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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윤리(職業倫理)는 개인과 기업의 예측되는 행동 기준을 아우른다.
직업 윤리의 의미
특정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윤리이다.
직업이란 무엇인가? 일과 직업은 어떻게 다른가? 수없이 많은 직업 가운데 우리가 전문직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가? 전문직은 일반직과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언론은 전문직인가? 먼저 이 문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직업(occupation)이란 무엇인가? 직업은 일시적 활동이나 취미생활과는 엄격히 구별된다. 직업이란 한 사람이 자기가 가진 노동이나 기술을 제공하고 재화 획득을 목적으로 계속하는 활동을 가리킨다. 직업은 일상적 활동이자 경제적으로 보상되는 활동을 뜻한다. 노동경제학을 연구하는 사람에 따르면 직업은 다음과 같은 특성을 갖는다.
첫째, 직업은 생존유지를 위한 경제활동으로 재화 획득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대체로 일의 가치나 평가는 소득의 많고 적음이 기준이 된다.
둘째, 일은 인격적 인간형성의 한 조건이 된다. 인간은 직업에 종사하는 구성적인 기능을 가짐으로써 사회적 가치를 가지는 존재가 된다. 사람들의 사회활동은 직업을 통한 일의 과정에서 형성되는 인격적 존재로서 가능해지는 것이다.
셋째, 인간은 직업에 종사하여 일하는 과정에서 만족감이나 성취감 등 많은 희열을 맛보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며 행복해질 수 있다. 직업은 생활과 행복의 원천이다.
그렇다면 직업과 일(work)은 서로 다른 것인가? 때로 동의어로 쓰이고 있으나 조금은 상이하다고 보아야 한다. 일은 직업과 달리 생활에 관계된 경제행위 이상의 것까지 포함하고 있다. 일은 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경제적 기능 외에도 도덕적·정서적·사회적 의식과 관련된 여러 가지 기능을 갖고 있다. 일은 자아실현의 수단으로서 생활의 경제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 귀속감을 갖게 해주며,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동일시 또는 사회적 위신 같은 경제 외적인 충족을 주기도 한다.
많은 직업 가운데서도 우리는 의사나 변호사·회계사·교수 등을 전문직이라고 부른다. 전문직(profession)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대학원 수준의 높은 교육을 받고 국가나 협회로부터 자격이나 면허를 받아서 독점적으로 전문기술이나 지식을 사용하는 직업이 전문직이다.
첫째, 유일하고 독특한 종류의 사회적 봉사 기능을 가지며
둘째, 그 기능을 수행하는 데 있어 고도의 지적 기술을 필요로 하며
셋째, 상당히 장기적인 준비교육이 필요하며
넷째,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광범위한 자율권을 행사하며
다섯째, 자율의 범위 안에서 행사한 행동과 판단에 대해 종사자의 광범위한 책임을 묻고
여섯째, 자격이나 면허를 갖고 있으며
일곱째, 경제적 보수는 사회적 봉사보다 우선되지 않으며
여덟째, 그 자체의 직능을 수행하는 데 준수해야 할 엄격한 직업윤리를 가진다.
전문직과 직업윤리
전문직의 특성
행위 성향 하부문화 중시 하부문화 경시
동기 봉사 사익
자율성 높음 낮음
연대의식 높음 낮음
윤리의식 성숙 미숙
훈련 정도 전문화 비전문화
이로써 전문직은 높은 교육을 거쳐서 자격·면허를 갖고 독점적으로 기술을 행사하면서 봉사정신을 발휘하고 엄격한 윤리강령을 실천해가야 함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언론인이 전문직이냐 하는 문제에 대해 살펴보자.
반드시 대학원 수준의 높은 고등교육을 받아야 기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국가나 협회가 자격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인 전문직 정의에서는 빗나가 있지만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라고 할 만큼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헌법에 의해서 표현의 자유가 보장돼 있고, 좋은 기자와 PD가 되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을 받아야 되고, 게다가 높은 자율성을 갖고 공공에 봉사해야 하는 직업의 특수성을 감안할 때 언론인은 전문직이라고 해야 옳다.
