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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빠사나 명상의 이론과 실제
/ 마성(摩聖) 스님
마성스님 (이수창)
스리랑카팔리불교대학교 불교사회철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현재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과 강사, 팔리문헌연구소 소장, 논문으로 “Man in Buddhist Perspective”, 「포살과 팔재계에 관한 고찰」, 「자등명 법등명의 번역에 대한 고찰」 등 다수가 있다.
▒ 목 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명상의 개념과 불교의 수행
1. 명상의 개념
2. 두 가지 형태의 불교수행
Ⅲ. 위빠사나 수행의 이론과 실제
1. 사념처(四念處)의 개요
2. 몸에 대한 염처(身念處)
3.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
Ⅳ. 나가는 말
1. 들어가는 말
한국의 불교도 가운데 상당수는 아직도 무속적이며 미신적인 기복신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불자들은 기복신앙에서 탈피하여 자신의 정신적 발전을 위해 각종 수행 프로그램에 직접 참여하고 있다. 이들을 위한 수행 프로그램이 전국의 여러 곳에 개설되어 있으며, 참가 인원수도 점차 늘어나고 있다. 이제 한국불교도 서서히 기복에서 수행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수행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한편 최근에는 ‘웰빙(well-being)’이라는 말이 크게 유행하고 있다. 웰빙의 유행과 함께 일반인들의 명상에 대한 관심도 크게 고조되었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명상을 웰빙과 연계시켜 새로운 산업으로 육성시키고 있다. 그야말로 명상이 상업화의 길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명상의 산업화는 경계해야 할 명상의 역기능(逆機能)이다.
[박석, “명상의 어제와 오늘, 그 사회적 가능성과 문제점에 대하여”, 『제28차 열린토론마당 자료』(서울: 불교포럼, 2004. 5. 14.), p. 5 참조.]
그런데 진정한 의미의 웰빙은 물질적 풍요와 함께 건강한 육체와 건전한 정신을 소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다시 말해서 웰빙은 육체와 정신의 균형적인 발전 없이는 기대하기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명상은 웰빙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것이다.
현대인들이 명상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명상이 가져다주는 순기능(順機能)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명상은 개인의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를 해소시켜 줄 뿐만 아니라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발전을 가져다준다. 또한 명상은 완전한 정신적 휴식을 통해 높은 단계의 행복을 맛볼 수 있게 해준다. 그 뿐만 아니라 명상은 사회의 많은 병폐들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주기도 한다.
특히 불교의 명상, 즉 위빠사나 수행(vipassanā-bhāvanā)은 크게 두 가지 이익을 가져다준다. 첫째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보다 높은 정신적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불교의 궁극적 목표인 완전한 깨달음, 즉 열반을 속히 증득할 수 있다. 둘째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개인의 육체적 건강과 정신적 발전은 물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일반인들이 불교의 명상에 깊은 관심과 매력을 느끼는 것은 후자의 현세적 이익, 즉 당장 눈앞에 나타나는 변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기 때문에 불교의 수행법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탐구하기보다는 현재 남방 상좌부 불교국가에서 널리 행해지고 있는 위빠사나가 어떤 명상인가를 소개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아직 학문적으로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은 가능한 배제하고, 위빠사나 명상의 이론과 실제에 대하여 간략하게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2. 명상의 개념과 불교의 수행
1. 명상의 개념
보통 명상이라고 하면 요가나 선(禪)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월폴라 라훌라(Walpola Rahula, 1907-1997) 스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많은 사람들은 명상에 대하여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들은 ‘명상’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일상적인 삶의 활동으로부터의 도피를 생각한다. 즉 사회로부터 격리된 어떤 먼 장소에 있는 사원의 독방이나 어떤 동굴에서 석상처럼 특수한 자세를 취하는 것, 그리고 일종의 신비 혹은 불가사의한 생각이나 황홀경에 몰입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불교의 명상은 전혀 이러한 형태의 도피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갖지 못한 ‘제3의 눈’과 같은 어떤 영적(靈的) 신비적 능력을 얻기 위해서 명상이나 요가에 관심을 가진다.”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WBT.), (London and Bedford: Gordon Fraser, 1959), p. 67.]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명상이라는 용어도 너무 남발되고 있다. 이 때문에 매우 혼란스럽다. 명상이라는 용어는 누가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개념이 달라진다. 현재 여러 가지 종류의 명상법이 유통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인도의 요가명상, 서구에서 심리치료를 위해 개발된 각종 명상 프로그램, 마인드 콘트롤, 단학계열의 기(氣)수련, 그리고 의식개발 프로그램인 아바타(Avatar) 코스 등에서도 명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각종 명상과 불교의 위빠사나 명상은 확연히 다른 것이지만, ‘명상’이라는 용어만으로는 쉽게 구분하기 어렵다.
일단 다른 명상에 대해서는 생략하고, 요가에서 말하는 명상과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의 개념을 비교해 보고자 한다.
첫째, 요가에서 말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인도의 파탄잘리(Patanjali)가 지은『요가 수트라(Yoga Sūtra)』에 나오는 개념이다. 즉 요가의 8단계 중 제7단계인 ‘댜나(dhyāna)’를 영어로 meditation이라고 번역한 것을, 다시 일본 사람들이 명상(瞑想)이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을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넓은 의미에서의 ‘명상’은 요가의 제5, 6, 7단계를 함께 가리킨다.『요가 수트라』의 제3장 2절에서는 제5단계 ‘프라탸하라(pratyāhāra)’, 제6단계 ‘다라나(dhāranā)’, 제7단계 ‘댜나(dhyāna)’ 등의 세 단계를 통틀어 ‘명상’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보충 설명하면 『요가 수트라』에서는 요가의 점진적인 수행을 여덟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서 제5단계의 ‘프라탸하라’는 대상으로부터 감각을 철수시키는 것이고, 제6단계의 ‘다라나’는 의식을 어느 한 곳에 집중하는 것이며, 제7단계의 ‘댜나’는 그 집중된 의식을 단절 없이 지속적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져 나가게 하는 수행적인 절차이다. [George Feusestein, The Shambhala Encyclopaedia of Yoga, (Boston & London: Shambhala, 1997), pp. 88-89; 김관영, “‘명상의 어제와 오늘, 그 사회적 가능성과 문제점에 대하여’에 대한 논평문”, 불교포럼 주최, <제28차 열린토론마당 자료집>, pp. 3-4에서 재인용.]
