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2.22.(토)-23. 동계마스터과정 1기 교육 응원산행, 명성산
2.22(토). 흐림, 가끔 눈
철원 명성산은 깊었다. 산도 깊지만 가는 길도 깊었다. 철원시내에서 산으로 가는 길은 거의 산으로 둘러싸여있다. 삼부연 폭포를 지나 휘돈 길을 넘어서 불쑥 드러나는 커다란 저수지가 놀라운 것도 다 거기가 깊어서였다. 깊은 데서 갑자기 나타난 평면의 수면은 그 대비로서 더 깊게 느껴졌다.
간만에 짊어진 커다란 홀백은 나만큼 무거웠다. 무거운 짐과 나를 지고 거친 숨을 내쉬며 30분가량 오르니 능선에 이르렀다. 거기서 우측으로 꺾으면 석천계곡으로 그 이후로는 내리막이거나 평지다. 제법 큰물이 흐르고 군데군데 적당한 탕이 자리 잡았다. 늦겨울 추위가 왔다지만 그래도 일단 한 번 풀린 물길은 조금 남은 얼음을 녹여가며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찬 겨울산의 물에 들어가고 싶은 충동은 습관처럼 배여 견디기 힘들다. 소운폭포에 이르자 조금씩 내리던 눈이 와락 쏟아졌다. 제법 긴 폭포를 아래서 올려다보니 물과 눈이 온 몸에 쏟아져 내리는 듯했다. 나는 더 견디지 못했던가, 지난 건 모두 환영 같다.
주홍이와 나는 동계마스터 사람들이 자리 잡았다는 비래폭포를 찾아 두어 시간 헤매다 포기했다. 배터리를 절약하기 위해 양쪽 다 전화기를 꺼놓은 경우가 많아 연락이 원활하지 않은 탓도 있었다. 떠돌다 허기가 진 둘은 냇가에 쭈그리고 앉아 시에라컵에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셨다. 그러는 사이 남인우 강사한테 장소를 알려주는 문자가 왔다.
짐을 꾸려 비래폭포로 가니 사람들이 군데군데 만들어놓은 비박지가 피난처처럼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교육생 틈에 끼어 술 몇 잔을 마셨다. 교육생 중 두 명은 키르키스스탄, 한 명은 마터호른 원정을 계획하고 있었다. 이들에게 야영생활을 비롯한 훈련의 전반은 아주 유용할 거라고 생각했다. 막 어두워지려고 했으니 5시나 되었을까. 태섭 형님, 인호, 연수, 우근 등 후발대가 도착했다. 비박 자리가 마땅치 않아 참관자들은 다시 내려왔다.
내려가는 길에 강사와 교육생이 먹을 음식을 잔뜩 싸가지고 홀로 올라오는 변기태교장 선생님을 만났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 우리 앞의 가시적인 것들은 사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어떤 마음과 행동의 총합으로 이루어진 현상일 것이다. 우리는 당연한 듯 무심하게 그 현상을 스쳐가지만, 이면에 감춰진 것들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우리를 둘러싼 현상 혹은 현실에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머리 위까지 솟은 짐을 지고 어둡고 미끄러운 비탈길을 조심스럽게 올라가는 변기태선생님의 뒷모습은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켰다.
응원팀은 거꾸로 돌아오는 길 적당한 장소에 터를 잡았다. 깊은 명성산에서는 보기 드문 평지였다. 밥 잘 먹고 술 잘 마시고 기분 좋게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홍일점 성연수의 꼬드김이 시작되었다. 우근이의 도움으로 애써 자리 잡고 누운 태섭형과 주홍이를 머리 맞대고 이야기해야 제 맛이라며 옆으로 오라는 둥, 노래를 부르라는 둥 하면서 바람을 잡았다. 나 역시 연수의 바람에 걸려 흥을 맞추다 어어 하는 사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각설하고 그 밤의 달 없는 캄캄한 하늘, 검게 다가오던 산, 나무 사이 걸린 무수한 찬별들, 일정하게 들리는 물소리, 우리들의 웃음소리, 어쩔 수 없이 우리를 심각하게 만든 동문회 이야기들, 어둠을 가르는 담배연기, 맨 몸에 비수처럼 와 닿던 차가운 계곡물을 한동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23.(일) 맑음
동문회에 대한 이야기를 되새김하며 뒤척이다보니 사위가 밝아졌다. 흐르는 물소리만이 어제의 그것처럼 동일하게 느껴졌고, 동이 트는 명성산 깊은 계곡은 또 새로운 어떤 풍광이었다. 가끔 들리는 이름 모를 새소리는 차가운 공기를 갈라서인지 매우 날카로웠다. 좁은 계곡이어서 원경은 눈에 잡히지 않았다. 대신 가로로 이어진 길과 길을 따라 이어지는 나무들의 고요함은 오랜만에 겨울 산에 들어온 나에게는 아득한 어느 시점으로 인도하는 입구처럼 느껴졌다. 이럴 때 나는 꼭 어린 시절 골목길이 떠오른다.
