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후원의 주합루(昌德宮 宙合樓) 규장각
<창덕궁(昌德宮) 후원>
창덕궁은 예약없이 입장 가능이지만 후원은 별도 인터넷 예약이 필요하다. 예약을 하지 않으면 인정전, 대조전, 선정전, 희정당을 보고 그리고 낙선재에서 구경을 멈춰야 한다. 여기까지도 충분히 고궁의 전형을 볼 수 있지만 아무래도 그윽한 풍모는 후원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다. (다시 6.15부터 현재까지 코로나 덕분에 후원은 물론 고궁도 계속 관람이 금지되고 있다.)
창덕궁 낙선재까지의 앞 공간은 업무와 생활의 공간, 후원은 휴식과 충전의 공간이다. 앞이 긴장, 뒤가 이완의 기능으로 역할을 분담하고 있다. 창덕궁을 보려면 후원까지 봐야 온전하게 본다고 할 수 있다.
관람일 : 2020.5.21.
창덕궁 정전을 지나 후원쪽으로 향한다. 보통 예약하고 시간에 맞추어 와서 해설사의 해설을 들으며 정해진 코스에 따라 돌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면 관람을 끝내고 나와야 한다. 또 다음 팀을 위해서다.
코로나 덕분에 관람만 허용되고 해설은 진행되지 않아 무한대로 시간과 공간을 다 쓰며 관람할 수 있었다. 천천히 돌면서 생각과 마음을 더해 바라보았다. 코로나 덕도 볼 수 있는 건가, 씁쓸한 기분이었다.
*후원의 명칭은 상원(上苑), 금원(禁苑)ㆍ비원(秘苑)ㆍ내원(內苑), 북원 등으로도 불렸는데, 후원이 가장 많이 쓰였다. 비원은 1900년대 이후에 쓰인 명칭이다. 비원은 1904년 고종조에 중추원 의관 안종덕의 상소에서 처음 보인다.
"궁내부가 있어 궁내(宮內)의 정원을 전부 관할하는데 비원(祕苑)을 별도로 세운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비원은 정원 이름이기도 하지만 후원을 관리하는 관청 이름으로도 쓰인 것이다. 비원 설치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고 있다.
이름으로만 따져도 후원은 비원의 은밀한 정원의 느낌보다 그윽하고 품격 높으며 자연친화적인 분위기여서 후원이 더 적절해 보인다. 1900년대 이후로 비원을 많이 써서 비원이 더 알려져 있지만 최근에는 후원으로 환원하여 부르고 있다.
원래 창경원의 후원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 담장을 쌓아 분리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후원 부용정. 앞 부용지는 네모난 연못, 방지이다. 중간에 둥근 소나무 섬은 천원지방 사상을 반영한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사상이다. 전에는 연꽃이 가득했던 곳이다.
*낙선재
낙선재를 오른쪽에 두고 언덕길을 조금 오르면 후원 입구다. 여기서부터는 예약자만 입장이 가능하다.
후원으로 가는 담장길 또한 여러번 개보수를 거쳤으련만 우거진 나무와 아직도 여전히 격조를 유지하는 모습이 왕조의 품격을 보여주어 입구에서부터 왕궁의 격조가 감지된다. 나무는 예사나무들보다 높이가 더 높고 건강하고 푸르다. 나라의 중심을 지켜주는 기개와 위엄도 느껴진다.
후원에는 300년 이상 된 나무가 50그루가 넘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후원의 나무 특징은 인공적 관상수가 없고 전지를 하지 않은 것이다. 자연스럽게 오래 자라 쭉쭉 뻗은 나무들이 주는 시원한 느낌은 산에서도 느끼기 쉽지 않다. 어떤 정원에서도 느끼지 못했던 운치를 느끼게 되는 것은 이런 수목 덕분인 거 같다.
30여년 전에 대만 타이빼이에 가서 처음으로 예술적으로 전지를 해서 각종 동물 모양이 된 활엽수들을 보았다. 양명산 자락에 있는 한 대학 캠퍼스의 정원을 그렇게 꾸며 놓은 것을 보고 매우 충격을 받았었다.
우선 나무가 그렇게 변신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대한 충격이었다. 나무가 기린, 사람, 강아지 등 동물이 되었는데, 얼마나 오랫동안 많은 공을 들여 전지를 하며 키웠을까, 하는 전지 예술?의 대단함과, 식물이 동물로 성별을 바꾼 듯한 충격적인 변모에 놀랐던 것이다.