언론은 일반 직업과 달리 공중에 대한 책임이 있으므로 언론은 ‘생래의 전문직’이라고 미국의 한 언론학자는 지적하였다. 언론이 전문직인 것은 전문직이 규정되는 역사적 규범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론매체가 사회생활에서 점점 더 중심이 되어감으로써 얻어진 지위와 명성에 의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
전문직과 직업윤리
전문직은 독점적 지위를 갖는다. 환자를 진찰하고 치료하는 일은 의사만이 할 수 있다. 의사면허가 없는 사람이 환자를 치료하면 의료법 위반이 된다. 의사는 사익보다는 공공에 봉사해야 한다. 의사가 제공하는 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은 일반환자가 쉽게 이해하거나 접근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한 독점적·전문적 기술을 이용해서 부당한 이익을 추구한다면 일반환자로서는 그것을 알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불필요한 수술을 한 연후에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원상회복은 이미 어려워진다. 시민단체나 법이 의사의 비윤리적 행위를 감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전문직의 경우 비윤리적 행위에 대해서는 전문직 종사자 스스로 자율적 규제를 제도화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대체로 전문직은 협회나 단체 같은 자율적 기구를 결성하고 윤리강령을 제정하여 이를 준수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이를 직업윤리라고 말한다. 공무원 사회에는 공직윤리가 있으며, 교사에게는 교직윤리가 있고, 언론인에게는 언론윤리가 있다. 이들은 스스로 정한 윤리강령을 실천하되, 이를 지키지 않았을 때 징계위원회 같은 기구를 운영, 구성원들의 비윤리적 행동을 자율적으로 규제하고 있다.
첫째, 전문직의 직업윤리는 단순히 직업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전문직의 사회의식과 문화의식을 포함하고 보다 넓은 사회윤리의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 전문직의 직업윤리는 자기가 속해 있는 집단 내지 조직의 이익과 소비자인 국민의 이익과 갈등을 일으킬 경우 높은 윤리의식에 의거하여 국민의 이익 편에 서야 한다.
셋째, 전문직 종사자들이 누리는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고려하여 윤리문제에 있어 자율적 규제가 바람직하다.
넷째, 전문직 종사자를 고용하고 있는 조직들의 지나친 영리추구 행위가 지양되어야 한다.
전문직은 사회적 영향력이 크고 독점적 기술을 이용하고 있으며 공공에 봉사해야 할 ‘지도층’이라는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윤리덕목에 주목해야 한다.
첫째, 직분의식이 요청된다. 인간의 삶은 타인과의 관계를 통한 목표의 추구라 할 수 있다.
둘째, 책임의식이 요청된다. 자유는 자유를 가능케 하는 규범이나 질서의 테두리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셋째, 장인정신이 필요하다. 언론인은 직업적 긍지와 열정을 생명으로 여겨야 한다.
넷째, 명예를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파렴치 행위나 금품수수 등 부도덕한 행위, 개인명예 훼손 등은 언론의 적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직업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식을 버려야 한다. 자기의 적성과 능력을 고려해서 선택한 직업은 모두 고귀하고 자신의 직무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은 언제나 아름답다.
여섯째, 전문직 종사자들에게는 특히 금욕정신이 요청된다. 서구사회에 보편화되어 있는 프로테스탄트적 금욕정신은 우리 사회에서 더욱 소망스럽다.
언론윤리는 왜 중요한가
윤리란 무엇인가? 법, 도덕과는 어떻게 다른가?
윤리란 사람들이 지켜야 할 행위규범을 말한다. 직업윤리란 그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있어 서로 약속되고 공인된 행동규준으로서 그 집단에 소속된 구성원들에게는 반드시 준수해야 할 당위를 갖는다. 사람의 행위를 구속하는 사회적 규범에는 법률이 있으나, 법은 강제성을 갖고 있는 데 반해서 윤리는 양심에 근거하고 있다. 법이 겉으로 나타난 행위를 규율하는 데 비해 윤리는 내면적 문제까지 다룬다.
