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로운 제국주의
북반구와 남반구의 자본 불균형
1980년대 말에 철의 장막이 무너지고 자유 시장 자본주의가 세계 대다수 지역으로 확산하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역사의 종언을 선언했다. 자본의 전도사들은 가장 가난한 나라들에까지 기회와 번영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약속했다. 2008년 금융 위기는 이 환상을 산산이 부쉈으며 요란한 소리를 내며 역사를 되살렸다. 한때 북반구 아나키스트들과 남반구의 저항운동에 국한되었던 지구화 반대 여론이 지구 경제에 가장 긴밀히 통합돼 있는 바로 그 국가들에서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좌파가 2008년 공황 이후 등장한 자본주의에 대한 반발의 덕을 보기는 했지만, 우파가 지구화에 대한 반발로 얻은 이득이 더 컸던 것 같다. 이 두 과정이 별 문제 없이 분리된 채 전개됐다는 사실은 반反지구화 운동의 쇠퇴 이후 좌파와 자본주의 비판이 지녔던 약점을 보여준다. 현실에서 지구화와 자본주의는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북반구 국가들의 경제는 상품 생산에서 거리가 멀어지는 쪽으로 전환했지만 마르크스가 《자본》에서 묘사한 끔찍한 노동 관행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는 단지 현대 소비자의 시야 밖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신자유주의적 아웃소싱을 수십 년간 지속하고 난 지금, 세계의 공장은 폭스콘 사가 노동자의 투신자살을 막기 위해 공장에 그물을 설치해놓은 중국, 섬유 공장 건물 붕괴로 천여 명의 노동자가 사망한 방글라데시, 아동 노동을 통해 우리의 휴대전화와 컴퓨터에 사용되는 콜탄을 채굴하는 콩고민주공화국에 있다.
현재 각국 경제는 모두 이러한 착취적인 지구 생산 과정을 관리하는 데 특화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관리자의 역할에 대해 “자본의 이름 아래 노동 과정 전반을 지휘”하는 특권적 노동자라고 평했다. 이러한 노동자들은 고용주와 맺는 관계에 착취의 자취가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이익을 뒷받침하는 일에 의존하며 살아갈 수 있는데, 이들의 고임금과 사회적 지위가 이들보다 아래에 있는 노동자의 고착취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특히 영국과 미국 같은 유럽과 북미의 많은 국가에서는 1980년대 이후 주로 금융과 전문직 서비스에 고용된 전문직-관리직 계급이 대거 등장했다. 전문직-관리직 계급은 세계 곳곳에서 이뤄지는 생산 과정을 관리하며 거대 다국적기업 본사에서 일하거나, 세계 곳곳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에 투자하는 투자은행에서 중개업자로 일하거나 아니면 세계 곳곳에서 창출되는 잉여가치를 실현하는 최선의 방법에 대해 기업에 조언하는 광고 전문가로 일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관리자 국가에는 억압적 국가기구와 감시 기술을 통해 조종되는 십 수 개의 고착취 노동자 국가가 딸려 있다.
오늘날 우리가 ‘지구화’라고 부르는 바는 레닌이 약 100년 전에 분석한 제국주의 과정과 공통점이 있다. 금융가들은 국내에 투자하기보다는 독점기업들이 축적한 자본을 아직 자본주의가 완전히 정착하지 않은 지구 경제 주변부로 유출하는 데 일조하려 한다. 국가독점자본주의하에서 경쟁은 사라지지 않고 초거대기업들은 결코 하나로 완전히 통합하지는 않는다. 대신 이들은 단순히 국내 수준이 아니라 지구 수준에서 다른 초거대기업들과 제한된 형태의 경쟁을 계속 벌이며, 국내 자본이 확장해나갈 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 간 경쟁을 벌이는 각국 정부가 이들을 지원한다. 레닌은 이것이 제국주의, 즉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의 토대라고 역설했다.