한참 보다 보니 충격이 가시고 의문이 생겼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저렇게 만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그것이 지독한 자연 훼손과 식물학대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었다. 그 뒤로도 한국에서는 어디서도 그런 전지예술은 보지 못했다. 우리 정원, 혹은 원림이 가진 전통적 자연친화적인 모습이 한국인에게 그대로 내면화된 덕분이 아닐까 한다.
그런 자연친화적인 정원의 미의식의 절정이 바로 이곳 후원이다. 소쇄원이나 명옥헌 등은 규모가 작아서 이런 풍모까지는 보이지 못하는 거 같다. 아름다움의 깊이가 앞으로 펼쳐질 후원의 모습에 기대를 갖게 한다.
*영화당. 후원에 들어서서 맨처음 만나는 건물이 영화당이다. 왕이 영화당에 임하고 근처에서 과거를 보이기도 했다.
요즘도 대통령이 국빈이 오면 이용하기도 한다. 2018년 9월에는 문재인 대통령 부부가 인도네시아 대통령 부부를 맞아 창덕궁에서 환영식을 마치고 이곳으로 와서 다과를 나누었다.
영화당은 임진왜란 후 1610년 광해군 때 건립되었다. 이후 여러 후원의 정자가 왕의 취향에 따라 다양하게 건립되었는데 인조조에 가장 많이 건립되었다.
영화당 앞 공터 춘당대에서는 영조조에 별시재를 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이곳에서 치르는 시험이 춘당대시(春塘臺試)이다. 국가적으로 경사가 있을 때 왕이 직접 춘당대에 나가서 관장하였다. 춘향전의 이몽룡도 이곳에서 시험을 치렀다. 영화당에 앉아 내려다보는 왕을 바라보며 시험을 치르는 것이다.
*부용정. 앞 연못에서는 는 임금과 신하들과 낚시를 즐기고 시를 지으며 풍류를 즐기던 곳이었다.
*부용정 내부
*주합루. 상단의 이층 누각은 주합루, 오른쪽은 서향각, 입구 대문은 어수문이다. 어수문 양 옆으로 있는 두 개의 좁은 협문은 신하가 드나든 문이다. 2012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주합루는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1층은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규장각, 2층은 열람실로 2층을 주합루로 불렀는데, 지금은 전체를 주합루라고도 한다. 정조의 문집도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었다.
규장각 도서는 해방후 서울대학교 도서관으로 이전하였고, 1992년 이를 관리하는 독립기관으로 규장각을 설치하였다. 25만점의 자료를 보관하고 있다.
정조가 설치한 규장각은 장용영과 함께 정조의 친위세력 형성을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정조 사후에는 기능이 약화되고, 도서 관리 기능만 남았다. 정조 재위시에는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서이수 등이 근무하였다.
주합루 아래 어수문(魚水門) 사이에 있는 건물은 서향각이다. 책의 향기, 이름에서 보듯이 책을 보관하던, 규장각의 부속건물로 임금의 영정을 모시던 곳이기도 하다. 친잠권민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으며 왕비가 이곳에서 누에를 쳐서 모범을 보이던 양잠실로도 사용되었다.
신주나 영정 등을 옮겨 모신다는 이안각으로 불리기도 했다. 어진, 어제, 어필등을 옮겨 모셔와서 이를 포쇄(습기찬 것을 거풍을 시키고 햇볕에 말리는 것)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김홍도의 그림 <규장각도>에도 선명하게 서향각이 그려져 있다.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에도 잘 나와 있다.
* 주합루의 대문 어수문 안으로는 들어갈 수 없어서 어수문에서 보면 왼쪽의 건물인 서향각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어수문(魚水門)은 임금만 드나드는 문이었다. 신하들은 옆의 작은 문으로 출입하였다. 어수문과 두 개의 협문으로 삼문의 형식을 갖추었다.어수문의 의미는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다 하여 임금과 백성을 가리키는 말, 또는 임금과 신하를 각각 물과 물고기에 비유하여 군신의 관계가 서로 융화하는 관계라는 뜻을 담은 말로 보기도 한다.
