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생가, 문학관>
시문학파로 활발하게 활동하다 6.25때 납북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진 정지용이 이곳에서 1902년 5월 15일에 태어났다. 오십이 안 되는 짧은 생애 동안 <향수>를 비롯해 널리 알려진 시를 많이 써서 그를 그리는 사람들이 많다. 현대문학사에 족적을 남긴 시인을 현실공간에서 만나는 것은 자신을 반추한다는 의미도 있을 거 같다.
1. 관람처대강
위치 : 충북 옥천군 옥천읍 향수길 56
전화 : 043-730-3408
입장료 : 없음
방문일 : 2022.12.2.
2. 둘러보기
1) 정지용(1902~1950?) 생애
한의사인 아버지 태국(泰國)과 어머니 정미하(鄭美河)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다. 12세 때 송재숙(宋在淑)과 결혼했으며, 1914년 아버지의 영향으로 가톨릭에 입문했다. 옥천공립보통학교를 마치고 휘문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서 박종화·홍사용·정백 등과 사귀었고, 박팔양 등과 동인지 〈요람〉을 펴내기도 했으며, 신석우 등과 문우회(文友會) 활동에 참가하여 이병기·이일·이윤주 등의 지도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이선근과 함께 '학교를 잘 만드는 운동'으로 반일(半日)수업제를 요구하는 학생대회를 열었고, 이로 인해 무기정학 처분을 받았다가 박종화·홍사용 등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났다.
1923년 4월 교토에 있는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영문과에 입학했으며, 유학시절인 1926년 6월 유학생 잡지인 〈학조 學潮〉에 시 〈카페 프란스〉 등을 발표했다. 1929년 졸업과 함께 귀국하여 이후 8·15해방 때까지 휘문고등보통학교에서 영어교사로 재직했고, 독립운동가 김도태, 평론가 이헌구, 시조시인 이병기 등과 사귀었다. 1930년 김영랑과 박용철이 창간한 〈시문학〉의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고문으로 있으면서 이상(李箱)의 시를 세상에 알렸다. 같은 해 모더니즘 운동의 산실이었던 구인회(九人會)에 가담하여 문학 공개강좌 개최와 기관지 〈시와 소설〉 간행에 참여했다.
1939년에는 〈문장〉의 시 추천위원으로 있으면서 박목월·조지훈·박두진 등의 청록파 시인을 등단시켰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화여자대학으로 옮겨 교수 및 문과과장이 되었고, 1946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중앙집행위원 및 가톨릭계 신문인 〈경향신문〉 주간이 되어 고정란인 '여적'(餘適)과 사설을 맡아보았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했던 이유로 보도연맹에 가입하여 전향강연에 종사했다. 1950년 6·25전쟁 이후의 행적에는 여러 설이 있으나 납북됐다, 1950년경 북한에서 사망한 것이 통설로 알려져 있다. (다음백과 전재)
2) 문학세계
1930년 창간된 시문학 잡지에서 김영랑, 박용철과 함께 활동하며 명성을 얻었다. 박용철이 평론 분야에서 주로 활동하고, 김영랑이 음악적 감수성이 돋보이는 시를 주로 쓰고 산문은 쓰지 않은 반면, 정지용은 회화적 이미지를 묘사하는 시를 주로 쓰면서 시를 빛내는 수필도 썼다.
시문학파는 순수한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며 일제와의 대결을 벗어난 시를 쓰는 것으로 독자가 긴장을 풀고 포근한 느낌으로 시를 읽게 했다.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등의 민족의 처지에 대한 고민을 노래한 시적 성과를 계승하지 않고 어떤 논란도 벌이지 않는 시를 썼다.
정지용은 <시문학> 폐간 후에는 <문장> 편집에 관여하면서 시 추천 심사를 맡아 영향력을 확대했다. <문장>에서 배출한 청록파 시인들은 심사를 맡은 정지용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지용은 동지사대 영문과 전공과 카톨릭 배경이 떠오르도록 하는 외래어 취향의 서양 번역시같은 시도 썼다. 주로 창 바다 고향같은 대상에 시상을 담았다.
시어 선택과 연마 등으로 묘사로 일관하면서 감각을 숭상하는 쓴 것이 지용의 특성이다. <백록담>조차도 민족의 처지가 아닌 감각적 표현의 기교에 집중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참조)
최근 현대시조는 물론이고 현대시가 묘사에 집중하여 내면성찰이나 현실에 대한 책임에 소홀한 문제는 정지용의 시적 세계와 일정한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학관과 생가 외관
*문학관 내부
관람객의 기념촬영을 위한 설치물이다.
