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1월 20일. 믿기 힘든 일이 벌어졌다.
그동안 외부선수 영입이 없었던 넥센 히어로즈가 창단 최초로 FA(프리에이전트)를 영입했단 것이다. 넥센 히어로즈가 FA를 영입했단 사실은 둘째 치고, 그 주인공이 ‘이택근’이란 사실에 한 번 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택근은 잘생긴 외모와 무뚝뚝한 성격을 가지고 있어 좀처럼 다가가기 힘든 선수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이러한 이미지 뒤엔 매 경기마다 몸을 사리지 않고 펜스에 부딪히며 9회 말이 끝난 후 언제나 흙먼지 투성이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항상 열심히 하는 선수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다.
인터뷰를 위해 처음 만난 이택근은 역시나 땀으로 흠뻑 젖은 운동복을 입고 나타났다. 언제 어디서나 구슬땀을 흘리는 선수. 2년 만에 줄무늬 유니폼을 벗고 자주색 유니폼으로 갈아입은 돌아온 영웅, 이택근 선수를 목동 야구장에서 만날 수 있었다.
본 더그아웃 After는 2011년 12월에 작성된 내용입니다.
이택근은 지난 해 4년 계약, 총액 50억 원이라는 초대형 FA 잭팟을 터뜨리며 친정 팀인 넥센 히어로즈로 금의환향했다. 초대형 FA를 맺었다는 점은, 그가 야구선수로서 성공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야구에 소질이 있었던 것일까? 그보다 먼저, 이택근은
어떻게 야구를 시작하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어보기로했다.
태권도 소년, 야구를 만나다.
“야구요? 야구는 초등학교 3학년 때부터 시작했어요.
그 전에는 태권도를 했었죠. 제가 입단한 야구부는 정식야구부는 아니었고 동아리 개념의 야구부였습니다.”
야구를 시작하기 전까진 태권도를 했던 이택근이다.
모 든 운동을 좋아했지만, 특히 야구가 좋았다. 그래서 부모님께 조르고 졸라 야구를 시작했다. 사실 그의 부모는 그 가 야구 선수로 자라는 것에 반대했다. 그래서 어린 아들을 어르고, 달래보았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그 누구도 야구에 대한 어린 소년의 사랑을 꺾을 수 없었다.
“야구를 처음 시작한다고 했을 때, 집에서 심하게 반대했어요. 유니폼을 버리시는 건 물론이고, 제가 평발도 아닌데 ‘넌 평발이라 야구를 할 수 없어!’라는 거짓말도 하셨죠. 반대가 심했던 부모님이셨기에, 무조건 ‘야구
로 성공해서 보여드려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제가 야구선수로 어느 정도 이름이 알려졌기 때문에 요즘에는 부모님께서 먼저 ‘택근이는 어려서부터 우리가 야구를 시킨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다니세요. 하하하.”
야구를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릴 때부터 그의 옆엔 항상 야구 방망이와 글러브가 있었다.
우연히 발견한 사진 속에도 그에 손엔 야구 방망이가 들려있었다. 이택근에게 야구는 ‘운명’이자 ‘숙명’이었다.
이렇게 운명적으로 만난 야구는 고등학교시절부터 빛을 보기 시작했다. 대천중을 졸업하고 야구명문인 경남상 고로 진학한 그는 포수로 활약하며 지금은 롯데 자이언 츠의 투수인 ‘김사율’과 배터리를 이루어 나란히 청
소년 국가대표로 발탁되기도 했다.
“(김)사율이 와는 아직도 친하게 지내요. 연락도 자주하고요.
이번에 롯데의 새로운 주장으로 선출되었다고 하는데, 분명 잘해낼 것이라 믿습니다.”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란 이택근은 그때 그 당시를 회상했다. 경남상고 바로 옆에 있던 경남고와의 라이벌 전은 프로야구의 인기만큼 열기가 대단했다. 고등학교 시절의 치열한 라이벌 관계는 오늘날의 이택근을 만들었다 고 그는 말했다.
“경남고와의 라이벌 전은 말도 못할 정도로 굉장히 치열했어요. 두 학교가 가깝다보니 하루가 멀다 하고 연습 게임을 했었죠. 그때 야구가 가장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이택근은 1999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현대 유니콘스의 2차 3순위 지명을 받았다. 사실 낮은 순번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프로 행을 택하지 않고 대학 진학을 선택하였다. 프로 행을 선택했다면 꿈에 그리던 프로야구 선수로 좀 더 빨리 자리 잡을 수 있었을 텐데……. 왜 그는 대학을 택했을까?