오늘날의 전 지구적 독점기업들은 제국주의 국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반反경쟁 관행으로 창출한 산더미 같은 현금 방석에 앉아 있다. 그리고 나서 이들은 거액의 자금을 부유한 주주들에게 배당하고 남은 일부를 생산 투자에 사용하며, 나머지는 자사주를 매입하거나 다른 대기업을 인수 혹은 합병하는 데 쓴다. 레닌이라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겠지만 북반구로부터 남반구로의 자본 이동 덕분에 부유한 투자자들은 주변부의 자산을 사들일 수 있으며 주변부 국가들의 성장에서 이윤을 뽑아낼 수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창출된 이윤이 북반구 금융기관으로 돌아오면 제국주의의 순환이 완결된다. 예를 들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는 매년 ‘개발’ 원조로 얻는 이익의 3배를 자본 유출로 잃는다.
이러한 지정학적 패턴은 우연이 아니다. 먼저 산업화를 한 국가들은 최초로 다국적기업을 만들고 노동력을 조직적으로 사용했고 매번 승리를 거두며 노동력 가격을 끌어올렸다. 국가는 처음에는 군대를 통해, 나중에는 정치·경제적 제국주의(불평등한 무역 및 투자협정, 국제 이윤의 국내 흡수, ‘자유시장’ 경제정책을 받아들이라는 부유한 국가들의 압력, 부자 나라들이 지지하는 국제기구)를 통해 국내 대기업들이 해외의 값싼 노동과 새로운 시장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왔다.
현재 지구화 아래에서 노동의 국제 분업은 국가들 사이의 제국주의적 관계를 통해 계속 구조화되고 있다. 상품 생산과 관련된 많은 거대 독점기업들이 이용하는 가치 사슬은 지구 전체에 퍼져 있다. 부가가치가 낮은 활동은 이윤이 창출되는 주 장소인 주변부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활동은 이윤이 송금되는 중심부에서 벌어진다. 별로 대단할 것 없는 상품을 생산하며 그들의 이윤 대부분을 뽑아내는 애플 같은 ‘테크’ 기업들에게 이러한 연관성은 매우 분명하다. 중국 폭스콘 공장의 고착취 노동자가 아이폰을 제조하고, 미국에 소재한 ‘본사’에서 일하는 대부분의 비정상적인 노동자가 과도하게 인상된 임금의 혜택을 누린다.
비록 이견도 많지만 현대 제국주의가 항상 폭력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1965년 가나의 독립을 이끈 지도자 콰메 은크루마는 “오늘날의 신 식민주의는 제국주의의 최종 단계이자 어쩌면 가장 위험한 단계를 보여 준다”고 하면서, “신식민주의의 본질은 아예 종속된 국가가 이론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국제적 통치권international sovereignty의 지속적인 덫에 발목이 완전히 잡혀 있다는 데 있다. 현실에서 신 식민주의에 종속된 국가의 경제 시스템과 이에 따른 정치적 정책의 방향은 국외에서 결정 된다”고 주장했다. 신식민주의 권력은 서로 연결된 두 과정을 통해 행사된다. 첫 번째 과정은 서구 독점기업들이 남반구 시장을 지배하는 것이고, 두 번째 과정은 남반구 국가의 국내 자본이 창출한 이윤이 런던의 시티 같은 주요 금융 센터들과 연결된 추출 네트워크를 통해 북반구로 이전되는 것이다. 브레턴우즈 시기에는 첫 번째 과정이 지배적이었지만, 금융 지구화 시기에는 두 번째 과정이 훨씬 더 중요해진다.
이러한 전환점은 1970년대와 1980년대 오일쇼크와 서구의 이자율 인상의 결과로 닥친 제3세계 외채 위기였다. 이로써 가나처럼 외채난을 겪는 나라들이 채무 경감의 대가로 친시장적 개혁을 실시해야 했다. 외채 위기는 가난한 나라들을 국제 투자에 ‘개방’시키는 기회로 활용됐다. 여기서 ‘개방’이란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국가 주도 발전 프로그램에 착수하지 못하게 막으면서 밖으로부터 국제 자본을 이롭게 할 ‘시장 친화적’ 정책을 강요하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인간과 경제 발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는 게 다반사였고 특히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 그 정도가 심했다. 이 프로그램이 경제 성장에 끼친 영향은 온갖 찬사를 받았지만 실은 무시해도 좋을 수준이었고, 반면 극빈층은 인프라, 교육, 공공서비스 등의 감축으로 극심한 타격을 받았다. 장기적으로 외채 위기와 구조조정 프로그램은 남반구의 자본을 유출시키면서 소득과 경제 성장을 위축시켰다. 그 결과 이들 국가의 외채는 GDP에 대비해 오히려 늘기만 했다.
