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대 그리스의 피타고라스가 맨 처음 기술했듯이,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지각과 견해, 그리고 삶과 삶에서 일어나는 것에 대한 이해가
진짜, 진실, 사실이며, 따라서 옳다고 순진하게 추정한다.
그러므로 남들이 다른 관점을 갖고 있으면
그들이 틀렸고, 잘 못 알고 있으며, 편견이며,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거나 무지라고 간주한다.
에고의 나르시시즘적 핵심이 갖고 있는 타고난 허영심때문에
에고는 스스로가 옳은 것에 기득권을 갖고 있는 듯이 작동한다.
이런 성향때문에 에고는
자신이 중요한 존재라는 생각을 항상 달고 다닌다.
다시 말해 에고의 작동 토대가 완전히 환상에 불과할 경우라도 에고는
자신에게 강력한 권한이라는 미묘한 특성과 자질을 덧붙인다.
따라서 '옳은 것'은 자존심과 자부심과 관련이 있다.
이는 도덕적 우위를 차지하려고
끊임없이 벌이는 국내외 정치적 투쟁에서도 반드시 지켜내야 할 항목이기도 하다.
신념체계와 그로 인한 감정적 행동이
성공과 행복은 물론
심지어 생존까지결정적인 요인이 된다는 점을 고려할때
그와 관련된 기저의 과정을 분석하는 일은 매우 유용하다.
기저의 처리과정은 기본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이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일은 상당히 중요하다.
인간의 정신은 여러가지 유추나 가정에 기초해 작동한다.
이와같은 유추나 가정은 정서적으로 취급되는 동시에 우선순위에 따라 분류된다.
이러한 계층화는
동의나 반대를 포함해 믿음과 행동에 필요한 잠정적 모델을 제공한다.
그 다음 결과적으로 의심이나 확실성을 야기하는데,
이에 따라 개인과 집단이 충성과 헌신이라는 목적에
스스로를 맞추어 가려는 경향을 강화시키거나 약화시킨다.
현실감각이란
식별할 수 있는 것과 미묘한 것 등
수많은 요인에서 발생하는 상호복잡성에 대한 경험적/주관적 초점이다.
잘 검토해보면 어떤 순간이든 주관적 인식이 이루어질때마다
그 인식에는 말 그대로 원인이 될만한 수백만개의 요소가 들어있다.
그 수백만개의 요소는
내부적으로 중요도와 지배권이라는 기준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
견해, 믿음, 신념 그리고 여타 정신적 처리에 영향을 끼치는 가장 확실한 요인에는
나이, 성별, 교육, 뇌생리학, 과거경험/경력, 훈련, 언어기술,
지능지수, 심리적/지적 전문지식과 능력등도 포함된다.
전반적인 의식진화수준은 이런 요인들을 지배한다.
이 의식은 인간의 의도, 헌신, 내면화된 목표, 그리고 주의 자세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더 나아가 이 모든요인들은 정치화된 문화와 사회적 추정 및 공리에 의해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이때 공리란, 사회구조에 있어서 실재이자,
사회구조에 본래 내재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자명한 원리를 말한다.
하나의 해석으로서의 실재
앞 내용을 보자면 현실감각은 가령, 선형적 묘사와 물리적 사물의 차원처럼 기능적으로 유용하지만 입증할 수 없는 매우 주관적인 유추이자 가정이다. 정신의 모든 명제는 기껏해야 잠정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 한계를 인식하는 것은 지혜가 갖고 있는 본래적 자질이다. 지혜는 겸손함과 유연함의 정도를 뜻한다. 또한 시간과 경험에 따라 앞으로 더 많은 정보가 쌓이게 될 것임을 인식하는 보수적이고 조심스러운 태도를 암시한다. 따라서 지혜(를 지닌 사회와 구성원)는 모든 지식이 잠정적인 것이자, 의미와 중요성과 가치측면에서 언제든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라는 말의 정의도 입증가능한 진실을 뜻한다. 사실, 입증가능한 진실이라는 묘사적 표현은 최근까지도 할 수 없었다. 의식수준 측정이 되고 나서야 그런 표현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입증가능한 실재/진실/진실성은 인간의식에서 가장 최근에야 등장한 것이다.
