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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국 시인선2)
비운의 황토시인 백석
지방적, 토속적인 것에 집중하여 향토색 짙은 특이한 경지를 개척한 시인이며, 詩에 평안도 사투리를 넣기도 하고 서사를 넣은 이야기 시를 구사하기도 했다. 근대 한국시단에 막중한 발자취를 남겼음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북한에 남으면서 천재성을 발휘하지 못하고 잊혀져버린 비운의 시인이다. 자신의 고향에 머물렀을 뿐이지만 동란 후 월북시인 취급이 되어 남한에서도 작품들이 공개되지 못했고, 북한에서조차 철저히 버림받았다. 그러나 그가 남긴 시들은 독특하면서도 뛰어나 1988년 월북 작가 해금 이후 연구자와 시인, 그리고 일반대중들에게 널리 퍼지며 갈수록 큰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다.
1. 탄생과 성장
1912년 7월 1일, 평북 정주군 갈지면 익선리(현 정주시 오산동)에서 아버지 백시박白時璞과 어머니 단양이씨 이봉우李鳳宇 사이에서 3남 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은 수원(水原)이며 호는 백석(白石), 본명은 백기행이다. 시인이었던 아버지가 37세가 되어서야 어렵게 얻은 자식 중 장남으로 태어나 1918년 평북 정주 오산소학교 입학, 1929년 오산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다. 아버지 백시박은 당시로써는 드물게 사진 기술을 가지고 있어, 조선일보에서 사진기자로 근무하면서 사진반장을 지내다 고향으로 낙향했다. 졸업 후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있다가 1929년 조선일보 후원 장학생선발시험에 붙었고, 당시 사주였던 방응모의 후원을 받아 이갑섭, 문동표, 정근양과 함께 당시 일본에서 학비가 제일 비싸다는 아오야마학원 전문부 영어사범학교에 입학한다. 백석은 공부에만 전념하며 어학을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 영어 마스터, 2학년 프랑스어, 3학년 러시아어를 집중 공부했다고 한다. 특히 교내의 교회에서 외국인 교수들과 자유로이 영어로 대화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아오야마 학생들에게 경이감을 선사할 정도로 유창했다고 한다. 정작 영어사범 전공이면서도 정식 수업은 독일어를 들었고, 독일어 교수는 그를 무척 아끼며 애제자로 여겼다고 한다. 그 시절에는 보기 드물게 180cm정도의 훤칠한 키를 가진 댄디보이형의 외모였지만 성격은 소심하고 내성적이어서 많은 친구를 사귀지 않았다. 백석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귀국한다.
2. 문학 활동과 삶의 행로
힘든 유학생활 속에서도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그 모(母)와 아들』이 당선되어(농촌에서 일어난 남녀의 불륜을 공동체의 소문형식으로 그려낸 수작이며, 조숙한 솜씨로 인간의 욕망을 다루었다.) 등단했다. 귀국 후 1934년 조선일보에 입사했으며 1935년 시 「정주성定州城」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시단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출판부로 자리를 옮긴 시인은, 잡지 〈조광〉창간에 참여해 발간 1주일 만에 3만부 매진되는 성공을 거뒀다. 〈조광〉 창간호에 본인의 수필 「마포」를 발표했다. 잡지 편집자로 인정받은 백석은 〈조광〉에 이어 〈여성〉 창간작업에도 투입되었으며, 안톤 체호프 등의 작품을 번역해 신문에 싣기도 했다.
1936년 첫 시집 《사슴》을 단 100부의 한정판으로 고급스럽게 자비 출간한다. 백석은 신문사 번역 일을 하는 틈틈이 준비한 초기작 33편을 담은 시집으로 문단에서 큰 호평을 받게 된다. 당시 시인과 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를 지내던 김기림이 조선일보에 그의 서평을 실었다. “『사슴』의 세계는 시인의 기억 속에 쭈그리고 있는 동화와 전설”라면서도 “주착없는 일련의 향토주의와는 명료하게 구별되는 ‘모더니티’를 품고 있다”고 평가했다. 신경림의 경우 우연히 헌책방에서 『사슴』을 구입한 후 매일 안고 다니면서 줄줄 욀 정도로 반복해 읽었고, 윤동주의 경우 구할 길이 없어 연희전문도서관에서 노트에 시를 베껴서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노천명의 시 「사슴」 역시 백석의 별명이었던 『사슴』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진다.