구조조정을 통해 강요된 자본계정 자유화capital account liberalisation는 ‘수출 주도 성장’ 전략을 추구하는 ‘개발도상국’들의 경제를 돕기로 되어 있었다. 주류 경제학자들은 저소득 국가들이 ‘경쟁 우위’ 품목을 중심으로 외국에 상품을 수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국내 산업에 더는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고 민간부분을 규제와 국가 개입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며 자본 이동에 대한 제한을 폐지하는 것을 뜻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조치들 덕분에 다국적기업들이 보다 쉽게 남반구 경제에 진입해 국내 자본가들을 대체했고 그 이윤은 북반구로 재 흡수됐다. 또한 엘리트들이 현금을 국외로 빼돌려 해외(대부분 조세 회피처)에 쌓아놓기도 더욱 쉬워졌다. 한편 국내 생산자들은 중심부 국가들 쪽으로 기울어진 지구 시장에 재화를 수출하지 못하게 막는 거대한 장벽에 부딪혔으니, 중심부 국가들은 엄청난 재원을 투입해 자국의 국내생산자들을 보호했던 것이다.
그러나 금융 지구화로 상처를 입은 것은 남반구만이 아니다. 자본이 주변부로부터 중심부 제국으로 유출됨으로써 중심부 국가들의 경제 또한 왜곡됐으며, 금융 위기 리스크가 커졌다. 교과서 속 경제 이론에 따르면 큰 폭의 경상수지 흑자를 기록하는 채권국과 큰 폭의 경상수지 적자를 기록하는 채무국 사이의 커다란 불균형은 알아서 조정되게 돼 있다. 예컨대 A라는 국가가 적자를 내면 통화가 국외로 빠져나간다. 이 통화가 A국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면 세계시장에서 A국 통화 공급이 늘어남으로써 통화 가치가 떨어질 것이다. 통화 가치 하락 덕분에 다른 나라 소비자는 A국의 수출품을 보다 저렴하게 구입하게 되고, 따라서 A국의 수출에 대한 수요가 증대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이 지구 경제 규모에서 전개되면 일반 균형 상태에 도달하게 된다. 2008년 금융 위기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이런 균형이 좀처럼 도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상당수 경제학자들을 당혹하게 했다. 적자국들은 자국의 경상수지 적자 규모에 따라 큰 폭의 통화 가치 하락을 경험했고, 결과적으로 이런 통화 가치 하락 덕에 이들 나라 재화의 경쟁력이 강화되어야 했다. 전 연준 의장 벤 버냉키는 다수의 신흥국들이 미래의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 저축을 끌어안고만 있는 탓에 지구 경제가 균형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실은 이러한 전 지구적 불균형은 지구자본주의를 규정하는 제국주의적 관계의 직접적 결과로 출현한 것이다. 1990년대 말부터 남반구에서 유출된 자본은 외국인직접투자 형태로 유입된 자본을 상회했는데(다시 말해 앞서 말한 ‘두 번째 과정’이 ‘첫 번째 과정’을 압도 했는데), 이는 주로 자본 이동과 조세 회피의 역학 때문이었다. 북반구의 금융 센터로 되돌아온 자본은 국내 금융화 과정을 뒷받침하는 데 사용되었다. 