4살쯤부터 중학생 무렵까지 뛰어놀았던 이 골목을 나는 평생 잊어본 적이 없다. 뚜렷이 기억나는 구체적인 어떤 사람, 또 어떤 사건이 그리 많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이 골목은 늘 내 마음 한편에 거부하지 못할 어떤 묵직한 덩어리로 자리 잡고 있었다. 잊을 만하면 떠오르곤 하던 윤회의 그 느낌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순수에 대한 갈망이었다. 그런데 그 골목은 내게 정말 순수한 공간이었을까. 따스한 햇살아래 어머니가 꽃밭을 가꾸며 환하게 웃던 모습은, 눈이 소복이 내리던 크리스마스이브에 코트에 쌓인 눈을 털며 들어오던 막내 삼촌의 손에 들린 케잌의 달콤한 추억은, 어린 내게 뜬금없이 시국이야기를 하며 흥분하던 앞집 대학생 형과 진북천에서 자라를 잡은 기억은 짧은 순간이었다. 돌이켜보면 고향의 골목에는 즐거운 추억보다 서글픈 기억이 더 많았다. 숱한 갈등 속에 허물어져가는 가정을 지켜봐야 했던 곳도 거기였고, 밤마다 수많은 빚쟁이들이 몰려와 진을 친 곳도 거기였다. 그곳은 차라리 내게서 순수가 뒤로 돌아서 멀어지기 시작한 어느 지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골목이 순수한 공간으로 남아있는 것은 기억에 반사된 갈망 때문이다. 이기심과 물욕으로 가득 찬 속물근성이 자라갈수록 내 자신에 대한 회의는 더 짙어졌고, 그만큼 순수한 정신세계에 대한 갈망은 깊어졌다. 그러한 갈망을 추인하기 위해 내겐 구체적인 장소가 필요했고, 거기가 바로 공무원주택 골목이다.
내가 고향의 골목을 그리워하며 붙잡고 있는 순수의 감정은 순수한 세계에 대한 동경과 결코 다가갈 수 없는 이상에 대한 좌절과 그렇다고 완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만들어낸 환영이다. 잡을 수 없는 밤하늘의 별을 무한히 동경하듯 낙원의 순수를 갈망하지 않고서 상실의 허무함을 달랠 길 없어서일까. 이제 더 이상 새로운 골목을 기대할 수 없는 나는 지난날의 기억에 잠길 뿐이다.
침낭에 몸을 묻은 채 머리맡에 놓아둔 담배 하나를 꺼내 물었다. 사람들은 아직 기척이 없다.
설거지를 하는 소리가 났던지, 연수가 부스스 일어났다. 연수를 보니 갑자기 배가 고팠다. 어제 밤이 꿈같지요? 그러네요 답하는 연수와 음식을 만든다고 뒤적뒤적 하는 사이 사람들이 일어났다. 꽁꽁 얼어붙은 쌀과 고기를 녹여 김치찌개에 밥을 먹었다. 우근이가 아주 단순한 형태의 커피메이커로 뽑은 진한 커피는 주인을 닮아서인지 짙고 깊다. 우근이는 천안에 사는 홍보부의 미연씨로부터 가장 남성미 넘치는 사람으로 선정되었다. 천안에서 이 소리를 들은 성식이와 나는 이건 뭔가 잘못됐다, 우리도 머리를 길러야 한다는 등 패잔병의 넋두리를 안주삼아 몇 병의 쓰디쓴 술을 마셔야했다. 밥을 먹은 후 연수와, 언젠가 유양리에서 바닥칠 뻔한 자기를 확보해준 인연으로 이후 고분고분 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인 유기사?(태섭형)는 먼저 내려갔다.
