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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새롭게 하십시오(행18:18-23)
스위스 제네바에 쁠렝빨레라는 광장 끝에 120년 된 교회가 있는데 참으로 잘 지어진 문화재급 예배당입니다. 그 예배당이 2000년에 술집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예배당에 술집을 차린 사람은 그 교회 담임 목사였습니다. 제네바의 한 신문사 기자가 그 목사를 찾아가 왜 예배당에 술집을 차렸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목사는 오늘날 제네바의 모든 젊은이들이 다 술집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들을 불러내기 위해서 예배당에 술집을 차렸다 고 말했습니다. 술집에 빠진 젊은이들을 구원하려고 그 교회의 목사와 교인들 그리고 예배당까지 술집에 빠져버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이런 식으로 행하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게 삼키어지라고 보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을 구원하라고 보내셨습니다. 세상 속에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보내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구원해야 할 대상입니다. 주님은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도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가정과 직장에서 파송받은 자로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세상적인 의무와 책임에도 성실해야 합니다. 삶을 통해 복음을 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상에 보냄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린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단순한 도구가 아니고 인격을 가진 하나님의 일군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보다 많은 사람이 구원되기를 원하십니다. 그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무엇이 필요할까요?
1. 새로운 결단이 필요합니다.
18절에 “바울은 더 여러 날 유하다가 형제들을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 서원이 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고 하였습니다. 겐그레아는 고린도 지역의 외항입니다.
안디옥의 수리아를 향해서 바울은 일행과 함께 배를 타기 위해서 고겐그레아로 갔습니다. 그리고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머리를 깎았습니다. 얼핏 보면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무슨 서약을 하면서 삭발을 한 것처럼 여겨집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일찍이 서원이 있었다는 것은 바울이 이전에 고린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주님께 드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머리를 깎지 않고 있다가 겐그레아에 와서 그 서원기간이 끝났으므로 머리를 깎았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나지르’는 구별하다는 의미로서 나실인의 서약은 남자든 여자든 일정 기간 동안 자신을 정결하게 구별해서 주님께 자신을 드리는 서약을 뜻합니다. 민수기 6장에는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이 준수해야 될 사항들이 열거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 준수 사항은 독주는 말할 것도 없고 포도주를 마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반드시 음주와 관련된 술의 의미만 갖고 있지 않습니다. 거의 모든 물이 석회수인 팔레스타인에서 포도주는 물의 대용품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그들의 주식인 빵으로 식사하면서 포도주를 함께 마시는 것은 식탁에 반드시 있어야 할 물의 개념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실인 서약을 한 사람은 희뿌연 석회수를 마실지언정 포도주를 자기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해서 주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함이었습니다.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이 지켜야할 두 번째 준수 사항은 자기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머리는 심장과 함께 생명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서약기간 동안에 머리에 칼을 대지 않는 것은 자신의 생명을 주님께 온전히 드린다는 의미였습니다. 따라서 나실인의 서약을 한 사람은 그 서약 기간 동안에 장발이 될 수밖에 없었고 서약 기간이 끝난 뒤에라야 장발로 자란 머리를 단정하게 자를 수 있었습니다.
바울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는 것은 고린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했던 바울이 서약 기간이 끝나고 이제 고린도를 떠나면서 장발로 기른 머리를비로소 단정하게 배를 타기 직전에 잘랐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나실인의 서약을 한 것은 아무 연고도 없이 찾아간 고린도에 주님께서 자신을 위하여 아굴라 부부를 미리 포진시켜두고 계심을 확인하고서 먼저 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 그 주님께 자기 자신을 더욱 구별하여 드리기 위함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를 짓밟던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에게 사로잡히는 순간부터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온전히 바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수리아의 안디옥에서부터 두 차례에 걸친 전도 여행을 통해 유럽 대륙의 고린도에 이르기까지 숱한 박해와 모함과 중상모략과 심지어는 죽음의 돌팔매질 속에서도 주님의 증인으로 살기 위해 자기를 온전히 주님 앞에 내어놓았습니다.
