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주 <국형사(國亨寺)>
깔끔하고 제법 규모가 큰 절이 치악산 자락에 고즈넉한 모습으로 숨어 있다. 커피숍 수피다의 뒷쪽이어서 더 당황스럽다. 더욱 놀라운 것은 동악단, 사찰을 따라 가만가만 이동하면 얼핏 터진 한쪽길이 동악단으로 안내한다.
현대적이며 인도의 신비스러운 분위기 커피숍 수피다에서 숨을 돌리고, 그윽한 사찰에 맘을 담근 후, 살금살금 호젓한 길을 따라가면 동악단에 도달한다. 조선 태조가 동악신을 봉인하였다는 산신당이다. 보물상자를 여는 기분으로 단계별로 열리는 비밀의 화원, 제일 마지막 단계의 동악단은 우리 산신신앙이 어떻게 불교와 습합되어 있는지 그 현재형을 보여준다.
소재지 : 원주시 고문골길 155(행구동 98)
방문일 : 2021.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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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피다에 이르는 동안 분명 일주문을 보지 못한 듯한데, 자신없이 더듬어 봐도 기억에 없다. 아마 수피다가 일주문을 대신하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모습이다. 그만큼 삼각으로 이루는 사찰의 범주는 신비한 것 투성이다.
*소개
대한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이다. 신라 경순왕 때 무착(無着)이 창건하여 고문암(古文庵)이라 하였는데, 일설에는 고문암이 아니라 관음보살을 보신 보문암(普門庵)이었다고도 한다.
조선 초 태조는 이 절에 동악신(東岳神)을 봉안하고 동악단을 쌓았으며, 매년 원주·횡성·영월·평창·정선 고을의 원들이 모여 제향을 올린 관계로 국형사라 하게 되었다.
일설에는 조선시대 정종의 둘째 딸인 희희공주가 늘 몸이 약해 병석에 누워 있었는데 어떤 약을 써도 치료되지 않자, 이 절에 보내어 백일기도를 드렸다. 하루는 공주의 꿈에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병을 고쳐 주리라고 한 뒤 완쾌되었으므로 정종이 기뻐하여 절을 크게 확장하고 절이름도 고문암을 국형사로 고쳤다고도 한다.
1680년(숙종 6) 이후에 폐사가 되었던 것을 1907년에는 벽하(碧河)와 응송(應松)이 중창하였으며, 1945년에는 자항(慈航)이, 1974년에는 주지 전용호(全龍浩)가 각각 중수하였고, 1980년에는 보영(普英)이 토단만 남아 있던 동악단에 앞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을 세워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관음전과 대방(大房), 동악단, 요사채와 주방이 있다. 문화재로는 ‘普庵堂大禪師靈塔(보암당대선사영탑)’이라고 쓰여진 높이 약 1.6m의 부도와 그 바로 옆에 파괴된 부도 1기가 있다. 또한, 관음전 북서쪽 100m 지점에 동악단이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재)
*국형사(國亨寺)와 국향사(國享寺)
국형사(國亨寺)는 국향사(國享寺)와 혼용되는데 동악제로 나라의 만사형통을 기원하는 절이었으니 국형사일 거라고도 한다. 그러나 드물게 국향사(國香寺)도 보인다. 치악산 관내 안내 표지에서는 모두 국형사로 표기되어 있다.
혼용의 이유는 '亨(형통할형)'을 '享(누릴향)'으로 오독한 데서 유래한 것이라고 하는데, ‘향(享)’에 제사를 드린다는 뜻도 있으므로 동악단에서 올리는 산신제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면 가능한 명칭으로도 보인다. 국가가 제사를 올리는 절이 되는 셈이다.
이를 국형사로 통일하려면 사찰이 좀 더 솔선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사찰이 자체적으로 둘 다 쓰고 있어서 혼용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찰에선 혼용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다. 굳이 큰 문제가 없다면 혼용을 막을 필요 또한 없지 않을까도 싶다.
이미 역사적으로도 이름을 여러개 가지고 있는 사찰이고, 국형이나 국향이나 비슷한 의미로도 보여지는 데다 불가에서는 어차피 사물에 붙이는 이름을 헛된 이름 가명(假名)이라 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름으로 불러도 가명(假名)이 아니겠는가.(연경)
범종각. 2005년에 만들어졌다는데, 사찰 내 전각 중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범종뿐 아니라 사물도 함께 있다.