적자국들은 강한 통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이들 나라의 재화에 대한 수요가 상대적으로 극히 적더라도 이들 나라의 자산, 그중에서도 유독 금융 자산에 대한 수요가 강력했기 때문이다. 적자국들(특히 미국과 영국)의 자산에 대한 수요가 많았던 주된 이유는 1980년대에 이들 국가의 신자유주의적 정부가 단행한 금융 규제 완화였으며, 이는 개인, 기업, 금융기관이 민간 대출의 혜택을 누릴 기회를 극적으로 늘렸다. 궁극적으로 이런 대출의 상당 부분은 미국과 영국의 자산 시장 거품의 등장으로 생겨났고, 취약성이 드러나는 것을 막기 위한 은행 규제의 약화와 결합되어 있었다. 세계의 나머지 부분에서 창출된 자본은 더 많은 수익을 좇던 북반구 금융부분으로 유입됐고 그 덕분에 거품은 더욱더 확대될 수 있었다.(71-82)
외채 위기의 늪에 빠진 잠비아와 아르헨티나
국제 금융기구들과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관계를 맺어온 잠비아는 현대 제국주의가 어떻게 남반구 국가들의 발전을 가로막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구리 수출에 크게 의존하는 잠비아 경제는 1970년대 국제 구리 가격 붕괴로 큰 타격을 입었다. 잠비아는 국제 금융시장에서 돈을 빌릴 수 없었기에 금융 지원을 받기 위해 IMF로 가지 않을 수 없었고 구조조정 프로그램의 대상이 됐다. 잠비아는 2011년 ‘중간소득 국가’ 지위에 올랐지만 이 시기에 GDP 성장의 혜택을 본 국민은 거의 없었다. 외채 수준과 불평등은 악화됐다. 잠비아는 여전히 구리 수출에 의존했으며 산업화에 필요한 자본을 창출할 능력이 없었고 훨씬 더 비양심적인 대출 제공자를 상대하도록 강요받았다. 한 벌처 펀드vulture funds는 300만 달러 상당의 잠비아 국채를 매입하고는 2007년 (원금과 이자를 합해 5500만 달러를 갚으라는 소송을 청구한 뒤) 1500만 달러를 뜯어내는 데 성공했다.
팬데믹이 지구 전체의 상품 수요에 타격을 가하면서 구리 가격이 하락하자 잠비아 통화(콰차)도 덩달아 떨어져 외채 상환 비용이 증가했다. 구리의 수요도 많지 않고 해외 송금과 외국인직접투자 유입도 거의 완전히 중단된 상태에서 잠비아는 채권자에게 상환할 외환을 충분히 확보할 수 없었다. 더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잠비아의 외채는 상환하기에 너무 높은 수준이라 봐야 할 것이다. 잠비아의 미지불 채무 중 상당 부분은 중국의 국영 은행들의 몫으로, 상대적으로 낯선 대규모 대출 제공자인 중국이 아프리카의 부채 재조정 요청에 어떻게 응할지는 불분명하다.
한편 남대서양의 반대편에서는 2019년 당선된 좌익 페론주의자 알베르토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이끄는 아르헨티나가 이 나라의 아홉 번째 디폴트 사태를 겪고 있다. 다른 남반구 국가들의 경우처럼 국제기구들은 채권 자경단과 한 패가 되어 아르헨티나를 맹공격하고 국제 투자자들에게는 이롭지만 근로 대중에게는 해로운 정책을 실시하도록 압박했다. 자본 이동을 제한하는 정책을 실시할 수 있다는 페르난데스 정부의 엄포는 이미 팬데믹 전부터 투자자들 사이에서 주의 대상이 되어 있었다. 투자자들은 아르헨티나 자산을 매각함으로써 고군분투하는 국가를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자 국채 수익률이 급등하고 통화 가치는 급락했으며 이에 따라 차입은 더욱 힘들어졌다.