실재를 분간하는 능력
인간정신은 자동적으로 자신의 주관적 경험이 당연히 타당한 것이라고 추정한다. 따라서 정신의 작동은 믿음이라고 부르는 타고난 특성에 기초한다. 자질로서의 믿음은 최근 학계 회의주의자들에게 공격받아왔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회의주의자들은 그들의 회의주의(160), 그리고 그것과 관련된 나르시시즘적 궤변에 대해서는 극도의 믿음을 보인다. 회의주의가 그들 자체의 회의주의를 회의하지 못하고, 순진한 신념체계를 외부로 표출하는 것이다. 이 신념체계는 두가지 약점을 드러낸다. 첫째, 기능적으로 더 높은 의식수준을 거부하고, 둘째, 의미와 추상, 혹은 선형적 내용(외관)에서 나온 맥락(장)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는 4장에 나오는 뇌기능과 생리학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고는 자체 프로그램의 실재나 진실을 굳게 믿으면서 내부적으로 그 프로그램을 교정할 능력이 없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순진무구한 성향을 기본구성 요소로 타고났다고 할 수 있다. 에고에게 검증할 수있는 능력이 선천적으로 결핍된 이유는, 에고의 데이터가 오직 내부처리 시스템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에고의 내부 메커니즘에는 검증과 입증에 필요한 외부의 독립적 참고자료가 전혀 없다.
인간의 정신은 이를테면 나침반이나 하늘의 별같은 외부의 참고자료 없이는 자체적으로 방향을 수정할 수 업는 해상선박과 같다. 위성 항법장치처럼 다른 모든 데이터를 비교할 수 있는 절대기준이 될 외부의 참고지점에 접근할 수 없을때에 비로소 시스템을 수정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절대주의는 의식수준 650, 절대자는 1000으로 측정된다).
1995년부터 2007년 사이에 먼저 나온 본 저자의 책에서 기술했듯이, 현재는 입증가능한 진실의 참고 척도가 있다. 그 척도에 의하면 의식수준 200이하는 가짜이며 200이상은 점진적으로 진실이다. 의식수준 200이하는 가짜이며 200이상은 점진적으로 진실이다. 의식수준 1000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지표로서 다른 모든 측정수치는 이 수치에 대한 상대적인 값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을 통한 상대주의는 상정된 모든 진리가 사회적인 것이며, 언어적으로 구성된 견해(지각/정의), 이를테면 그저 수사에 지나지 않다고 생각하기때문에 절대주의라는 실재를 부인한다. 따라서 상대주의는 단지 지각자체만을 볼뿐, 본질과 맥락은 보지 못한다. 역설적으로 상대주의는 그 자체의 전제를 절대적인 것(우수하고 엘리트적인 것)이라고 간주한다. 만약 모든 서술이 그저 가설된 의미론적 구성물이라면, 분명히 바로 그 서술자체에 내재적 실재가 없으며, 그 또한 가치를 덧입힌 언어적 구성물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자체 기준에 의해서 허위로 판명된다(이는 역사상 피타고라스의 자멸적 주장에 맞선 플라톤의 패배장면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내용 대 맥락
진실이라고 알려진, 혹은 실재라고 주장하는 모든 진술은 여러 지배적 요건에 좌우된다. 이 조건들은 이미 확인할 수 있는 요인일수도 있고, 동시에 전혀 모르는 요인일 수도 있다. 앞서 이미 기술했듯이 데이터 분석은 오롯이 상황론적 요인에 달려있다. 어떠한 사건이 관찰자에게 어떤 의미로 보이는지, 혹은 무엇처럼 보이는지는 관찰지점/시점과 현재 지배적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관찰하는 능력과 관찰을 정확히 해석하는 것은 뇌기능과 조화를 이루는 일로서 사실상 의식수준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 의식수준과 뇌기능은 의도와 동기에 영향을 받는다. 의도와 동기의 범위도 다양해서, 잘 훈련되어 사심없이 정교한 통찰력과 본질을 식별하는 전문지식을 갖출수도 있고, 감정에 사로잡혀 왜곡된 편견을 보이거나 고의적인 위조(지각)와 수사(180)로 정치적 논란을 키울수도 있다.
