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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가지 유혹 / 신 26:5-11, 눅 4:1-13
사순절 첫째 주일을 맞아 예수님이 유혹받으신 본문을 읽게 된 것은 계절적으로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사순절이란 40일간을 말하는데, 곧 부활하신 날 이전의 6번의 주일을 제외하고 40일간을 특별히 따로 떼내어 주로 예수님의 생애와 수난을 기억하면서 회개하고 기도하며 말씀을 읽고 묵상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기간이다. 사순절 기간을 40일간으로 한 이유는 주님께서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기간이 40일이라는 데에서 온 것이다. 광야는 예루살렘과 사해 사이에 있는 누런 모래와 부스러진 석회암과 자갈로 이루어진 넓은 지역이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직후 공적 사역에 들어가시기 전에 사람이라고는 한 사람도 살지 않는 광야로 나가서 40일간을 금식하시며 지내셨을 때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예수님이 이때 받으셨다는 세가지 유혹은 이런 것이다. 첫째 유혹은 ‘당신이 하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둘째 유혹은 악마가 예수님을 이끌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순식간에 세계 모든 나라를 보여주면서, ‘저 모든 권세와 영광을 당신에게 주겠소. 당신이 내 앞에 엎드려 절만 하면...’이라는 것이다. 셋째 유혹은 예수님을 예루살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 보시오. 하느님이 천사들을 시켜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너의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시리라 하지 않았소?’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때 광야에서 받은 이 유혹의 성격이 어떤 것인가라는 문제를 비롯하여 이 유혹 사건과 관련하여 관심있고 호기심이 높은 문제들이 많이 제기된다. 그러나 오늘은 이 문제들을 생각하는 대신에 보통 잘 생각하지 않는 문제인 이 세가지 유혹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대한 고찰은 예수님의 유혹 사건을 전적으로 새롭게 이해하도록 해줄 것이다. 이 세가지 유혹이 옛날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 백성이 겪었던 역사적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매우 드물다. 그러나 미국 카톨릭 대학교 교수이며 구약신학자인 죠셉 핏츠마이어는, 예수님의 광야 유혹 사건이 출애굽 사건과 관련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막에서 식량난을 당했을 때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공급해 주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구한 날 만나만 먹게 되자 그만 만나에 질려버렸다. 그래서 이집트에서 먹던 빵과 고깃가마를 생각하고 한숨짓고 원망하고 불평했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은 메추라기를 공급해 주셨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양식 아닌 다른 양식, 곧 이집트의 빵과 고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과는 다른 자세와 태도를 취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악마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이 돌들에게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고 유혹한다. 이때 40일간을 굶어서 극도로 시장했던 예수님은 기아 상태에 있었으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악마의 재안을 거절했다. 예수님의 이 태도는 하나님이 뜻하시고 주시는 음식 이외에 다른 음싞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같은 유혹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을 보면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에 이어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하나님이 지정하시고 작정하신 목표를 떠나서 자기 자신의 이해 관계나 뜻을 추구하지 않겠다는 예수님의 결의를 엿볼 수 있다.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은 실패했으나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음을 볼 수 있다.
둘째 유혹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절하라. 그러면 온 천하의 주권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유혹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유랑할 때 다른 신들을 섬기려 했던 유혹과 관련되어 있다. 광야에서 방황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이 만나게 되는 다른 민족들의 신이나 우상을 섬겨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거듭해서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그런 유혹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일에 실패했다. 모세가 시내산 위에 올라가서 하나님으로부터 계명을 받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였다. 하나님은 특별히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가나안 사람들의 신들을 섬겨서는 안된다고 엄히 경고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신들을 섬겼고, 그들은 이집트에서 해방하시어 그 땅에 들어오게 인도하셨던 유일신 하나님을 저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엎드려 절하라’는 악마에게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는 신명기 말씀으로 악마의 요구를 거절했다. 여기서 악마가 예수님에게 유혹하는 것은 하나님 말고 다른 존재에게 절 한번만 하면 모든 세상 나라들의 정치권력과 그 영광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긴다’는 말씀으로 하나님 이외의 어떤 다른 존재, 곧 악마의 권세를 인정도, 예배도 하지 않고 그에게 예속도, 타협도 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선언한 것이다. 여기서도 이스라엘은 유혹에 넘어가서 이방 신들과 우상을 숭배함으로써 실패했으나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시고 끝까지 한분만을 예배하고 그를 섬기셨다는 것이다.