“대부분의 선수들이 고교 졸업 후 프로 지명을 받으면 바로 프로 무대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한 제 생각은 다릅니다. 저는 4년간 대학에 다니며 야구를 통해 접하지 못한 많은 것들을 캠퍼스에서 배웠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자면 대인관계라던가 사회생활 등을 꼽을 수 있죠. 그래서 고교 졸업 후 바로 프로세계에 뛰어든 후배들을 보면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요. 그래서 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 해도 대학 진학을 선택할 것입니다.”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고려대학교 졸업 후 이택근은 2003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다시 한 번, 주 포지션이었던 포수로서 현대 유니콘스 의 부름을 받는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에선 포수로 뛰던 아마추어 때와는 달리 주로 1루수와 외야수를 보게 되었다. 내야, 외야를 가리지 않는 팔방미남 이택근. 그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 당시 현대 유니콘스 선수들은 실력이 모두 월등했어요. 그래서 살기위해 포수뿐만 아니라 다양한 포지션 을 연습했죠. 단 한 번만이라도 게임에 나가고 싶었어요.
그냥 매일 경기장에 나와 3시간 동안 벤치만 지키다가 집 에 돌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죠. 포지션을 바꾸는 것 보다
게임에 뛰지 못하는 것이 더 자존심 상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안방마님’으로 군림하던 이택근 이었다. 하지만, 단 한 번의 기회를 잡기위해 그는 포수 미트가 아닌, 1루수와 외야수 글러브를 끼고 경기에 출장했다.
멀티 플레이어로 훈련하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미트와 글러브를 몇 개 씩 챙겨 다녀야 했고, 남들보다 더 많이 움직여야 했다. 지금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외야수로 자리 잡았지만 포수에 대한 미련은 더
이상 없는 것인지 궁금했다.
“당연히 아직도 포수자리에 대해 미련이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누가 시켜주겠어요? 하하하. 그냥 저는 현재 주어진 보직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2004년에는 선수단 내의 입지를 잡지 못해 2군에 머물렀으나, 2005년 시즌 중·후반에 출장 기회를 가지기 시작하여 이 해 0.331을 기록, 주전 선수로 발전 가능성을보였다. 2006년에는 현대 유니콘스의 중심 타자로 자리 잡게 되어 뛰어난 활약을 보여 주었으며,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동메달을 획득했다. 그리고 이 해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며 주전 중견수로 자리 잡아 2007년 시즌에도 활약했다.
하지만 2007년 시즌을 끝으로 영원할 것만 같았던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되며 선수단을 서울 히어로즈가 그대로 승계 받아 소속이 바뀌게 된다.
“현대 유니콘스가 해체될 때 굉장히 힘들었어요. 하지만 저보다 선배님들이 더 힘드셨죠. 그 당시 저는 많이 어렸기 때문에 선배님들을 믿고 따랐습니다.”
팀의 소속은 변경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활약은 2008년에도 계속 되었다. 그리고 9전 전승이라는 대기록을 세운, 2008 베이징 올림픽 야구국가대표에도 선발되었다.
이택근은 스스로 불펜 포수도 자처하며 팀에 헌신적이었다. 그 덕분에 그는 금메달을 목에 걸 수 있었다.
“베이징 올림픽에서 마지막 결승전은 제 야구인생 중 가장 좋았던 순간이며 가장 떨렸던 순간이에요. 주전 포수로 활약했던 진갑용 선배는 부상 중인데, (강)민호가 9회 말에 퇴장 당했잖아요. 순간 감독님께서 제 이름을 부르실까 덜컥 겁이 났죠.
다행히 진갑용 선배가 포수 장비를 챙기시더라고요. 그때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죠. 하하하.”
베이징에서의 좋은 활약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2009년 시즌에도 팀의 주축 선수로 활약하였는데, 이 해 0.311 타율에 15홈런, 43도루를 기록하였다. 그 결과 2009년 시즌이 끝난 뒤 이택근은 2번째 골든 글러브를 수상하는 영예를 얻었다.
하지만 그 다음해, 반복되는 무릎 통증으로 인해 수술을 받고 재활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명품 칼은 뜨거운 불 속에서 달궈지고, 대장장이에 의해수백 번 두들겨진다.
2008년 11월 장원삼 현금 트레이드 파동 이후 2009년시즌이 끝난 뒤 이택근도 현금 트레이드 파동에 휩싸이게 된다. 그러면서 넥센 히어로즈가 KBO의 가입금 납부를 해결하면서 정식으로 트레이드가 승인되었다. 히어로즈에 있으면서 팀의 중심이 되었던 그였다. 그는 그때 트레이드를 어떻게 받아드렸을까?
“많이 놀랐습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요? 프로 세계에서는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잖아요. 많이 아쉬웠지만 팬들의 사랑을 많이 받는 LG 트윈스에서 뛰어보는 것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죠.”
LG 트윈스로 이적 후, 무릎 부상을 갓 치료하고 훈련에 임하던 중 뜻하지 않게 허리 부상을 당했다. LG 트윈스 가 이택근을 영입한건 포스트 시즌 진출을 위해서란 걸 그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실력 발휘를 해 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당시 차근차근 재활을 소 화하지 못한 것이 두고두고 아쉽다고 이택근은 말했다.
