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3. 6. 8
돈오입도요문론 강좌 ⑧
하나.
이제 전국 어디에서나 쓸 수 있는 교통카드가 오는 10월에 나온다고 합니다.
지금까지는 버스나 지하철 탈 때는 교통카드를 쓰고 고속도로 통행료는 하이패스 카드, 열차를 탈 때는 신용카드로 결제했습니다. 그런데 교통카드가 있어도 각 시도에서 사용되는 카드는 서로 다르기 때문에, 어디서나 똑같이 통용되는 교통카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저도 생각한 적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앞으로 현실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들이니까 이러한 것을 우리의 마음공부로 비유해보겠습니다.
지구상에 인류가 나타난 이래 지금까지도 각 종교마다, 또 그 종교 안에서도 각 종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교리가 서로 달라서 신앙하고 수행하는 방법도 달랐습니다. 그래서 비록 종교인이라 할지라도 서로 자기 종교의 가르침이 절대로 옳다는 생각 때문에 종교 사이의 갈등이 끝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모든 종교 안에 근본적으로 통일된 신앙과 수행이 없는 것일까요? 물론 없을 리가 없지요.
우리 정전의 <상시응용 주의사항> 제1조를 보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할 것이요’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기서 ‘온전한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그것은 ‘성품의 지혜로부터 나는 생각’, ‘공적영지를 따라 나오는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로 바꾸면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긍정하고 표준으로 삼을 수 있는 생각’이라고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그런데 그러한 생각은 어떤 생각일까요. 내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맞는 생각일까요.
만약 그렇게 된다면 우선 각 종교인의 생각이 서로 다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맞는 표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 ‘윤리’와 ‘도덕적 가치관’에 맞는 생각일까요?
그런데 이것도 시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그리고 사람들의 집단에 따라 가치관이 다를 수가 있습니다.
가령 조선시대의 윤리관과 현재의 윤리관은 똑같을 수가 없고, 앞으로 몇 백 년 뒤의 윤리관도 지금과 다를 수 있습니다. 또한 스스로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윤리관과, 엄격한 규율을 지향하는 군인의 윤리관이 다를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윤리’와 ‘도덕적 가치관’에 맞는 생각도 언제나 표준이 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럼 과연 어떤 생각이 어느 시대나 또 누구에게나 온전한 생각이 될까요?
그것은 오늘 강좌에서 공부할 내용과도 같습니다.
바로 사랑과 미움을 떠나 그 어떤 것에도 착(着)이 없는 마음, 즉 아무데도 머물지 않는 마음에서 나오는 생각입니다. 마음이 이렇게 되면 저절로 우리의 성품자리로써 일원의 체성에 합한 자리이고 그대로가 진리자리입니다.
바로 이러한 마음이 모든 성인들의 마음이며, 이 세상 모든 종교적 교리의 근원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시대와 종교, 인종과 지역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표준이 되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경계를 대할 때 바로 이런 마음으로 행하라는 것이 곧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우리의 참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둘.
그동안 신심과 공심으로 우리 교단을 위해서 큰 불사를 많이 해주신 신 타원님께서 열반하셨습니다.
대승불교에서는 보살이 실천할 수행덕목을 여섯 가지로 말하는데, 그 첫 번째가 보시(바라밀)입니다.
그리고 보시에는 또 흔히 세 가지가 있다고 하는데, 재시(財施), 법시(法施), 무외시(無畏施)입니다.
재시는 물질로 베푸는 것이고, 법시는 진리의 법문을 설해주는 것이며, 무외시는 두려워하는 이에게 두려움을 벗어나 편안한 마음이 되도록 해주는 것입니다.
신 타원님처럼 자신이 가진 재산을 주위와 공익에 상 없이 베푸는 보시와 함께, 불법의 본지(本旨)를 깨쳐서 미혹에 빠진 이들을 바르게 인도하고 깨닫게 해주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보시입니다.
