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라 / 사 43:18025, 막 2:1-12
복음서에는 예수께서 병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시작한 시초부터 병고치는 이야기가 나온다. 1:21절 이하에는 귀신들린 사람을 고친 이야기, 1:29절 이하에는 열병에 걸린 시몬의 장모를 비롯하여 많은 병자를 고친 장면이 있고, 1:40절 이하에는 나병환자를 고치신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인 2:1-12절에는 중풍병자를 고치신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복음서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병을 고치신 이야기를 제외하면, 예수님의 말씀과 수난에 관한 짧은 기록밖에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정말 예수님은 그렇게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또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시는 이적과 기사를 행하셨나? 복음서의 기사를 문자 그대로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믿을 수 있나? 과학과 의학이 고도로 발달한 현대 문명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좀처럼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믿으려 하지 않는다. 더욱이 2천년 전에 있었던 일을 전하는 종교적 문헌을 문자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것도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입장에서 보도록한 것이 아니라,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세주로 믿는 신앙의 입장에서 기록한 문서를 그대로 믿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고대 문서를 연구해서 그 기록의 신빙성과 그 배후에 깔린 의도와 보존된 기록과 실제로 있었으리라고 생각되는 사실을 가려내려는 과학적인 비판 작업을 놀라울 정도로 발달시켰다.
특히 성서에 대한 이러한 연구는 18세기 이후로는 더욱 고도로 발달했다. 그래서 이제는 실제로 예수께서 행한 일, 하신 말씀과 그렇지 않은 것, 곧 복음서 기자의 말이나 편집자의 삽입, 또는 전승되는 과정에서 첨가된 것들과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과학적인 분석과 비판의 결과로서도 예수께서 실제로 많은 병자를고치셨다는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증명되ㅋ었. 그리고 지금도 예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치는 일이 교회의 안팎에서 진행되고 있다. 예수님 자신도 제자들과 교회에 병을 고치는 권능을 주셨다고 성서는 기록하고 있다.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은 병고치는 일을 했으며, 때로는 실패하기도 했다. 제자들이 실패한 것은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도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는 예수의 제자들이 많다. 병 고치는 것을 선교의 방편으로 하는 교회들도 많다. 또 그런 교회에는 사람들이 많이 간다. 병 고치는 기적이 전혀 없는 교회는 사실 예수의 선교를 바로하는 교회라고 말할 수 없다. 그런 교회는 주어진 병 고치는 은사를 활용하지 않고 있는 교회이다. 의사는 물리적 육체적 화학적 작용을 통해 병을 고치지만, 교회는 신앙적으로 영혼에 작용해서 병을 고친다. 의사와 신앙은 서로 상호보완적이다. 육체적인 것이 정신에 영향을 끼칠 수 있고, 그 반대로 영적인 것이 육체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예수님의 병 고치는 기적은 언제나 병자의 믿음을 전제로 하였고, 믿음이 없는 곳에서는 아무런 이적도 행할 수 없었다.
오늘 본문은 사람의 죄를 사해주는 문제에 대하여 예수님과 당시의 교권을 가졌던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과의 충돌사건이다. 지붕을 뚫고 내려진 한 중풍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고 한 예수님의 말씀이 논쟁의 시발이 되었다. 곧 당신이 무엇인데 하나님만이 사해 줄 권한을 월권하느냐는 것이다.
여기 교권주의자들이 예수님을 비평한 것은 그때의 교리로서는 타당성이 있다. 언제나 비평정신은 새것을 창조하고 향상이 있다는 의미에서는 타당하다. 그러나 여기서 비평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를 모르는 비평이고 의도적으로 시기심에서 그 분을 책잡으려는 비평이라면 잘못된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용서한다는 것은 저 사람의 잘못이 나에게도 있다고 스스로 인정할 때 그를 책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고 다른 이의 잘못을 용서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를 용서하신다는 것은 그분이 우리와 같은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의 상호교환 조건에서 우리를 사해주시는 분이 아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으로서 우리를 용서하신다. 참된 용서는 죄가 없으신 거룩한 분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흔히 우리가 갖는 비평정신에 의하여 비판해 버릴 분이 아니고, 오히려 그분에게는 복종이 요구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하는 일이 적당하다는 것을 깨우쳐 준다. 중풍병자를 고쳐주는 일을 통해서 우리가 예수님과 어떻게 관계해야 하느냐를 가르쳐주며, 간접적으로 그때의 적대시 되던 자들에게 메시야적 선포를 한 셈이다.
