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령이씨의 갈촌선생 인곡별묘(仁谷別廟) 경상남도 함안군 가야읍 설곡리 인곡에 있는 갈촌선생(葛村先生 휘 潚)의 사당은 五世祖(모은공 휘 午)의 묘재사인 인산재(仁山齋) 바로 옆에 있다.
갈촌선생의 휘는 숙(潚), 자는 여징(汝澄), 갈촌(葛村)은 호이며, 명종5년(1550년) 10월 24일 함안에서 출생하였다. 부제학 율간공(휘 仲賢)의 증손이며 우후 덕고공(휘 珷)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증 참판공 휘 경성(景成)이며 어머니는 여주이씨이다. 선생은 일찍이 무예와 학문에 능하여 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나 관직의 뜻을 버리고 셋째형인 모촌선생(휘 瀞)을 따라 고을내의 현인들과 함께 성리학에 심취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해에 제포만호(薺浦萬戶)가 되어 성곽을 수축하고 임진왜란을 맞아 적을 무찌르는데 앞장섰다. 특히 의병장 곽재우와 방백 김수(金 日+卒)의 사이가 매우 나쁨을 알고 초유사 김성일에게 보고하여 두사람을 구해 주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조정에서는 선생을 합천군수직를 제수하였으며 이 때의 정인홍을 꾸짖어 세금을 징수한 일과 통제사 정기룡장군의 명을 받아 성주까지 왜적을 추격하여 공을 세웠다. 왜란후에는 장성현감(1605년)을 거처 군자감판관에 이르렀으나 광해군의 혼정때 함안의 산인에 봉명정(鳳鳴亭)을 짓고 은둔생활을 하였는데 1615년에 향년 66세로 별세하였다. 묘소는 증조부 율간공의 묘아래에 있으며 함안의 도계(道溪)서원에 제향되었다. 배위는 숙인 밀양박씨 만호 사신(士信)의 따님이며 4남 5녀을 낳았으며 아들은 이단(而檀, 주부공 =묘소는 향동 참판공 뒷편에 있음), 이기(而杞, 선무랑 호 洛觀亭=묘소는 대산면 걸매산), 이남(而楠, 통덕랑공=묘소는 취무동), 이오(而梧, 묘소는 魚鳶村)이며 따님은 김해인 창주(滄洲) 허돈(許燉), 경주인 박도원(朴道元), 울산인 김닥립(金卓立) 태안인 박경광(朴慶光) 이영(李英)에게 각각 출가하였다. <참고문헌> 陜川郡守李公遺墟碑銘(晩求 李種杞 撰) 陜川郡守葛村李公墓碣銘(鶴棲 柳台佐 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