“시즌 초 판단미스 탓이 컸습니다. 좀 더 체계적인 준비가 필요했죠. LG 선수였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겠네요.
LG가 절 영입한 이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죠.
아웃으로 타석에서 물러날 때마다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LG 팬들에게 굉장히 죄송하죠.”
그는 LG에서 뛰었던 두 시즌 동안 ‘이름값에 비해 부진하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규정타석에 들지 못했을지라도 타율은 항상 우수했다. 특히 여름 이후로 지친 기색을 보이는 다른 선수들과는 달리 매 시즌 후반에
강한 모습을 보였다. 비결이 무엇일까?
“항상 후반에는 강했지만 초반에는 약했어요. 매년마다 바꿔보려 노력 했지만 잘 안 되는 것이 사실이에요. 저도 빨리 그 이유를 찾고 싶어요. 하하하.” 2011년 시즌이 끝나고, 이택근은 FA를 선언한다.
원 소속구단이었던 LG 트윈스와의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했다.
그리고 2년 만에 다시 넥센 히어로즈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장석 대표님께서 제가 넥센을 떠날 때 ‘나중에 꼭 다시 만나자’라고 말씀하시며 굉장히 미안해 하셨어요.
그 약속을 이렇게 좋은 대우로 지켜주셔서 무척 감격했죠. 아마도 제 몸값에 그 때의 미안함이 조금은 포함되지 않았나 싶어요. 물론 계약금액도 중요하지만 대표님의 정성에 마음이 움직인 거죠.”
2011 시즌을 끝으로 18년간 한 팀에서 뛰었던 이숭용이 은퇴했다. 이숭용은‘넥센의 차세대 캡틴은 이택근’이라고 할 정도로 그에 대한 두터운 신뢰를 보였다. 어느덧 고참 급이 된 이택근. 그가 앞으로 넥센을 어떻게 이끌 것인지 궁금해졌다.
“제가 나서서 후배들을 이끌기 보다는 제 위치에서 솔선수범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해요. 현대 시절부터 선배들이 후배들을 이끄는 모습을 지켜보았죠. 좋은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에 강팀이 되었고 우승까지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선배님들의 모습을 본받아 팀을 아우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011년 시즌 처음으로 넥센 히어로즈는 꼴찌를 했다.
그러기에 이택근의 복귀 소식은 넥센 히어로즈 팬들에겐 단비와도 같았다. 그보다 어쩌면 잃어버린 영웅을 찾은 것에 대해 더 반가워하는 이유일 수도 있다. 2년 만에 다시 돌아온 이택근은 여전히 열렬한 응원을 보내주는 넥센 히어로즈 팬들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제가 왔다고 해서 당장 분위기가 바뀌거나 성적이 단 번에 좋아지는 일은 쉽지 않겠죠. 하지만 이제 넥센 히어로즈가 강팀의 면모를 보일 수 있도록 발판을 다질 생각이에요.
작년에 8위를 했으니 올해엔 7위, 6위, 5위…….한 단계씩 올라가겠습니다. 팬 여러분의 많은 응원 부탁드립니다.”
화살을 앞으로 내보기 위해, 활시위를 뒤로 당긴다. 이택근의 롤 모델은 현 넥센 히어로즈의 배터리 코치인 김동수 코치와 MLB에서 활약했던 노마 가르시아파라 (Anthony Nomar Garciaparra)이다. 김동수 코치에게
는 현대 유니콘스 시절 룸메이트를 하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야구 이외의 생활 습관, 자기 관리 등을 김동수 코치를 보면서 ‘진정한 프로 선수는 이래야 하는 구나! 라고 생각했다.
정해진 생활 패턴이 오랫동안 야구를 할 수있다는 비결을 알려준 선배에게 그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리고 노마 가르시아파라는 어린 시절 그의 우상이었으며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다. 타석에 서면 항상 그 선수를 생각하며 방망이를 돌렸다. 가르시아파라와 김동수 코치가 있었기에 오늘 날의 이택근이 있었다.
이택근은 어른 시절부터 오랫동안 야구를 해왔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야구를 할 때가 가장 즐겁고 신난다고 한다.
그라운드 위에서 뛰고 있으면 모든 걱정과 고민이 사라진다. 그는 야구선수이기 이전에 야구를 사랑하는 한사람이었다.
처음 야구를 시작했던 것처럼, 언제나 야구를 할 때가 가장 설렌다고 말한다.
2012시즌이 앞으로 약 3개월이 남았다. 이택근은 왕관을 쓰기위해 그 무게를 견뎠고, 뜨거운 불속에서 충분히 달궈지며 대장장이의 수많은 망치질을 견뎌냈다. 나는 그의 활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제 이택근은 활시위에서 손을 놓고 그 화살을 과녁에 쏠 순간이 왔다.
EDITOR 최선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