사회적 산물로서의 실재
인간정신이 인식하건 못하건, 실재와 진실을 구별해내는 일은 인간정신에 있어 항상 중요한 문제였다. (예, 인식론의 주제) 오늘날 그 구별은 미디어의 전반적인 영향때문에 훨씬 더 어려워졌다. 미디어가 끼치는 영향력은 눈에 보이고 확실한 것이지만, 동시에 오묘하고 무의식적인 것이기도 하다. 미디어가 가장 확실하게 영향력을 미치는 지점은 A를 선택하고, B를 버리는 취사권한을 가지고 선별된 사항을 보도하는데 혈안이 되어있다는 점이다. 이 모든 상황은 텔레비전에서 시각적 효과와 음악을 영상에 덧입혀 나오면서 심화된다. 기존의 편집권에 정서적/정치적 왜곡과 극적 각색의 영향력이 추가된다. 편집은 특정사항을 제시하는 스타일과 순서배열에 의해 강화된다. 미디어가 제시한 자료는 의식수준 최저 10에서 최고 570까지 측정된다. 이렇듯 제시되는 진실의 수준이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관찰자의 정신은 실재에 대한 추정을 동일하게 작동시킨다. 따라서 미디어가 끼치는 총체적 영향은 왜곡된 가치를 포함하는 가상실재의 산물이다.
당대의 정교한 시청자는 앞서 말한 미디어의 왜곡된 영향을 잠재적으로나마 인식하지만 의식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그 점을 인식하지 못한다. 더구나 그들은 어린아이처럼 허구가 진실임을 믿는 경향을 보이면서 일종의 "대체된 실재"속에 살아간다. 2007년 10월을 기준으로 인터넷 블로그의 50%는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된다. 미국내 55% 인구는 200이하로 측정되며, 따라서 이들은 내저적으로 왜곡과 오독을 하기 쉽다. 전세계에서 200이하로 측정되는 인구는 전체 85%에 이르며 일부 하위문화와 국가에서는 거의 100%에 육박한다. 따라서 오늘날 거짓이 전세계 인구 대다수의 사고와 현실검증능력을 지배하고 있다. 나치 선전부 장관 요제프 괴벨스가 관찰했듯이, 거짓말도 자주하면 결국 사실(가상실재)인 것으로 믿게 된다. 대다수 시민들은 진실과 거짓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과 실재의 진보적 본성
정보처리는 진화적이다. 발달진화상의 타임라인과 더불어 진보적인 방식으로 드러난다. 이른바 가정된 사실을 확인하는데에는 수십년, 아니 수백년이 걸릴 수도 있다. 또한 시간이 갈수록 더 많은 정보를 얻고 해석사게 되므로 그만큼 편집하는 과정도 더 필요하다. 더 위대한 지식이 등장하면서 검증에 필요한 기준도 바뀌고, 이에 따라 의미와 중요성도 변한다. 인가니식의 모든 분야는 시간이 흐르면서 변한다. 심지어 역사도 새로운 발견과 방법론에 근거하여 수정될 수 있다. 따라서 설령 그 사실은 변하지 않더라도 그 사실의 의미나 중요성은 시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신념과정보는 잠정적이다.
진실/실재의 이해는 주관적이며 가변적이다. 정보를 처리하는 개개인의 스타일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가령 나는 알고 있다/생각한다/느낀다/믿는다/--에 대해 신뢰한다 등 표현은 다양하다. 또한 개개인들은 실재의 명시되지 않은 패러다임에 대해 무언의 충성을 내비치기도 한다. 이에 사람들은 직관하고 깨닫고 인식하고 이해하고 파악한다. 이런 스타일은 교육, 전문화, 재능, 타고난 능력, 지능지수, 투사된 가치, 견해, 감정, 편견뿐 아니라 지리학적, 문화적, 가족적, 윤리적, 도덕적 훈련등의 요인에 영향을 받는다.
진실과 실재는 등가성/동일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이제 진실의 수준척도를 참고하여 그 등가성의 타당함을 입증할 수 있다. 그 척도는 객관적이고, 비개인적이며 관찰자의 견해와 무관한 것이다. 다시말하면, 추정된 진실을 진술하려면 반드시 맥락을 자세히 설명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아야 한다. 이 점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영적인 것은 진짜인가?