나머지는 짐을 데포하고 남은 부식을 모아 교육장으로 올라갔다. 소운폭포 즈음에서 좌로 급한 산비탈을 한 20분 정도 올라 교육장에 다다랐다. 교육생들도 이제 막 도착하여 훈련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김세준 대표강사에게 몇 가지를 물었다.
5박6일 교육의 마지막 코스인데, 교육생의 습득 정도는 어느 정도인가?
좋다. 어제 처음만 해도(이번 코스는 토요일 아침 9시 명성산에 도착하여 시작했다) 조금 익숙하지 않은 면이 있었는데 다들 기본이 있고 열심이어서 하루사이에 많이 적응한 상태다. 특히 몇 몇은 매우 성취도가 높다.
오늘 교육의 목적은 무엇인가?
실전연습이다. 산에 가서 우리가 맞이하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연습한다. 실전에서 후등자는 선등자가 깔아놓은 줄을 이용하여 저깅으로 오르지만, 오늘 훈련은 저깅 대신 선등의 방법으로 오른다. 배낭을 지고 바일을 이용하여 루트를 통과하는 과정을 체험하는데 목적이 있다.
ER의 동계마스터과정의 특징, 차별성은 무엇인가?
실전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계획했다는 점이다. 동계훈련이지만 빙벽에 초점을 맞추지 않았다. 빙벽등반 훈련은 기본적으로 되어있다고 상정하고, 그 이외 고산등반 시스템, 자기 보호 및 팀원 구조, 야전 믹스크라이밍 등 실전에서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의 전수에 초점을 뒀다.
이번 교육의 최고 기대치를 100으로 봤을 때 점수를 매긴다면?
100 이상이다. 물론 부족한 면이 많이 있지만 가능성이 더 크다는 점에서 그렇다.
어제, 오늘 교육생과 얼핏 나눈 대화와 김세준 강사의 말을 종합하면 대체로 만족할 만한 교육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한국 최고의 등반교육을 지향하고, 또 그런 기대를 받고 있는 ER로서는 더 나은 교육을 향해 한층 더 노력해야 한다. 대표강사와 그 자리에 있었던 남인우, 염동우 같은 탁월한 강사들, 꼼꼼한 교무 강기철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지고 오르내린 교장선생님의 헌신이 있는 한 동계마스터교육은 또 하나의 멋진 ER교육으로 발전하리라 믿는다.
응원팀은 3시에 내려왔다. 데포한 짐을 거둬들고 주차장에 이르니 4시 반경이었다. 아쉬움이 남은 우리는 철원시내 막국수집에서 막국수와 빈대떡을 먹었다. 우근이가 의정부에서 한잔하고 대리할 걸 그랬다고 아차 했으나 때늦은 뒷북이었다. 여전히 아쉬움이 남은 우리는 커피집에 들어가 동문회운영과 코로나바이러스 이야기를 한참하다 헤어졌다. 집에 돌아와 짐을 정리하고 책상에 앉으니 카톡이 들어왔다. 어제오늘 찍은 사진들이다. 명성산을 나왔으나 당분간은 거기 깊숙한 곳에 있겠다.
첫댓글 잘읽었습니다 필력이 상서비와 막카 마카 ㅎㅎㅎ.
사담을 고스란히 옮기 셨네요..ㅎ
이번에는 설문지를 받지 않았습니다.
현장 교육의 목소리가 궁금해서
조만간 만나서 이야길 나누기로 했습니다.
그때 회장님도 시간이 되시면 뵙지요~
잼난글 잘 읽었습니다. 😄😄😄
상황에 대한 기억력이 대단하십니다
잼나게 읽었습니다 회장님^^
수고하셨습니다~
열정적인 집행부가 있어 행복합니다.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