국형사 종무소
대웅전
대웅전 앞 석탑. 이전 자재를 가지고 최근 복원한 모양새다.
약수. 희희공주가 이 물을 먹고 치유가 되었을까.
수광전 가는 길
수광전
사찰의 좋은 점은 이처럼 마음편한 한옥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다. 단청없는 건물에 유리를 끼워 안팎의 연관을 높이고 내부 공간을 외부로 바로 트이게 하여 공간을 최대화했다. 안이 밖이고, 밖이 안이다. 우리 아파트가 아무리 넓어져도 옛날 사립문짝의 초가만 못한 것은 아파트는 문과 벽으로 갇혀 따로 담장이 없이도 외부로부터 완전 단절되고, 초옥은 사립마저 닫히지 않아 외부로 열려 외부를 그대로 내부로 안는다는 것, 그런 공간 개념이 유리벽에서 보인다.
전통 가옥을 찾으려면 사찰로 와야 하는 현실이 그렇지만, 거꾸로 보면 사찰이 그만큼 오랜 역사 속에서 우리 내부로 들어와 있다는 것, 그런 모습을 보여주는 사찰과 건물이 편안하게 다가온다.
약사여래. 뒤안에 한층 높은 곳에 약사여래가 약병을 들고 서 있다. 요새 코로나 시절에야말로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 보살이다.
이제 사찰 경내를 조금 벗어나 동악단으로 향한다.
** 동악제단은 현재 원주시 행주동 국형사 (98번지) 근처에 자리해 있다. 동악단에는 조선 정종 때 공주의 신병을 치료하기 위해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드려 동악산 신령의 가호에 의해 완치되었다는 전설이 있다. 건물은 근년에 신축한 것으로 토단만 남아있어 동악단을 지었지만 2001년 7월 뇌전으로 불에 탄 이후 10월부터 복원작업에 들어갔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맛배집으로 좌우에는 방풍판이 있고, 주변을 돌담으로 에워싸 신단의 분위기를 자아낸다. (대한민국 구석구석)
무학 대사가 계룡산에 머물며 산신을 현몽한 뒤, 대사가 태조에게 진언하여 오악단을 세웠다고 한다. 중악으로 계룡산 신원사에 중악단을 세웠고, 서악으로는 황해도 구월산에, 남악의 하악단은 지리산에, 북악의 상악단은 묘향산에, 그리고 동악으로는 치악산 국형사에 동악단이 세웠다는 안내문이다.
신원사의 중악단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데, 그곳에도 똑같이 무학대사의 현몽과 태조가 개설하였다는 중악단의 전설이 전해온다. 그러나 "계룡산은 신령스러운 산으로 여겨 예로부터 우리나라 5악(嶽)의 하나로 중사(中祀)의 예로써 제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북쪽의 묘향산을 상악(上嶽)으로, 남쪽의 지리산을 하악(下嶽)으로, 중앙의 계룡산을 중악으로 하여 단을 모시고 산신에게 제사를 지냈다."고 하여 치악산이나 구월산에 관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오악(五岳)이 지칭하는 산은 시대와 기준에 따라 다양하다. 보통 오악은 우리나라의 이름난 다섯 산으로 금강산, 묘향산, 지리산, 백두산, 삼각산을 이른다.(국어사전) 반면 신라 때는 동의 토함산, 서의 계룡산, 남의 지리산, 북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父岳)을 일렀다. <삼국사기>에 의한 지칭이다. 조선 세종의 북진개척 이후에는 새로운 영토개념과 재래의 풍수지리사상이 혼융되어 동의 금강산, 서의 묘향산, 남의 지리산, 북의 백두산, 중앙의 삼각산(북한산)을 가리키게 되었다.(다음백과)
오악으로 지칭하던 산 이름 중에 치악산은 없다. 신원사의 자료로는 3악이 확인되는데, 3악단도 1394년(태조 3) 처음 제사를 올린 뒤 1651년(효종 2) 이후 제단이 폐지되었다. 이중 계룡산의 중악단은 1879년(고종 16)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재건하여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산신에게 제사지냈던 유일한 유적이라는 점에서 중악단은 역사적 의미가 인정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국형사의 동악단은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외의 다른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어떤 근거에 의해서든 치악산신을 현재형으로 받든다는 것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고 본다. 보통 산신각이 사찰의 가장 후미진 곳에 위치하며 때로는 삼신각과 혼재되어 있기도 하다. 동악단은 매우 당당하게 규모를 갖추고 형식을 갖춘 정식 산신제를 지내고 있는 점은 산신제의 의미 확대임이 분명하다.