양자역학이 등장하기 전까지,
물리적 세계에 대한 뉴턴식의 설명이 완전무결하고 최종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입자물리학, 비선형적 역학, 양자이론이 등장하고
여타 과학적진보가 이루어지면서 이전의 가설과 추정은 다시 검토되어야만 했다.
만물을 이해하는 방식에 변화가 생겼지만, 과학적 데이터의 기본적 실재는 좀처럼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
지만 비물리적 패러다임을 다루는 영적 실재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았다.
영적 실재는 구체적이지 않고 별개로 분리되지 않으며 선형적이지 않고, 적절하게 묘사할 수도 없다.
그것은 내용이 아니라 맥락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영적인 개념은 경험에 근거하여 주관적이고 개념에 근거하여 맥락적이며, 비선형적이다.
따라서 W. 제임스의 '종교적 체험의 다양성'에 따르면, 영적 실재는 형언할 수 업는 종교적, 천상의(에테르적), 태초의, 거룩한, 시간이 흘러도 변치않는, 영원한, 전능한,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는 신성한 것으로 기술된다.
또한 인간이 알지 못하는 카르마적 성향의 영역이자 천상과 신성의 영역이다.
영적 실재, 더 위대한 비선형적 실재는
위대한 화신, 성인, 깨달은 현자들, 그리고 총체적으로 경험에 근거하여 확인가능한
실재에 동의했던 영적 천재들에 의해 천년을 넘나들며 계속 묘사되어 왔다.
이런 실재들은 측정된 의식수준 200에서 나타나기 시작하여,
500대와 600대를 거쳐 깨달음의 1000지점까지 점진적으로 나아간다.
여러시대의 위대한 영적 스승들은
영적실재를 경험적이고 주관적인 방식으로 확인할 수 있는 과정과 단계를 가르쳐왔다.
이러한 실재는 의식측정연구라는 임상적 방법론에 의해 증명될 수 있다.
의식측정연구는 확증과 조사의 새로운 차원을 허용한다.
영적실재 대 영적환상
역사적으로 볼때, 진실과 거짓을 구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영적 영역안에도 틀린 정보가 상당히 많았으며, 영적 허구와 판타지 정도로 기술될 수 있는 내용을 믿는 경우까지 있었다.
아래 도표는 바로 이점을 잘 나타내준다. 다음은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되면서 거짓으로 판명된 것이다.
소설과 신화
5차원 진입, 묵시론적 예언, UFO종교, 물병자리 숭배집단, 계시록(신약성경), 미륵불, 뉴에니지 운동, 바이블 코드, 다빈치 코드, 백만개의 조각(제임스 프레이), 다빈치 코드의 진실, 부정적인 기도-치유연구(미국심장저널 2006년 4월호), 라엘파(외계인이 인간복제를 통해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는 집단), 붓다의 화신, 람 바다두르 반잔, 마야족 달력의 예언, 스네이크 피트, 스타시드 이이들(별의 종자들), 자연치유, 시온의정서, 점성술 종교, 심령영매, 점술, 영적세계와 교신(채널링), 제 51구역음모론, 오푸스 데이회, 지구종말예언, 외계인, 크롭서클(곡물밭에 나타나는 원인불명의 원형무늬), 외계인에 의한 납치, 크리스털 아이들, 외계인의 UFO, 태양신전교단, 유다복음, 토리노의 수익, 유란시아, 하느님의 유전자, 유령, 하위종으로서의 환생, 유전자코드, 하이다칸 바바지(히말라야 성자).
역사적 해석
영적이라고 명명되는 영역의 스펙트럼은 넓다. 위대한 시대를 거치면서 확인된 높은 수준의 확증가능한 진실부터 이와 정반대로 가짜 영적판타지, 허구, 신화, 오독까지 총망라한다. 하지만 신화, 알레고리, 동화, 우화, 이야기 그리고 전설은 추상적 진실의 개념을 단순한 형태로 전환하여 비유적으로 보여줄 수있는 일종의 교사기능을 수행한다. 이와 비교하자면 유머, 시, 그리고 미술은 추상적 원리를 강조하기 위하여 패러독스를 덧붙여, 신화 등과 유사한 은유적 소통방식을 사용한다.