셋째 유혹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것이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하느님이 당신의 천사들을 시켜 너의 발이 돌에 부딪혀 부서지지 않게 너를 받들게 하시리라.’ 이때 악마는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여 ‘그것이 성서에도 그렇게 씌여져 있지 않느냐?’라고 까지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때에도 예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는 신명기의 말씀으로 물리친다. 이 유혹 역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시험하는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그들이 르비딤에 도달했을 때 물이 없어서 갈증을 느낀 나머지 불평하고 원망했다. 이때 하나님께서 바위에서 샘물이 솟아나게 하셨다. 그러나 이 사건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대들고, 또 하나님을 시험한 사건으로 성서는 특정짓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계신가 하며 하나님을 시험했다’라고 하여 그곳 이름을 ‘맛사’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림으로써 정말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호하시는가를 시험해 보라는 악마의 유혹은 중요한 의미가 내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란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악마가 그런 유혹을 한 것은 예수님에게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는 말이기도 하고, 또 예수님을 시험해 보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예수님은 과거 바위를 쳐서 물이 솟아나는가르 보고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를 시험했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전적으로 대조가 되게 그 자신이 확고부동한 태도를 견지했다.
광야에서 40년 동안 유랑하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혹에 넘어가고 뜻을 다르는데 실패했지만,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하며 악마의 시험을 받았던 예수님은 새 이스라엘로 소개되고 메시야로서 이 모든 유혹을 이김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고 하나님의 뜻을 끝까지 따랐다는 것을 명확히 대조시키고 있다. 이것이 예수님의 광야 유혹 사건이 우리들에게 말해주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세가지 유혹을 극복하신 광야의 이야기는 예수님이 유대인들이 기다리고 있던 그런 민족주의적 매시야가 아니라 그러한 전통적인 메시야 상을 초월하는 메시야의 모습과 성격을 가졌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 유혹 사건이 예수님이 세례를 받은 직후에 있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례를 통해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말씀, 곧 메시야라는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들은 예수님이 공적 사역을 시작하기 직전에 광야로 가서 단독 수련회를 가지신 것이다. 이 수련회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길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한 것이고, 그의 선교의 진로와 사명을 완수하는 길을 모색하고 정립하기 위한 것이었다.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은 경제적 부에 대한 유혹이고, 온 천하만국의 정권과 그 영광을 쟁취하라는 유혹은 정치적 권력에 대한 유혹이고, 마지막으로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서도 안전하고 무사하게 되는 것을 나타내 보이라는 유혹은 종교적 기적과 능력에 대한 유혹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시대 모든 사회에 있는 유혹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세가지 유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유혹을 예수님이 받으셨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 유혹은 바로 예수님이 수행할 선교의 내용과 성격과 방법과 관련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세가지 길을 단호하게 거절하고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의 길을 택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예수님이 택해야 할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님은 악마의 유혹, 곧 십자가의 길 이외에 다른 길로 제시된 대안을 모두 거절한 것이었다. 광야에서 예수님에게 제기되었던 이 세가지 유혹은 모든 시대, 모든 곳의 사람들, 모든 지도자들,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우리 교회에게, 우리 민족에게 제기되고 있는 유혹이기도 하다. 우리 민족과 우리 교회는 이 세가지 유혹에 어떻게 대응했나?
