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바래기에서 비서(秘書) 입수(入手),
가슴에 품고 대원사에 가 독공
본관은 야성(冶城). 본명은 송도군(宋道君), 법명은 규(奎), 호는 정산(鼎山). 1900년 8월 4일 경상북도 성주에서 아버지 송벽조(宋碧照), 어머니 이운외(李雲外)의 장자로 태어났다. 1943년 6월 박중빈이 사망하자 종통을 계승하여 원불교 2대 종법사에 취임하였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송도군은 고향에서 백일치성을 마치고 산골 논 서 마지기 판 돈을 가지고 선돌댁과 같이 다시 전라도로 왔다. 도를 이루지 않고는 결코 집에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비장한 결심을 한 그는 정사년 구월의 두번째 전라도 행이 고향과 영이별이 되었다.
도군이 선돌댁과 같이 다시 전라도로 와 머문 곳은 정읍 두승산 시루봉(甑山) 아래 마을 손바래기 증산의 본가였다. 석달 전에 손(客)으로 얼마동안 머물렀던 곳이라 선동 같은 환한 모습의 그를 반겨 맞이한 이는 증산의 본처 정씨와 무남독녀 강이순이었다. 이때의 이순은 열네 살이었다.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었다. 정읍군 덕천면 신월리에 소재한 이 마을은 '손바래기' 또는 '새터'라고도 부르는데 '손'이 원래 선(仙)의 변한 말인지 모르나, 속설에 의하면 손님을 바라기(客望) 위해 시루봉 아래 새터를 잡았다고 한다. 현재지명 신월리(新月里) 신기(新基)라면 '새 터를 잡고 새 달(손님)을 기다린다'는 뜻이 되고 마는데, 어찌된 기연인지 얼마 뒤 도군은 모악산 대원사에서 치성 도중 태을주 신도들로부터 달덩이 같은 용모의 새 손님 '만국양반'으로 받들어져, 손바래기에서 불과 십리 상거한 덕천들 건너 화해리 마동에 7개월간 머물게 되고, 또 증산의 본처 정씨가 시부모와 불미한 일로 딸을 데리고 화해리 마동으로 옮겨가 한 동네에 살게 된다.
송도군은 손바래기와 원평 송찬오의 엿집을 거점으로 정읍, 김제, 고창, 장성 등지의 이름 난 도꾼들을 찾아다녔다. 도꾼이라 해봤자 모두 증산상제의 제자들이었다. 고 부인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정사년(1917) 9월25일 월곡 차경석은 모친 밀양 박씨의 회갑연을 기하여 24방주와 주요 간부를 모아놓고 장기간 집을 떠나 외유할 뜻을 표명했다.
"내가 이곳에 있으면 정읍경찰서 문턱이 닳아 없어질까 걱정이다. 내가 세상을 주유하여 천하사를 도모코자 한다."
수제자 김홍규와 채규철을 북집리와 남집리에 임명하여 그들에 교단 재산을 관리하도록 하고 김형규와 문정삼을 남북도 신도를 교화하는 설유사(說諭師)로 명하여 24방주를 중심으로 연원체계를 조직하라 지시하고 고 부인에게 예문하는 신도를 단속하는 등 교단의 제반사를 부탁하였다. 어쨌든 월곡은 이 유랑을 계기로 하여 강원도, 경상도 등지에서 핍박받는 민심의 호응을 얻어 엄청난 신도를 확보하게 된다.
송도군은 월곡이 유랑을 떠났다는 소문을 듣고 대흥리 도장에 찾아가 얼마동안 머물렀다. 고 부인은 도를 구하러 온 소년의 그 순진하고 진지한 자세에 몹시 부담을 느꼈다. 고 부인은 그를 보고 대면하지도 방에 들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이때 송인기(久山)가 아들을 찾아 송찬오를 통해 그곳에 왔다. 고 부인은 송도군의 부친 인기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지발 댁의 아들 좀 데리고 가소. 내가 새파란 그 소년을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당췌 못살것소."
송규(宋奎, 1900∼1962). 호는 정산(鼎山). 경북 성주군 초전면 소성리 출생. 원불교 2대 교주. 경상도 가야산에서 태모님 교단의 신도들로부터 ‘큰공부를 하려면 정읍 대흥리의 고수부님을 모셔야 한다.’는 말을 듣고 태모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대흥리에 한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아들을 찾아 대흥리 도장에 오니 태모님께서 “제발 당신네 아들 좀 데리고 가소.” 라고 하셨다 한다.(도전 11:42:1측주) |
고 부인은 새파란 소년 도인의 기세에 상당히 부담을 느꼈다. 도군도 고 부인에게서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음을 확인하고 도로 손바래기로 돌아왔다. 그때 도군은 강이순으로부터 그녀의 부친이 남긴 비서를 받게 된다.