따라서 구약성경 등의 역사적 종교경전에는 문화적 신화와 이야기가 포함된다. 말 그대로 신화와 이야기는 사실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문화적 전통에 들어간다. 이를테면 이런 신화와 이야기는 산타클로스의 상징성과 유사하다. 실제로 산타클로스는 사슴을 타고 지부으로 날아오거나 굴뚝을 타고 내려가지 않지만, 그 전설은 크리스마스 정신을 아이들이 이해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을 보여준다.
스콥스 재판에서 성경안에 비유적으로 표현된 여러가지 이야기는 클래런스 대로가 펼친 세세한 공격의 초점이 되었다. 그의 방식은 법률조항과 법률정신 사이에 생기는 차이를 공격하는 것과 비슷했다. 이는 종교적 표현의 자유와 종교시행의 자유를 놓고 벌이는 최근 정치적 논쟁의 전형이기도 하다.
앞서 인용했듯이 미국헌법과 권리장전은 정부가 주도하는 종교(신권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적립해놓았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크리스마스 트리, 산타클로스, 메노라 등) 종교표현의 자유는 사법부를 비롯해 입장차이를 내세워 때마다 의견이 달라지는 세속주의자들이 무심코 간과하는 미묘한 구별지점이다. 사법부 출신 국회의원들이 간과했던 사실은, 인간 존재의 궁극적 근원으로서 신을 언급하는 부분이 미국 50개주 전체 헌법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로써 그들은 미처 인식하지 못하지만 "자연법"에 대한 보편적 충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재와 의미
구체적 사례를 활용해 추상적 개념을 설명할때, 결과로서 그 개념의 중요성과 의미가 명확하게 드러난다.
영적 진실과 실재는 비선형적 맥락의 산물이다.
이점 때문에 그것을 선형적인 언어로 드러내 설명하기가 어렵고 문제가 발생하곤 하는 것이다.
의미는 입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영향이 주관적이기 때문이다.
이는 미술이 언어적 제약을 우회하는 표현형태라는 점과 아주 유사하다.
이에 따라 표현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을 만큼의 진짜가 아닌 오히려 주관적으로 매우 강력한 진짜가 될 수 있다.
문자적 진실과 추상적 진실을 구별하는 일은 더 높은 의식수준으로 진화하면서 얻은 미묘함과 능력으로 가능해진다. 이를 가리켜 흔히 정교함의 정도라고 언급하기도 한다. 알레고리는 시적 허용의 형태로 표현된다. 말하자면 맥락에 따른 색체, 즉 함추석과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상징적 이미지와 개념을 활용하는 것읻. 가령 용은 문자그대로 하나의 실재는 아니지만 용의 상징성은 보편적으로 인식되며 원형적 수준에서 파악된다.
상징과 추상적 함의 혹은 의미간의 차이를 분간하지 못하거나 할수 없는 것을 가리켜 "문자 그대로의", 경솔한 또는 상상력이 없는 것이라고들 한다. 상상력이 없다는 것은 온전한 이해에 필요한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뜻이다. 진실의 문자적 수준과 추상적 수준(법률 조문과 법률정신)사이에서 벌어지는 의도적인 왜곡은 정치적/법적 논쟁은 물론 교회에서 일어나는 논쟁의 기본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논쟁과 갈등의 근간은 대개 집중적이며 오독이라는 자기 본위의 인위적 산물(실수)이다. 이는 보통 의도적인 것이며, 사실상 아무 관련도 없는 세부사항의 가설적 중요성을 과장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해석학이라고 일컫는 의미연구는 맥락을 정의하고 파악하면서 자연발생하는 추상적 사고의 수준을 분류할때에 미묘한 것이 참고자료, 절묘한 뉘앙스를 반영한다. 모든 인간이 신성한 근원의 힘으로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높은 수준의 추상적 진실이지만, 문자그대로 입증하거나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재능, 신체적 자질, 그리고 부자에서 빈자까지 태어나는 환경이 너무나도 다른데, 대체 어떤 의미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말인가?