둘째,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팔리어 ‘바와나(bhāvanā)’를 영어로 옮긴 것이다. bhāvanā는 동사 bhāveti 혹은 bhāva에서 나온 여성명사이다. 이 bhāvanā는 ‘마음의 계발’ 혹은 ‘수행’ 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The Pali Text Society's the Pali-English Dictionary(=PED.), ed., T. W. Rhys Dacids & William Stede, (London: PTS, 1921-1925), p. 503.]
다시 말해서 수행 혹은 발전, 즉 정신적 수행이나 정신적 발전을 의미하는 원어 바와나(bhāvanā)를 meditation(명상)이라고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바와나(bhāvanā)란 정확히 말하면 완전한 의미의 정신수행이다. 이것은 마음에서 욕망, 증오, 악의, 게으름, 근심, 걱정, 회의와 같은 불순함과 어지러움을 깨끗이 하고, 정념(正念), 직관, 총명, 의지, 정력, 분석력, 확신, 기쁨, 적정 등과 같은 자질을 계발하여 마침내 사물의 본성을 그대로 보고, 궁극 진리인 열반을 깨닫는 최고 지혜의 성취로 이끈다.” [Walpola Rahula, WBT. p. 67.]
따라서 영어 meditation(명상)은 원어 바와나의 의미를 완전히 살리지 못한 빈약한 번역이다. 팔리어 바와나에 해당되는 가장 적합한 우리말은 ‘수행(修行)’이다. 그래서 필자는 위빠사나 명상이라는 말보다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이와 같이 요가에서 말하는 명상이라는 용어와 불교에서 말하는 명상이라는 용어는 그 어원이 다를 뿐만 아니라 그 지향하는 목표도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2. 두 가지 형태의 불교수행
불교의 수행(bhāvanā)은 완전한 정신적 건강, 평형 및 적정(寂靜)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러한 불교의 수행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ā, 止, 평온함의 계발)과 위빠싸나 수행(vipassanā-bhāvanā, 觀, 통찰력의 계발)이 그것이다.
[Nyanaponika Thera,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2), p. 102.]
이것을 평온 명상(samatha-bhāvanā)과 통찰 명상(vipassanā-bhāvan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간혹 이것을 사마타-명상주제(samatha-kammaṭṭhāna, 止業處)와 위빠사나-명상주제(vipassana-kammatthana, 觀業處)로 구분하기도 한다.
[Nyanaveero Bhikkhu, "Buddhist Meditation", Weekend Insight Meditation Retreat, (Bangkok: The International Buddhist Meditation Centre, 2001), p. 34.]
평온 명상(tranquility meditation)은 사마타(고요함, 평온함)의 계발을 목표로 하고, 통찰 명상(insight meditation)은 지혜(prajnā, 般若)의 계발을 목표로 한다. 통찰 명상은 붓다께서 발견한 새로운 형태의 명상법이고, 평온 명상은 붓다 재세시 당시 인도의 수행자들에 의해 높이 발전시킨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전통이다. 붓다는 자신의 스승들로부터 평온 명상을 배워 실천했지만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에 붓다의 고유한 명상, 즉 위빠사나 명상(vipassanā-bhāvanā)을 개발했다는 것이 가장 공통적인 이야기이다. 그는 이 통찰 명상을 통해 열반에 도달했으며, 괴로움을 초월하게 되었다.
[Ethan Mills, "Cultivation of Moral Concern in Theravāda Buddhism: Toward a Theory of the Relation Between Tranquility and Insight" Journal of Buddhist Ethics, Volume 11, 2004, p.2; http://jbe.gold.ac.uk/11/mill0303.html.]
1) 사마타 수행(samatha-bhāvanā, 止)
사마타 수행은 마음을 완전히 집중하는 선정(禪定, jhāna)을 목적으로 한다. 선정은 다른 단계에서 38가지 전통적인 ‘평온함에 도움이 되는 수행의 주제(samatha-kammaṭṭhāna, 止業處)’를 체계적으로 수행함으로써 얻게 된다. 선정으로 이룬 높은 단계의 정신 통일과 고요함을 통하여 오근(五根)은 일시적으로 사라질 것이고, 선정의 첫 번째 단계에서는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는 개념적이고 추론적인 생각도 다음 단계에서는 완전히 사라진다. 위의 사실로 봤을 때 불교에서 사마타 수행 즉 선정은, 단지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고, 그 자체는 위빠싸나처럼 해탈의 최고 목표로 이끌 수 없다. 이러한 선정의 상태가 나타난 뒤에는 위빠싸나를 계발하는 수행을 계속해야 한다. [Nyanaponika Thera, The Heart of Buddhist Meditation (Kandy: Buddhist Publication Society, 1992), p. 102; 냐나포니카 지음․송위지 옮김, 불교 선수행의 핵심(서울: 시공사, 1999), pp. 113-4.]
이 사마타 수행의 간단한 응용과 실천으로 획득할 수 있는 효과는 대략 다음과 같다. 즉 ① 깊은 육체적 휴식과 이완(긴장을 풂), 그리고 육체적 건강 증진, ② 완전한 정신적 휴식과 함께 높은 단계의 행복, ③ 완전한 자유의 마음 획득, ④ 기억력 강화, ⑤ 정진력 증대, ⑥ 보다 효과적인 작업 성취, ⑦ 창의적이고 창조적인 지혜, ⑧ 삶의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한 건전하고 효과적인 출구, ⑨ 미묘한 평온과 행복 등을 얻게 된다. [Archan Vinal Ussivakul, An Introduction to Buddhist Meditation for Results, (Bangkok: Buddhist Study and Development Centre, 1996), p. IV.]