"오빠 오빠, 어디 갔다 왔는가? 내동 기다렸고마."
"대흥리에."
"차가 집 그 여편네?"
"사모님 뵈었제."
이순이 새침하여 따졌다.
"참말로 오빠는 모르는가?"
"뭘?"
"그 여편네는 오빠한테 대면 아무 것도 아니랑께."
"이순이가 어떻게 아노?"
"나도 알지. 내가 우리 아부지한테 단 하나뿐인 혈손인데."
이순의 말은 단호했다. 그래도 작은 어머니인데, 돌아가신 부친의 신임을 받은 부인인데 어찌 이다지도 매몰찰 수 있을까. 도군은 대꾸 할 말을 잊었다.
"……"
"오빠가 태을주를 외면 그 소리를 듣고도 나는 천상에 있는 매로 편안해져. 절로 공부가 된당게로."
"……"
"그만큼 오빠 공부가 되었당게."
이순의 말에 도군은 내심 놀랐다. 나이 어린 계집아이로만 여겨왔던 것이다. 불과 네 살 차일뿐인데.
집안이 매우 조용한 어느 날이었다. 두 사람뿐이었다.
"오빠, 내가 좋은 것 하나 일러줄까."
이순이 다가와 정답게 도군의 손을 잡으며 이끌었다.
"무슨 일이고? 이야기 해도고."
"전에 아부지께서 서재같이 쓰신 별실이 있는데 그리 가 보장께요."
"상제님께서 쓰신 별실?"
도군은 궁금하여 이순이를 따라갔다. 증산이 따로 방을 마련해놓고 독공을 드린 듯하였다.
이순이 가리키는 곳을 보니 천정 한 귀퉁이에 묵은 종이로 땜질하듯 봉해놓았다.
"아부지가 저기에 책 한 권을 넣고 봉하시면서 뒷날 여기를 열고 찾아갈 사람이 있을 터이니 주인이 올 때까지는 입밖에 말을 내지 말라고 그랬어라."
이순이는 도군을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순아, 와 나한테 그 말하노?"
"내 생각에는 오빠가 뜯어보면 좋겠소."
▲ 이옥포가 기술한 도가 비서 〈정정요론〉. 후일 대종사의 명으로 이춘풍이 번역하였다.
이순이는 궤짝을 하나 갖다놓고 어른처럼 말했다. 도군은 가슴이 사뭇 두근거렸다. 상제님이 후일 어떤 사람에게 전하기 위해 책을 숨겨두었다면 이는 필시 보통 비서가 아닐 것이라는 기대 속에, 도군은 바로 궤짝을 놓고 올라서서 천정을 뜯었다.
빛바랜 한지에 붓글씨로 필사한 순 한문책인데 표지에 〈正心要訣(정심요결)〉이라 제목하였다.
상제님이 직접 지으신 책인가 궁금하여 뒤적거려보니 책 말미에 '道門小子玉圃(도문소자옥포)는 敢發天師之秘(감발천사지비)하야 記述定靜一部(기술정정일부)하노니'란 구절이 보인다.
'도문 소자 옥포는 삼가 상제의 비서를 발하야 정정 한 책을 술하니'라고 한 구절로 미루어 '옥포'라는 호를 가진 도학자가 기술한 것만은 분명하다.
"이순아, 옥포가 누고? 상제님께서 그런 호를 써셨나?"
"아녀라오."
이순은 고개를 살레살레 흔들었다. 적이 실망이 되나 주인을 기다리던 서책을 입수한 도군은 그 내용을 살펴보니 수련서라 어찌나 황홀하고 즐거운지 그 기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소중한 비서인지라 말이 아니 나야 하겠으므로 도군은 이순에게 단단히 당부하였다.
"이순아, 우리 둘이 약속하자이, 엉?"
"오빠하고 둘이 약속하면 꼭 하지르."
이순이 눈을 깜짝이지도 않고 도군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여기 뜯어 본 것을 사람들이 알아도 안 되고, 또 이 책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도 남이 알아서도 아니 되니 우리 둘이 이 일을 절대 발설하지 말자." 둘이 손가락을 걸고 약속을 하고 그로부터 도군은 품속에 소중히 책을 간직하고 다녔다.
출처 : 원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