만약 인권이 인간 창조를 맡은 신성의 결과라면, 인권은 천부적인 것이며, 그 결과 불가침의 영역이다. 반면 인권이 단순히 세속적인 의미규정이 갑작스럽게 변화한 결과에 불과하다면, 모든 권위는 그저 잠정적이고 자의적일 뿐이며, 따라서 일시적이고 취약적이고, 정치적/법적협상에 굴복하기 쉽다.
진짜라는 것은 어떤 명제가 사실상의 실재하는 명백히 드러나는 시공간상에서 측정가능한 그리고 과학으로써 확증가능한 것과 관련된다는 뜻이다. 그것은 특정한 존재상태와 사실로서의 존재에 대한 결론을 나타낸다. 따라서 진짜임은 감각에서 파생된 정보와 묘사로써 확인할 수 있는 주관적 진술이다. 하나의 의사전달행위로서 사실적 실재를 진술하는 것은 나를 제외한 사회 일반이 확인하고 입증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암시한다. 그런 일은 사실상 개인의 주관적 실재들만으로는 가능하지 않다. 실재의 정도는 신념과 지속성을 반영한다. 하지만 신념과 지속성도 해석, 회의(의심), 또는 편견에 따라 변할 수 밖에 없다.
실재에 관한 모든 가정과 추정은 더 높은 수준에 가면 또 다시 개인적 한계에 따라 바뀔 수 있다. 이점은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말을 인용하는 부분에서 잘 드러난다. 각각의 모든 사건은 그것이 나한테 보이는 대로 나의 못이 된다. 이렇듯 실재에 관한 진술들은 실재를 드러내려는 나름의 증거들이다. 하지만 위의 주장은 본질이 아니라 외관/지각을 언급하면서 더욱 더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요점은 관찰자가 견해와 본질을 구분할 수 없다고 해도 본질자체는 주관적 견해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 따라서 본질의 진실수준을 측정하는 일은 지각, 관찰 그리고 해석상의 결론이 아닌 잠재적 오류를 초월할 수 있는 지금까지 발견된 유일한 수단이다. 결과적으로 실재는 묘사가 아니라 독자적 정체성이다.
다른 사람들이 경험으로 확인해줄 수 없는 순전히 주관적인 실재도 있다. 꿈, 상상, 이미지, 기억 등이 그렇다. 심지어 데이터 자체를 확인할 수 있는 경우에라도 그것의 의미, 함축성, 가치 혹은 중요성은 총체적 맥락을 이루는 원인으로서 서로 중첩된다.
의식연구에서 추론할 수 있는 점은 가령, 미국인구의 약 55%는 진자를 제대로 분간할 능력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증거는 법정재판에서 드러난다. 범죄 용의자 신원 파악사례중의 약 50%는 경찰이 사전에 준비해놓은 용의자 라인업 절차나 사진을 통해서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네 저사람이 범죄를 저지르는 장면을 내가 실제로 봤어요"라는 단 하나의 진술마저도 그 시점에서 50%는 거짓이다. (인터넷상의 정보중에서 505도 의식수준 200이라로 측정된다).
데이터는 인간정신을 통해 포괄적인 처리과정을 거칠수밖에 없다. 가령 어떤 사람들은 무엇이든 축소해서 말하고, 또 어떤 사람은 과장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중요성을 과장하거나 함축성을 무시해버리는 것이 현실검증에 필요한 능력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망상에 빠진 사람은 실제 여러 사실들은 진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그가 가진 온갖 유형의 신념은 진짜라고 믿는다. 이를테면 허구가 진짜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 허구를 통해(선악 구분 등) 어떻게든 에고의 나르시시즘적 의도를 강화하고 싶은 의도가 기저에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숙한 정신은 언제라도 실수할 가능성을 잘 알고 있다. 이점을 통해 겸손함의 가치를 확인할 수 있다. 고전적인 금언인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와 더불어 그 밖의 실재에 관한 모든 진술은 잠정적인 것이다.
