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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3월 10일 주일예배 설교내용 – 마음에 받는 할례. 心に施された割礼。
본문: 로마서 2:17-29
롬 2:17 ○그런데, 그대가 유대 사람이라고 자처한다고 합시다. 그래서 그대는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율법의 가르침을 받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고 가장 선한 일을 분간할 줄 알며, 19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하며, 20 지식과 진리가 율법에 구체화된 모습으로 들어 있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스승이요 어린 아이의 교사로 확신한다고 합시다. 21 그렇다면 그대는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24 성경에 기록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그대가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그 사람은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겨질 것이 아니겠습니까? 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았더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이, 율법의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범하는 사람인 그대를 정죄할 것입니다.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갗에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 사람으로 유대 사람인 이가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17.ところで、あなたはユダヤ人と名乗り、律法に頼り、神を誇りとし、18.その御心を知り、律法によって教えられて何をなすべきかをわきまえています。19-20.また、律法の中に、知識と真理が具体的に示されていると考え、盲人の案内者、闇の中にいる者の光、無知な者の導き手、未熟な者の教師であると自負しています。21.それならば、あなたは他人には教えながら、自分には教えないのですか。「盗むな」と説きながら、盗むのですか。22.「姦淫するな」と言いながら、姦淫を行うのですか。偶像を忌み嫌いながら、神殿を荒らすのですか。23.あなたは律法を誇りとしながら、律法を破って神を侮っている。24.「あなたたちのせいで、神の名は異邦人の中で汚されてい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25.あなたが受けた割礼も、律法を守ればこそ意味があり、律法を破れば、それは割礼を受けていないのと同じです。26.だから、割礼を受けていない者が、律法の要求を実行すれば、割礼を受けていなくても、受けた者と見なされるのではないですか。27.そして、体に割礼を受けていなくても律法を守る者が、あなたを裁くでしょう。あなたは律法の文字を所有し、割礼を受けていながら、律法を破っているのですから。28.外見上のユダヤ人がユダヤ人ではなく、また、肉に施された外見上の割礼が割礼ではありません。29.内面がユダヤ人である者こそユダヤ人であり、文字ではなく”霊”によって心に施された割礼こそ割礼なのです。その誉れは人からではなく、神から来るのです。
제가 잘 아는 어떤 목사님의 경험입니다. 차를 타고 외출을 했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이들이 묻습니다. 아빠 다 왔어? 아직 좀 더 가야 돼. 얼마 안 있다가 또 묻습니다. 아빠 다 왔어?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돼. 잠시 뒤 신호에서 대기하는 데 묻습니다. 아빠 아직이야? 응, 이제 거의 다 왔어…. 그럼 나 내려도 돼?
무엇인가 거의 다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직 다 되지 않았다는 뜻이지요. 거의 다 왔다고 해도 완전히 도착한 것은 아닙니다. 웨슬리 목사님은 그의 설교에서 Almost Christian あと一歩でクリスチャン(almost christian)殆(ほとん)どクリスチャン、99%クリスチャン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거의 다 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지요. 그에 반하여 온전한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로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 본문은 명실상부한 믿음에 관하여 증언하고 있습니다. 건강한 믿음은 겉과 속에 균형이 잡혀 있는 믿음입니다. 진정으로 명예로운 삶은 겉과 속이 함께 존중을 받는 것입니다. 겉모습을 아무리 예쁘게 꾸민 그릇이라도 속에 담긴 것이 쓰레기라면 그 그릇은 쓰레기통입니다. 반면 아무리 깨끗하고 튼튼해도 쓰레기통에 음식을 담아 보관할 사람은 없습니다. 무엇이든 겉모양과 그 기능이 동일할 때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은 과연 명실상부한 믿음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을까요? 오늘 성경은 우리의 믿음을 건강하고 명실상부한 모습으로 지켜갈 수 있는 매우 의미 있는 내용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율법은 우리의 거룩함을 완성하고 지키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은 거룩하고 완전한 천국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인생의 한계이며 현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복음으로 우리를 대속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임재하시며, 동행하고 계십니다. 그 십자가 속죄의 복음과 부활 임재의 복음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절기가 사순절과 부활절입니다.