2) 위빠싸나 수행(vipassanā-bhāvanā, 觀)
선정에서 나타나는 정신적 현상과 그것이 근거하는 육체적 과정은 위빠싸나에서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라는 삼법인(三法印)으로 분석되고 명확해진다. 수행에서 그 절차는 수행의 경험을 추론적이고 환상적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도와준다. 위빠싸나를 훌륭히 행함으로써 도달할 수 있고 또 도달해야 하는 선정을 근행정(近行定, upacāra-samādhi)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개괄적인 사유[尋]과 분석적인 사유[伺]는 계속된다. 그러나 정신 집중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다양한 대상으로 쉽게 전환되지는 못하고 차근차근 효과적으로 집중을 향해 나아간다. 경전에서 가장 빈번하게 설명되는 것은 사마타와 위빠싸나가 결합된 수행이다. 하지만 우리는 나중에 청정한 위빠싸나(sukkha-vipassanā, 乾觀)라고 하는 방법이 자주 언급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먼저 선정을 증득하지 않은 채 직접 전문적인 명상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 획득할 수 있는 효과는 다음과 같다. 즉 ① 삶에서 ‘무지의 어둠[無明]’을 쫓고 ‘지혜의 밝음’을 배양한다. ② 삶의 잘못된 견해의 근절, ③ 생활 속에서 불쾌한 느낌이나 고통을 증폭시키는 요인 제거, ④ 정신적 방황과 고통의 경감 획득, ⑤ 유익한 기억력 증진과 고조 획득, ⑥ 극도로 해로운 기억력에 효과적으로 대응 가능, ⑦ 가장 완벽한 자유의 최고 경지의 마음 획득, ⑧ ‘완전한 행복’(열반)의 증득으로 이끄는 완전한 깨달음의 실현 등이다.
[Archan Vinal Ussivakul, op. cit., p. V.]
3) 사마타(止)와 위빠싸나(觀)의 관계
냐냐포니카의 견해에 따르면, 본래 청정한 위빠싸나 쪽에 치우친 수행자가 아니라면 위빠싸나를 체계적으로 수행하기에 앞서 선정을 증득해야 한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선정을 통해 마음은 상당히 집중되고 청정해지고 고요해지며 직관의 잠재된 근원 깊숙이 도달할 것이다. 선정을 통한 준비 과정 덕분에 위빠싸나 수행 기간은 더 짧아지고 확고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그러므로 정말로 자신이 수행을 빨리 진척시킬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호흡에 대한 염(念)과 같이 선정을 증득하는 데 도움이 되는 ‘수행의 근본 주제(mūla-kammaṭṭāna, 根本業處)’를 선택할 때에도 신중할 것이다. [Nyanaponika Thera, op. cit., pp. 102-2.]
또한 냐나포니카는 호흡에 대한 염(念)을 설명하면서 “만일 수행자가 고요함의 단계에 도달한 이후에 위빠사나의 올바른 길로 가기를 원한다면 특히 호흡의 시작과 끝 단계에 확실히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염처의 부수적이고 일반적인 모든 대상은 조심스럽게 수행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선정의 계발과 위빠사나의 계발 사이에는 단지 약간의 집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라고 말했다. [Nyanaponika Thera, op. cit., p. 111.]
이러한 불교명상의 두 가지 형태에 관해 언급한 학자 그룹도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즉 한 그룹은 열반을 추구함에 있어서 위빠사나(vipassanā, 觀)는 필수적이지만 사마타(samatha, 止)는 필수적이지 않은 것으로 간주하고, 다른 그룹은 사마타와 위빠사나 둘 모두 필수적이라는 견해이다. [Ethan Mills, op. cit., p. 1.]
대부분의 학자들은 둘 중에서 통찰 명상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월폴라 라훌라는 평온 명상에 의해서 창조된 상태는 “마음에서 창조되고, 마음에서 만들어지며, 조건 지어진 것, 이것들은 실재, 진리, 열반과는 관련이 없다” [Walpola Rahula, op. cit., p. 68.]
라고 기술했다. 이러한 의견들은 “고요함의 역할은 통찰에 종속된 것이다. 왜냐하면 후자는 윤회의 속박의 밑바닥에 있는 무지를 뿌리째 뽑는 데 필요한 최종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 비구 보디(Bhikkhu Bodhi)에 의해서 널리 퍼졌다.
[Bhikkhu Bodhi(tr.), The Connected Discourses of the Buddha: A New Translation of the Saṃyutta Nikāya, (Boston: Wisdom Publications, 2000), p. 38.]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통찰력 명상에 의해 만들어진 실재의 진실한 본성을 통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와 같이 사마타는 열반을 위해 긴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Ethan Mills, op. cit., p. 2.]
이와 같이 사마타와 위빠싸나(止觀)의 관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지관(止觀)은 초기불교 가운데에서도 비교적 늦게 성립된 것이며 불교 이전에는 사용되지 않았다는 주장도 있으며, [中村元, “原始佛敎에 있어서 止觀”, p.36; 김준호, “初期經典에 나타난 止觀槪念” 『韓國禪學』제1호 (서울: 한국선학회, 2000), p. 285.]
지관(止觀)이 불교 이외의 명상수행과 그 차이점을 명확히 드러내주는 불교만의 독자적 선정(禪定)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武邑尙邦, “원시경전에 나타난 지관의 의미”; 위의 글에서 재인용.]
또한 잡아함 출가경(964)과 장아함 大本經 등에서 지관은 기본적인 선정법(禪定法)이며 정각(正覺)을 이루는 수단으로 서술되어 있다. 成實論에서는 보다 적극적으로 지(止)를 정(定)으로, 관(觀)을 혜(慧)로 도식화하기도 한다. [김준호, 앞의 글, p.286.]
또한 장아함 大本經 大正藏 2, p.10上-中.
에서는 지관(止觀)이 ‘정각(正覺)을 이루는 수단’으로 설해져 있다.
그 밖에도 현재 국내 학계에서는 선정(禪定) 없이도 위빠사나가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쪽과 선정 없이는 진정한 의미의 위빠사나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쪽으로 양분되어 있다.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양쪽의 견해가 팽팽하게 대립되어 있다. 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생략한다. 다만 여기서는 지관구족(止觀具足)의 이익을 언급한 『增支部』의 내용을 소개하는 것으로 만족하고자 한다.