아르헨티나든 잠비아든 혼자 힘으로 현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규모의 외채난을 겪는 국가들에게는 생산성과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투자에 자금을 대기 위한 저렴하고 장기적이며 조건 없는 대출이 필요하다. 그러나 ‘채권 자경단원들’의 이익을 위해 구축된 제국주의 국제 시스템의 구조 때문에 이는 불가능하다.(83-85)
채무 이행과 기후 위기, 양자택일의 딜레마
지금 남반구는 코로나19 확산과 기후 붕괴의 여파, 두 전선에서 자연과 싸우고 있다. 이들 국가가 마주한 과제는 2020년 5월 사이클론(인도양의 열대성 저기압) 암판Amphan이 인도와 방글라데시를 강타하자 더없이 분명해졌다. 빈곤률이 높은 중간소득 국가 인도는 암판 상륙 당시 코로나19 확진자가 10만 명을 넘어섰고 3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상황이었다. 한편 세계 최빈국 가운데 하나인 방글라데시는 확진자가 약 2만 7000명이고 사망자가 약 400명이었다. 두 나라 모두 공중 보건 인프라가 취약한 나라다. 두 나라는 국가 역량이 못 미치는 탓에 대량 검사 같은 조치를 대규모로 실시하기도 쉽지 않았고, 많은 가구가 빽빽하게 밀집된 채 살아가는 상황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를 준수하기도 어려웠다. 암판에 의한 대규모 대피 사태는 문제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한편 비공식 경제 종사자, 이주 노동자, 산업 노동계급은 이미 낮았던 소득을 더욱 억제하고 많은 이들을 극빈 상태에 빠뜨린 봉쇄 기간에 엄청난 고통을 겪었다.
북반구에서 기후 변화와 코로나19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바로 지출이다. 영국의 홍수, 최근 빈발하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산불, 점점 더 자주 발생하는 미국의 허리케인과 폭풍 등 이들 국가에 기상 이변이 엄습하자 경제적 충격을 줄이려고 수십억 달러가 지출됐다. 팬데믹 대책으로 이들은 이례적인 재정을 지출하고 있으며 자국의 국내 자본가계급(미국의 경우에는 국제 자본가계급)을 지원하기 위해 더욱 느슨한 통화정책을 집행하고 있다.
많은 좌파들은 북반구의 재정 대책 규모가 그들이 수년간 주장해온 바를 입증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부 지출에 준수해야 할 한계란 없으며, 정부는 채권과 화폐 발행을 통해 계속 지출할 수 있고 인플레이션에 주의해 경기가 과열되지 않게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이 설명은 한 가지 중요한 문제와 충돌한다. 그 해결책이 북반구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반구에 비해 남반구 국가들은 바이러스의 경제적 충격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들 것이다. 이들 나라에서는 제한된 사회보장제도와 보건 체계가 팬데믹에 압도돼버릴 수 있다. 남반구 국가들이 이에 대처한다면 해외 채권자에게 더 많은 돈을 빌려야 할 것이고, 대처하지 않는다면 생산에 심대한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러나 만국의 노동자가 공공서비스와 사회보장에 대한 국가 지출 증대에 의존하고 있는 바로 이 순간, 투자자들은 코로나19의 경제적 충격에 불안해하며 ‘신흥시장’에서 떠나가고 있다.
자본 유출의 규모는 2008년 금융 위기가 북반구 국가들의 경제를 난타한 뒤에 다수의 신흥시장 경제들이 경험한 상당한 유입에 부분적인 원인이 있다. 2008년 이후 처음에는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다음에는 민트MINT(멕시코, 인도네시아, 나이지리아, 터키)에 대한 열광으로 막대한 액수의 자금이 남반구에 유입됐다. 세계 체계의 주변부 국가들은 북반구에 비해 금융 위기의 영향을 심각하게 받지 않았고, 게다가 중국이 위기의 사후 대책으로 내놓은 대규모 부양책으로 혜택을 입었다. 북반구의 저금리와 비관습적 통화정책 또한 수익률을 높이고자 투자 기회를 모색하는 투자자들을 남반구로 보냈다. 때로 이 자본은 실제로 유용한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를 찾아 투자됐고 외국 정부에 대부됐으며 부동산으로 흘러들어가거나 순전한 투기에 쓰이기도 했다.