10절에 인자란 말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인데, 장차 심판자로 오실 메시야를 암시한 말로써 중요한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로 나타났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독교 교의의 중요한 기초가 된다. 이 사람의 아들이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깨달을 때 구원의 복음이 되는 것이다. 성서의 말씀은 어떤 사건을 간단히 요약한 것이기 때문에 비록 평이하게 보이나 굉장한 갈등, 방황, 불안 그리고 결단과 행동이 함축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을 꼭 만나야겠다는 강한 의욕을 가진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은 주님을 둘러싼 사람들 때문에 도저히 그 집에 들어갈 수 없음을 알고 지붕에 올라가 구멍을 내는 광경을 상상해 보자. 예수님을 만나기 위하여 세리장 삭개오는 돌무화과나무에 올라가야 했고, 딸의 명을 고치기 위하여 이방 여인은 갖은 수모를 참아야 했다는 기사가 있지만, 이 가버나움의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기발한 행위는 놀랄 수밖에 없다. 많은 사람의 저지도 있었을 것이다. 요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주거불법침입, 손해배상, 그리고 소요죄 등 법석을 떨만한 행위이다. 점잖게 예의를 다 지키면서는 예수님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리 귀중한 전통일지라도 무시해버려야 할 때가 있다. 질서가 생명 같이 여겨지는 세상의 법도 때로는 거추장스러운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는 사실은 그때 당시로서는 철칙으로 되어있는 전통을 무시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 한 행위도 인륜도덕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로 신앙의 조상이 되었다고 성서는 보도한다. 신앙은 안일한 것을 제일 싫어한다. 모험을 하는 것, 비상수단을 쓸 수 있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중풍병자를 메고 예수님께 나온 자들이 동양의 성인군자였다면 예수님을 만나 뵐 수도 없으려니와 구원의 길도 있을 수 없다. 삭개오가 세리장의 위신을 생각했다면 어찌 돌무화과나무에 놀라갈 수 있었겠나? 아기 예수를 만나기 위해서 동방박사 세 사람은 산을 넘고 물을 건넜다고 했다. 이것들은 예수님을 만나뵙기 위한 열성적 모험들을 기술한 이야기이다. 안일한 벙법으로는 그분을 만나기 어렵다는 것은 그붕은 언제나 세상적으로는 위험한 곳, 난처한 곳, 세상이 타부로 설정해 놓은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안일하다는 말은 너무 인간의 생각만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팔에 안길 수 있는 믿음이 없다는 말이다.그러므로 믿음은 생명운동이요 살고자 하면 죽어야 하는 곧 모험과 비상수단을 동반하는 것이다. 남의 집을 헐고 들어갔다는 것은 세상적으로 그리 좋은 일이 아닐텐데도 성서가 보도하는 것은 그것이 생명운동의 모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다음은 이 중충병자에 대한 관심이다. 그들이 무례한 행위를 하게 된 것은 이 중풍병자 때문이었다. 그러나 좀더 깊이 생각한다면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라는 것, 곧 여기 중풍병자는 2천년 전 병자를 말한다기 보다는 오늘의 병자인 나를 가르쳐주는 것이다. 우리의 몸은 과연 내가 가고싶은 곳에 갈 수 있는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는가? 오히려 남의 눈치나 평가 그리고 주변환경이 몰고 가는대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몸이 아닐까? 전신이 마비되어 자유가 없는 중풍병자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예수님을 만나려해도 누가 데려다주어야 하고, 열성적 헌신적인 인물이 있어서 지붕이라도 뚫어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신세가 우리들이 아닐까? 좀 유식한 말로 말해서 우리나라 사람치고 주체적으로 살아간다고 할 사람이 있을까? 한마디로 말해서 우리는 영적으로 병자들이요 죄인들이다.
더구나 제 마음대로 못하고 주체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 오늘의 교회이다. 이 중풍병자는 오늘의 교회를 풍자했음이 틀림없다. 사랑을 찬밥 먹듯이 외쳐대면서도 쪼개지기만 했고, 거룩한 설교가 밤낮으로 외쳐지고 또 듣고 있으나 가장 폐쇄적이고 이기적인 집단, 성령의 뜨거움울 말하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싸늘한 집단이 교회가 아닌가? 건강한 사람은 쓴 것도, 약간 독이 있는 것까지 먹어야 더 건강해지는 법인데, 조금만 이질적인 것이라면 혼비백산하는 나약하고 비겁하고 능동적 주체적으로 움직이지 못하는 오늘의 교회는 영락없는 중풍병자인 것이다. 그 나라의 교회가 건전하지 못할 때에 어찌 다른 것들이 건전하길 바랄 수 있을까? 교회는 바야흐로 이 중풍병자의 신세에서 벗어나서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협동과 모험과 비상수단의 지혜를 배워야겠다. 그리하여 중풍병자와 같은 이 나라의 정치가, 이 나라의 밥통을 좌우하는 경제인 모두 들것에 운반해서 주님을 만나야 하겠다. 이 나라의 교육가들도 영락없이 중풍병자처럼 제 마음대로 못하여 갈팡질팡하는 것이 우리의 자녀를 더 심각한 병자로 만들고 있으니 교육의 지붕을 뚫고 구멍을 내어 주님께 인도되어야 하겠다. 지붕을 뚫는다는 말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을 보장하리라는 덮개를 거둬버린다는 말이다. 인간은 제가 잘나서 무엇이 되는 줄 알고 자신들이 힘이 강해서 안전하리라는 인간 껍데기를 뜯어버려야 오히려 적나라한 인간으로서 예수님 앞에 설 수 있다는 말이다. 며칠 비만 안 와도 또 비가 계속 와도 죽겠다고 아우성치는 주제에 그래도 저희들이 잘해서 유지되고 강해서 살아가는 줄 아는 허수아비들을 뜯어 버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돌보심에 귀를 기울이고 겸허하게 삶의 자세를 가다듬으라는 것이다.