즉 “지(止)를 닦으면 어떤 이익이 있는가. 마음이 계발된다. 마음이 계발됨으로써 어떤 이익이 있는가? 모든 욕망이 포기된다. 관(觀)을 닦으면 또한 어떤 이익이 있는가. 통찰력이 계발된다. 통찰력이 계발되면 그것은 또한 어떤 이익이 있는가. 모든 무명(無明)이 사라진다.”
[Aṅguttara-nikāya(PTS), Vol. Ⅰ, p. 61.]
이와 같이 지(止)와 관(觀)은 수행에 있어서 두 날개와 같다고 할 수 있다.
3. 위빠사나 수행의 이론과 실제
1. 사념처(四念處)의 개요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불교의 수행은 크게 사마타 수행과 위빠사나 수행 둘로 나누어진다. 좁은 의미의 위빠사나 명상은 후자에 속한다. 그런데 후자의 위빠사나 명상은 다시 두 가지 종류의 수행자로 구분된다. 즉 “위빠사나-명상주제(vipassanā-kammaṭṭhāna, 觀業處)는 다시 둘로 구분된다. 즉 ① 사마타 수행자(samatha-yānika, 止乘者), 즉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기초적인 사마타-수행주제(samatha-kammaṭṭhāna, 止業處)를 수련하는 것을 채택하는 사람이고, ② 순수한 위빠사나 수행자(suddha-vipassanā-yānika, 純毘鉢舍那乘者), 즉 열반을 증득하기 위해 기초적인 사마타-수행주제를 수련하지 않고, 곧바로 위빠사나 수행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Nyanaverro Bhikkhu, "Buddhist Meditation", Weekend Insight Meditation Retreat, (Bangkok: The International Buddhist Meditation Centre, 2001), p. 36; "Vipassanakammaṭṭhāna is again sub-divided into ⑴ Samatha-yānika, one who takes up the basic exercise of Sammakammaṭṭhāna for realising Nibbāna, and ⑵ Suddha-vipassanā-yānika, one who directly carries out the practice of Vipassanā without the basic exercise of Sammakammaṭṭhāna for realising Nibbāna."]
이것은 앞에서 언급한 사마타(止)와 위빠사나(觀)의 관계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팔리어 위빠사나(vipassanā, Skt. vipaśyanā)는 영어로 inward vision, insight, intuition, introspection 등으로 번역된다. [PED. p. 627.]
가장 좋은 번역은 insight 또는 insight meditation이다. Vipassanā의 어원은 접두사 vi에 ‘보다’라는 뜻을 지닌 passati라는 말의 명사형인 passanā로 되어 있다. vi라는 접두사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vipassanā에서의 vi는 뛰어나다(visesa)는 의미와 다양성(vividha)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뛰어난 봄, 뛰어난 관찰, 통찰 등이나, 여러 가지 방식으로 봄,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관찰함이라고 할 때의 여러 가지 방식이란 무상(無常)․고(苦)․무아(無我)라는 관점에서 모든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재성, “위빠사나의 이론”, p. 3.]
『법구경(法句經)』에 의하면 존재의 세 가지 특성[三法印]인 무상(anicca)․ 고(dukkha)․ 무아(anatta)에 대해서 지혜로써 관찰하는 것이 바로 청정(열반)에 이르는 길임을 설하고 있다.
[Dhammapada(法句經), v.277-279.]
이 법구경에서 말하는 지혜로써 관찰한다(passati)는 말이 다름 아닌 위빠사나라고 이해할 수 있다. [김재성, “위빠사나의 이론”, p. 4.]
한마디로 위빠사나는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실재(實在, reality)를 꿰뚫어 본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빠사나 명상(vipassanā-bhāvanā)도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몇 가지 계통으로 나누어진다. 현재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는 위빠사나 명상은 미얀마 마하시 계통이다. 어떠한 형태의 위빠사나 명상이든 거의 모두 염처계(念處係) 경전에 근거를 두고 있다.
[Mahāsatipaṭṭhāna Suttanta(大念處經) of the Dīgha-nikāya. Vol. Ⅱ. pp. 290-315; Satipaṭṭhāna Sutta(念處經) of the Majjhima-nikāya. Vol. Ⅰ. pp. 55-63; Kāyagata Sutta(念身經) of the Majjhima-nikāya. Vol. Ⅲ. pp. 88-97; Ānāpānasati Sutta(入出息念經) of the Majjhima-nikāya. Vol. Ⅲ. pp. 78-88; Satipaṭṭhāna Saṃyutta(念處相應) of the Saṃyutta-nikāya. Vol. Ⅴ. pp. 141-192.]
특히 『대념처경(大念處經, Mahāsatipaṭṭhāna sutta)』은 위빠사나 수행에 대한 지침서로써 가장 널리 알려진 경전이다. 이 경전에서는 네 가지 염처, 즉 사념처(四念處, cattāro satipaṭṭhāna)를 관찰할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제시해 놓았다. 『대념처경』의 서두에는 다음과 같이 설해져 있다.
비구들이여, 이것은 모든 중생들의 청정을 위한, 슬픔과 비탄을 극복하기 위한, 괴로움과 싫어하는 마음을 없애기 위한, 올바른 길에 이르기 위한, 열반을 깨닫기 위한 유일한 길이다. 바로 그것은 네 가지의 마음챙김이다. 네 가지란 무엇인가?
비구들이여, 여기 (이 가르침)에서 어떤 비구가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그는 느낌에서 느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 그는 마음에서 마음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 그는 법에서 법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열심히, 분명한 앎을 지니고, 마음챙김을 지니고, 세간에 대한 탐착심과 싫어하는 마음을 제어하면서.
[냐나틸로카 지음․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서울: 고요한 소리, 2002), pp. 129-131.]
이와 같이 사념처(四念處, satipaṭṭhāna)란 ① 몸에 대한 염처(身念處, kāyānupassanā), ② 느낌에 대한 염처(受念處, vedanānupassanā), ③ 마음에 대한 염처(心念處, cittānupassanā), ④ 법에 대한 염처(法念處, dhammānupassanā) 등을 말한다.
