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감리교회의 조선 선교와 윌슨 감독
1885년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선교사가 내한하여 뿌려진 복음은 점점 자라나고 있었다. 이에 12년 뒤 1897년에 미국 남감리교회도 선교사를 조선에 파송함으로써 조선에는 미국 남북 감리교회 선교사들이 복음의 불모지 조선의 텃밭을 일구게 되었다. 남 감리회의 조선 선교에 산파 역할을 한 인물이 있었다. 그가 바로 좌옹(佐翁) 윤치호(尹致昊)다. 윤치호는 충남 아산군 둔포면 신항리에서 윤웅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의 배려로 1881년 봄 신사유람단의 조사(朝士)인 어윤중(魚允中)의 수행원이 되어 일본에 건너가 개화 사상가이자 기독교인인 나카무라(中村正直)가 설립한 동인사(同人社)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배웠다. 후에 일본 기독교 지도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의 지도를 받았다. 1884 12월 갑신정변의 실패로 개화당 내각 형조판서로 임명된 부친이 유배당하자 윤치호는 1885년 1월에 푸트 공사의 소개장을 가지고 일본을 경유하여 상투를 자르고 양복을 입고 상해로 망명 유학길을 올랐다. 이때 남 감리교회 선교부가 운영하는 중서서원 중등과에 입학하여 2년 동안 좌절과 갈등의 나날을 보내다가 기독교에 입문하기로 결심했다. 중서서원 교수인 본넬(W.B. Bonnel) 목사에게 세례를 받고 한국인 최초로 남 감리교회 교인이 되었다. 그 후 미국 유학을 떠나고 1895년 2월에 귀국했다. 그는 유학 시절 남 감리교 대학들과 교회를 순방하며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의 노력으로 1896년 5월 중국에 있던 헨드릭스 감독과 리드 목사가 조선에 들어와 선교 가능성을 탐색했다. 이에 긍정적인 선교 보고를 받은 남 감리교는 마침내 1896년 5월에 리드(Clarence Frederick Reid, 李德) 목사를 조선의 선교사로 파송하여 남 감리교 조선 선교의 새로운 장이 열리게 되었다.
이때 남 감리교회가 조선에서 본격적인 선교 활동할 수 있도록 리드 목사를 파송한 사람이 남 감리회 윌슨(Alpheus Waters Wilson) 감독이었다. 그는 1834년 2월 5일 메릴랜드 주의 볼티모어에서 아버지 노바(Norva Wilson) 목사와 어머니 코넬리아(Comelia Wilson)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1802~1876)는 법학을 공부하면서 1819년에 감리교로 개종했고 1821년 3월에는 설교자 자격을 얻었다. 그는 대부분 여생을 볼티모어, 윈체스터, 알렉산드리아 구역에서 보냈다. 그는 26세에 지방회 의장(감리사)으로 임명되었고 1861년 미 감리교 총회에서 볼티모어 연회를 분리하는 결의안을 작성했다. 또한 윌슨의 아버지는 총회 위원이었는데 1832~1840년 감리회 총회 대표, 1860년에 남 감리회 총회 대표로 활동했다. 윌슨(Alpheus Wilson)은 조지 워싱턴 대학교에서 공부하고 18세에 졸업하였다. 그는 의학과 법학을 공부했다. 그는 랜덜프-메이컨 대학과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센트럴 감리교 대학과 위싱턴-리 대학교에서는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윌슨은 1857년 3월 4일에 수산(Susan Bond Lipscomb) 양과 결혼하여 슬하에 3남 3녀를 두었다. 1853년 미감리교회 볼티모어 연회에서 서리로 허입하고 1855년 남 감리교회에서 집사목사(준회원), 1857년 장로목사(정회원)가 되었다.