요점은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 최우선이요 그분을 뵙는 것이 중풍병을 고치는 일이며, 그분에게 연결됨이 새로운 생명을 갖게 될 것이기 때문에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모험이고 비상수단이며 있는 힘을 다해야만 되리라는 것이다. 우선 우리가 살아야 예의고 전통이고 아무리 좋은 보수전통도 필요하기 마련이다. 값진 진주를 사기 위해서는 전 재산을 모두 팔아버려야 살 수 있다고 했다. 이 중풍뱡자를메고 온 네 사람은 이런 생명의 관계를 잘 알았기 때문에 적절하고 지혜있는 행위를 해낼 수가 있었다. 주님을 만나뵙기 위해서 인간 안전의 가장 보루인 지붕을 뚫어버린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ᅟᅧᆼ자를 고쳐주셨다고 했는데 그들의 믿음이란 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믿는 믿음의 결과롤 이루어진 훌륭한 연대관계인 것이다. 우리가 사는 길도 신앙으로 얻어진 연대성, 함께 고난을 이겨내고 함께 선교의 대열에 서며 함께 힘을 모으는 일이다. 이 중풍병자를 메고 온 네 사람의 행위는 실은 자신들을 위함이 아니었다. 남을 위한 행위였다. 남을 위하는 행위가 지붕을 뚫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칭찬하신 신앙도 예절이나 바르고 전통수호나 잘하며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그런 인간은 아니었다. 체면이나 이해타산 그리고 사회적 관습을 넘어서서 모험을 감행한 일이다. 이런 신앙의 결과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예에수님을 만났낫다는 말은 생명관계가 이어졌다는 뜻이며, 그래서 네 죄가 사해졌다는 선언을 받는다. 이 주님의 선언은 제 마음대로 할 수 없었던 중풍병자가 나만을 위한 삶이 될 수 없고, 연대감에서 전적으로 남을 위한 생이 된 것이다. 그것이 침상에서 얼어나 ‘네 발로 걸어가라’는 선언이다.
영생이다 구원이다 하는 말들은 천당에 훌쩍 뛰어들어가는 것을 뜻함이 아니고, 이 세상 속에서 주체적으로 역사형성에 참여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고 그 역사에 동참의 영광을 차지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주변에 모였던 많은 군중이 모두 놀라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다고 했다. 인간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다. 비뚤어진 인간이 적선을 해봐야 자기 영광은 되어도 하나님의 영광은 안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일에서 나타나고 하나님의 일은 인간을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선교며 복음화이다. 그러므로 선교다 복음화다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체가 되셔서 하는 일인데 중풍병자와 같은 인간들이 제가 잘나서 하는 줄 아는데 복음화의 부패성의 원인이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서로 협동하여 그리스도를 만나뵙고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는 것 뿐이다. 말로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만나 뵙고 생의 옳은 관계성을 회복하는데 있다.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얼마나 열성이 있었느냐? 모험과 비상수단까지 동원해서 주님을 만나려 했느냐? 주님 뵙기 위하여 주님께 흠뻑 반하고 미쳤느냐? 주님 만나기 위해서 협동하고 연대적 책임을 질 수 있느냐? 중풍병자와 같은 내 이웃과 이 사회를 주님께 안내하기 위하여 이런 봉사와 희생정신이 있었느냐? 우리는 교회에 다니긴 해도 주님을 뵙지 못하고 그분의 주변에서 기웃거리는 그래서 여전히 중풍병자로 살고있는 병자들인지 모른다. 우리가 살 길은 주님을 뵈옵고 나이 죄악을 용서함 받고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며 서로서로의 연대감으로 이 사회와 민족을 향하여 살아가는 선교의 책임을 다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199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