 그룹 연구에 대한 설문조사를 만들었고, 그 결과 그녀는 대부분의 그룹들이 비슷한 형태를 갖고 있단 것을 알아냈다. 그녀는 1984년 쓴 보고문에서 이것을 소개(Introduction), 활동(Activity), 토론(Discussion)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했다. 이렇듯 미술치료사의 그룹들은 매우 정형화되어있다. "소개"단계에는 새로운 멤버에 대한 환영, 경계의 설정, 지난 세션을 요약하고, 약간의 신체적인 워밍업을 한다.
그리고나서 그 세션의 주요한 활동이나 테마가 소개된다. 대개 치 료사들은 이전 세션에 했던 것들이나 그 당시 중요했던 이슈에 따라 활동을 선택한다. 여러 번 함께했던 그룹들은 특정 세션의 활동을 선택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새로 온 멤버를 돕는 등 더 많은 책임을 진다. (Dalley, 1984년:180페이지)
립먼이 말하는 "활동"은 주어진 시간의 반 정도를 차지한다: 미술치료사들은 이 단계에서 그들이 어느정도 참여할 것인지를 결정해야 한다. 이 결정은 개인의 치료철학, 치료사 소개, 대상 그룹의 종류, 활동의 종류 등 여러 요소들에 달려있다. 마음의 장벽을 깨기 위해서 일부 치료사들은 활동에 함께 참여하기도 한다. 만약 그들이 그룹 구성원들에게 그 자신들을 소개할 것을 부탁하면, 치료사의 참가는 이 단계의 진행을 용이하게 할 수 있다. (Dalley, 1984:16; 참고 - Yalom, 1985:216-226)
"토론"은 대개 세션에 할당된 시간의 나머지 반을 차지하며, 때때로 각자 일정 시간을 분배받거나 1-2개의 그림에 대해 토론하거나, 그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느꼈 던 점을 말하는 시간을 갖는다. 립먼은 환자들의 미술 작품을 "토론"하는 과정이 각 치료사의 철학과 이론적인 관심, 주위 환경, 특정 그룹의 종류에 따라 달리 행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립먼은 이후에 "놀이"의 개념을 소개했고 사람들의 타인들과의 경험을 강화 시켜줄 수 있는 그룹 놀이에 대한 논문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녀는 개인의 성장 측면에서의 놀이는 일정한 규칙이 있으며 즐길 수 있는 그 어떤 활동도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 규칙은 여러 단계의 대답을 할 수 있게 다양한 법으로 해석 될 수 있을만큼 유연해야하며, 참가자들의 동의가 있으면 바뀔 수 있어야 한다. 어떤 놀이라는 것은 축소된 "실생활"이며 "실생활에서 일어날 수 있으나 실제와 혼돈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Dalley,1984:163) 그녀는 게임을 이용하는 것을 포함한 미술치료 그룹의 여러 예시를 든다. 그녀는 알콜중독자 병동의 그룹들, 여성 그룹, 지역 주민 그룹, 성폭력 피의자 센터의 그룹, 미술치료 과정 중의 친목 회의 등을 묘사한다. 이 모든 그룹들에서 안내자는 그룹을 소개했고, 워밍업을 제안하면서 활동을 했다.
립먼은 그녀의 보고서 "미술 놀이와 그룹 구조Art games and group structures"를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미술치료 게임과 정형화된 활동을 하는 것은 미술 치료와 집단과 놀이의 전문 지식을 얻는 것이며, 특정 그룹과 특정 맥락에 따라 옳은 선택을 하고 그룹과 함께 배우는 것은 치료사의 책임으로 남는다. (Dalley, 1984:171)
립먼의 연구에 나타난 접근법과 많은 수의 미술치료사들의 그것을 비판하면서, 맥닐리는 그가 이전에 특정 테마로 어떻게 그룹의 방향을 정해 줬는지를 묘사했다. 이 주제들은 사랑, 증오, 의존, 독립 등과 같은 강한 감성적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이들 경우에서 주안점은 위와 같은 것들의 극과 극에서 나오는 것들의 갈등이다. 주제의 변화는 개인이 문제들을 처리하는 것과 해결점을 찾는 것의 어려움을 명백히 드러낸다. 맥닐리는 그런 직접적인 표현이 너무 강한 감정을 너무 짧은 시간에 드러나도록 함으로써 그 구성원과 그룹, 치료사가 그 대상물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준다고 느꼈다. 또한 그 테마는 그룹이 발전할 수 있는 정도를 제한할 수 있으며, 이는 치료사가 그 그룹이 탐구할 깊이를 조절할 수 있는 방법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의 상호관계에 대한 탐구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주제 중심의 미술치료 그룹을 비판한다; 주제중심의 그룹의 대부분에서 발생하는 것은 개별의 구성원들과 치료사 간의 설교적이고 가르치는 것 중심의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치료사는 모든 좋은 것들을 제공하는 공급자로 보여질 뿐이다. 여기서 이 치료사는 처음부터 의존 기본전제에 빠진 것이다. 그는 대상 그룹을 만족시키고 그들로 하여금 자신에게 의지하게 만드는 데 동의한 것이다. (McNeilly, 1984:7)
맥닐리가 "집단분석"으로 정의한 비지시적 접근에서도 주제는 나타나지만, 일정한 시간을 두고 서서히 나타난다: 전체적인 주제는, 지시적이고 직접적인 요구에 의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발전에 있어 더 미묘하고, 어쩌면 더 강하며 더 역동적일 수 있다. 동기적 현상은 두 개 이상의 같거나 밀접하게 관련된 상징들이 그룹의 구성원들에 의해 나타나면서 보여질 수 있다. 또한 그런 접근법 하에서, 우리는 그 그룹의 보편성과 그 상징적 삶에 초점을 맞출 수 있다.
