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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여, 비추어라 / 시 32:7-11, 살전 5:1-11
전주관광호텔 사거리에서 목격한 이야기이다. 행동하는 것을 보니 전주 나이트파 깡패들이다. 선배 한 명과 마주치자 두 녀석이 고개를 90도 각도로 굽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몇마디 나누고는 그 곁을 떠나자 다시 고개를 90도 각도로 인사를 했다. 이 광경을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보고서 하는 말이 ‘저 자식들이 제 부모에게는 저렇게 안 할 거다’라고 했다. 이 모습을 부모들이 보셨다면 얼마나 속이 상하겠는가? 이런 일도 있다. 집에 오다가 우연히 보니까 덩치가 큰 놈이 자기보다 훨씬 작은 아이가 때리는데 가만히 맞고 있더라는 거다. 가만히 보니 맞는 놈이 자기 아들이라는 것이다. 갑자기 속이 확 상해 버리더라는 것이다. 아이를 길러본 사람이라면 비슷한 경험을 다 해 보았을 것이다. 부모가 왜 속상해 하나? 싸우면 능히 이길 수 있는데도 맞고 왔다는 것 때문이다. 할 수 있는데도 안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자기 자녀들을 향해서 느끼는 심정도 같다. 성도들은 너무도 많은 매를 세상에서 맞고 다닌다. 툭하면 욕이나 퍼붓고 싸움하고, 툭하면 좌절하고 낙심한다. 삶이 여러 분야에 찢기고 상한 모습으로 겨우겨우 살아가고 있다.
인격적인 면에서도 그렇다.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니까 제 맘대로 행동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한다. 뭐 예수 믿는다는 사람이 저 모양이냐? 작은 일에도 저렇게 화를 내고 졸장부같이 행동하는가? 별 것도 아닌 일을 그렇게 크게 부풀려서 말을 옮기는가? 자기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조그만 일에도 불안해 하는가? 이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답답함은 얼마나 크겠는가? 분명히 하나님은 복을 주시며 명령하셨다. ‘땅에 움직이는 모든 것을 다스리라.’ 힘든 문제를 잘 극복하며 독수리처럼 구름 위로 빛나는 모습으로 솟아오르기를 얼마나 원하시는가?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떠한 상황인가?
1.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환난은 도둑같이 오지 않는다.
1-3절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둑 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알기 때문이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갑자기 그들에게 이르리니 결코 피하지 못하리라.’
세상 사람들에게 무서운 날은 다가온다. 그러나 그들은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을 것 같이 생각한다. 그래서 느긋한 마음으로 먹고 마시고 논다. 그러나 아무도이 무서운 날을 피할 수 없다. 이 날은 우주적 파국으로 온다. 하지만 개개인에게도 환난이 온다. 작은 심판으로 수없이 많이 다가오기도 한다.
불신자나 또는 믿음이 얕은 사람들이 조심성 없고 무관심하며 제멋대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쾌락과 향략생활을 할 때에 주께서 임하신다는 것이다. 본문의 ‘평안하다’는 신앙 없이 지내도 괜챦고, 인간 공로와 인간 영화가 계속 유지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안전하다’는 제 힘과 제 지혜로 살고, 하나님의 보호와 섭리가 없어도 인간의 힘으로 모든 것을 꾸려갈 수 있고, 하나님의 간섭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주의 재림이 갑자기 임할 것이다. 그것은 만삭된 임산부에게 산기가 임하는 것과 같다. ‘임신한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이’ 잉태한 여인은 아이를 낳을 요소를 지니고 있다. 조만간 언젠가는 반드시 아기를 낳을 것이다. 그러기에 임산부는 평소에 태아와 모태의 건강을 위하여 세심한 주의를 해야 한다. 그리고 또 언제나 아기를 받을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유산을 하기도 하고, 사산을 하기도 쉬우며, 불구를 낳거나 난산을 하여 산모와 태아가 함께 생명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모르고 그냥 당하기만 할까? 그렇지 않다. 4절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준비가 없는 자에게는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하지만, 준비된 자에게는 그 날이 도둑같이 임해도 준비가 되어있기에 염려가 없다는 말이다. 성도는 어떤 방법으로든 하나님께서 환난을 면하게 하신다. 적어도 환난을 통해서 멸망 받지는 않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평소에도 주님이 오실 날을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
하나님이 언제 자기들을 부르실지 아는 자가 없으니 마지막 시간까지 연기할 수 없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어 학생이 시험지를 받아놓고 시험준비를 할 수는 없다. 폭풍우가 몰아치는데 이제서야 집을 수리하거나 기초를 고칠 수 없다. 시험이나 시련이 오기 전에, 위험이 닥치기 전에 준비가 있어야 한다. 준비성이 있는 자에게는 ‘갑자기, 의외로’란 말이 있을 수 없다. 또한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든 우리와 교통하셔서 알게 하신다. 적어도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믿고, 그 믿음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그렇게 될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많아질수록 그로부터 오는 모든 영적인 말씀도 더 잘 알아들을 것이다. 이것이 성도들의 환난 날을 위한 준비인 것이다.
2. 하나님의 자녀들은 빛의 자녀이다.
엡 5:8절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전에는 어둠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빛이신 예수를 속에 모셨기에 빛이다. 예수는 마 5:14절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그런데도 많은 성도들은 빛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를 변화시켜 달라고, 새롭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우리는 이미 변화되었고 새롭게 된 존재들이다. 성경 롬 12:2절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이제 우리가 변화시키고 새롭게 할 것은 단 하나 우리의 마음뿐이라는 것이다. 느낌이나 경험은 달라도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대로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빛이라 하시니 빛인줄 알아야 한다. 그때부터 빛의 삶은 시작된다. 성도의 모든 삶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한다.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생명의 빛되신 예수님이 우리에게 영혼의 눈을 뜨게 해주셔서 확실한 하나님의 삶을 살도록 하셨다. 인생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다가 가는 인생이다.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마지막에 하나님 앞에 가는 인생임을 깨닫게 하면서 살게 하시려고 우리 예수님이 오신 것을 믿기 바란다.