겉보기에 불법수행은 자신에게만 이롭고 남에겐 별 도움이 안 되는 것 같지만, 자기의 본래면목을 깨친 수도인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자신의 성품을 일상에서 부려 쓰는 것도 실은 스스로 널리 법시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순간이 이른바 화피초목 뇌급만방(化被草木 賴及萬方)입니다. 즉 주위의 모든 생명, 즉 짐승이나 미물 곤충 심지어 나무와 풀까지도 진리의 가피를 입는 것입니다.
이생에 자신이 가진 물질적인 복을 나누고 베풀어 내생에 또다시 많은 복을 장만하며, 비록 물질이 부족하다고 해도 스스로 청정무념, 주한 바 없는 마음을 닦아서 그 자리에 있으면 주위 삼라만상, 허공법계에 모두 법을 설하는 보이지 않는 보시입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갑니다.
12.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
“만약 마음이 청정함에 머물면 청정함에 집착하는 것이 아닙니까?”
“청정함에 머물었을 때 청정함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청정함에 집착한 것이 아니다.”
“마음이 공(空)에 머물면 공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만약 공하다는 생각을 한다면 곧 ‘공에 집착했다’고 한다.”
“만약 마음이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물면 머무름이 없는 곳에 집착한 것이 아닙니까?”
“다만 공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곧 집착하는 곳이 없으니, 네가 만약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분명하게 알고자한다면, 좌선할 때에 다만 마음만 알뿐, 그 어떤 것도 생각하여 헤아리지[思量] 말며 그 어떤 선(善)과 악(惡)도 생각하여 헤아리지 말라.
問 若心住淨時 不是着淨否
答 得住淨時 不作住淨想 是不着淨
問 心住空時 不是着空否
答 若作空想 卽名着空
問 若心得住無住處時 不是着無住處否
答 但(不)作空想 卽無有着處 汝若欲了了識無所住心時 正坐之時 但知心 莫思量一切物 一切善惡 都莫思量
‘마음이 청정하다’고 하는 것은 그 마음이 스스로 ‘청정하다’고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청정하다’고 하는 느낌이 있다면 도리어 그것은 청정하지 않은 마음입니다.
참으로 청정한 마음은 스스로 ‘청정하다’는 상(相)을 떠나있기 때문에 그 속에는 청정함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속으로 ‘내 마음이 청정해졌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이미 물든 마음이며 ‘청정함’에 집착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은 마음과 관련된 모든 공부에 똑같이 적용됩니다.
가령 정말로 착한사람은 그 마음속에 자기가 착하다는 생각이나 느낌이 없습니다. 반대로 정말로 악한 사람은 도리어 자기가 악하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그래서 극악무도한 짓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혜롭다’고 느끼는 사람도 사실은 어리석은 자입니다. 참다운 지혜, 즉 ‘본래의 지혜’는 것은 그 속에 지혜라는 상(相)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가 있다고 자기를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지 않습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러한 지혜, 즉 반야(般若)를 지혜라고 했는데, 세상에서는 도리어 ‘지혜가 있다’고 하면 ‘꾀가 많다’는 뜻으로 자주 쓰입니다. 그 때문인지 일본사람들에겐 ‘꾀’와 ‘지혜’가 같은 낱말입니다.
‘나지도 멸하지도 않는[不生不滅]’ 자기의 본성을 알고 있으며, ‘받으면 반드시 주어야하는’ 인과의 이치를 아는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눈에 정말 ‘지혜롭게’ 보일까요?
반대로, 자기가 어리석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되레 어리석지 않은 사람입니다.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면 자기를 돌아보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나는 이러이러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사실 거기에 끌려있는 것이지 정작 그렇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흔히 ‘마음을 비웠다’고 하는 것도 정말 비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비워지면 ‘비워졌다’는 느낌도 없는 것인데 어떻게 ‘비워졌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그것은 모두 망상이며 집착이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마음이 비워지면 ‘비워졌다, 안 비워졌다’는 생각조차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빈 마음으로 경계에 응하되 경계에 주착하지 않음은 물론, 빈 마음도 돌아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마음이 공(空)하되 공에도 머물지 않는다고 합니다.
