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박지원선생사적비>
박지원은 이곳에 있는 5년 동안 백성들에게 밀착된 선정을 베풀었다. 본인의 의지에 따라 불망비 없이 떠난 것을 1987년에야 관아가 있던 이곳에 사적비를 세웠다. 박지원의 흔적이라는 것만으로도 가슴 떨리는 일인데, 유일한 흔적이란다. <열녀함양박씨전>도 아울러 소환된다. 그 함양의 박지원 흔적이다.
1. 사적지 대강
명칭 ; 연암박지원선생사적비
위치 : 안의초등학교 교정
경남 함양군 안의면 안의초등길 8
전화 : 055-964-2491
방문일 : 2022.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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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지원(1737~1805)
1786년 처음 벼슬에 올라 선공감감역(繕工監監役)에 임명되었다.
1789년 평시서주부(平市署主簿), 1790년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제릉령(齊陵令), 1791년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안의현감(安義縣監), 1796년 제용감주부(濟用監主簿)·의금부도사·의릉령(懿陵令), 1797년에는 면천군수(沔川郡守)를 지냈다. 1799년에는 1년 전에 정조가 내린 권농정구농서(勸農政求農書)의 하교(下敎)에 응해 〈과농소초 課農小抄〉를 바쳤다. 이 책은 농업생산력을 발전시키는 농업생산관계를 조정하는 문제를 깊이있게 다룬 것으로, 그의 사상의 원숙한 경지를 잘 나타내고 있다.
1800년 양양부사가 되었고, 1801년 봄에 사직했다. 이후 건강이 악화되어 1805년 10월 20일 69세를 일기로 죽었다. 그의 묘는 지금 북한 땅인 장단(長湍) 송서면(松西面) 대세현(大世峴)에 있다. (다음백과)
2) 사적비문
여기 안의와 서부경남 일원에 길이 역사적 기념물이 될 연암 박지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운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박지원 선생은 조선 후기희 탁월한 시학파 학자이며 우리 역사상 최대의 문학가의 한 분이시다. 열하일기를 비롯하여 선생이 남긴 수많은 글들은 편편이 경세제민과 이용후생의 뜻을 담고 있어서 민족사의 창조적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매우 컸었다. 이러한 선생의 업적을 특히 우리 고장에서 기념하게 되는 까닭은 선생이 우리고장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기 뚜문이다.
1792년에서 1796년까지 5년 동안 선생은 안의 현감으로 재직하면서 행정가로서 훌륭한 업적을 남겨놓았을 뿐 아니라 평생 가슴속에 품고 있던 자신의 실학을 유서 깊은 이 고을에서 실천에 옮겨볼 수 있었으며 작품활동에 있어서도 대표적인 저작의 대부분을 이때에 이루어놓았던 것이다 .이제 선생이 기 고장에 남긴 뚜렷한 자취를 대강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선생이 저작활동을 통해 이 고장을 빛낸 점이다. 선생이 이곳에 있을 때 지은 저작으로 선생의 문집인 연암집에 수록되어 전하는 것만도 40여편이 된다. 그 가운데는 국ㄱ민생에 관련된 중요한 글이 다수포함되어 있고 이곳에서의 치정치민의 과정에서 쓰여진 것 그리고 안의를 비롯한 함양 거창 합천 등 우리 고장의 아름다운 산수와 문물에 구체적으로 연관된 내용 등이 그 대부분이다. 또한 선생은 이곳에서 자신의 문집을 정리하면서 편제에 인상각선본, 공작관문고와 같이 이곳 관아 건물을 명칭을 붙여 자신의 안의 시절을 기념하였다.
이러한 저작 활동을 통하여 당시의 일류문인들을 이곳을 찾아오게 하였고 그 결과 우리 고장이 당시 우리나라 문학의 중심지로 여겨지게까지 하였다.
(이하 중략 내용
-과학기술을 이 고장에 접목시킨 점(북경에서 체득한 지식으로 --- 베틀 양수기 물레방아 등 새로운 창안에 의한 생산 제작 사용하도록 함)
-현감으로서의 행정적 치적
-선생 생애
- 학문적 공적, 문학적 성취)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선생의 생장지인 서울에는 격심한 변천으로 아무런 흔적도 찾을 길이 없으며 선생의 묘소로 휴전선 북쪽에 있어 가 볼 수가 없으니 선생의 거룩한 자취를 더듬을 수 있는 곳은 오직 우리 안의뿐이다. 이에 선생이 재임시에 손수 지은 관아의 부속건물들이 있었던 이곳 안의국민학교 교정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우는 것이다.
(하략)
1986년 월 일
여주 이우성 삼가 지음
진단학회, 국어국문학회 등등 세운 기관 이름
*참고 : 사적비문은 반남박씨 사이트에 전문 게재되어 있다.