여기서 팔리어 사띠빳타나(satipaṭṭhāna, 念處)는 sati와 paṭṭhāna의 합성어이다. 염처계(念處係) 경전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인 사띠(sati, Skt. smṛti)는 원래 ‘기억’이나 ‘회상’의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염처계 경전에서는 염처(attentiveness, 주의 깊음)라는 의미로 주로 쓰인다. 사띠(sati, 念)라는 말은 마음챙김, 지킴, 새김, 수동적 주의 집중, 기억 등 여러 가지로 번역되고 있다. 이 용어를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위빠사나를 이해하는 방식이 약간 달라진다.
그리고 빳타나(paṭṭhāna)는 네 가지 명상의 대상인 몸․느낌․마음․법의 ‘주요 장소(padhānam ṭhānaṁ)’나 ‘적당한 장소(gocara)’로 표현한다. 이것은 ‘염처의 정진 장소’ 혹은 ‘염처의 확립’을 의미한다. [냐나포니카 지음․송위지 옮김, 불교 선수행의 핵심, p. 9-10.]
그리고 네 가지 염처(念處, satipaṭṭhāna)의 대상인 신념처(kāyānupassanā), 수념처(vedanānupassanā), 심념처(cittānupassanā), 법념처(dhammānupassanā) 등의 술어는 몸(kāya, 身)․느낌(vedanā, 受)․마음(citta, 心)․법(dhamma, 法)이라는 각각의 단어에 ‘아누빠사나(ānupassanā)가 결합된 합성어이다. ‘아누빠사나(ānupassanā)’는 ‘~을 따라서’, ‘~와 결합하여’ 등의 의미를 가진 ‘anu’와 ‘보다’라는 뜻의 ‘passati’가 결합된 ‘아누빠사띠(anupassati)’로부터 나온 명사형으로 ‘따라가며 보기, 관찰, 응시’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정준영,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 보이는 수념처(受念處)의 실천과 이해” 『불교학연구』제7호(2003, 12), p. 186 참조.]
따라서 ‘까야누빠사나(kāyānupassanā, 身念處)’는 몸에 대한 사띠(sati)의 확립이라는 의미로써 ‘몸을 따라가며 관찰한다’는 뜻이다. 나머지 세 가지 술어의 의미도 동일하다. 이러한 네 가지 염처의 내용을 요약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몸에 대한 염처(kāyānupassanā, 身念處)는 14가지 육체적인 현상에 대한 염처(마음챙김)을 말한다. 즉 육체와 그 동작(호흡, 행주좌와) 및 부정관(不淨觀)을 주제로 한 마음챙김이다. 즉 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
⑵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동작[行住坐臥]에 대한 마음챙김,
⑶ 분명한 앎[正知]을 지니고 행동;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돌아올 때, 앞을 볼 때나 주위를 돌아볼 때, (팔 다리를) 구부리거나 펼 때, (탁발을 하기 위해서) 가사를 수하고 (옷을 입고), 발우를 들 때,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 대소변을 볼 때, 가고, 서고, 앉을 때, 잠자리에 들고 잠에서 깨어날 때, 말하거나, 침묵을 하고 있을 때에도 분명한 앎을 지닌다.
⑷ 육체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킴[厭逆作意]; 신체의 31(또는 32)가지 부분에 대한 想起. ⑸ 네 가지 요소: 땅의 요소, 물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四大: 地水火風],
⑹-⒁ 9가지 묘지에서의 관찰 등이다.
둘째, 느낌에 대한 염처(受念處, vedanānupassanā)는 느낌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즉 고(苦)․낙(樂)․불고불락(不苦不樂)의 세 가지 육체적․정신적인 느낌[感受]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셋째, 마음에 대한 염처(心念處, cittānupassanā)는 마음의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이것은 8쌍으로 16가지이다. 즉
⑴ 탐욕이 있는 마음[有貪心], 탐욕이 없는 마음[無貪心],
⑵ 성내는 마음[有瞋心], 성냄이 없는 마음[無瞋心],
⑶ 어리석은 마음[有癡心],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無癡心],
⑷ 침체된 마음, 산만한 마음,
⑸ (선정으로) 커진 마음[大心], (선정 수행을 닦지 않아) 커지지 않은 마음,
⑹ (色界禪과 無色界禪 수행이) 향상된 마음, 향상이 안된 마음,
⑺ (선정에 의해) 잘 집중된 마음, 집중이 안된 마음,
⑻ (선정 수행에 의해 일시적으로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진 마음[解脫心], 자유로워지지 않은 마음[非解脫心]을 (있는 그대로) 안다.
넷째, 법에 대한 염처(法念處, dhammānupassanā)는 다섯 가지 육체적․정신적 현상에 대한 마음챙김이다. 즉
⑴ 다섯 가지 덮개[五蓋; 욕망, 분노, 혼침과 졸음, 들뜸과 우울, 회의적 의심],
⑵ 오온(五蘊; 色․受․想․行․識),
⑶ 십이처(十二處; 眼耳鼻舌身意와 色聲香味觸法),
⑷ 칠각지(七覺支; 念, 擇法, 精進, 喜, 輕安, 定, 捨),
⑸ 사성제(四聖諦; 苦集滅道) 등이다.
위에서 살펴본 네 가지 염처 중에서 다른 세 가지는 생략하고, 몸에 대한 염처(身念處, kāyānupassanā)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위빠사나 명상에서 가장 초보적이고 중요한 것이 바로 몸에 대한 염처이기 때문이다.
2. 몸에 대한 염처(身念處, kāyānupassanā)
이 몸에 대한 염처(kāyānupassanā, 身念處)는 초심자의 첫 단계에서부터 최고 목표에 이르기까지 수행 전체를 통해서 위빠사나를 체계적으로 계발하는 데 이바지한다. 몸에 대한 염처의 원리를 터득하면 다른 세 가지 염처(受念處, 心念處, 法念處)는 저절로 알게 된다. 그래서 경전과 주석서에서는 몸에 대한 염처를 강조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염처를 계발하고 자주 수행하는 사람이면 그 자신을 포함해서 어디에나 그 가운데 지혜로 이끄는 모든 이로움이 있다. [Majjhima-nikāya No.119, Kāyagatāsati Sutta(身行念經).]