‘머무름이 없는 곳[無住處]’은 이러한 장소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실은 ‘머무는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한자로는 같은 뜻인데 풀이를 하다 보니 그렇게 두 가지가 되었습니다.
‘다만 공(空)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이라는 구절은 본디 원문(原文)에 ‘但作空想’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래서는 말이 되지 않기 때문에 제가 불(不) 자를 넣었습니다.
마음이 공(空)하면서도 공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공(空), 불공(不空) 어디에도 집착하는 곳이 없다는 말입니다.
만약 ‘머무는 바 없는 마음’을 똑똑히 알고 싶다면 그 어떤 것도, 선악조차도 떠올리지 말고 이러쿵저러쿵 헤아리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직 ‘마음’만 알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마음만 알고 있으라’고 말한 것은 무기(無記)에 빠져있지 않음을 보여주려는 뜻입니다.
누구든 무기에 들어있으면 스스로 제 마음조차 인식하지 못합니다. 그야말로 깜깜한 공(空)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무기를 다른 말로 무기공(無記空)이라고도 합니다.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갔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않으면 과거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과거의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며, 미래의 일은 아직 다가오지 않았으니 바라지도 구하지도 않으면 미래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니 곧 ‘미래의 일이 없다’고 하는 것이고, 현재의 일은 이미 현재 모든 일에 다만 집착이 없음을 알뿐이니, 집착이 없다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곧 집착함이 없음이라 현재의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곧 ‘현재의 일이 없다’고 한다. (이렇게) 삼세(三世)를 쫓아가 잡을 수 없음을 또한 ‘삼세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過去事 已過去而莫思量 過去心 自絶 卽名無過去事 未來事未至 莫願莫求 未來心 自絶 卽名無未來事 現在事 已現在 於一切事 但知無著 無著者 不起憎愛心 卽是無著 現在心 自絶 卽名無現在事 三世不攝 亦名無三世也
과거의 일은 이미 지나갔고 미래의 일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생각하여 헤아리지 않으면 그 일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현재의 일은 집착하지 않으면 그 마음이 없어서 그 일이 없는 것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마치 기차를 타고 여행하는 사람처럼, 지나간 풍경은 이미 지나가버렸으니 생각할 필요가 없고, 다가올 풍경은 아직 오지 않았으니 미리 떠올릴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 있는 풍경은 시선을 어느 한 곳에다 고정하지 않으면 전체의 풍경을 다 감상하면서도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즉, 창밖의 경치를 볼 때 어느 한 곳에 시선을 두면 마음이 ‘머무는 곳’이 있지만, 경치를 보더라도 전체 화면으로 보게 되면 다 보면서도 어느 한 군데도 마음이 머무는 곳이 없습니다.
이렇게 되었을 때를 ‘머무는 바 없이 머무는’ 마음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성품을 올바로 쓰는 수행인은 일상생활에서도 이와 같이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마음이 무엇인가에 끌려 머무는 데가 있으면 저절로 거기에 집착하게 되어 스스로를 속박하게 되고, 그래서 희로애락이 일어나서 필경엔 괴로움의 바다[苦海]로 들어갑니다.
수행인이 어떤 경계에서든 이렇게 ‘머문 바 없이 머무는’ 마음을 지니면 과거 현재 미래가 모두 끊어져버리니, 이것을 두고 삼세의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이 만약 일어날 때에 따라가지 않으면 가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지며, 만약 (마음이) 머물 때에 또한 따라서 머물지 않으면 머무는 마음이 스스로 끊어져서 머무는 마음이 없으니, 곧 이것이 머무름이 없는 곳에 머문다고 한다. 만약 머무름 없음에 머무는 것을 분명히 스스로 알 때는 단지 머물 뿐, 머무는 곳도 없고 또한 머무는 곳이 없음도 없다. 만약 마음이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음을 스스로 똑똑히 알면 곧 ‘본래마음[本心]을 분명하게 본다’고 하는 것이며 또한 ‘성품을 분명하게 본다’고 한다.