먼저 17절부터 24절까지는 율법을 안다고 자부하던 유대인들에게 하는 쓴소리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은 유대민족이라고 자랑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증거로 율법을 주셨다고 자부심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율법의 조항들을 지키는 것에 대한 긍지가 하늘을 찌르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에도 유대인들은 여전히 안식일 규정과 각종 절기 규정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먹는 것은 물론이요 입는 것과 사회생활 하는 모든 영역에서 목숨과 같이 지키는 것이 율법입니다.
이스라엘 대학에서 유학을 하던 선배 목사님께서 하신 말이 생각납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유태식 엘리베이터’가 있다고 합니다. 안식일이 되면 이 유태식 엘리베이터는 모든 층에서 자동으로 문이 열리고 닫힌다고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엘리베이터에서 단추를 누르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이토록 철저하게 율법을 지키는 이들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무척이나 이기적인 적용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마을에 아버지께 큰 유산을 받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그 유산을 받고 어떻게든 하나님께 감사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기의 몫도 잘 챙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직자들의 조언을 얻어야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것과 자신을 것을 구별하는 지혜를 묻기로 한 것입니다. 먼저 목사님을 찾아 갔습니다. 목사님은 말했습니다. 바닥에 원을 그리고 그 안으로 금화를 던져 넣으세요. 안으로 들어 가는 것은 형제님의 것이고, 밖으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하십시오. 다음으로 신부님을 찾아 갔습니다. 신부님은 말했습니다. 바닥에 선을 그으세요. 선 위로 동전을 떨어트려서 왼쪽으로 튕기면 형제님의 것이고, 오른쪽으로 튕기면 하나님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랍비를 찾아 갔습니다. 랍비는 말했습니다. 푸른 하늘이 잘 보이는 넓은 들로 나가세요. 그리고 금화를 하늘로 던지세요. 금화가 하늘에 올라가 머물면 하나님의 것이고, 땅에 떨어지면 형제님의 것입니다.
부자는 랍비의 의견을 수용하였답니다. 유머집에 있는 우스개소리이지만, 유대인들의 지혜를 비꼬는 우화입니다.
오늘 성경에서 바울도 같은 맥락으로 유대인들의 외식하는 신앙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17절 후반부터 20절까지 유대인들의 자부심을 말합니다. 과연 그들이 갖고 있는 율법은 참으로 귀하고 대단합니다. 율법을 의지하며 사는 그 신앙이 얼마나 귀하고 복된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친히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십계명부터 모세를 통해서 주신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다면 누구든 이 세상에서 살아도 천국의 복을 누리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사람들이 위인들의 행적을 따라 순례를 하기도 하고, 그의 생가에 가서 그 체취를 느껴보려 합니다. 그가 직접 쓰던 물건을 보며 감동하고 감격에 빠지기도 하지요.
초등학교 6학년 때인가요… 경기도 아산에 있는 현충사라는 곳에 갔는데 이순신 장군이 쓰던 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 그 영웅이 쓰던 칼이라고 하니 얼마나 감동이 되던지요.
그런데 하늘의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주신 명령을 받는 유대인들의 자부심은 얼마나 대단하였을까요?
율법의 능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19절에 눈먼 사람의 길잡이가 되고 어둠 속에 있는 사람에게 빛이 되어 주십니다. 실제로 그러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은혜 가운데 산다고 한다면 그럴수록, 율법의 능력과 기능을 무시하거나 경솔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난 주일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율법에 관하여, 기독교의 교리에 관하여 저와 여러분이 배우고 연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특히 음식 규정에 정해진 것을 순종하여 식생활 개선으로 아토피와 알레르기성 비염 등, 환경에 의한 질병을 단 몇 개월 안에 치료했던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신약과 더불어 구약을 함께 믿고 의지하며 삽니다. 율법에 순종하며 거룩함을 회복하려는 갈망이 생겨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해서는 그렇게 자부심을 갖고 자랑스럽게 생각하였지만, 실제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는 데에는 소홀했다는 것을 21절부터 24절까지 고발하고 있습니다.
