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강 잘못된 것을 바로잡기 (갈2:15-21)
1. 선천적 의인이 있는가?(2:15-16)
“본디”라는 말은 “날 때부터”, 즉 “선천적”이라는 의미입니다. 유대인은 선천적으로 의인이고, 반대로 이방인은 죄인이라 생각이 정통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판단입니다. 그 이유는 이방인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 없이는 의를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로 바울이 시작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갈라디아의 거짓 교사들과 “의로워지는 일”에 대한 격한 논쟁을 벌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의로워진다는 표현은 “잘못된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를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보통 “의로움”의 반대말이 “불의”이니까, 의롭게 된다고 하면 엄청나게 훌륭한 업적을 이룬 줄 착각하게 되지만, “바로 잡는다”라고 표현하면, 겨우 비뚤어진 것을 회복하였다는 말이 됩니다.
율법주의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선천적으로 의로운 유대인은 살면서 대다수는 율법을 어길 일만 겪게 됩니다. 반면에 나면서부터 죄인이라고 하는 이방인은 죄인에서부터 벗어나 바른 길로 갈 일이 더 많을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논쟁의 시작을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라는 말로 포문을 연 것입니다.
그런데 실상 바울과 그의 동료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었습니다. 율법을 행하는 행위로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진리였다는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유대인으로 살면서, 제대로 지키지도 못할 율법의 행위의 노예가 되어 불안에 떨면서, 참회의 제물이나 바치는 것으로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게 알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전혀 필요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필요합니다. 법이 없다면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그들이 신뢰하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다스리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록된 율법들 안에도 상황에 따라서 구별되어 실행할 것들이 있습니다.
유대인들 내에서 음식규정이 중요했던 것은 그 지리적이거나 문화적인 여건이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 땅을 벗어나면 음식을 먹는 풍습이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바뀌어도 될 율법규정들을 반드시 준수해야만, 의롭게 된다고 주장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굳이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시고 다시 부활하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반론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는 믿음도 설자리를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 출신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거짓 교사들이 다시 율법준수를 들고 나온다면, 그들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효력을 스스로 부정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16절에 나오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원문에 따르면 이 대목은 “그리스도의 믿음”(Faith of Christ)라는 소유격으로 되어 있는데, 목적격적 소유격이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번역이 됩니다. 하지만, 원래대로 소유격으로 번역한다면, “그리스도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마 바울은 두 가지를 다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일종의 “형식”이라면, “그리스도가 가진 믿음”은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될 것입니다.
2. 과거로 돌아가지 맙시다. (2:17-18)
갈라디아 교회에 슬쩍 들어온 거짓교사들의 말에 교인들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에 더하여 율법을 지키면 구원이 더 확실하다고 누구나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율법주의가 다시 등장하면, 예수믿음은 내려가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논리적인 모순이 생깁니다. 과거에 율법만으로 의를 성취할 수 있었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무슨 역할을 하느냐는 궁극적 질문이 등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고된 선교여행을 다니면서 자기가 믿는 그리스도를 전파했더니, 거짓 교사들은 그들을 모두 유대인의 율법주의로 되돌려 놓고 있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유대인들조차도 바리새파 아니면 다 지키지도 못하는 율법주의의 굴레는 사람을 의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의로워질 가능성조차 막아버리는 역주행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만들어 버린 꼴이 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그리스도를 “죄의 일꾼”으로 만들어 버리는 크나큰 모순이 발생하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말합니다. 이미 헐어버린 것을 왜 다시 세우려고 하느냐고 말입니다. 자신은 이미 율법의 기능이 죄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율법주의의 장벽을 허물어 버렸는데, 이것을 알면서 다시 과거로 되돌아가는 것은 오히려 더 큰 범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 한 가지가 있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무엇 무엇을 하지 말라”고 지시합니다. 그런데 예수는 언제나 “무엇 무엇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하지 말아야할 것을 알려주는 기능에 머물게 됩니다. 그것조차도 내용에 따라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과, 상황에 따라서 달라지는 것들도 섞여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헐어버린 것은 선택을 필수로 만들고, 그 안에 사람의 자유를 가두어둔 그 장벽을 헐어버린 것입니다.
역사가 진보한다는 말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거꾸로 되돌리려는 일들이 가끔 벌어집니다. 만일 거짓 교사들의 주장이 관철 되었다면, 그리스도교는 이 땅에서 사라졌을 것입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정신은 유대인의 율법주의 안에 가두어 둘 수 없는 자유로운 정신입니다. 그래서 온 세상에 이렇게 퍼져 나간 것입니다.
3. 나는 누구인가?(2:19-20)
바울은 “나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율법의 관계에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었다는 표현이 난해합니다. 더구나 그 뒤에 “그것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살려고 한다.”고 말하니 더욱 더 어렵습니다. 만일 이 말을 바리새파 유대인 앞에서 했다면, 그들은 들고 일어나서 바울을 돌로 치려고 했을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인데, 율법을 버려야 하나님께 대하여 산다고 말하니 이런 신성모독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율법에 의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말은 “율법 스스로 바울을 율법에서 멀어지도록” 만들었다는 의미입니다. 독일어에 젤버 슐트(Selber Schuld!)라는 표현이 있는데, 아이들 사이에서 많이 씁니다. “네 잘못!”이라는 뜻인데, 우리말로 하면 “쌤통~”쯤 됩니다. 그렇게 될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예수를 처형하게 된 것도 율법주의 때문입니다. 그것은 율법주의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와 그리스도 신앙이 여기서 첨예하게 충돌하게 된 것입니다. 율법주의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을 십자가에 처형했는데, 어떻게 율법주의를 선택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에 의하여 죽은 “나”는 누구일까요? 바울은 아직 살아있습니다. 그런데 자신이 죽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바울은 스스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합니다. 십자가 죽음이 의미하는 것은 율법주의와 <분리> 된 것입니다. 율법이 그리스도 메시아를 처형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율법으로 볼 때 죽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는 자신이 사는데 아무런 힘이 없다는 선언을 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므로, 자신의 생명은 스스로의 힘으로 유지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아계셔서 자기가 살아있다는 고백은 그런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말은 상징어(Metaphor)인데, 자기 삶의 영역이 그리스도의 세력 아래에 있음을 밝히는 것입니다. 바울처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라고 한 번 말해보면,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그 무게가 어떤 것인지 느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 뒤에 다시 설명합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4. 바로잡기(2:21)
율법은 잘못된 것을 알려줍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 것은 믿음이 하는 일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반성하게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반복되면 좌절에 빠뜨리고 맙니다. 스스로의 힘으로 다시 일어서보려고 발버둥질 쳐도 율법의 굴레에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구약성경의 율법내용들을 읽어보면 정말로 좋은 내용이 많습니다. 음식금지 규정 같은 것들도 유대 팔레스타인 지역이라면 합당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법은 언제나 상황에 맞추어야 합니다. 물론 하나님을 따르는데 필수적인 것들은 반드시 지켜야할 법이라고 예수는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율법의 정신은 사라지고, 하잘 것 없는 규정위반으로 사람들을 좌절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신앙의 기본을 바로잡으려고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의 인생이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다는 확신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살리는 것은 죽은 문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성령입니다. 문자가 아니라, 성령이 우리의 삶을 바로잡아 바로 걷게 인도해 줍니다.
2024년 5월 26일
홍지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