코로나19 위기 전에 IMF는 저소득 국가의 40퍼센트가 외채난의 한복판에 있거나 이에 근접한 상태라고 보고했다. 당시의 우려는 북반구에서 금리가 인상되면 1980년대 남반구 외채 위기를 촉발했던 자본 유출의 새로운 장이 열리리라는 것이었다. 팬데믹의 결과로 북반구에서 금리가 오르지는 않았지만 이로 인해 안전을 추구하는 투자자들은 남반구를 떠나 달러표시 자산에 몰렸다. 2020년 5월 IMF는 남반구가 역사상 최대의 자본 유출에 직면했다고 전 세계에 알렸다. 자본 유출 탓에 남반구 국가들의 국채 수익률이 올랐고 외채의 지속 가능성이 타격을 입었다. 이들 국가 중 상당수는 국제 투자자들에게 채무를 이행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게 될 것이다. 국제 무역 흐름과 송금의 위축으로 이들 국가의 소득은 감소할 테지만, 바이러스의 충격을 줄이기 위해 지출은 오히려 늘어나야 할 것이다. 남반구 국가들이 부채 상환에 필요한 외환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지급 불능 상태에 한층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IMF 총재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는 국제통화기금이 회원국의 팬데믹 해결을 돕기 위해 세계은행이 이미 약속한 차관 및 보조금 형태의 1600억 달러에 더해 1조 달러 상당의 자금을 준비해놓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모든 나라가 이 차관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자유무역과 시장에 바탕을 둔 워싱턴 컨센서스를 받아들인 고분고분한 나라에만 특혜가 주어진다.
*옮긴이 주-워싱턴 컨센서스: 신자유주의 시기에 미국 정부와 IMF, 세계은행 등이 남반구 국가들에 요구한 표준적 정책을 일컫는다. 미국 경제학자 존 윌리엄슨이 1989년 규제 축소, 사유화, 시장 자유화 등 10가지 정책에 붙인 이름이다.
국제 투자자들은 현재 심각한 외채난을 겪고 있는 다른 빈국들과 달리 인도와 방글라데시에는 아직 등을 돌리지 않고 있다. 국제기구들이 요구한 신자유주의 ‘개혁’을 실시한 첫 번째 나라들 중 하나인 방글라데시는 여전히 빈곤률이 높은데도 구조조정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오늘날 방글라데시는 열약한 노동 조건으로 악명 높으며 2013년 라나플라자 붕괴 같은 참사를 낳은 섬유 공업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모디 총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자유시장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서약하며 기업 친화적인 수사를 던졌고 국제 사회는 기쁨에 덜떠 그의 총리 선출을 축하했다. 그러나 이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운 총리가 국내 무슬림 소수자 박해에 골몰하느라 개혁 의제 추진에 속도를 내지 않자 많은 투자자들은 실망하고 말았다.
두 나라 모두 코로나19에 맞서 경제 대책을 일부라도 내놓을 수는 있었다. 모디 정부는 2600억 달러를 상회하는 종합 구제 대책을 발표했는데, 이는 인도 연간 GDP의 약 10퍼센트에 해당한다. 인도 정부는 불과 시행 4시간 전에 전국 봉쇄 조치를 발표하여 가난한 이들이 먹을 것과 일자리가 없어 어찌할 바를 모르게 만들더니 6월에는 전염이 정점을 찍기도 전에 규제를 풀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는 GDP의 약 2.5퍼센트에 달하는 80억 달러 규모의 여러 재정 대책을 발표했지만 수출 촉진을 위해 다수의 섬유공장을 조기에 재가동하기 시작했고, 이는 바이러스가 더욱 광범하게 확산될 수 있게 만들어 노동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렸다.