心若起去時 卽莫隨去 去心 自絶 若住時 亦莫隨住 住心 自絶 卽無住心 卽是住無住處也 若了了自知 住[無]住時 只物住 亦無住處 亦無無住處也 若自了了知 心不住一切處 卽名了了見本心也 亦名了了見性也 * 只物=只麽 (단지 ~일 뿐)
‘마음이 일어날 때에 따라가지 않으면 그 마음이 스스로 끊어진다’고 하였는데, 이와 똑같은 내용이 우리 교전에도 나와 있습니다.
먼저 정전 수행편의 <좌선법>에 보면
“망념이 침노하면 다만 망념인 줄만 알아두면 망념이 스스로 없어진다”
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수심결> 24장에도
“생각이 일어나면 곧 깨치라, 깨치면 곧 없어진다[念起卽覺 覺之卽無]”
고 하였는데 바로 이와 마찬가지 뜻입니다.
우리가 망념이 계속해서 일어나는 것은, 그 첫째 이유가 그 망념이 일어남을 알아채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자주 마음을 챙겨서 망념이 일어남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하루 종일 가도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없습니다.
둘째는 망념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고도 그 망념에 자꾸 물을 대주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왜 이런 망념이 드는 걸까?” 라든지
“나는 망념이 너무 많아!” 또는
“이런 망념을 없애야하는데...”
따위로 자꾸 생각을 이어가면 그야말로 망념이 그칠 새가 없습니다.
이것이 망념에 자꾸 물을 대주는 것입니다.
망념이 일어난 것을 느꼈으면 그냥 앞뒤 생각지 말고 그 마음을 쉬어버려야 합니다.
그러면 망념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마음이 머물 때에 또한 따라서 머물지 말라’는 것도, 내 마음이 어딘가에 끌려 머물려고 할 때 스스로 그렇게 끌려감을 깨달아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것으로, 역시 자주 마음을 챙겨야만 알 수가 있습니다.
때문에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은 평소 자신의 마음을 자주 보는 것이 진리수행의 기본이며, 견성과 해탈성불의 첫걸음입니다.
예로부터 인류가 만약 자기 마음을 보거나 자기 마음의 움직임을 느끼는 일이 없었다면, 아마 이 세상에는 부처님과 성인(聖人)도 없었고 종교도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머무름 없음에 머무는 것을 분명히 스스로 알 때’라는 구절은, 본디 원문에는 ‘若了了自知 住在住時’라고 나와 있는데 그리되면 뜻이 맞지 않기 때문에, 가운데 재(在) 자를 무(無) 자로 고쳐 넣고 제가 위와 같이 풀이하였습니다. 아마도 원문이 베껴져 전해 내려오는 과정에서 생긴 오자(誤字)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마음이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음’을 스스로 또렷이 알면, 그것이 곧 본래마음[本心]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며, 또한 성품(性品)을 분명하게 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본래마음’ 혹은 ‘성품’이라는 것은 그 몸체가 참으로 텅 비어서[眞空] 그 자리엔 어떤 생각이나 관념도 붙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이 그 어느 곳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 자체가 바로 본래마음이고 성품인 것이라, 이를 가리켜서 ‘본래마음(성품)을 본다’고 한 것입니다.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만이 곧 부처님 마음[佛心]이고, 또한 해탈심이며, 또한 보리심이고, 또한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이며, 또한 ‘색(色)의 성품이 공함’이라고 하니, 경에서 말하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證)하였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대들이 만약 아직 이와 같이 체득하지 못하였다면 노력하고 노력하여 부지런히 공력을 더하라. 공부가 성취되면 스스로 알게 될 것이니, 그러므로 ‘안다’고 하는 것은 어디서나 무심함이 곧 아는 것이다.
무심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되어 참되지 않음이 없으니, 거짓되었다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며, 참되다는 것은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곧 두 성질[二性]이 공함이니, 두 성질이 공하면 자연해탈이다.”