만일 몸이 (수행을 통해) 정복되지 않는다면(abhāvito) 마음도 정복되지 않을 것이다. 몸이 정복된다면 마음도 정복될 것이다. [Majjhima-nikāya No.36, Mahāsaccaka Sutta(薩遮迦大經).]
그런데 몸에 대한 염처는 곧 ‘호흡에 대한 염(ānāpānasati, 安般念)’을 말한다. 이러한 호흡에 대한 염에 대하여 『대념처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비구들이여, 여기에 어떤 비구가 숲 속에 가거나 나무 아래에 가거나 빈방에 가서, 다리는 가부좌를 틀고 상체를 곧 바로 세우고 전면에 마음챙김을 단단히 하여 앉는다. 그리고는 마음을 챙겨서 숨을 들이쉬고 마음을 챙겨서 숨을 내쉰다.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pajānāti),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sikkhati),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마치 도공이나 그의 제자가 원반을 돌릴 때, 오랫동안 돌리면서는 ‘오랫동안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며, 짧게 돌리면서는 ‘짧게 돌린다’라고 알아차리는 것과 같이, 바로 이처럼 비구들이여, 숨을 길게 들이쉬면서는 ‘길게 숨을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길게 내쉬면서는 ‘숨을 길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숨을 짧게 들이쉬면서는 ‘숨을 짧게 들이쉰다’고 알아차리고, 숨을 짧게 내쉬면서는 ‘숨을 짧게 내쉰다’고 알아차린다. 그리고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들이쉬리라’고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온 몸을 파악하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한다. ‘(호흡이라는) 육체의 작용[身行]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들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하며, ‘육체의 작용을 안정시키면서 숨을 내쉬리라’며 마음을 다지면서 수행을 한다.
이와 같이 그는 내적으로, 또는 외적으로, 또는 내외적으로,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생겨난 현상이)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몸에서 현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또는 그에게 ‘몸이 있다’ ‘몸이 있다’라는 것은 오직 육체적인 현상만이 있지 거기에 중생, 인격체, 여자, 남자, 자아는 없다는 뜻이다. 즉 몸에는 자아에 속한 것이나, 자아나, 인격체에 속한 것은 없다는 의미이다.
라고 하는 마음챙김이 분명하게 확립된다.
바로 이 마음챙김은 분명한 앎을 얻기 위한 것이며, (현상들에 대해서) 놓침이 없는 알아차림을 얻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음이 기울어져 의지하는 것이 없이 지내며, 그 어떠한 세간적인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비구들이여, 몸에서 몸을 관찰하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냐나틸로카 지음․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 pp. 131-3.]
이와 같이 호흡에 대한 마음챙김[出入息念]은 가장 중요한 수행방법 가운데 하나이다. 이 방법은 위빠사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 단계나,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을 계발하는 방법이나 위빠사나와 사마타의 양쪽을 닦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될 수 있다. 지금 이 『대념처경』에서의 출입식념은 위빠사나 수행을 닦기 위한 예비단계로서의 마음집중과 고요함을 얻기 위해서 제시되었다.
정기적인 출입식념의 수행을 통해서 어느 정도의 마음의 고요와 마음집중(사선 가운데 한 가지의 선정)을 얻은 후, 수행자는 호흡의 시작(origin of breath)을 검토한다. 그는 사대(四大; 地水火風)와 다섯 감각기관과 같이 사대에서 파생된 여러 가지 물질적인 현상에 의해 구성되어 있는 육체[色]에 의해서 호흡이라는 현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진 인상[觸]으로부터 인식[識]이 생겨나고, 이 인식과 함께 오온(五蘊)의 나머지 세 가지 요소인 느낌[受], 표상작용[想], 의지작용[行]이 생겨난다는 사실도 통찰하게 된다.
따라서 수행자는 이른바 인격체라고 불리는 에고라는 실체 또는 자아는 어디에도 없으며, 존재하는 것은 다만 여러 가지 요건에 의해서 조건 지워져 있는 육체와 마음의 흐름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본다. 그런 후, 그는 이러한 현상들에 대해서 세 가지 특성을 적용시켜서, 그것들은 전적으로 무상하며, 괴로움이며, 영원한 실체가 없음을 이해하게 된다. [냐나틸로카 지음․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 pp. 133-5.]
호흡에 대한 염[出入息念]은 마음챙김의 수행이지 힌두 요가의 조식법(調息法, prāṇayāma) 같은 ‘호흡 연습’이 아니다. 불교 수행에서는 호흡을 ‘머금은 채 가만히 있다거나’ 다른 방식으로라도 호흡을 방해하는 일이 없다. 단지 호흡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확고하게 하고 안정되면서 동시에 편안하고 ‘경쾌하게’, 즉 긴장하거나 경직되지 않고 조용히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일 뿐이다. 호흡의 길고 짧음에 주목하기는 하나 의도적으로 규칙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규칙적인 수련에 의해서 호흡이 자연스럽게 안정되고 고르고 깊어질 것이다. 그리고 호흡이 안정되고 고르고 깊어지면 삶의 리듬 또한 안정되고 고르고 깊어지게 된다. 이렇게 호흡에 대한 염은 비록 이것이 부수적인 수련에 불과하지만 육체적․정신적 건강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냐나포니카 지음․송위지 옮김, 불교 선수행의 핵심 . p. 71.]
한편 맛지마 니까야(Majjhima-nikaya, 中部)의 『신념경(身念經, kāyagatāsati sutta)』에서는 ‘몸에 대한 염처[身念; kāyagatāsati]’의 열 가지 이익이 제시되어 있다.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身念, kāyagatāsati)을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확고하게 하며, 강화시켜, 잘 수행한다면, 다음의 열 가지 이익이 기대된다.
① 불쾌함과 즐거움을 제어하게 되어 불쾌함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불쾌함이 생겨날 때 (즉각 알아차림으로써) 불쾌함을 극복하며 지낸다.
② 공포와 두려움을 제어하게 되어 공포와 두려움이 그를 정복하지 못하게 된다. 공포와 두려움이 생겨날 때 (즉각 알아차림으로써) 공포와 두려움을 극복하며 지낸다.
