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음력 6월 일본의 후원아래 만들어진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에 항의하면서 구식 군대가 왕조에 대해 집단으로 일으킨 군란(軍亂)이다.
무능한 임금 고종으로 인한 민씨척족이 민비와 벌인 부정부패로 인한 군의 반란인 것이다.
조선왕조가 멸망의 길을 걷는 본격적인 시발점이 된 사건이다. 또한, 한반도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나라의 군주가 살고 있는 궁궐이 군대와 백성들에게 직접 습격을 당한 사례다
이 사건이 조선왕조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일단, "조선은 군대에 돈도 제대로 못 줘서 군인들이 백성들과 함께 손잡고 반란을 일으켰을 정도로 나라가 완전히 엉망이라는 것을 만천하에 까발렸기 때문이다.
고종을 비롯한 민씨척족정권이 개화정책을 추진해 일본과 구미제국과의 교섭통상관계가 이루어지면서 민씨 척족세력인 개화파와 대한 대원군을 중심으로 한 수구파의 반목이 점차 심해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개화파 관료가 제도 개혁에 따라 대거 등장하자 수구파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은 대원군파와 특히 남인계열의 수구파에 대대적인 탄압을 가함으로써 지배층의 분열은 극도에 달해 있었다.특히, 5영(營)을 폐지한 후 무위(武衛)·장어(壯禦)의 2영을 설치하고 별기군(別技軍)을 창설하는 등 군제 개혁이 단행되자 구 5영소속 군병들의 불만이 고조되었다.군제 개혁 후 구 5영 소속 군병의 대부분은 실직하였다. 또 무위영과 장어영으로 개편된 군병이라 할지라도 신설된 별기군에 비해 열악한 대우에 처해 있었다.
1882년 6월초에 전라도조미(全羅道漕米)가 도착하자, 6월 5일 도봉소에서는 우선 무위영 소속의 구훈련도감 군병들에게 한달분의 군료를 지급했으나 겨와 모래가 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 양도 반이나 모자랐다.
이 때 포수(砲手) 김춘영(金春永)·유복만(柳卜萬) 등이 선혜청 고직(庫直)과 무위영 영관에게 항의해 시비가 격렬해졌다. 이에 다른 군병들도 합세하여 도봉소는 순식간에 수라장이 되었다. 당시 궁중에 있던 민겸호는 이 소식을 듣고 김춘영·유복만 등 주동자를 포도청에 가두었고, 혹독한 고문을 가한 후 그 중 2명을 처형하도록 하였다.
이 소식에 격분한 군병들은 김춘영의 아버지 김장손(金長孫)과 유복만의 동생 유춘만(柳春萬)의 주동으로 통문을 발송, 군병의 결집을 호소하였다. 6월 9일, 소요는 마침내 대규모의 폭동으로 발전하였다. 우선 민겸호의 집을 습격했고, 이후 행동방침을 결정하기 위해 대원군의 지시를 받았다.
대원군이 군병의 대표자들에게 어떤 밀계를 지령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군병들의 이후의 행동으로 볼 때 전 해에 있었던 이재선의 토왜반정음모사건 당시의 거행계획을 실행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대원군의 심복인 허욱(許煜)이 군병으로 변장하고 군란을 지휘하기도 하였다.
이들 군병은 동별영(東別營)과 경기감영의 무기고를 습격하고 포도청에 난입해 동료를 구출한 뒤 척신과 개화파 관료의 집을 습격하였다.
이날 저녁에는 일본공사관을 포위, 공격해서 하나부사(花房義質) 공사는 가까스로 인천으로 탈출하였다. 군란 이틀째인 6월 10일에 사태는 더욱 확대되어 영돈녕부사 이최응(李最應)이 살해되었고, 뒤이어 궐내로 난입한 군병들에 의해 민겸호와 김보현도 살해되었다.
민씨척족정권의 최고 권력자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제거하려고 찾았으나, 명성황후는 여흥부대부인(驪興府大夫人) 민씨와 무예별감(武藝別監) 홍재희(洪在羲)의 도움으로 탈출해 윤태준(尹泰駿)의 집에 은신했다가 광주(廣州)·여주를 거쳐 장호원(長湖院) 민응식(閔應植)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군병이 궁궐에 침입하자 고종은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맡겼고, 이 과정에서 대원군은 재차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대원군은 먼저 군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5영의 복설, 통리기무아문(統理機務衙門)의 혁파, 삼군부(三軍府)의 복설을 명하였다.
제2단계의 개혁으로 척족을 제거하는 인사를 단행하였다. 맏아들인 이재면(李載冕)을 훈련대장 겸 호조판서·선혜청당상에 임명하여 병재(兵財) 양권을 장악하게 하였다.
영의정 홍순목(洪淳穆)을 유임시키고 인망 있는 신응조(申應朝)를 우의정에 임명하였다. 그 밖에 신정희(申正熙)를 어영대장으로, 조희순(趙羲順)을 금위대장으로, 임상준(任商準)을 총융사로, 조병호(趙秉鎬)를 도승지로 임명하였다.
이어서 중앙의 각 부서 및 지방관에도 새로운 인물을 등용하였다. 대원군이 등용한 인물들은 대부분 남인 계열에 속하는 노정치가들이었다. 그러나 인재의 부족을 통감한 대원군은 투옥 또는 유배 중인 죄수들을 석방시켜 등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원군 정권은 불과 33일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그 원인으로는, 첫째 명성황후의 국장 절차를 강행하는 동안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다는 것, 둘째 고종 친정 10년간 대원군파는 철저히 탄압되어 신정권에 참여할 수 있는 인재가 부족했다는 것, 셋째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군란 처리를 위해 청일 양국이 재빨리 출병한 데다가 특히 청나라가 대군을 출동시켜 7월 13일 대원군을 납치한 것을 들 수 있다. 임오군란에 대해 설명 하기엔 지면이 너무 좁아 아쉽다 50배 100배로 해도 아니 책 두어권으로도 부족한것을 여기에 설명 하기엔 역부족인듯하고, 자르고 축약해 본질과 다르게 설명됀 부분도 있는듯하다, 지면이 좁아 이해하라고 하기엔 변명인듯해서 면구 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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