1878년에는 남 감리교회 선교부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1882년에는 종신직 감독에 선출되었다. 윌슨 감독은 1886년, 1888년, 1890년에 3차례에 걸쳐 전 세계 감리교회를 순회하였다. 1898~1900년과 1907년에는 일본, 한국, 중국을 방문하였다. 일본 선교회를 조직하는 일에도 도움을 주었으며 한국에는 1897년과 1900년 두 차례 방문하여 제2회, 제4회 조선선교회를 주재하였다. 특히 1900년 제4회 선교회에서 윌슨 감독은 하디 선교사를 원산으로 파송하였는데 이것이 1903년 원산 부흥운동의 시작이었고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으로 점화되어 한국교회의 대부흥운동을 일으키는 첫 출발점이 되었다. 또한 윌슨 감독은 1881년, 1901년 런던에서 열린 에큐메니칼 회의를 시작으로 1891년 워싱턴 회의, 1911년 토론토에서 열린 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892~1903년에는 브라질을 방문하여 선교 가능성을 점검하였다. 1908년 그의 아내가 별세한 후에도 윌슨 감독은 많은 종교적인 사설과 논문들을 저술했다. 그의 중요한 저서로는 《선교(Mission)》와 《그리스도의 증인(Witness to Christ)》이 있으며 후자는 밴더빌트 대학교(Vanderbilt University)에서 강의한 《콜 강의(Cole Lectures)》 모음집이다. 윌슨 감독은 32년간 감독으로 재임한 후 1914년 은퇴하였고 1916년 11월 21일 별세하였다.
윌슨 감독의 적극적인 후원에 힘입은 남 감리회의 조선 선교는 든든한 기반을 구축하였다. 리드가 조선에서 전도 사업에 힘쓸 때 미감리교회 스크랜턴 선교사는 자신이 맡고 있던 상동교회 청년 김주현(金周鉉)과 김홍순(金興順)을 그에게 보내어 협조하게 했다. 1896년 12월부터 리드는 두 명의 한국인 전도자와 함께 서울 근교를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897년 5월 2일에 고양읍교회가 설립되었다. 김흥순은 1911년에 정춘수(鄭春洙), 주한명(朱漢明)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음으로써 한국인 최초의 남 감리교회 목사로 이름을 올렸다. 1897년 6월 21일 서울에 있는 리드 목사의 집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인 예배를 시작하였다. 이곳이 광희문교회의 시작이었다. 그해 9월 10일에 리드 목사는 제1회 조선지방회를 개최하고 서울구역과 개성구역을 분할하였으며 리드 목사는 조선 지방회장이 되었고 윤치호가 서기를 맡았다. 리드 목사의 아들 이위만(李慰萬)은 의사가 되어 1907년부터 경기도 개성에서 의료 선교사업을 시작하였으며 버지니아 주 아이비에게 의연금 5천 달러를 기증받아 1907년 개성에 아이비 기념병원을 설립하였다. 1897년 남 감리교회는 첫 여선교사 캠벨(Josephine P. Campbell, 姜慕人)을 조선에 파송하였으며 이때 미 감리회 스크랜턴 대부인은 자기 교인들을 보내주어 캠벨의 전도부인 역할을 하도록 했다.
이처럼 미(북) 감리회와 남 감리회는 미국 본토에서와는 달리 조선에서는 한마음으로 선교에 협력했다. 신학 부문에서도 연합 경영을 이루었는데 1907년 두 교회가 연합으로 협성신학교를 운영하였고 1920년 여성들을 위하여 협성 여자신학교를 설립하였다. 1932년 남녀 신학교가 통합되어 감리교신학교를 설립하였는데 이것이 오늘의 감리교신학대학교이다. 1898년 9월 12일에 서울에서 제2회 조선선교회가 개최되었다. 바로 이 선교회에서 윌슨 감독은 리드 목사를 조선 선교 관리자 겸 경성 구역장으로 임명했다. 또한 캠벨 부인을 경성 여성사업 담당에, 하인즈(Fanny Hindes) 양을 개성 부인사업 담당에 임명하여 남 감리교회가 조선 선교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이처럼 남 감리교회는 성공적으로 이 땅에 복음의 뿌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첫댓글 남감리회 첫 선교사 리드
좌옹 윤치호 선생
윤치호의 가족
남감리회 첫번째 여자 선교사 캠벨
통합전권위원회
제1회 감리교 총회 1930.12.2
제1회 중부 동부 서부 연합연회 19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