21절부터 22절은 말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고 하지만, 몸으로는 도둑질을 하고, 간음을 저지르며, 돈을 섬겼다는 말입니다. 우상을 미워하면서 신전의 물건을 훔친다는 표현이 나오는데요. 이것은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 조각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신전에 드려진 금이나 패물, 혹은 음식에는 탐심을 갖고 있다는 말입니다.
신사에 소원을 비는 문화는 그저 전통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교인이면서도 신사의 에마를 사서 소원을 적어서 걸어 두고, 길흉을 점치기 위해서 쿠지를 뽑기도 하는 모양입니다. 어디선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지리산 밑에 아주 용하다는 점집의 단골 리스트에 유명한 교회의 집사, 권사 직분자들도 기록되어 있다는…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의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 그 어떤 우상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를 알고 계시고, 우리 안에 임재하셔서 동행하고 계십니다. 따라서 이미 우리는 더 없는 복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자신은 복도 없다고 여기고, 세속적으로 갈망하는 것이 많다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간디의 사탕 예화… 인도의 지성인이자 많은 사람들이 존경을 받는 간디가 어느 날 이웃의 아이와 그 엄마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아이가 사탕을 너무 좋아하는데 사탕을 절제없이 먹는 바람에 이가 많이 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간디 선생님이 아이에게 말을 하여 주면 사탕 먹는 것을 절제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간디는 아이와 엄마에게 내일 다시 오라고 돌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아이 엄마는 아이와 함께 다시 찾아 왔습니다. 그 때 간디는 아이를 환영하며 진지하게 사탕을 너무 많이 먹지 않도록 친절한 모습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제자가 왜 그렇게 하셨느냐고 물었습니다. 사실 그 전날 간디는 자신도 사탕을 입에 물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갈라진 목을 진정시키는 용도의 사탕이었습니다. 하지만, 자신이 사탕을 물고 있으면서 아이에게 사탕을 먹지 말라고 말할 수 없었던 간디는 실례를 무릎쓰고 아이와 엄마를 돌려 보내야 했던 것이지요.
간디의 예화에서 가르치는 사람은 언제나 먼저 가르침을 받는 이의 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 대상이 아무리 어린 아이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복음으로 사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복음으로 사는 삶에 순종해야 우리의 삶을 통해 생수의 강이 흘러 넘쳐 이웃에게 가족에게 친구에게 가 닿을 것입니다.
23절과 24절은 본을 보이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신앙과 가르침이 곧 유대인들이 믿는 하나님을 욕보이는 것이라고 고발합니다. 만일 우리도 복음을 믿는다고 하면서 여전히 탐욕적이고, 여전히 제멋대로이고, 여전히 염려하고, 여전히 낙심하고, 여전히 교만하다면 회개해야 합니다. 주님을 다시 바라보고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25절부터 28절은 할례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의학적인 의미가 아닌 영적인 의미는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고백입니다. 다시 말해 가장 개인적이며 은밀한 곳이면서 생명을 잉태하는 씨앗을 직접 관할하는 신체기관에 표식을 함으로서 생명을 함부로 여기지 않겠다는 다짐을 기억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할례는 율법으로 규정된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목숨처럼 지키라는 표식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할례의 의무는 없습니다. 대신 누구든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세례는 1차적으로 죽음과 부활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는 것으로 세속적인 것에 대해 죽음을 선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의 임재하심 가운데 영생으로 살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세례는 믿는 자의 자부심을 나타낸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성찬과 같은 거룩한 성례에는 기본적으로 세례를 받은 교인만 참석하게 되어 있습니다. 어떤 교단에서는 매 성찬 전 주일에 성찬식에서 분급을 받을 수 있는 사람과 배제되는 사람의 명부를 공개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세례는 기독교 전통에서 성도의 거룩한 삶과 존재를 증거하고 고백하는 매우 소중한 성례전입니다.