1937년 백석은 「통영」, 「오리」, 「탕약」, 「연자ㅅ간」, 「황일」 등을 조선일보에 발표하고 1937년 〈조광〉에「함주시초咸州詩抄」 연작시를, 〈여성〉에 산문 「가을의 표정-단풍」을 발표한다. 시집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본격적인 詩 창작에 몰두하기 위해 4월 함경북도 함흥으로 내려가 영생여고보의 영어교사로 옮긴다. 1938년 학교를 사임하고 서울로 와서, 다시 〈여성〉의 편집을 맡는다. 〈조광〉에 「산중음山中吟」 연작시와 「물닭의 소리」 연작시, 〈삼천리문학〉에 「석양」, 「고향」, 「절망」, 〈여성〉에 「설문답」, 「내가 생각하는 것은」, 「가무래기의 약」, 「멧새 소리」 등을 발표하고, 〈현대문학전집〉에 「외가집」, 「개」와 〈조선문학독본〉에 「고성 가도固城街道」, 「박각시 오는 저녁」 등을 수록한다. 1939년 조선일보에 산문 「입춘」과 연작시 「서행시초西行詩抄」와 시 「안동」을 〈문장〉에 「함남도안咸南道安」, 「동뇨부童尿腑」, 「넘언집 범 같은 노큰마니」 등을 내놓은 그는 1940년 〈조광〉에 「목구木具」, 「북방에서」, 「허준許浚」 등을 발표한다.
1940년 1월 만주 신징新京에 도착한 백석은 러시아어를 할 수 있어 만주국 경제부에 측량보조원으로 일을 하며, 낮에는 만주국 국무원 경제부의 통역으로 일을 하며 시작詩作과 직장 일을 충실히 병행한다. 시간을 쪼개 테스까지 완역한다, 〈인문평론〉에 「수박씨 호박씨」를 발표하고, 〈조광〉에 토마스 하디 원작의 『테스』를 번역해 발간하였다. 측량 서기와 측량 보조원으로 일을 하며 1941년 그는 〈조광〉에 시 「국수」, 「흰 바람 벽이 있어」, 「촌에서 온 아이」, 〈인문평론〉에 「두보나 이백같이」, 「귀농」 등을 발표한다. 1942년 안둥安東의 세관으로 직장을 옮기고 ‘엔 페아코프’의 원작소설 「밀림 유정」을 번역한다. 해방 후 신의주로 귀국했다가, 고향 평안북도 정주로 돌아온 백석은 그곳에서 남북분단을 맞는다. 즉 북한 사람이 되었다.
당시 백석은 신의주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고향 정주로 갔고 1947년 〈신천지〉에 「적막 강산」, 〈신한민보〉에 「산」을 발표하고 1948년 〈신세대〉에 「마을은 맨천 구신이 돼서」, 〈학풍〉에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문장〉에 「칠월 백중」 들을 발표한다.
8.15 광복 후에는 스승 조만식의 부름을 받고, 평양에 머무르면서 비서 겸 통역으로 조만식을 도왔다. 그러나 조만식선생이 연금 당한 후 부터는 러시아문학 번역과 아동문학(특히 동시)에 천착하며 정치와는 거리를 두었다. 전쟁 중 서울이 북의 손에 떨어지자 월북한 문인들이 서울로 와 정치 선동에 참여했지만, 백석은 일체 참여하지 않았다. 이때가 1년에 10권씩 번역하던 시기, 그것도 최고의 수준으로 번역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렇듯 백석은 창작을 쉬지 않고 해방 전 후까지 50여 편의 시를 여러 잡지를 통해 발표했지만 하나로 엮지는 못했다. 아버지가 출타 중인 깊은 밤 어두운 산속에서 들리는 짐승의 울음소리, 아버지와 오리사냥을 갔던 추억, 소박한 집성촌 사람들의 구구절절한 사연들이 지역사투리로 서정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그려진 『사슴』이 백석의 유일한 시집이었다. 해방 이후 북에서는 수많은 번역에 집중하였다. 주로 러시아문학에 집중하였고, 일부 프랑스 문학과 중국문학도 번역했다고 전해진다. 일본에서 유학 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일본어 공부는 게을리 했다고 한다. 문예활동에도 전념하며 지냈으나, ‘사상 이외 문학성도 중시해야 한다.’는 그의 논조(1959년 ‘붉은 편지 사건’)이후 당성이 약한 인민으로 분류되어 문단에서 숙청당했다. 이후 량강도 삼수군의 한 협동농장에서 돼지와 염소를 치는 농부로 일을 하면서도 청소년을 대상으로 과외 지도를 하며 여생을 보냈지만, 문단에는 다시 복귀하지 못하고 쓸쓸히 살다가 199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2. 백석의 사랑
백석과 자야(김영한)의 연애사가 유명하지만 또 다른 순애보도 있다. 1935년 여름 친구 허준의 결혼축하회식을 위해 통영을 방문한 자리에서 박경련이라는 여인에게 한눈에 반하고 만다. 또 다른 친구 신현중의 누나가 교사였는데 박경련은 그녀의 제자였다. 조선일보에 신춘기행시를 쓴다는 핑계로 통영까지 세 번이나 내려가는 등의 정성을 기울였지만 만나지 못하고 왔다고 한다.
