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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6년 7월 일본 동경에서 목판본으로 간행된 『근세조선정감(近世朝鮮政鑑)』의 저자 박제형(朴齊炯)은 누구인가? 이익성이 우리말로 옮긴 번역본(2016, 탐구당)에는 다음과 같은 지은이 소개가 나온다.
<자는 이순이고 반남이 본관이다. 본명은 박제경(朴齊絅).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 후에 박영효가 수신사로 일본을 왕래할 때에 수행원의 한 사람으로 참가, 일본의 새로운 제도와 문명을 살피고 요코스카橫須賀 군항을 시찰하는 등 견문을 넓혔다. 귀국 후에는 박영효ㆍ김옥균 등과 함께 개화독립당의 요인으로 개화운동에 헌신하였다. 갑신정변에는 직접 거사했던 것이 갑신일록에 나타나며, 정변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자 수표교에서 민중에게 피살되었다고 전해진다.(출처: 이익성 번역본 앞표지 날개)>
박제형의 본명(실명)을 박제경(朴齊絅)으로 보는 근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박제경의 이름은 『근세조선정감』 원본에는 박제형(朴齊炯)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이것은 일본에서 이 책을 간행할 당시에 발행자의 착오나 고의로 이름을 고친 것 같고, 정변 전후 관련 인사들의 제 기록인 『사화기략(使和記略)』·「갑신일록(甲申日錄)」·「근세조선정감 서문」 등과 문헌인 『일본외교문서』 등을 살펴보면 박제형이 아니라 박제경(朴齊絅)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할 수 있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위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박영효(朴泳孝: 1861~1939)가 특명전권대신 겸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후 1882년에 작성한 견문록인 『사화기략(使和記略)』, 그리고 갑신정변(甲申政變: 1884)에 대해 김옥균(金玉均, 1851~1894)이 1년쯤 뒤에 지은 것으로 보이는 회고록인 『갑신일록(甲申日錄)』 등의 문헌 외에도 윤치호(尹致昊: 1865~1945)의 일기(日記)(1883~84)에도 박영효 등과 더불어 여러 차례 등장한다. 이러한 역사적 문헌에 나타나는 박제경(朴齊絅)과 『근세조선정감』의 저자 박제형(朴齊炯)은 동일 인물임이 거의 확실하다고 판단된다.
그런데 위의 몇몇 문헌에서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박제경(제형)의 본관이 반남이고 자(字)가 이순(而純)이라면, 반남박씨세보(족보)에서 그를 확인할 수 있을까? 임진보를 열람해 본 결과, 반남박씨 22세로 제형(齊炯)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대략 10분 정도이고, 제경(齊絅)이라는 이름을 가진 분은 3분 정도 발견된다. 그러나 이 분들 중에 이순(而純)이라는 자를 가진 분은 한분도 없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 때문에 박제경이 『근세조선정감』을 지으면서 자신의 이름을 의도적으로 바꾸었다면 자신의 자(字)도 함께 바꾸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字)가 이순이 아니더라도 박제형의 실명인 박제경(朴齊絅)과 이름이 같다면 동일인인지 아닌지를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된다.
위에서 언급한 대로 비록 자(字)가 다르더라도 박제형과 동일 인물로 상정해 볼 수 있는 반남박씨세보의 인물은 바로 판관공(8세 휘 병균) 후인으로 참봉공(13세 휘 동민) 종중으로 입계한 박제경이다. 다음은 갑자보에 기록된 박제경의 방주 일부이다.