흔히 언론윤리의 개념은 ① 조직으로서 언론윤리를 강조하는 차원 ② 언론인 개인으로서 윤리에 초점을 두는 경우로 나뉘는데 전자는 사회적 공기로서 언론이 공적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 지켜야 할 규범체계이고, 후자는 언론인이 그들의 행위가 옳고 그른 것, 선하고 악한 것, 또 책임 유무를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어떤 기준을 제시하는 행동지침을 가리킨다. 넓게 보면 언론윤리란 언론조직과 언론인을 다 포함하는 언론활동상 더 공정하고 더 신뢰받기 위해 지켜야 하는 가치기준이자 행동규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언론에 대한 신뢰가 크게 떨어지고 있다. 국민의 지지를 회복하기 위해서, 그리고 직무수행에 도움을 얻기 위해서 윤리의식 강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사실 ‘윤리적’ 언론은 보다 나은 저널리즘이다. 윤리적 저널리즘은 국민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언론인 자신을 포함한 특정집단의 이해관계를 초월해서 다양하고 심층적인 정보를 제공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해 준다고 필립 패터슨 등은 주장하였다.
우리는 윤리와 도덕을 유사한 것으로 혹은 혼동해서 쓰고 있는데, 엄격하게 말해서 같은 말이 아니다.
윤리는 원칙에 기초한 합리적 과정이라고 한다면 도덕은 종교와 신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서로 갈등을 일으킬 때 윤리는 출발한다. 곧 윤리는 우리가 어떤 생각이나 행동을 할 때 옳고 그름을 선택하는 철학적 기초로서 가치체계를 의미하고, 도덕은 이러한 가치체계에 따라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방식이나 태도를 뜻한다. 윤리는 선과 악을 구별하고 도덕적으로 정당화되는 것과 정당화되지 않는 것을 구별하는 것이다. 또한 윤리는 좀더 도덕적으로 정당한 것을 선택하는 능력을 의미한다.
언론윤리가 중요한 까닭을 다음과 같이 정리해볼 수 있다.
첫째, 언론이 세상을 굴러가게 만든다. 언론이 그리는 세계 속에 우리는 살고 있으며, 언론의 논평에 의해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게 된다.
둘째, 언론은 부정·부패·비리·부조리를 고발하고 감시한다. 도둑 지키는 개의 기능은 언론의 여러 기능 가운데 제일 중요하다. 스스로 정직하고 공정하고 깨끗하지 않고서는 제 몫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셋째,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언론은 점차 집중화되고 자본에 예속되어 가는 경향이 있다. 그러므로 특정인이나 특정계층에게 봉사하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
넷째, 언론보도는 많은 경우 양면적이다. 또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침해하거나 명예를 훼손할 위험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공익과 사익에 대한 적절한 교량이 항상 필요하다.
다섯째, 언론은 국민의 알권리를 담보로 하여 언론의 자유를 누리고 많은 법률이나 제도, 관행에 의해서 상당한 특권을 누리고 있다. 이러한 법률의 보호나 특혜는 개인이나 언론사를 위한 것이 아니라 ‘표현의 자유’를 위한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여섯째, 세상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언론이라고 할 때 언론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돈이다. 언론운영의 비용은 주로 광고에서 나온다. 언론의 공익성과 상업성은 충돌하기 쉽다.
일곱째, 언론은 속성상 현상유지적이다. 따라서 기득권층을 옹호하고 변화에 둔감한 경우가 많다.
여덟째, 언론은 지면과 시간의 제약이 큰데다 마감시간으로 인해 잘못 보도하거나 오보를 내기 쉽다.
현재 편협, 기협, 방송프로듀서협회 등은 각기 언론윤리강령을 갖고 있고, 개별 언론사 역시 ‘윤리적’ 저널리즘을 위한 좋은 장치를 갖고 있다. 문제는 실천이다. 그리고 윤리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끊임없이 다양한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
도덕성이 계발되지 않고는 지금 우리 언론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을 뿐더러 빛과 소금으로서 그 소임을 다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 ‘윤리적’ 저널리즘이 보다 좋은 저널리즘(Ethical journalism is better journalism.)임을 명심해야겠다.