그런 바울이라면 새삼스럽게 나실인의 서약 같은 것은 불필요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나실인으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머리에 칼을 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않았습니다. 1년 6개월 동안 하루 세 끼 주식인 빵으로 식사할 때마다 그 빵을 물과 먹었던 것입니다. 2000년 전에 빵을 포도주와 함께 먹는 것은 팔레스타인과 서방세계의 식문화였습니다.
그 땅의 물이 석회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무려 1년 6개월 동안 빵을 물로만 먹었습니다. 바울이 1년 6개월 동안 먹었던 물은 보기에도 희뿌연 석회수였습니다. 그 석회수가 건강에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을 구원해주시고 함께 해주시는 주님께 자신을 나실인으로 드리기 위해서 고린도에서 1년 6개월 동안 매일 석회수만 마셨습니다. 바울이 나실인의 서약을 주님께 드린 것은 주님을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 바울 자기 자신을 위함이었습니다. 일정 기간 동안 자기 자신의 삶을 구별해서 자신을 주님께 나실인으로 드리는 것은 자기 믿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고 자기의 영성의 깊이를 심화시키는 지름길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동역자이자 바울의 영적 아들이었던 디모데도 바울에게 배운 대로 살았습니다. 바울은 말년에 에베소 교회의 책임자였던 디모데에게 써 보낸 편지인 딤전5:23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위장과 자주 나는 병을 위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고 하였습니다. 디모데가 바울에게 배운 대로 자기 삶을 구별해서 주님께 나실인으로 드리기 위해서 석회수만 먹다가 위장을 버린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그와 같은 삶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그 구별된 삶을 존중하면서 단지 디모데의 속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포도주를 조금 쓰라고 권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처럼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서 포도주를 먹으라는 것이 아니라 속병을 다스리는 약으로 조금씩 쓰라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십자가 죽음의 고난을 자취하신 주님께 자신의 삶을 구별하여 드리는 나실인의 서약으로써 우리 믿음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려야 합니다. 남자들은 석회수를 마실지언정 그리스도인으로서 금해야 할 것들과 끊어야 할 것을 미련 없이 과감하게 삶에서 도려내고 그리스도인으로 행하여야 할 것은 반드시 행하는 21세기의 바울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가정과 이 사회와 교회는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는 만큼만 새로워집니다. 우리의 믿음이 진보한다는 것은 우리를 위한 십자가 제물 되시는 주님께 우리 자신을 구별하여 나실인으로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 드릴수록 주님의 부활의 생명이 우리를 통로로 삼아 더 크게 역사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맥스 루케이도 쓴 <믿음연습>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 16장의 제목이 <회개의 타이밍을 놓치지 말라>입니다. 회개에도 타이밍이 있다는 것입니다. 인생의 때를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티핑 포인트가 있듯이 우리 삶에 주시는 하나님의 때를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토저는 19세기 미국의 영적부흥기를 주도했던 분입니다. 이 분이 쓰신 <임재체험>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아요. 나는 새로워지고 싶어요. 나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요. 그런데 아는가? 우리가 이렇게 사는 이유는 사실 이렇게 살기를 원하는 자기 자신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바울도 머리를 깎았던 것입니다. 사실 승리의 삶은 완벽한 삶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진정 승리의 삶은 하나하나 매듭이 있는 삶입니다. 머리를 깎고 나올 수 있을 때 나와야 합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면 되는 것입니다. 매듭을 짓는 것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을 위한 출발입니다.
사명을 이루려면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착해도 결단력이 없으면 변화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자녀를 키울 때 부모들이 우유부단한 모습을 하면 자녀들의 떼쓰는 버릇만 커집니다. 우유부단하면 큰일을 하지 못하고 많은 사람을 갈등하게 만듭니다. 해야 할 일이라면 “죽으면 죽으리라!”고 생각하고 과감히 결단하고 한번 결정한 일이나 맡은 일은 끝까지 수행하려고 해야 사명을 이룰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의 뜻을 살펴야 합니다.
19,20절에 “에베소에 와서 저희를 거기 머물러 두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여러 사람이 더 오래 있기를 청하되 허락지 아니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2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에베소에 잠깐 들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인데도 쉬지 않고 그곳에서도 전도하려고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자 여러 사람이 복음에 마음 문을 열고 더 오래 있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에베소 사역은 전망이 좋았고 사람들도 호의를 보이며 바울의 체류를 간청하였습니다.
