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표(墓表) 공(公)의 휘는 영국(榮國)이요 자(字)는 여구(汝龜)이며 호(號)는 심운재(心雲齋)이며 성은 이씨이니 재령인이다. 고려말 성균진사로서 포은 정선생과 도의상종(道義相從)하시다가 려운(麗運)이 종흘(終訖)하자 강개한 회포를 품으시고 함안 산인 모곡리로 낙향하셔서 손수 자미화(紫薇花)를 심어 가꾸시고 종신불출하신 모은(茅隱) 휘 오(午)의 8세손이시며 주부(主簿)인 휘 종(琮)은 공의 고조이시니 하동 옥종 청룡리로 이거하신 분이며 조(祖)의 휘는 홍훈(弘勛)이니 승사랑(承仕郞) 행군자감봉사(奉事)요 고(考)의 휘는 지하(支厦)요 비는 진양하씨니 매헌(梅軒) 경휘(鏡輝)의 녀이다. 선조 무술(戊戌)에 생하시니 서기로는 1598년이다. 품성(稟性)이 근검(勤儉)하시고 효행(孝行)이 지극하시며 文學 또한 저명(著名)하셨으나 문적(文籍)이 모두 화마로 인하여 소실되었으니 가석(可惜)할 뿐이다. 공의 당세에 비로소 수곡면 사방동으로 이복(移卜)하셨다가 卒于 월 일 하시니 묘는 수곡면 구태동 와산 乾坐이다. 배(配) 진양하씨 묘는 조계촌 어은동 艮坐이며 계배 서산정씨의 묘는 정곡 申坐이다. 공이 전후배에서 6남 1녀를 두셨으니 포(褒) 곤(袞) 양(襄) 충(衷) 유(裕) 표(表)와 녀에 전제민(田濟民)이다. 공의 묘비는 1847년 당시 시묵(時默) 의묵(宜默) 만묵(晩默) 제문조의 주선으로 해산(海山) 이우(李遇) 찬(撰)과 박형규(朴馨圭) 서(書)로서 건립하였으나 년구세심(年久歲深)하여 낙(落)이 태심하여 판독이 곤란하기로 종의에 따라 개견(改堅)함에 있어 종손 성호(性浩)의 청에 의하여 약술하는 바이다. 서기 1977년 丁巳 淸明節 后孫 瑞浩 撰 晉山 河龍燮 書
2003년 3월에 필자가 묘비의 이끼와 불순물를 제거하고 탁본 및 접사하여 확인한 결과 위의 묘표 중 몇가지 차이점이 발견되어 열거해 보았다. 1) 1847년 당시 즉 정미(丁未) 10월에 공의 6대손 만묵(晩默) 시묵(時默) 의묵(宜默)등.. 순서를 족보의 순서대로 표기하였는데 최근의 1977년 기록은 이를 따르지 못했으며 또 원본에 이 비를 세우는데 동묵(東默) 진묵(鎭默) 상묵(相默) 등이 주간하였다고 되어 있다. 2) 비문을 지은 분은 공의 종자(從子) 칠세손(7世孫) 우(遇)이며 글씨를 쓴분은 밀양인 박형태(朴馨太)이다. 이는 원문의 글자가 잘안보였고 맨 끝자 서(書) 중 일부를 규(圭) 자로 잘못 해석한 것으로 생각된다. 3) 원 비문에 효자불궤 영석이류(孝子不궤 永錫爾類)란 문구가 나온다. 원문에 효자의 집안에서 효행을 하신분으로서 상기 내용은 시경(詩經)의 대아(大雅)에 나오는 시구인데 이부분의 내용이 묘표에는 '효행이 지극하여'란 단어로만 표현되어 있으나 원비문의 내용은 많은 부분을 효자와 효행으로 표기되어 있다. 여기서 비문을 지은 분은 호가 해산(海山)이며 휘는 우(遇)이신 선조분인데 종자 7세손이라 했다. 해산선생은 월촌선생(河達弘)문집의 사우록에 기록되어 있는데 재령인으로서 자(字)는 숙진(叔晉)이며 월촌선생과 함께 겸재 하홍도선생의 문집간행일로 여러번 주고받은 편지와 자주 만나 상의한 기록이 있으며 남명의 문인이신 일신당(日新堂) 이천경(李天慶) 선생의 문집 후기(後記) 즉 발문(跋文)을 기록하신 문인으로 안릉인(安陵人)이라 되어 있으니 안릉은 재령의 별호이니 분명히 1850년 경술보를 간행할 당시에 진주-산청 일원에서는 문장가로 알려진 재령이씨의 자랑스런 한 분이다. 교남지에는 산청군 단성면 남사에 사신분이라 하였는데 아직 어느 분인지 계속 문헌을 찾아 보아야 할 것이다. *경술보에서 최근 확인된 해산(李遇)선생은 청원리 판관공(判官公)파 선조로 확인되었다. 청사 李世泰의 玄孫(四世孫)이며 아버지는 인진(鱗晉)이시고 어머니는 달성 徐有章의 따님이시다 남사리의 후손을 찾지 못해 비문의 원문을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