하지만, 할례나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자동으로 거룩해지고, 영생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하지요. 다시 말해 명실상부한 믿음의 일상을 견디고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들은 초코렛과 사탕, 그리고 과자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간식들이 반드시 몸에 좋은 것은 아닙니다. 단지 좋아하는 것이지요. 바르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어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보통 대다수의 사람들이 노는 것을 좋아하고, 재미나는 것을 좋아한다고 그러한 것들이 꼭 우리에게 좋은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좋아하는 것과 좋은 것을 분별하여 좋아하는 것보다 좋은 것을 선택하고 견디는 것을 ‘절제’라고 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는 모두 좋은 것들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물론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좋아하게 된다면 가장 최고일 것입니다. 그러나 좋아하지 않더라도 좋은 것이기에 선택하고 도전하는 것이 사람다운 삶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육신이 좋아하는 것만 좇아서 살면 받은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할례를 육신의 할례가 진짜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진짜라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마음으로부터 믿는 것(마음의 확증)이 명실상부한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마음에 가득 찬 것을 입으로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입으로 말하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지요. 그러나 현대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못되고 탐욕스런 마음이 자기 욕심에 좋아하는 음식들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육신의 욕심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으면서 마음이 더러워집니다. 마음이 더러워지면서 우리의 믿음도 오염됩니다.
결국 몸이 율법과 말씀의 명령을 어기면서 마음도 더럽혀집니다. 마음이 더럽혀지면서 거룩하지 못한 음식을 탐합니다. 거룩하지 못한 음식이 우리의 몸을 더럽힙니다. 우리의 몸이 더러워지면 우리의 마음을 지키기가 어려워집니다. 우리의 선한 마음이 약해지고 못된 마음이 힘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못된 마음은 영적으로 ‘좋은 것’보다 육신이 ‘좋아하는 것’을 더 탐하게 됩니다. 결국 우리의 못된 마음이 (혀에는 달지만)못된 음식을 취하고, 이 못된 음식이 다시 우리 몸을 못되게 오염시킵니다. 오염된 우리의 몸은 못된 음식을 좋아하고 다시 우리 마음을 오염시킵니다.
이런 악순환이 반복되면 믿음이 형편없이 힘을 잃어가고 마는 것입니다. 그 증거가 믿음의 연수가 늘수록 교만해지는 현상이 나타납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책망을 받은 이유는 교만 때문이었습니다. 육신만의 할례에 만족하는 바람에 마음으로 할례를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믿으면 믿을수록 그들의 마음이 굳어지고, 회칠한 무덤이 되고, 교만하여 기쁨이 없는 종교인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은 마음에 할례 받은 사람입니다. 마음으로부터 거룩함을 소망하는 사람입니다. 매일 하루만큼 겸손해지는 사람입니다. 구원이 거룩하고 정결한 만큼 마음과 육신의 행실이 건전하고 경건한 성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유대인들은 혈통을 자랑하였습니다. 하지만,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을 자랑합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이 있음으로 든든하였습니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과의 동행으로 기뻐합니다. 분명 유대인의 역사와 그 율법은 자부하고, 자랑스러워 할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그런 겉모습보다 마음이 더 귀하다 말씀하십니다. 내면을 지켜야 외면이 더러워져도 씻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면을 지켜야 내게 부으시는 은혜의 생수가 흘러 넘쳐 이웃과 친구와 가족에게까지 가 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은 그 자체가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명실상부한 그리스도인으로 가족과 이웃과 친구와 사회와 이 나라를 생수로 채우는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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