첫째로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라는 경제적 부에 대한 유혹에 우리들은 그대로 넘어간 것이 아닌가? 경제 제일주의, 선경제 건설, 경제성장, 수출제일주의 등이 깃발 아래 지난 30여년간 인생과 사회의 모든 가치와 의미와 목표들을 다 뒤로 미루고 희생시키고서 경제적 부만 추구해 왔고, 또 그것을 어느 정도 달성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 주위에 물질적 풍요를 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것은 오직 돌멩이를 떡으로 만드는 기적에만 관심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나? 그런데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온 천지가 사치와 퇴폐풍조, 도덕적 부패, 부조리, 물질주의가 지배하고 있지 않나? 돈을 좀 벌었다고 해서 요즘 우리나라 사람들이 세계 여러 곳으로 관광을 다니면서 길바닥에 침뱉고, 담배 꽁초를 마구 버리고, 호텔에서 잠옷만 입고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을 놀라게하고, 밤새도록 고스톱인가를 한다고 시끄럽게하여 쫓겨나는 망신을 당하면서도 이를 알지 못하고 아무데서나 사진기만 찰칵찰칵하고 거만스레 돌아다니는 어글리 코리안(추한 한국인)들로 세게인의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기독교인들도 믿지 않는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에게서야 뭐 다른 것을 기대할 수 있겠나? 돈만 벌고 부자만 되면 그만이다라는 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인권, 민주화, 평등, 정의, 자주, 통일, 평화 등을 믿겠나?
둘째로 정치적 권력에 대한 유혹에 넘어간 것이 지난 30여년 간에 걸친 군사정권 아래 지배 받아온 우리들의 현실 아닌가? 선의의 정치적 경쟁에 의해 정권을 잡는 것이 아니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빼앗은 것은 바로 악마에게, 군대 귀신에게 절하고, 그로부터 권력을 받은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것이 바로 군사주의이고 군사독재인 것이다. 양심을 버리고, 도덕심도 민족도 다 버리고, 어떤 수단이나 방법으로든지, 총칼로 권력을 쟁취하겠다는 정치 군인들은 악마에게 절하고 그로부터 정치권력을 잡겠다는 것뿐이다. 영원한 구원같은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것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이 땅에서 순간적인 정치권력과 그 영광을 위해서 군대 귀신에게 엎드려 절하고 권력을 빼앗아 민중들을 억압, 착취하고, 민족을 외세에 종속시키고 분단을 고착화하고 철권으로 다스리면서, 그 대가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있는 자들은 바로 이 정치권력에 대한 유혹에 넘어간 자들이다. 군인이 정치할 때는 그랬다치고 요즘은 그렇지 않은가? 요즘도 마찬가지이다. 대통령 되기 위해 군사정권과 손잡고, 대통령 되기 위해서는 어떤 행동일라도 한 사람, 그래서 람들은 흔히 문민독재라고 말한다. 모든 정책이 인기 위주로 진행되고 있다. 이래서는 이 민족의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종교적 기적과 능력에 대한 유혹에 넘어간 이 땅의 교회, 종교 지도자들을 본다. 오늘 우리나라의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 설교자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요술’을 가지고 사람들을 미혹하면서 교회를 채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기복신앙의 수법이다.
오늘 우리나라의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대표적인 세가지 유혹, 돌멩이를 떡으로 만들라는 유혹, 악마에게 절하고라도 모든 정치적 권력과 그 영광을 쟁취하겠다는 유혹, 종교적 기적과 능력에 대한 유혹, 이 세가지 유혹을 단호히 물리쳤나? 진정으로 우리를 살리는 양식이 되는 하나님이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우리의 식량으로 삼고 있나? 설교자가 많고 설교도 많지만, 정말 하나님의 말씀이란 식량이 풍성하나? 이 땅에 빵의 기근은 없을지 모르나 진정한 식량인 하나님의 말씀은 빈곤한 상태에 있는 것이 오늘의 실정이 아닌가? 악마의 유혹에 대하여 예수님이 세 번 다 하나님의 말씀의 위력으로 물리치셨다는 이 광야 유혹의 이야기는 말씀의 위력을 말하는 동시에 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가 추구해야 될 진정한 양식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고 하겠다. 우리는 영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깨닫고 믿어 세상에서 우리를 유혹하는 모든 것에서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자. (1996-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