안의초등학교 정문
*1786년 벼슬을 처음 시작한 박지원은 1792(1791?)년 안의현감을 제수받아 이곳에 내려와 5년을 재직하고 상경하였다.
그런데 사적비문이 너무 길지 않은가. 국한문혼용체로 이렇게 길게 잔 글씨로 써 놓으면 누가 읽는다는 말인가. 더구나 초등학교 교정 아닌가. 초등학생도 이해할 수 있는 보조 안내판을 세워놓든지 해야 될 거 같다.
교정의 주인은 초등학생인데, 초등학생은 완전히 소외된 그들만의 사적비는, 불망비 혹은 선정비 건립을 반대하였던 연암의 의사와도 합치되지 않는 거 같다. 더구나 관광지 아닌 학교여서 외부인은 들어와서 보기에 부담스러운 곳이다. 학업에 방해되지 않도록 빨리 보고 나가야 하는데, 이런 장황한 비문이라니. 더구나 햇빛에 반사되어 홈만 파이고 색상이 없는 글씨는 읽기에 여간 힘들지 않다.
열심히 봐내린 비문은 외형적 치적 위주고 그의 주기론적 사고가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함양 방문의 1순위 방문목적으로 삼은 사적비가 좀 실망스럽지만, 그의 흔적을 기리려고 하는 의지를 확인한 것을 만족하기로 한다.
사적비 옆에는 이러저러한 민속 기념물들을 배치해놓았다. 덜렁 사적비만 있는 것보다 덜 외로울 거 같기도 하다.
연암관. 안의초등학교 어린이들은 복받은 거 같다. 당시 인문학의 최고봉인 연암의 숨결을 느끼면서 뛰어놀 수 있으니 말이다. 훗날 연암을 뛰어넘는 대가가 이 아이들 속에서 나오기 바란다.
학교앞 거리
3. 돌아본 후
1) <열녀함양박씨전> 단상
<열녀함양박씨전>을 대학 때 보면서 함양은 고소설의 운남처럼 가상의 공간인 줄 알았다. 함양이 현실적인 공간이라고 해도, 열녀의 문제를 설명하려는 연암의 소설적 공간 장치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사실 그런 일은 전국 어디서든지 다 벌어지는 일이었을 테니 어디라 해도 무슨 상관이었겠는가.
연암이 여기 와서 집필한 40여편의 작품 중 하나였다니, 함양의 중인집 처자였다는 그 열녀의 사회적으로 강요된 삶이 현실로 다가온다. 병든 총각에게 시집가서 남편이 예측대로 죽자 3년 대상 뒤에 목을 맨 통인 박상효의 달 박씨, 그녀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강요된 죽음임을 이 작품에서는 항변하고 있다. 이 작품은 박씨의 열을 드러내 찬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회제도와 인식에 대한 비판을 하기 위한 작품이다.
박지원은 '이가 기 자체의 원리라고 하는 일원론적 주기론을 작품을 통해 실현했다. 기가 아무리 변해도 이는 변하지 않는다고 하고, 변하는 기를 보여주는 문학은 천박하며 변하지 않는 이를 추구하는 문학이라야 숭상할 가치가 있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전통적인 문학관을 반박'하는 논리였다.(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321면)
함양 박씨가 추구할 수밖에 없었던 '변하지 않는 이'를 사회적인 압제라고 비판하려는 것이 창작의도라 할 수 있다. 이는 기 자체의 원리, 남녀노소 누구나 갖는 행복추구권을 위한 일상의 동력인 기 자체에 내재된 원리 아니겠는가. 여성의 성적 욕망까지도 긍정하는 논리가 된다. 동일 소설에 등장하는 평생 동전을 굴리며 욕망을 통제하고 수절하며 자식을 키우는 또 한 여성 과부의 얘기는 기 긍정의 구체화라 할 수 있다.
사회제도에 대한 비판은 실학이나 표피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그의 철학에 기반한 것임을 생각할 수 있다. 이렇게 그는 남녀에게 동일하게 적용되는 권리와 욕망의 긍정을 통해 대등의 관점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호질>을 통해 표현된 인물성 동이론 중 <인기이론>의 관점, 사람이든 동물이든 기로 이루어진 것이 같다는 기일원론의 관점, 삶을 누리는 것이 선이고, 삶을 침해하는 것이 악이라는 관점과 (한국문학통사 3권) 같은 것이다.
참다운 문학의 동기가 득의가 아니고 불만이라고 한 그의 문학관(위의 책 330면)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작은 마을 안의에 와서도 박씨의 불의한 상황을 보고 일어난 불만이 그로 하여금 문학을 하게 했으니, 안의는 세상과 절연된 작은 시골마을이 아니라 세상을 집약해서 보여주며 세상으로 열린 창이었음이다.
2) 박종채의 기록 <나의 아버지 박지원>
안의현감 시절의 일을, 같이 살았던 그 둘째 아들이 기록한 글이 이렇게 출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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