③ 추위와 더위, 배고픔과 갈증, 등에, 모기, 바람, 햇빛, 기어 다니는 벌레 등과 접촉할 때 견디어 내게 되며, 험담이나 불쾌한 말, 고통스럽고 통증이 심하며, 살을 애는 듯한 괴로움이나, 뼈를 깎아내는 듯한 괴로움, 의견의 불일치, 고뇌 그리고 생명에의 위협을 견디어 내게 된다.
④ 어려움이나 곤란함 없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서 네 가지 마음집중[四禪]을 얻을 수 있다, 사선은 마음이 정화된 높은 경지이며, 사선을 얻으면 바로 여기에서 안락하게 지내게 된다.
⑤ 여러 가지의 신통력을 얻게 된다. 몸이 하나의 상태에서 여럿이 되기도 하며, 여럿인 상태에서 하나로 되기도 한다.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도 하며, 벽이나 사방이 가로막힌 곳을 가로질러 아무런 장애 없이 통과하기도 하고, 마치 빈 공간을 지나가듯이 산을 뚫고 지나가며, 마치 물 속으로 잠수하듯이 땅 속으로 들어가며, 마치 땅 위를 걷듯이 물위를 빠지지 않고 걸어간다. 가부좌를 한 채로 새처럼 공중을 날아가며, 손으로 달과 태양을 만질 정도로 신통력이 생긴다. 범천의 세계와 같이 멀리 떨어진 곳에까지 그의 신통력이 미치게 된다.[神足通]
⑥ 인간의 귀를 뛰어넘는 청정한 천상의 귀(청각기관)로 천상과 인간세계의 소리를 듣는다. 멀리서 나는 소리나 가까이에서 나는 소리나.[天耳通]
⑦ 다른 존재나 다른 사람의 마음을 마치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처럼 이해하게 된다. 그는 (다른 사람의) 탐심에 물든 마음을 탐심에 물들어 있다고 알며, 탐심이 없는 마음을 탐심이 없다고 안다. 성내는 마음을 성내는 마음이라고 알며 성냄이 없는 마음을 성냄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마음을 어리석음에 덮여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을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이라고 안다. 인색한 마음을, 인색한 마음이라고 알며, 인색한 마음이 없어지면 인색한 마음이 없어졌다고 안다. (색계와 무색계의 선정에 의해) 고양된 마음을 고양된 마음이라고 알며, 고양된 마음이 없으면 고양된 마음이 없다고 안다. 보다 뛰어난 마음을 뛰어난 마음이라고 알며, 보다 뛰어난 마음이 없으면 보다 뛰어난 마음이 없다고 안다.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을 집중이 되어 있는 마음이라고 알며, 집중이 안된 마음을 집중이 안된 마음이라고 안다. (번뇌에서 벗어나) 해탈한 마음을 해탈한 마음이라고 알며, 해탈하지 못한 마음을 해탈하지 못한 마음이라고 안다.[他心通]
⑧ 자신의 수많은 과거 전생에 대해서 기억한다. 즉, 한 생이나 두 생 … 등등의 과거생의 자신의 이름, 태생, 모습, 생전의 경험 내용,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 등을 기억하게 된다.[宿命通]
⑨ 인간의 눈을 뛰어넘는 청정한 천상의 눈(시각 기관)으로 뭇 중생들이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본다. 좋은 곳에 태어나는가 나쁜 곳에 태어나는가, 잘 생겼는가 추하게 생겼는가,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보게 된다. 이처럼 그는 중생들이 자신의 행위[業]에 따라서 받게 되는 삶의 양태를 알게 된다.[天眼通]
⑩ 모든 번뇌를 없애 버려서, 번뇌가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의 해탈을 바로 이 생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증득해서 깨달아 완성을 이루어 지낸다.[漏盡通]
비구들이여, 몸에 대한 마음챙김을 거듭 닦고, 향상시키며, 계발하고, 수레(수행법)로 쓰며, 기반으로 하고, 확고하게 하며, 강화시켜, 잘 수행한다면, 위와 같은 열 가지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냐나틸로카 지음․김재성 옮김, 『붓다의 말씀』, pp. 151-4.]
위에서 언급한 열 가지 몸에 대한 마음챙김의 이익 가운데 뒤의 여섯 가지(5에서 10까지)의 이익은 여섯 가지 신통[六神通]을 말한다. 이 가운데 앞의 다섯 가지 신통은 (번뇌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세간적인 조건들이어서 범부들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의 여섯 번째의 누진통은 (번뇌를 모두 제거한) 출세간적인 신통력으로서 아라한만이 지니는 덕목이다. 네 가지의 마음집중[四禪]을 이룬다면 다섯 가지의 세간적인 신통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신통력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서 네 가지 신족(神足)이 있다.
3. 위빠사나 수행의 핵심
통찰 명상은 마음의 집중 즉 심일경성(心一境性)을 점진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토대로서 평온 명상의 기법을 사용한다. 그러면 알아차림이 확대되어 사유, 감정 혹은 감각적 인상 무엇이든 상관없이 현재 발생한 모든 일을 포함하게 된다. 위빠사나는 실제 하나의 기교가 아니고 하나의 태도이다. 이것은 편향이나 편견 없이 현재 일어난 모든 일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사마타 명상과 위빠사나 명상 둘 모두에서 마음은 대상을 향한다. 위빠사나의 주된 대상은 행선[行禪] 시에는 발의 움직임이고, 좌선[坐禪] 수행 시에는 호흡 중 복부가 오르내리는 움직임이다. 마음은 복부의 움직임이 가장 명확한 지점에 초점을 맞춘다. 이곳은 대개 배꼽 아래로 약 2㎝ 지점이다.