‘란’ 이라는 애칭으로 그녀를 그리는 통영이라는 시를 여러 편 남겼다. 백석은 란과 결혼하기 위해 그녀의 어머니에게 승낙을 받으려했다. 란의 어머니는 그에 대해 백석의 친구인 신현중에게 물었고 신현중은 백석의 아버지는 시인이었지만 어머니는 기생출신이라는 것을 말했다. 열렬히 사랑했지만 결국 결혼승낙을 받지 못했고 1936년 친구 신현중이 란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배신감을 느끼고 좌절했다.
그의 앞에 자야(김영한)가 나타난다. 유복한 집안이었으나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고 금광사업에 빠진 친척의 반 강제적인 빚보증과 사업실패로 집안이 몰락한 후 15살의 나이에 나이어린 신랑에게 팔려가게 된다. 그러나 우물 옆에서 빨래하는 사이 남편이 우물에 빠져죽는 비운을 맞는다. 친구의 언니가 기생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는 것을 본 그녀는 16살에 기생이 된다.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빈가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당시 전국적인 문예지인 “삼천리문학”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문재를 겸비해 노래와 춤만이 아니라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뛰어난 재능이 있는 미모의 기생이었다. 김영한은 23살에 흥사단에서 만난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동경유학까지 떠나게 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함흥감옥까지 왔다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대신 함흥 영생여고보(여자고등학교)교사들의 회식자리인 함흥관에서 영어교사로 근무하고 있던 백석의 옆자리에 운명적으로 앉게 된다. 백석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하여 “오늘부터 당신은 영원한 나의 마누라입니다, 죽기 전에 우리에게 이별은 없습니다” 하면서 자야(子夜)라는 애칭을 붙여주었다.
1937년 김영한이 백석의 미래를 위해 모든 미련을 놓고 홀로 서울로 떠나자, 백석은 교사생활조차 버리고 김영한을 쫓아 서울 청진동 그녀의 집으로 와 동거를 시작한다. 이후 그들은 만주와 서울을 오가며 약 3년 동안 부부처럼 살았다. 하지만 백석의 부모는 기생출신과 동거하는 아들의 결혼을 허락할 수 없었고, 고민하던 백석은 함께 만주로 도망가서 자유롭게 살자고 자야를 설득한다. 오랜 설득에 함께 숨기로 약속했던 며칠 전, 너무나 사랑하는 백석의 장래와 부모님에 대한 불효를 걱정했던 자야는 서울로 짐을 싸고 만다. 시간이 흐른 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서울로 찾아 온 백석, 한동안의 설득 후 자야가 만주로 다시 와 줄 것이라는 약속을 믿고 먼저 돌아가게 되는데 이때 만주에서 자야를 생각하며 지은 시가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이다. 영원한 이별이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눈이 푹푹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뱁새)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오막살이집)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 곤히(소리 없이) 와 이야기 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디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전문
백석은 1939년부터 1945년까지 약 5년을 이별의 아픔에 신음하며 만주를 떠돌았다. ‘흰 바람벽이 있어서’ ‘북방에서’등의 시들은 그때 쓴 시 이며, 이후에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단 한편의 시도 발표하지 못했다. 해방 후 신의주로 넘어오며 다시 문학 활동을 재개했으나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1948년 발표한 ‘남 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이후 시인 백석은 사라졌다.