직업 윤리의 두 가지 측면
㉠ 사회적 측면:어떤 전체 사회에서 공인된 행동 규범으로 보는 관점
㉡ 개인적 측면:직업관이나 노동 정신으로 보는 관점
하나의 일이나 직업에 임할 경우 직업에 따라 사물을 보는 방식이나 가치관이 다르다고 생각되지만
일반적으로 노동이나 직업에 대한 인간 자신의 기본적인 태도나 자세가 문제가 된다.
일찍이 베버(Max Weber, 1864-1920)는 직업과 노동에 대해서 "신이 바라는 것에 대하여 인간이 해야 할 자기목적,
즉 신의 은총·영광을 더하기 위해서 인간으로서 해야 할 사명 내지 의무인 것이다"라고 설명하여
특히 그리스도교도의 직업윤리를 분명히 했던 것이다. 이것 또한 일종의 직업윤리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현대에도 교사·사회복지직원·종교인 등은 흔히 '성직(聖職)'이라고 부르고 또 그렇게 생각되고 있지만
아주 엄한 도덕률을 요구하는 '가치관', '직업관'이 있는데도 있다.
또 자연과학계통에서 일하는 사람과 사회과학계통에서 일하는 사람과의 사이에는
각각 직업에 따라 당연히 상위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회에서 인간은 자기 실현을 할 수 있는 일이나 방법을 올바로 이해하고
그것을 획득하여 가는 것이 일생의 직무라는 사고방식이 나타나고 있으며,
또 그처럼 개별화되고 전문화된 일이나 직무가 상호 경합·협력하고 또한 조정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에 의하여 금후의 공업화된 사회의 발전이 이룩될 수 있다고 하는 사고방식이 존재한다.
직업인의 직업 윤리
1. 소명 의식과 천직 의식:직업을 하늘이 자신에게 부여한 일로서 성스럽게 받아들여 그 일에 열성을 가지고 성실히 임하려는 직업관이다.
2. 직분 의식과 봉사 정신:사람은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활동함으로써 조직 사회의 기능을 분담하여 직접 간접으로 직분을 수행하며 사회의 유지 및 발전에 참여한다. 또한, 사람들은 직업을 통해서 사회에 봉사한다.
3. 책임 의식:자기 직업에 애정을 가지고 자신이 맡은 일을 자율적, 자주적으로 행하며, 성실하게 책임을 다하려는 자세가 필요하다.
4. 전문가 정신:자신의 직무와 관련된 기술과 지식을 습득하여 자기 분야를 책임질 수 있는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5.인간애와 연대 의식 : 사람은 남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이 속해 있는 직업공동체를 건강하게 가꾸어야 함
* 연대 의식 :직업윤리는 일반적으로 직업적 양심, 연대 의식, 전문적인 직업 기술 연마, 인간애에 투철할 것을 요구함. 연대 의식은 독립적이고 고립된 자아관을 지양하고,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사회적 책무를 강조하는 공동체주의적 개념
* 협동 봉사 정신 : 직장 내에서 서로 협동하고 돕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또한 직무 수행 과정에서 국가나 사회 및 개인을 위해 헌신하는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두번째 시간 입니다. 신재훈 목사님께서 본격적으로 막스베버의 책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공부를 이끌어 주셨어요.
막스 베버(Max Weber, 1864년 4월 21일 ~ 1920년 6월 14일)는 독일 사람으로 사회학 성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며 그의 논문 프로테스탄트와 자본주의를 연결한 프로테스탄스 윤리로 유명합니다.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1904년에서 1905년에 걸쳐 잡지 《사회과학과 사회정책학》에 연재되었다가 1920년에 책으로 간행되었습니다.
베버가 이 책을 쓸 당시는 자본주의가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시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바라보며, 자본주의가 어떻게 성립하였고 어떻게 하여 지금의 모습이 되게 되었는지 질문을 합니다. 베버가 본 자본주의는 합리성을 추구하는 근대정신의 산물이라고 보았습니다.
베버는 맑스의 자본에 대한 문제의식은 동의하면서도, 맑스가 생산관계라는 물질적 토대가 자본주의 정신과 문화를 만들었다고 설명하는 것과 달리, 자본주의 생성에 있어 영향을 준 중요한 정신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개신교 윤리 가운데 베버가 이름한 '세속적 금욕주의'라는 것인데요.