장기적인 차원에서 보면 코로나19 위기가 계속되고 기후 붕괴의 충격이 두 나라를 강타하기 시작하는 상황에서 국제 투자자들에게 이들을 돕는 선의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 위기에 대처하려면 정부 차입을 상당한 규모로 늘려야 하지만, 어쩌면 악명 높은 변덕쟁이인 국채 투자자들의 신용을 잃을 수 있다. 그러나 정부 지출의 현저한 증가가 없다면 앞으로 몇 년 동안 코로나19뿐만 아니라 기후 붕괴와 결합된 자연 재해가 더욱 빈발하고 혹독해지면서 수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을 수 있다.(85~91)
남반구 국가에 지금 가장 필요한 것
남반구 국가들은 워싱턴 컨센서스 기구들(IMF와 세계은행)이 제시하는 처방을 준수하기만 하면 북반구를 ‘따라잡을’ 것이라는 약속을 듣고 또 들었다. 그러나 사실은 돈 세탁과 조세 회피를 통해 세계 최빈국들에서 빠져나가는 막대한 자금은 말할 것도 없고 북반구와 남반구 사이에 신식민주의·제국주의적 관계가 지속되기 때문에 남반구의 대다수 국가들은 북반구를 결코 따라잡을 수 없었다. 게다가 북반구에서 테크 독점기업들이 성장하는 바람에 이는 더욱 난제가 됐다. 워싱턴 컨센서스의 광신도들은 국제 자본의 이윤을 늘리려고 자국 노동자의 건강과 행복을 희생시켰다.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발전국가들은 국제 금융기구의 충고를 무시하고 국가 주도 발전에 집중함으로써 신식민주의와 종속의 함정에서 가까스로 벗어난 예외 사례다.
부유한 세계에서 코로나19 위기의 교훈은 국민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국가의 지출에 한계 따위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계 인구의 압도적 다수에게 이 위기는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상식만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국제 ‘공동체’의 가난하고 힘없는 구성원 대부분은 자신들이 결코 북반구 국가들처럼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지 않은가? 남반구 사회주의자들은 재정정책의 한계는 정치권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올바른 교훈을 이끌어내야만 한다. 국제 연대를 이루려면 우리는 위기 종식 시점에 남반구 외채 탕감과 원조를 다시 추진해야 한다.
외채 탕감은 ‘제3세계 운동’으로 알려진 흐름이 태동할 때부터 핵심 쟁점이었다. 운동가들은 오랫동안 ‘부당외채odious debt’ 탕감을 위한 캠페인을 벌였다. 이들은 밀레니엄 외채 캠페인을 통해 일정한 성과를 거두기도 했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한 나라가 많았다. 코로나19 위기의 직접적 결과로서 남반구 전역을 난타한 금융 위기의 충격에 대처하기 위한 IMF의 주목할 만한 대출 프로그램조차 장기적인 채무 지속 가능성 쟁점을 다루기에는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오래된 외채 무더기 위에 새 빚을 쌓는다고 가난한 나라들이 독립 이후 계속 참고 견뎌온 외채와 종속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외채 탕감이다.
*저자 주-부당외채: 신생 독립국들은 식민 통치국에 의해 생긴 부채를 짊어진 상태여서, 시민들이 자신들을 예속시키는 데 사용됐던 부채를 같아야 했다. 독립하고 한참 지난 뒤에도 다수의 억압적 정권들이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대부분 미국의 지지를 받으며) 막대한 외채를 발생시켰는데, 독재 정권이 쫓겨난 후에도 민주적으로 선출된 지도자들이 이를 고스란히 물려받게 된다.
2020년 4월 G20 재무부 장관들은 연말까지 저소득 국가들의 외채 이자 지불을 중지하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이자 지불 중지란 그저 고통을 연말까지 연기하는 것에 불과하며, 지구 경제는 그때까지도 심각한 불황에서 벗어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G20 합의에 양자간 대출은 포함되지 않는다. 남반구 국채를 상당 규모로 보유한 금융기관과 특정 국가는 팬데믹 기간에 채무국과 건설적인 관계를 맺으라고 요청받았지만 그렇게 해야 할 의무는 없다.
1980년대의 구조조정 프로그램부터 오늘날 그리스까지, 제국주의 채권자들의 폭넓은 권력은 몇 차례나 주변부 국가들을 자본의 규율에 무릎 꿇리는 데 활용됐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이러한 제국주의적 추출 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다.(92~94)
〔출처〕 코로나 크래시 The Corona Crash
그레이스 블레이클리 지음, 장석준 옮김, 책세상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