위빠사나 명상의 목적은 집중력을 계발하여서 대상이 나타나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을, 즉 그 대상의 본질적 특성을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시간동안 명확한 알아차림 속에 집중력의 대상을 유지시킬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한 알아차림, 즉 판단이나 정서적 반응 없는, 편향과 편견 없는 알아차림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대개 감각적 인상이 일어나면 반응이 수반된다. 이 반응은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일 수도 혹은 무관심한 것일 수도 있다. 만일 초콜릿 케이크 한 조각을 본다면,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 수반될 것이다. 당신은 그것이 먹고 싶을 것이다. 만일 열린 하수구에서의 냄새와 같은 악취를 알아차리게 되면, 당신은 그곳을 피하길 원하고,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려 할 것이다. 이것 또한 반응이다. 만일 당신이 일정한 유선으로 방송되는 배경 음악이 있는 백화점 안에 있다면 무관심한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우리가 목표로 하는 위빠사나에는 그런 것들이 없다. 위빠사나는 모든 반응들을 초월하는 태도이다. 위빠사나는 마음의 평정(平靜)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위빠사나는 반응 없이 일어나는 순간에 사유와 감정 그리고 모든 감각적 인상들을 알아차리는 것을 의미한다.
명상자는 감각적 인상이 깨달음이 되게 하며 어떤 것을 배제하거나 어떤 것에 집착하려고 시도하지도 않고 살다가 죽는다.
위빠사나 명상은 거부함이 아님을 강조해야만 하겠다. 감각적 인상, 사유와 감정들이 일어나게 함은 이들을 사라지게 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마음이 감각적 인상으로부터 선정(禪定)의 상태라고 불리는 해탈의 경로로 들어가는 사마타 명상과는 같지 않다.
의지의 작용만으로 이러한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실질적으로는 불가능하다. 우리는 단순한 알아차림을 계발하기 위해서 마음을 단련할 필요가 있다. 처음 사용할 방법은 명상 중에 어떤 소리를 알아차리게 되는 예처럼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정신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당신은 에어컨의 부드러운 윙윙거림이나 자동차 급정지시의 귀에 거슬리는 날카로운 소리를 알아차리게 될 것이다. 어느 경우든, 그 소리가 쾌적하거나 불쾌하거나 상관없이, 당신은 이를 같은 방식으로 다룬다. 당신의 귀에 알아차림을 두고 마음속으로 “들림, 들림, 들림”이라고 말한 다음 주요 대상 즉 복부의 오르내리는 운동이나 발의 움직임에 당신의 주의력을 돌려라. 만약 고통이나 가려움의 감각이나 만족감이나 평온감이 있다면, 주의력은 감각이나 감정을 경험하는 신체의 부분에 초점을 맞추고 “느낌, 느낌, 느낌”이라는 정신적 인정을 한다. 감각은 대개 자발적으로 줄어들거나 완전히 사라져 버린다. 때로 세 가지 이상의 인정을 할 필요가 있다.
만약 아픔의 느낌을 참을 수 없으면, 당신은 움직일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움직이고자 하는 욕망을 알아차릴 필요가 있다. 마음속으로 “움직일 것임”이라고 말하라. 그리고 나서 당신의 발을 움직이거나 당신이 아픔을 느끼는 부위 어디이든 마음속으로 “움직임, 움직임, 움직임”, “앉음, 앉음, 앉음”이라고 말하라. 제거되었다는 느낌이 일어나면, 당신은 “느낌, 느낌, 느낌”이라고 정신적으로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중요한 주제에 대한 당신의 집중으로 다시 되돌아가라.
위빠사나는 깨달음으로 가는 곧은길이다. 위빠사나는 당신이 우주의 진실한 본성을 깨닫도록 도와 줄 수 있을 것이다. 위빠사나 즉 통찰 명상을 실천하면, 당신은 변화하는 존재의 본성을 깨닫게 된다. 당신은 지각력을 향상시켜서 지각의 매 순간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고, 삶에 만연한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하지만 이 단계의 지각은 대체로 당신이 처음 수행할 때는 나타나지 않는다. 시간이 들게 된다. 집중력을 구축하고 마음을 계발할 필요가 있다.
위빠사나는 우리로 하여금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삶을 경험하게 해준다. 위빠사나는 우리로 하여금 “볼 때는 보고, 들을 때는 들을 수” 있게 해준다. [Acharn Helen Jandamit Sadharma, “An Introduction to Vipassana Medetation”, Weekend Insight Meditation Retreat, (Bangkok: The International Buddhist Meditation Centre, 2001), pp. 5-6.]
4. 나가는 말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위빠사나 명상은 대상과 심리적인 상태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 고요히 대상을 응시하는 것이다. 이것만으로 바로 모든 번뇌를 여의고 궁극의 경지로 갈 수 있다.
요가는 감각을 제어하기 위한 다양한 몸동작과 호흡법을 통해 궁극의 경지에 나아갈 것을 요구한다. 간화선은 하나의 화두에 모든 의식을 집중시켜 불퇴전의 분심으로 물고 늘어져 모든 번뇌를 한 번에 부수고 깨달음을 이루는 역동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위빠사나는 이런 요가의 다양성이나 간화선 같은 역동성은 없다. 다만 고요하게 지켜보고 관찰하는 것. 이것만이 위빠사나 수행법의 모든 것이다. 그러나 고요히 지켜보는 가운데 혼탁한 물이 잠잠해 지면 더러움은 가라앉고 본래 그 물 색깔을 드러내듯이 사물의 본래 면목은 드러나고 불교의 삼법인(三法印)의 이치가 또렷이 자각되는 것이다.
불교에 의하면 마음은 악의 충동과 번뇌로 가득한 저장소이다. 이러한 영향으로 외적인 마음과 그 사고는 진행된다. 이것은 왜 마음이 절대적으로 정지 상태로 있지 못하고 언제나 움직이고 있는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어떤 생각, 느낌이나 지각은 매 순간 매 초마다 다른 곳으로 달아나 버린다. 명상은 내적인 계발로 이끄는 마음을 지배하고 정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끝으로 지면 관계로 사념처(四念處) 중 느낌에 대한 염처(受念處), 마음에 대한 염처(心念處), 법에 대한 염처(法念處) 등에 대하여 자세히 다루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의 ‘위빠사나 명상의 핵심’은 위빠사나 명상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위빠사나 명상에 관한 구체적인 실천 방법은 너무 번잡하여 생략하였지만, 실습을 통해 직접 체험할 수 있도록 지도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