只箇不住一切處心者 卽是佛心 亦名解脫心 亦名菩提心 亦名無生心 亦名色性空 經云證無生法忍是也 汝若未得如是之時 努力努力 勤加用功 功成自會 所以會者 一切處無心 卽是會 言無心者 無假不眞也 假者 愛憎心 是也 眞者 無愛憎心 是也 但無愛憎心 卽是二性空 二性空者 自然解脫也
부처님의 마음, 보리심이라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이 아니라 오직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부처님의 마음이나 보리심은 간단히 이야기해서 진리자리, 즉 법신(法身)을 말하는 것인데, 그 자리는 말과 이름과 모양[言語名相]이 다 끊어져서 그야말로 아무것도 머물 수가 없으니, 마음이 이러한 상태가 되면 그가 곧 부처이고 그것이 곧 깨달음의 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때문에 부처님의 마음은 중생의 사량 분별(思量分別)하는 마음으로는 알 수가 없으며, 보리는 생각으로써는 이를 수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이 또한 ‘남이 없는 마음[無生心]’이라 하였고 또 ‘색(色)의 성품이 공함’이라 하였습니다.
‘남이 없는 마음’이란, 우리의 본래마음 혹은 성품이라는 것이 처음 어디로부터 생겨서 나온 것이 아니라, 본래부터 그렇게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라는 개념과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본래마음을 남이 없는 마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남이 없는 마음’을 철저히 증득하면 곧 견성이며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색의 성품이 공하다’고 하는 것은 ‘모든 물질[色]은 그 본질이 공하다’는 것인데, 이른바 ‘진공이 곧 묘유’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먼저 진공이 있고난 뒤에 묘유가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진공 자체가 묘유로 드러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색의 성품이 공함’은 바로 진리의 진공묘유를 말하고, 이는 곧 참다운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라, ‘부처의 마음’이 바로 그것이고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이 또한 그것이니, 모두가 똑같은 뜻인 것입니다.
이를 두고 경에서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證)하였다’고 한다 하였는데, 무생법인이란 모든 법이 나는 것도 멸하는 것도 아님[不生不滅]을 깨친 지혜를 말하며, 이것을 확실히 증득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이렇게 확고하게 깨치지 못하였으면 부지런히 수행 정진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공부가 깨침에 이르면 스스로 알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진정한 깨침에 이르면 누가 일러주고 말 것도 없이 자기 스스로 환히 알게 된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깨친 바에 조금이라도 의혹이 있어서 바르게 깨침인지 아닌지가 불분명할 때 스승의 인가가 필요하고 다른 선지식의 판단이 필요한 것이지, 스스로 분명하게 깨치고 증득했다면 다른 사람에게 물어볼 것조차도 없습니다.
이것은 비유하자면, 지금 목이 타서 죽어가던 사람이 시원한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살아났을 때, 아직도 자기가 목마른 것인지 아니면 갈증이 이미 다 사라졌는지는 남에게 묻지 않아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누구든 만약 이와 같이 안다면 어디서나 무심하게 되는 것이 곧 그 ‘아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무심이야말로 참다운 것으로, 사랑과 미움을 모두 떠나면 두 가지 성질[二性]이 공함이라 저절로 해탈이라 하였습니다.
이렇게 사랑과 미움의 두 가지 성질을 모두 버리면 그것이 바로 참다운 자리이고 해탈이라는 표현은 선종(禪宗)의 제3조 승찬(僧璨)대사가 지은 유명한 신심명(信心銘)의 첫머리에 나와 있는 말입니다.
至道無難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으니
唯嫌揀擇 오직 가리는 것을 꺼릴 뿐이다
但莫憎愛 다만 사랑하고 미워하지 않으면
洞然明白 툭 트여서 명백하리라
이렇게 모든 마음공부의 결정체는 무심에 있고, 그 내용은 두 가지 성질, 곧 양변(兩邊)을 버리는 것이며, 그중 핵심이 바로 사랑과 미움을 다 놓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진리의 자리이고 해탈의 마음이며 부처님의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나우
|
첫댓글 청원 김도형합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