요약
최종분석을 하자면 결론적으로 가짜라고 간주되는 것은 주관적이며 추정에 불과하다. 그것은 주어진 맥락안에서 내용을 다차원적으로 처리한 결과다. 다시말해, 이 결과는 의식수준에 따라 달라진다. 의식수준은 뇌기능의 능력과 스타일, 그리고 영적에너지의 존재 내지는 부재와 관련된다. 이때 인간의 의도는 지배적 역할을 수행한다. 따라서 자만이나 자기고양적 성향은 진실/실재를 인식하는데 필요한 능력을 제한한다. 반면 참다운 진실에 대한 존중은 오류를 줄이고, 외관과 본질을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킨다. 의미, 중요성, 진실, 실재의 처리과정에는 추상적 진실을 구분하고 인식하는 일, 그리고 의식수준을 혼동하지 않는 일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이렇게 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대개 잘못된 해석으로 이어진다.
이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에 수 세기에 걸쳐 철학, 신학, 존재론 및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다룬 엄청난 양의 문헌이 발달할 수 있었다. 가령, 이런 질문들이 해당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알게 되는가? 우리는 우리가 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는가?"
수세기 동안 인류의 대다수는 어쩌면 영원히 애매모호할 것만 같은 복합적 문제의 해답을 제공하기 우해 권위에 의존해왔다. 현대사회의 의문은 "참다운 도덕적 권위는 대체 어디에 놓여있는가?"다. 참다운 권위는 진실의 산물이다. 이는 바로 의식진화 수준의 결과로 분류된 것이다. 시간이 흘러도 계속해서 버티고 있는 애매모호한 문제의 다수는 이제 의식/진실 수준을 측정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다. 온도계나 기압계, 고도계처럼 절대자를 나타내는 비개인적 척도 1000을 공통된 참고지점으로 삼아서, 나머지 모든 것을 이에 대한 상대적인 값으로 측정하는 것이다.
측정수준은 본질이라는 실재수준이 나타내는 결과이며, 따라서 그 결과는 포스트 모던적 해체주의와 상대주의의 직접적인 반박을 불러온다. 상대주의는 지각 그리고 그 지각에 언억적인 이름을 붙이고 명사화할때에만 실재를 나타낼 수 있다고 추정한다. 그와같이 사람을 교묘하게 속이는 억측에 의해서, 이성을 통해 실재를 이해하는 능력은 점차 파괴되어 급기야 200이하 수준(원시주의)까지 하락하고 말았다.
철학적 왜곡과 거짓에서 실재를 분간하는 일이 그저 정치화된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자체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한번 강조해야겠다. 지난 수세기동안 수백만명의 사람들이 진실과 선전된 거짓을 분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런 상황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날마다 계속되고 있다. 핵 에너지 시대에 호전적 무장단체의 거짓을 파악할 수 없으면 수천만명의 목숨이 날아갈 수도 있다.
구세주를 자처하는 사악한 나르시시즘(의식수준 30)은 상대주의적 궤변과 수사로 야기되는 무질서와 혼란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전히 잠재적 재앙의 주된 원인으로 남아있다. 2차 대전 직전, 히틀러가 유럽을 위협한다는 경고를 무시했던 영국총리 네빌 체임벌린의 경우가 좋은 예다.(진실대 거짓 15장을 참고하라). 지금도 거짓됨과 사회전반을 파괴하는 퇴행적 경향을 용인하는 태도가 정치적으로 유행하고 있지만, 그 대가로 우리사회는 제대로 된 힘을 상실한 채, 양의 탈을 쓴 늑대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죽은 상대주의자로 사느니 살아있는 현실주의자로 존재하는게 차라리 나은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성과 진실의 탈선 : 열정
현대인은 포유류 중에서 가장 잘 발달된 전두엽 피질(의식주준 200)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이성, 논리, 합리성은 감정때문에 일상적으로 빠르게 빛을 잃어간다. 의식수준 200이하에서 감정은 동물적 본능(변연계는 120으로 측정된다)에 기초하고 있으며, 부정적인 감정은 이성과 합리성을 효율적으로 활용하지 못하게 방해한다. 따라서 실재를 지성적으로 분간하는데 필요해 어렵게 얻은 능력을 감정이 없애버릴 수 도 있다. 열정이라는 감정은 매력을 느끼는 대상에게 강한 애착을 품게 되며, 그렇게 되면 당연히 그 대상은 과대평가 된다.