치료에 반대하는 기준에 대한 얄롬(Yalom)의 말은 이 비판을 뒷받침해준다. 미술작품은 번갈아 그룹 구성원들에게 토론의 대상이 되며, 구성원들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특정 주제에 대해 논하도록 강요를 받아 때 이른 자기폭로를 해야할 압력을 느끼기도 하며, 얄롬이 "당신은 이것을 능가할 수 있나요?" 라고 부르는, 멤버들이 "소용돌이 치듯 자기 폭로에 열중하거나 자신들끼리 배타적인 패턴을 만들어 외부의 구성원들을 배척 하고 새로운 구성원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 접어들기까지 한다.
많은 미술치료사들이 주제 중심의 접근법을 사용하는 맥락에서 맥닐리의 논설은 여지없이 강한 비판을 받는다. R. Thornton, M.Liebmann 등 브리스톨 지역의 미술 치료사들은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손튼Thornton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맥닐리에게 있어] 주제는 임상적인 목적을 위한 신중한 생각 뒤에 사용될 수 없으며, 의무감에서 자유로울 수도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이는 훈련의 강도를 주기 위해서 필요하며, 이 테크닉은 좋은 결과와 의미있는 상호작용에 대한 풍부한 예들로 뒷받침되고 있다.
손튼은 그 자신도 1년간을 IGA에서 보냈으나, 집단분석적인 방법에 설득당하지 않았다. 그는 그 접근법의 부진성에 충격을 받았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 접근법을 시도하다 이내 포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는 테마를 사용한 요법이 해롭다는 생각에 반대했지만, 어느 초보 치료사의 상황에 맞지 않는 주제 설정은 해로울 수도 있음을 인정 했다. 그는 주제 설정이 고도의 이해를 필요로 하며 쉬운 일이 아니란 점을 인정했다. 그는 치료사가 자신의 기술을 단지 방어적으로만 이용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동의 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한 사람과 그의 테크닉을 아는 것으로, 주제 요법의 경제적 가치와 내재적인 위험성을 모두 자각한 상태에서 훈련될 수도 있다. 웨이드슨은 미술치료에 관한 영국 내의 논쟁에 직접적으로 참가하지는 않았지만 다음 제시된 점에서 기여한 점이 있다:
유도 심상guided imagery을 포함하는 구조화된 미술 활동에 관한 가장 중요한 의문은 무엇을 사용하느냐가 아니라 언제 그것을 사용하고 사용하지 말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20여명의 미술치료사들과 몇 명의 미술치료 학도들과 함께 수업을 한다. 그 집단은 세 번 "돌면서" 자신들이 사용했던 미술치료 테크닉을 말했다. 짧은 시간 안에 우리는 60여개의 테크닉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필기를 했다. 내 옆에 있던 한 여학생은 그 노트에 "미술치료를 위한 레시피"란 제목을 붙였다. 미술치료는 한 조각 케이크가 아니다. 한 명의 미술치료사는 상업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그녀가 이미지의 힘과 그녀의 고객 안에 숨은 치유의 힘을 믿는다면, 그녀는 그녀의 치료 대상 그룹을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흐르도록 할 것이다. 그녀는 그녀 자신이 환자들의 자기표현에 민감하다고 믿음으로, 그녀는 그들의 자기 탐구를 촉진하고 미술치료 그룹과 각 구성원들의 성장 잠재력을 격려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