아래는 전시실 내부. 문학관 홈피에서 아래 설명을 옮긴다.
문학전시실이다.
지용연보문학전시실은 테마별로 정지용의 문학을 접할 수 있도록 지용연보, 지용의 삶과 문학, 지용문학지도,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 등 다양한 공간을 마련하고 있다. 이들 각각의 테마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용연보”는 정지용과 그의 시대를 시인이 살았던 시대적 상황과 문학사의 전개 속에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 수 있는 곳이며 스크린북에 상영되는 연상을 통해 추억의 앨범을 넘기듯 시인의 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
“지용의 삶과 문학”은 연대기와 주제별로 향수, 바다와 거리, 나무와 산, 산문과 동시 등 4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심도 있게 이해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지용문학지도”는 한국 현대시의 흐름과 정지용의 시문학에 관해 알아 볼 수 있는 공간이다. 1910년대부터 1950년대까지 현대시가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가를 한눈에 볼 수 있으며, 그 흐름 속에서 정지용시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확인 할 수 있다.
“시ㆍ산문집 초간본 전시”는 『정지용시집』, 『백록담』, 『지용시선』, 『문학독본』,『산문』등 정지용 시인의 시ㆍ산문집 원본을 전시하고 육필원고 및 초간본의 내용을 영상으로 감상 할 수 있도록 하여 당시의 상황을 느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테마를 따라 가는 동선은 전시실의 벽 3면을 가득채운 문학전시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아래는 생가.
문학관과 생가가 붙어 있어, 문학관 방문 후 바로 옆 생가로 이동한다.
<고향>의 황소 재현
이곳에서 정지용이 1902. 5. 15일에 태어났다.
*생가 밖 앞마을. <고향>의 실개천이 바로 이 개천인가보다.
이 마을은 정지용촌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거리 이름도 향수길, 곳곳이 그의 시 제목을 딴 커피숍에 개천의 좌우로는 그의 시 액자가 도배를 하고 있다.
그의 시 액자가 붙은 개천 방천.
앞 개천의 좌우에는 모두 그의 시가 써 있는 액자들이다.
4. 관람후 : 문학기행
이 마을은 모두 정지용의 그늘 아래 있다. 매년 5월 지용제가 열리는 '실개천'가는 모두 지용의 시로 도배가 되어 있고, 근처는 그의 문학과 관련 있는 상호의 가게가 즐비하다.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이 생각난다. 우리에게 <빨간머리 앤>으로 잘 알려진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고장이어서 온통 빨간머리가 도배를 한 섬이다.
작가의 무덤이 있고 원제 <그린게이블스의 앤> 의 그린게이블스가 재현되어 있는 구역은 관광객이 들르는 필수 코스다. 동명의 뮤지컬이 상설공연되는데 중후한 배우들이 등장하여 수준높은 작품을 만들어낸다. 소소한 빨간머리 기념품과는 차원이 다른 훌륭한 관광상품이다. 자동차의 번호판에는 빨간머리 앤의 그림이 있어 날마다 달고 다니는 앤은 주민의 긍지이다.
<빨간머리 앤>은 성장소설로 1편은 동화라고도 할 수 있지만, 고아인 앤이 사회의 일원으로 훌륭하게 성장해 가는 개인의 성장사를 통하여 어렵게 캐나다에 정착하는 이민들의 고난과 투지를 섬세한 필치로 그린, 캐나다 이민사를 응축한 소설이다. 2편 이후에서는 카톨릭 학교에서 원주민들의 정신개조를 명분으로 그 자녀들을 강제로 수용하고 학대 살해하는 내용까지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카톨릭의 이 만행은 최근 교황이 사과한 바 있다.
정지용은 어려운 현실이나 인간내면에 대한 성찰이 소홀한 것이 아쉽고, 그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묘사 위주의 시적 표현이 갖는, 현대시조를 비롯한 현대시 전체의 문제에 선두에 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식민지 상황에서 지켜온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죽음으로 보여준 현대사의 질곡은 고개숙여 감사하고 애도해야 마땅할 것이다. 작가의 뒤를 쫓는 문학기행에서는 공과 과를 함께 살피는 것이좋을 것 같다.
췌언 : 이 마을에도 지용과 관계없는 곳도 있다. 도토리묵이 맛있는 식당 <옥천묵집>(본카페 소개), <옥천할매묵집> 등은 관람 전후에 들를 수 있는 좋은 식당이다. 함께 묶어 방문하면 알찬 문학기행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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