<字輝中 憲宗癸未生 官通政秘書院丞 戊午七月十七日卒 . . . (이하 생략)>
갑자보 기록에서 "憲宗癸未生"은 "憲宗癸卯生"의 잘못으로 판단된다. "憲宗癸未生"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연도이기 때문이고, 또 박제경의 본생부(本生父) 박광수(朴廣壽)의 생년이 1817(丁丑)년이고 바로 위의 형 박제순(朴齊舜)이 1838(戊戌)년생임을 감안할 때 박제경의 생년은 1843(癸卯)년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비서원승(秘書院丞)을 지낸 박제경은 역사적 문헌에 몇 차례 등장하고 있다. 박제경은 고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몇 차례 등장하는데, 1887년(고종 24) 윤4월 박문국(博文局) 주사(主事)에 임명되었고, 1904년(고종 41) 4월 정3품 비서원승(秘書院丞)에 오른 사실이 승정원일기에서 확인된다. 박문국은 구한말인 1883년 8월에 박영효가 건의하여 근대화의 일환으로 설치된 한국 최초의 근대적 인쇄소이다. 동년 10월에 이곳에서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갑신정변 때 잠시 폐지되었으나 1885년에 다시 설치되었다가 1888년에 재정문제로 통리교섭통상아문(統理交涉通商衙門)에 부속되어 사라졌다. 박문국 주사에 임명될 당시 박제경의 나이는 44세였다.
자, 그렇다면 이제 갑신정변(1884년 12월 4일)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이전의 문헌에 등장하는 박제경과 그 이후의 문헌에 등장하는 박제경은 과연 동일인일까 아닐까? 대부분의 현대 인물 기사에서 『근세조선정감』을 지은 박제경(=박제형)은 갑신정변이 3일천하로 실패하게 되자 '수표교에서 백성들의 손에 희생되었다고 전해진다'며 박제경이 당시에 사망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박제경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행방불명' 상태였던 것으로 보인다(신편 한국사 38권 429쪽).
이상의 논의를 정리하면, 『갑신일록』에 등장하는 박제경A(편의상 박제경A라고 한다)는 갑신정변(1984) 이후 생사불명(행방불명)이고, 『승정원일기』에 등장하는 박제경B(편의상 박제경B라고 한다)는 1887년(당시 44세) 이전의 행적이 확인되지 않는다. 이 두 인물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는 없는 것인가? 동일인가, 아니면 동명이인인가?
두 인물의 성관이 반남박씨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두 인물 모두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시기에 존재했던 사실도 분명하다. 아울러 두 인물 모두 당시 새로운 문물에 개방적인 '신지식인'었음도 명백해 보인다. 박제경A는 이른바 개화파의 일원으로 활동했고, 박제경B는 근대적 신문 발행을 담당했던 박문국의 주사(오늘날의 기자 역할)를 지냈다. 여기서 우리는 1882년 수신사 박영효(朴泳孝)의 수행원 자격으로 일본에 갔던 이수정(李樹廷: 1842~1886)이 박제형(박제경A)의 『근세조선정감』 서문에서 밝힌 다음과 같은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今此書出 而訪我邦之內情者可悟昔之誤聞訛傳 而其中爲國家之瑕疵者 亦可以駁正 則而純之功也 雖然而純毅然 不以以言得罪爲惧 而出此書於世 盖效西國新聞記者之風歟.(이번에 이 책이 나오면 우리나라의 실정을 탐방하는 자가 예전에 잘못 듣고 그릇 전하였던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국가의 하자(瑕疵)로 된 것을 또한 바로 잡을 수 있을 것인 즉 이것은 이순의 공이다. 그러나 이순이 의연하게 말로써 죄받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 글을 세상에 내어 놓은 것은 대저 서양 신문 기자(記者)의 기풍을 본받은 것이었던가?)>
이수정이 박제형(박제경A)의 글에 대해 "서양 신문 기자의 기풍을 본받은 것"이라는 평(評)은 박제경B가 근대적 신문 발행을 담당했던 박문국의 주사(기자)로 일했다는 사실과 무관(無關)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신문 기자의 기풍"을 보인 박제경A(박제형)와 실제로 박문국에서 주사(기자)로 일했던 박제경B가 동일 인물일 수 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박제경A의 자(字)가 이순(而純)인 반면, 박제경B의 자는 휘중(輝中)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두 사람을 동명이인으로 단정하는 것은 성급한 결론으로 보인다. 당시의 상황에서 이름을 감추어야 했다면 자(字)도 다르게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반남박씨세보에서 박제경A(박제형)로 보이는 인물은 박제경B뿐이라는 사실도 두 인물이 동일인일 수 있다는 가설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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