21절에 “작별하여 가로되 만일 하나님의 뜻이면 너희에게 돌아오리라 하고 배를 타고 에베소를 떠나” 라고 하였습니다. 바울도 에베소에 더 머물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이 있다면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동안의 사도 바울이 행한 사역을 생각해보면 선뜻 이해가 가지 않는 대목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더 듣겠다는데 왜 굳이 에베소를 떠나야 했을까요? 복음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증거 해서 성과를 내고 효과를 얻어야만 할 텐데 왜 굳이 떠납니까?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 약속하고 떠난 기한이 다 되었기 때문입니다. 2차 복음전도 여행을 하려고 했던 모든 지경을 다 돌았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내 마음에 내 뜻에 좋게 보이고 형통하게 보이고 당연하게 보이더라도 나의 모든 것을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 자아를 내려놓으라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때와 하나님의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중요한 부분입니다.
내가 볼 때 형통한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보여도 한 번 더 하나님께 여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형통을 형통으로 이어가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형통이 참 형통으로 빛을 발하게 하는 참된 길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통해 주님의 일을 하실 수 있도록 나를 온전히 주님께 드리는 바른 순종의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다 보면 인간적인 요구와 요청들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마음이 자꾸 흔들리게 됩니다. 최초에 계획했던 것들을 그르치기 쉽습니다. 그러나 오로지 하나님의 뜻대로 움직여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예정하신 대로 따르고 움직이는 것이 옳습니다. 사람을 먼저 따라 다니다보면 본질을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사람의 생각은 얼마나 자주 바뀌는지 모릅니다. 그 때 그 때 다릅니다. 자기 입장과 형편 따라 다릅니다. 사람의 기준은 객관적인 기준이 아니고 언제나 주관적입니다.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따라 다니다 보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반대를 해도 하나님의 뜻이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동의를 따르거나 또는 반대를 두려워하는 것 모두 같습니다. 너무 사람의 뜻대로 하려해서는 안 됩니다.
갈1:10-12에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이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라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말하는 자들은 또는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자들은 결코 사람들의 이야기에 연연하지 않습니다. 또 두려워하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나 뜻은 하나님의 뜻 앞에서는 언제든지 수그러집니다. 사람들의 계획은 언제나 하나님의 뜻 앞에서 무너져 내렸습니다. 바벨탑이 그랬습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반대했던 바로가 그랬습니다. 요나 선지자가 그랬습니다.
약4:15-17에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거늘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고 하였습니다.
주의 뜻대로 사는 것이 선입니다. 주의 뜻을 거스르는 것이 죄요 악입니다. 바울의 삶은 언제든지 주의 뜻을 구하고 그 뜻대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주의 뜻대로 살고자 하니까 사람들의 반대와 싫어하는 점도 많았지만 결국 그는 신약시대 최고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울이 가진 신앙생활의 기준을 우리도 갖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 약속한 마음부터 지켜야 합니다. 비록 지금 물질이 없고 건강이 없고 가진 것이 없을지라도 먼저 마음부터 지키시면 됩니다. 마음을 지키면 방법은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또 언제든지 주의 뜻을 우선해서 살아가면 됩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고 할지라도 주의 뜻을 먼저 구하면 해결됩니다.
바울은 이 기준에 충실했습니다. 우리도 충실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기도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마음도 지키고 주의 뜻대로 살아가려면 하나님께서 다 도우셔야만 합니다. 우리 마음을 붙들도록 도와달라고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수도 없이 많은 인생의 결정과 선택을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그런데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는 정 반대의 일이 벌어질 수도 있습니다. 갈등이 생기고 충돌이 생기고 파열음이 생기고 싸움이 생기는 것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의 뜻과 관계없는 인간의 생각과 인간의 뜻들이 앞장서게 될 때 이런 좋지 않은 일들이 벌어집니다.
우리가 행하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고 하나님의 뜻과 계획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는 충돌이 없습니다. 아름답고 선하고 좋은 결과만이 일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아서 행동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들을 찾아서 분명히 인식해서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하고 전혀 관계없는 삶을 살아가게 될 때 우리의 삶은 아름다워질 수가 없습니다.