베버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전적으로 종교신앙의 특정한 형태 속에서 찾으려 한 것이 아니라, 근대자본주의가 그 주된 담당자인 산업적 중산자층에 의해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그들의 금욕적 직업윤리의 형성에 대한 이른바 주관적 자극제로서 프로테스탄티즘의 교리가 공헌한 비율을 입증하려고 했습니다.
본인의 가설을 입증하므로 자본주의 발달 초기에 영향을 주었던 정신의 회복을 통해서 물질만능화된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나름의 처방을 내리려 했는데요. 자본주의를 인류 발전의 한 과정으로 보고 그 모순의 정점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로 바뀔 것을 전망하며 문제를 풀어가려했던 맑스와는 이 지점에서 차이가 있구나 싶었어요.
강의 때, 베버의 결론이 담긴 문장을 짚어주셨는데요. 방법의 차이는 있지만, 자본주의 시대에 대한 문제의식은 베버나 맑스나 우열을 가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공부를 통해 근원에서 자본주의 사회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더 커지는 시간이었습니다.
아래 내용은 강의 때 짚어준 글(제일 마지막 문장)이 등장하는 부분인데요. 함께 읽어보면 좋을 것 같아 가져와 봅니다.
과거 청교도들은 직업인이 되기를 바랐다. 반면 지금의 우리들은 직업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금욕주의는 수도원의 닫힌 벽을 걸어 나와 일상생활의 직업으로 옮겨 왔고 현세의 도덕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금욕주의는 기계제 생산의 기술적, 경제적 전제 조건으로 자리를 잡으면서 근대적 경제 질서라는 강력한 우주를 형성하는 데 그 역할을 수행했다.
오늘날 이 근대적 경제 질서는 엄청난 힘을 갖고 이 안에서 태어나는 모든 개인의 생활양식을 강제로 규제하고 있다. 이 질서는 영리 추구 활동에 직접 종사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포함하며 마지막 석탄이 다 타서 없어질 때까지 그 규제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벡스터는 ‘재산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 던질 수 있는 얇은 망토처럼 신도의 어깨 위에 놓여 있어야만 한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러나 운명은 이 망토를 강철 같은 울타리로 만들었다. 금욕주의가 세상을 새롭게 형성하고 세속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자 이 세상의 외적인 재화들과 인간의 재산에 대한 욕망은 역사상 그 어느 때도 볼 수 없었을 정도로 인간에 대한 지배력을 키워 나갔고 급기야 인간은 결코 이 지배로부터 벗어날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종교적인 금욕주의 정신은 사라져 버렸다. 영원히 사라진 것인지 아닌지는 누구도 모르지만 말이다. 이제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라는 기초 위에 서 있으므로 더 이상 정신의 지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의 유쾌한 후계자인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완전히 빛이 바랜 듯하고, ‘직업 의무’ 사상은 지나간 종교 신앙의 유령이 되어 우리 삶의 주변을 떠돌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직업 수행의 의미를 찾거나 직업 수행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 오늘날 직업 수행은 더 이상 최고의 정신적 문화 가치와 직접적인 연관을 가질 수 없게 되었다. 이는 직업 수행의 주관적 의미가 경제적인 이유 이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종교적, 윤리적 의미를 잃어버린 영리 추구는 순전히 세속적인 열정과 결합하는 경향이 있으며, 오늘날 이런 경향이 가장 발달해 있다고 하는 미국에서는 종종 스포츠처럼 열정적인 경쟁의 성격을 띠는 경우마저 있다.
미래에는 그 누가 이 울타리 안에 살게 될 것인지, 이 거대한 발전의 마지막에는 완전히 새로운 예언자들이 나타날지 아니면 과거의 사상과 이상이 강력히 부활할지 그 해답은 아무도 모른다. 이 둘 중에 어느 것도 아니라면 어쩌면 병적인 자기 오만으로 장식된 기계에 의한 화석화가 일어날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화 발전에서의 ‘최후의 인간’에 대해서는 괴테의 다음과 같은 말이 진실이 될 것이다.
“영혼이 없는 전문가, 가슴이 없는 향락주의자, 이 공허한 인간들은 일찍이 인류가 도달하지 못했던 단계에 도달했다고 자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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