만약 열정이 그 자체만을 위해 평가받는다면(심지어 홍보되는 것이라면), 왜 그런일이 생기는 것일까? 특히나 광적인 열정때문에 일어난 나치, KKK, 테러리스트 등 인류의 엄청난 재앙을 고려한다면 말이다. 열정은 존재와 생존을 위한 투쟁의 차원에서 동물의 세계에서도 드러난다. 이렇듯 열정은 존재나 생존환경을 선별하는 면에서 실용적 가치를 갖지만, 만약 지성에 의해 지배되지 못한다면 부정적인 것이 된다. 흔히 열정은 제어되지 않은 나르시시즘적 정서를 뜻하지만, 기실 그것은 정량적이기보다는 정성적인 요소다. 표현의 자유는 생각의 자유와 관점표현의 자유를 뜻하는 것이지, 감정과 유치한 행동의 과잉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깨달음을 향한 탐색에서 거리두기(분리)는 필수요소다.
이를 위해 애착과 정서적 과잉을 포기해야 한다. 여기서 꼭 들어맞는 격언이 하나 떠오른다.
"오직 신에게만 열정을 다하라"
현실검증과 뇌기능 : 정신장애
과학연구와 전문적인 임상경험에 의하면 사회에 널리 퍼진 인격장애와 심각한 정신장애는 공히 유전적이고 생화학적인 뇌기능 장애때문에 비롯된다. 과거에 환자와 사회양측에 보호기능을 제공하던 공공/국립 정신병원 시스템이 폐쇄된이후로 정신장애는 빠르게 증가했다. 영화 "스네이크 피트"와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등에서 정신병원 시스템을 잘못 묘사하면서 시스템 붕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런 영화에서는 정신질환을 '인간을 격리하고 낙인찍는 일종의 신화"로 다루었다. 이로써 마르크스적 변증법(피해자대 가해자)을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적용하는 사례가 발생하였고, 그 과정에서 말하자면 이들 영화가 감정적 에너지를 제공한 셈이었다. 거창한 명분은 전체 정신병원 시스템의 폐쇄로 귀결되었고, 이데올로기 주의자들은 그것을 가리켜 '장족의 발전'이라고 선전했다.
실제로 그로 인해 사회적 재앙이 널리 퍼지는 결과를 맞이했다. 정신병자들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범죄, 가난, 노숙, 매춘, 빈번한 교우 살해(그런 살인자는 의식수준 5로 측정) 등의 잔인한 범죄, 아동고문과 성적학대, 그리고 심지어 아동 생매장 살인까지 참담한 문제를 일으켰다.
이런 문제보다 극적인 양상을 덜하지만 실은 더 파괴적인 결과를 야기하는 것도 있다. 바로 극도로 왜곡된 기가, 관점, 인터넷 상의 위조된 사실들이 미디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사태다. 미디어의 끊임없는 거짓포화 세례, 그리고 사건과 그 사건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오독은 대중을 세뇌시켰다. 대중은 의식수준 200이하로 측정되는 그럴듯한 "거창한 명분"에 사로잡혔다. 양의 탈을 쓴 표현의 자유아래에서, 잘못된 정보가 점차 대중을 지배하게 되었고, 서구 문명과 미국을 비롯한 인류 전체의 의식수준이 하락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 하나의 결과는 개인적, 사회적인 삶의 안정성이 하락하여, 순진한 시민들이 임의적으로 조준된 악과 거대한 거짓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중상모략, 명예훼손, 엄청난 발뺌과 변명이 법률하에 동등한 합법적 보호를 받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사생활과 법적보호는 상실되었고, 이에 따라 앞서 말한 결과는 더욱 심화되고 만다.
전통적 윤리, 도덕, 그리고 평범한 예의와 품위라는 지질구조판이 부서지면서 사회 전반이 통제가 불가능할 만큼 급하게 하락하는 추세에 진입한 것같다. 이런 변동은 인간역사 전반에 걸쳐 반복되는 현상으로 진보와 쇠퇴를 오가는 인류진화의 전체학습곡선의 다양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나침반이 없다면 인간사회는 하물며 정치적 진보와 사회적 재앙을 구별할 수조차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