미국 캘리포니아에 대재벌이면서도 인품이 훌륭해 존경받는 한 상원의원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사랑하는 외아들을 사고로 잃었습니다. 그는 삶의 의미와 희망을 잃고 자신의 삶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탄식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에 아들이 나타났습니다. “아빠 왜 낙심하세요? 미국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있나요? 저 대신에 그들을 위해 일해주시고 사랑해주세요. 그러면 그들이 아빠의 아들들이 될 거예요.”
꿈에서 깬 그는 곧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대학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많은 장학금을 주고 인재들을 모아서 그 대학을 세계 최고의 명문으로 키웠습니다. 그가 바로 스탠포드 의원입니다. 그는 세상을 떠날 때도 자신의 전 재산을 장학금으로 쓰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결국 그는 시련을 통해 더욱 큰일을 했습니다. 그처럼 어떤 시련이 있어도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시련을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시켜야 합니다.
3. 올바른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22절에 “가이사랴에서 상륙하여 올라가 교회의 안부를 물은 후에 안디옥으로 내려가서” 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해서 그의 2차 선교 여행의 결과를 보고하고 기도 부탁을 한 후에 그를 선교사로 파송한 예루살렘 북쪽의 약 480킬로미터 지점에 있던 안디옥 교회로 가서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다시 선교사역을 시작하였습니다.
23절에 “얼마 있다가 떠나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차례로 다니며 모든 제자를 굳게 하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 보고를 하고 얼마 후에 다시 제 3차 선교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이제 좀 쉬라고 권고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있다가 다시 제 3차 선교여행을 떠납니다. 그처럼 바울의 마음에는 도저히 억누를 수 없는 복음전파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에 무지할 때 그릇된 열심을 내게 됩니다. 바울을 대적하는 유대인들을 보게 됩니다. 그들이 복음 전도자에 대하여 이렇게 훼방하고 대적하는 이유는 단순히 시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들 나름대로 신앙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만든 유대교 규례에 열심이었습니다. 항상 유대교 규례 속에 사는 것이 유대교인들의 생활이었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율법은 선한 일이든 나쁜 일이든 일이라는 개념에 대해서는 일절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 하고 실제로 그 어떤 것도 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았습니다. 유대교의 규례를 무시하고 그리스도를 믿고 사랑으로 행하면 온 율법을 이루는 일이라고 전하는 바울의 전도의 내용을 이단 사설로 규정하고 바울을 없애려고 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의 의로움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신봉하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고 구제를 많이 하면 하나님이 의로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하여 영생 천국을 주실 것으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으며 이 세상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하게 지켜서 하나님께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없다고 전했습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거저 얻는다는 기독교의 구원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이에 유대교인들은 바울이 하나님과 그 율법을 모독하고 이단적인 구원론을 전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들 딴에는 바울 사도를 없애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고 바울은 핍박한 것입니다.
출23:1에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유대교인들은 바울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구원 진리를 하나님을 모독하고 유대교를 믿는 자를 미혹하는 허망한 풍설로 오인하고 바울을 없애는 일에 열심이었던 것입니다.
바울도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유대교인들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교회를 핍박하고 잔해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지금은 입장이 뒤바뀌어 자신이 쫓기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면 하나님의 뜻과 상반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됩니다.
열심이 있다는 것은 긍정적인 일입니다. 그러나 그릇된 일에 열심을 내거나 진리나 선과 상반되는 일에 열심을 낼 때에는 문제가 심각해집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열심에 앞서 바른 지식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상반된 그릇된 열심은 과거 유대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그들만이 저지르는 실수가 아닙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에 무지하면 동일한 오류에 빠지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거나 상반된 일에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어 있습니다. 말씀을 바로 알아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에만 열심을 낼 수 있습니다.
호4:6에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하였습니다.
롬10:2,3에 “내가 증거 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
고전2:8에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첫댓글 은혜받습니다. 새로워져야 한다는 도전을 다시 받습니다.
귀한 설교 정독했습니다.
지난 성지순례 때, 겐그레아의 해변의 모습을 상기하고, 석회수가 치아에 좋지 않아 생수로 양치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나실인의 정신으로 복음을 위해 얼마나 굳건한 결심을 했는지 감명 깊게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