사랑하는 이의 장래를 위해 눈물을 뿌리며 견딘 자야. 죽도록 그리운 백석을 생각하며 김영한은 공부를 시작해 1953년 38세의 나이로 중앙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학업도 쌓고 많은 재물을 모아 성북동 일대의 배 밭골을 사들였고 그곳에 한정식 집을 차렸다. 뛰어난 미와 재능으로 그곳을 한국 3대 요정 중의 하나인 대원각으로 키워 90년대 당시 1000억 이상을 호가하는 막대한 부를 이루었다. 소식을 알 수 없는 임을 그리며 평생을 혼자 살던 자야는 백석이 사망했다는 오보를 어디선가 듣고 그의 영생극락을 위해 기도로 날을 보낸다. 법정스님의 무소유를 읽고 강연에 심취한 자야는 백석의 영생을 위해 1000억이 넘는 대원각을 기부하였으나 법정 스님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10여 년 간의 간곡한 부탁 아래 1995년 허락을 받게 되었고, 1997년 12월 14일 한국 최고의 요정 중 하나였던 대원각이 길상사라는 사찰로 거듭나게 되었다. 대원각이 삼각산 길상사가 되던 날 그녀는 수천의 대중 앞에서 단 두어 마디 말을 했다고 한다.
“저는 죄 많은 여자입니다만… 저는 불교를 잘 모릅니다만…
저기 보이는 저 팔각정은 여인들이 옷을 갈아입는 곳이었습니다
저의 소원은 저곳에서 맑고 장엄한 범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입니다“.
간절하지만 깊은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그녀의 음성에는 사연 많은 슬픔을 넘어 위대한 비원이 담겨있었다. 백석이 죽도록 보고 싶으면 그녀는 줄담배를 피워댔다고 한다. 죽음이 임박해지자 마지막 주머니에 있던 현금 2억 원을 ‘백석문학상’기금으로 내놓았다. 1995년 “내 사랑 백석”(문학동네),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 (창작과비평)을 출간했다. 어느 날 기자가 찾아와 물었다.
1000억 내놓은 게 후회되지 않느냐고 물으니 “무슨 후회?” 라고 답했고, 언제 그 분이 생각나느냐는 물음에 “사랑하는 사람 생각하는데 때가 따로 있나?”라고 했다. 그 사람 어디가 좋으세요 라는 질문에, “1000억이 그 사람 시(詩) 한 줄만도 못해, 다시 태어나면 나도 시 쓸 거야” 라고 말했다고 한다. 같은 하늘 아래서 영영 만날 수 없는 사람, 이별의 아픔을 이겨내기 위해 생전의 자야는 백석의 생일(7월 1일)이 되면 하루 동안 일체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불사조 같은 사랑, 평생을 바친 진정한 사랑의 화신이었다. 1999년 11월 14일 육신의 옷을 벗은 그녀는 첫 눈이 순백으로 덮이는 날 길상사 뒤쪽 언덕바지에 뿌려져 그토록 사모하던 백석의 곁으로 떠나갔다. 2010년 3월 11일 법정스님이 입적한 곳도 바로 길상사다.
3. 사라진 시인, 영원한 시
북한에서 조차 버림받아 사라져 간 백석, 번역과 아동문학 정도를 간간이 발표하다가 1959년 ‘붉은 편지 사건’이후 당성이 약한 인민으로 분류되어 양강도 협동농장으로 쫒겨나 돼지와 염소를 치는 일을 영위하다가 삶을 접어갔다.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지만 향토의 서정과 토속적 사투리의 미학을 잊지 않았던, 순수하고 투명한 서정시인 백석은 천재성을 인정받지 못한 채 1996년 84세를 일기로 덧없이 사망했다. 시인은 떠났지만 그의 시들은 오랜 침묵 속에서도 살아남아 우리의 가슴속에 여전히 떨리는 감동을 전하고 있다.
참고문헌:
1. 『나는 문학이다』(장석주;나무이야기2009.09.09.)
2. 『한국민족문학대백과』.
3. 『두산백과』.
4. 『나무위키』.
5. 『한국현대시대백과』
글쓴이: 이희국 詩人(월간문예사조편집위원회장, 이어도문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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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길상사에서 법정스님의 법문 소리가 귀에 챙챙하게 들리는 것 같습니다.
좋은 자료 올려주신 이희국 회장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