그런데 어수문을 찬찬히 보면 지붕 아래 들보처럼 옆으로 또 하나 가로지른 부재가 있다. 거기에 여러 마리 용이 새겨져 있다. 어수문, 춘당대시 등과 함께 살펴보면 이곳은 등용문의 의미가 있지 않나 싶다. 과거를 등용문이라 하는 것을 생각하면 어수문은 군신관계로 보는 것이 맞는 거 같다. 인재를 귀하게 생각하고 이들과 함께 큰뜻을 이루고자 한 정조의 의지가 잘 담겨 있는 공간인 것이다. 즉위한 해에 규장각을 지은 의도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첫번째 영역이다. 다음 구역의 금마문을 지나면 기오헌을 만나게 된다.
기오헌(寄傲軒). 순조의 아들, 정조의 손자인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청하여 지은 독서처. 아래 의두합과 함께 효명세자가 책을 읽으며 세도정치로 피폐해진 조정을 개혁할 의지를 불태웠던 공간이다.
기오헌 이름은 도연명 귀거래사에서 따왔다. 2019년에는 예악을 장려한 효명세자가 모친의 탄신을 기려 직접 지은 궁중무용 '춘앵전' 공연이 이곳에서 펼쳐지기도 하였다.
* 의두합(倚斗閤) 혹은 운경거(韻磬居). 효명세자가 사용하던 책 보관용 건물. 후원에서 제일 작은 건물로 기오헌과 함께 지은 것이다. 옆 기오헌과 같이 단청을 하지 않은 수수한 북향 건물이다.
마루 아래로 통풍을 위해 둥글게 뚫어놓은 구멍이 보인다. 최근 보수를 하는 과정에서 3개는 없앤 것으로 보인다.
기오헌을 나서 연경당으로 향하는 문.
멀리 보이는 연경당.
긱오헌 앞은 애련지가 조성되어 있다. 멀리 보이는 작은 정자는 애련정이다. 궁중 사극에서 흔히 보던 그 정자이다. 처음 봤지만 궁중 후원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잘 보여주던, 매우 낯익은 공간이 애련지와 애련정이다.
높디 높은 수목들은 푸르고 건강하면서 격조를 보여준다. 수목 간에도 햇빛을 차지하기 위한 경쟁은 치열하다. 하지만 여유 있는 공간에 들어서 있는 나무들은 경쟁보다 화합을 보여주며 격조를 잃지 않는다.
이제 연경당 공간으로 들어선다.
연경당의 장악문. 효명세자(1809~1830)는 짧게 살다 갔지만 많은 것을 경험하고 많은 것을 이루려 했다. 순조 재위 시에 수렴청정을 하면서 안동김씨 세력의 발호를 막으려 했고, 왕권을 강화하여 정조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했다.
왕권 강화의 방식으로 채택한 것 중 하나가 예악의 확대였다. 화려한 궁중연회를 열어 군신간의 질서를 바로잡고자 했다. 연경당은 최초의 궁중공연장으로 효명세자의 이러한 뜻이 담겨 있다. 연경당을 지어 모친 순원왕후의 40세 축하연을 올렸다. 이때 "춘앵전"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이후 많은 연회를 효명세자가 직접 관장하였다.
연경(演慶)은 경사를 널리 편다, 혹은 경사를 공연한다 등의 뜻이 있는데 효명이 당호를 직접 지은 것이다. 연경당의 정문 장락문(長樂門)은 낙선재 대문 이름과 같은데 즐거움을 길이 누린다의 뜻이니 연경당의 의미와 상통한다.
*후원은 볼것도 많고 생각할 것도 많아 계속 이어 다음편을 쓴다.
#창덕궁후원 #후원 #비원 #규합루 #규장각 #어수문 #부용정 #영화당 #기오헌 #의두합 #연경당
첫댓글 정정합니다. "원래 창경원의 후원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가 창경원을 창경궁으로 개조하면서" 를 "원래 창경궁의 후원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가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개조하면서"로 정정하는 게 어떤지요?
삼십 여년 인천에 살면서 서울을 자주 오르내렸지만 정작 창덕궁과 창경궁을 찾아간 적이 드뭅니다. 오늘 이후로 시간을 내서 제대로 꼼꼼하게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지적 안 해주셨으면, 중요한 실수가 계속 갈 뻔했네요. 감사합니다.
저도 예약이 부담스러워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가 오랜 숙제를 해결하듯 가봤습니다. 한중일 궁궐의 정원 차이가 한눈에 보이는 듯했습니다. 드라마 속의 공간도 이제야 친숙하게 눈에 들어왔고요. 코로나 부담이 가벼워져 선생님의 방문이 빠르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