동악단.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조선시대 강원도 행정의 중심지인 강원감영의 500년 축제인 ‘2007강원감영제’에서는 국내 ‘명산 5악’ 중 하나인 치악산 동악단에서 현존 최고(最古)의 유교식 산신제인 동악제를 재현한 것을 비롯해 불교·무속 산신제를 올리며 국가의 안녕과 지역민의 행복을 기원하기도 했다. (스포츠경향, 2007.10.03)
소종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현재적 전승 여부이다. 동악제는 과거 박물관이나 서적에만 머무는 화석화된 신앙이나 행사가 아니라 오늘날 강원도민의 중요한 행사로 자리잡았다. 전통의 부활을 넘어 살아있는 현재형 도민 위무의 실체인데, 그 이상의 무슨 역사적 근거가 필요하겠는가. 역사나 설화보다 더 의미있는 오늘날의 삶이 되어 있는데 말이다.
전통의 부활이면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를 더하는 것이고, 전통에 기대는 새로운 창조라면 그것 자체가 의미 있는 창조라 할 수 있다. 언제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질 때는 역사의 그늘에 기대려 한 것, 또한 전통적인 방식이었으니 창안의 방식도 슬기로운 것이라 할 수 있을 거 같다.
소나무. 애국가가 생각난다. 기상이 좋은 품위 있으면서 강단있는 나무, 황장목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거 같다.
동악단이 마주보고 있는 마당 끝자락에는 수령이 오랜 소나무 금강송 숲 안의 평지가 있고, 벤치 몇 개가 있다. 이곳에 오는 보살님들이 사실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다. 금강송의 본래 이름은 황장목이라 한다.
동악단 앞의 솔밭에 싸인 마당은 숨어 있는 산신각이 아니라 보다 넓게 소통하고 나아가려는 모습이어서 새로운 모습인 것은 분명하다.
*치악산
치악산은 1984년 12월 31일 열여섯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공원면적은 175.668㎢로, 주봉인 비로봉(1,288m)을 중심으로 동쪽은 횡성군, 서쪽은 원주시와 접하고 있다. 치악산은 남쪽 남대봉과 북쪽의 매화산 등 1,000m가 넘는 고봉들 사이에 가파른 계곡들이 자리해 예로부터 산세가 뛰어나고 험난하기로 이름이 높다. 과거에는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산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치악산국립공원 및 주변은 후기 고원생대 편마암류 및 화강암질 편마암류, 중생대 쥐라기 화감암류로 구성되어 있다. 치악산국립공원은 한반도 구조운동의 특징을 관찰할 수 있는 좋은 지질학습장이다.
치악산의 형세는 우리나라의 등줄기인 백두대간의 오대산에서 서남향으로 갈려져온 산줄기로부터 최고봉인 비로봉(1,288m)에서 향로봉(1,042.9m)과 남대봉(1,181.5m)까지 해발 1,000m이상의 준봉들로 연결된 형세를 하고 있다. 이 준봉들 사이로 구룡계곡, 부곡계곡, 금대계곡 등 아름다운 계곡과 구룡소, 세렴폭포 등의 명소가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사계절에 따라 봄에는 진달래와 철쭉, 여름철에는 구룡사의 울창한 송림과 깨끗한 물이 볼만하고, 가을의 단풍과 겨울의 설경이 장관을 이룬다.
치악산은 수려한 경관과 함께 다양한 문화?생태 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치악산 곳곳에는 강원도유형문화재인 보광루를 보유한 구룡사와 꿩의 보은설화를 간직한 상원사, 전쟁유적지인 영원산성과 벌목금지의 상징인 황장금표 및 우리나라의 대표적 온대림으로 보존되고 있는 천연기념물 93호인 성남리 성황림 등의 문화자원이 있다. 아름다운 금대계곡에 자리잡고 있는 영원사를 포함 보문사, 국형사, 관음사 등 많은 사찰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것 또한 특징이다. 생물자원으로는 포유류 42종, 조류 136종, 곤충류 1,863종, 양서파충류 22종 야생식물 986종 등이 서식 중이다. (치악산국립공원 홈피)
동악단을 내려오면 속세와 연결된다.
수피다. 숲이다?커피숍
*수피다. 저녁이 되니 더 신비로운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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