필립 부룩스 목사는 말했다. ‘남을 축복해서 받은 것을 주기까지 우리는 절대로 받은 축복을 경험하지 못한다.’ 어떻게 빛의 자녀로 행할 것인가? 자신을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축복하는 것이다. 그 축복을 남에게 비춰 나간다. 그들이 받은 자격이 없으면,그들이 거절하면,다 내게로 돌아온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셧다. 그렇게 예수처럼 살아야 한다.
예수처럼 살다가 간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빛 가운데서 살다가 빛을 남기고 간 사람이다. 그는 바로 1995년 12월 25일 새벽에 85세를 일기로 하나님 품으로 돌아간 장기려 박사이다. 사람들은 그를 가리켜 ‘한국의 슈바이쳐’라고도 불렀고, ‘살아있는 작은 예수’라고도 불렀다. 그야말로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산 사람이었다. 그는 평생 무료로 진료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었다. 장기려 박사는 먼저 그의 아내를 극진히 사랑했다. 그는 1950년 12월 전쟁 중, 아내와 다섯 자녀를 북에 두고 월남한 후, 45년 동안 아내를 그리며 홀로 살았다. 재혼하라는 권유를 받을 때마다 그는 ‘우리의 사랑은 육체의 사랑과 무관하다.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살기 위해 혼자 산다’고 말했다.
또한 장기려 박사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했다. 그는 월남 후인 1951년 5월부터 부산에서 창고를 빌려 간이병원을 설립하고 피난민들과 전쟁 부상자들을 돕기 시작했다. 죽을 때까지 8천 여명의 간질환자들을 무료로 진료했다고 한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면서 예수님처럼 사랑하며 살았다. 장기려 박사는 자신의 무덤 비문에 ‘주를 섬기고 간 사람’이라고 적어달라고 유언했다. 장박사는 평생 주님을 섬기며, 장로로 그리고 의사로 살았다. 항상 ‘예수님의 마음을 본받자’라고 말하면서 주님을 섬겼다. 그는 바보처럼 살면서 예수만을 섬기며 예수처럼 살았다. 그는 작은 예수로 살았다. 그는 예수의 청지기로 살았다. 장박사는 단 12:3절에 기록된 대로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는’ 삶을 살았다. 그는 우리들이 어두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 지를 몸소 실천해 보여주었다. 빛 가운데, 빛을 남기며, 깨끗하게, 사랑하며, 주를 섬기며 살아가는 청지기의 삶이 어떤 삶인지를 본으로 보여주었다.
3. 하나님의 자녀들은 깨어 정신을 차려야 한다.
6, 8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묻는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라는 것입니까? 실례를 들어주십시오.’ 성경의 가르침은 이것이다. ‘자신을 그리스도요, 빛이라 생각하라. 그리스도로서 마음가짐을 가지라. 그리스도로서 말하고 행하라. 그처럼 사랑하고, 그처럼 축복하라. 그렇게 일어나 비치라.’ 이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는 나를 통해 그리스도가 된다.
인생을 산다는 것은 그냥 즐기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 늙어지면 못노나니’ 하면서 세상에서 놀고 취해서, 재미있게 즐기는 것이 인생인줄 착각한다. 우리나라 대중가요에 이런 것이 있다. ‘인생이란 무엇인가? 청춘은 즐거워. 마시고 또 마시고, 취하고 또 취해서 춤을 춥시다.’ 인생은 이렇게 취하고 즐기며 노는 것이 아니다. 인생은 즐기다가 가는 것도 아니다, 즐거움과 쾌락에 빠져 사는 것도 아니다. 정신을 차리고 훈련을 받고 성경공부를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즐거움과 평안을 누려야 한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인생임을 믿기 바란다. 어둠의 사람들은 술 취하고 세상 즐거움과 쾌락에 취해 산다. 그러한 기쁨을 맛보려고 욕심과 정욕 속에 빠져 살고 있다. 많은 인간들이 이 세상 즐거움을 누리기 위해서 살아간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영광의 빛, 기쁨의 빛, 즐거움의 빛으로 오신 ㅖ수님을 모시고 산다. 하나님의 일을 열심히 한다. 연단과 시련 속을 통과하는 하나님의 훈련을 받으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을 맛보며 산다. 사랑하는 우리 모든 성도들은 어둠의 사람들처럼 이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지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훈련과 시련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열심히 살기를 바란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성령의 기쁨과 평강을 누리며 사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란다.
4. 하나님의 자녀들은 서로 신앙을 도우며 살아야 한다.
10-11절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어 있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촛불을 하나만 켜 놓으면 밝지 못하다. 그러나 한꺼거번에 여러 개를 켜 놓으면 환해진다. 이처럼 성도는 서로가 빛을 발해야 한다. 그러면 그 빛이 더욱 강해진다. 서사로가 그 빛에 영향을 받는다. 교회는 이 빛들의 모임이다. 이 빛들이 열매를 내어야 한다.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성도는 각자에게는 빛의 열매를 맺을 힘이 주어졌다.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이 우리 각자의 속에 있다. 이대로 살아서 빛의 열매를 만드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의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라고 말했다. 이처럼 강하게 우리의 모습을 설명한 말이 있는가? 우리는 그리스도와 완전히 같은 존재라는 말이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도 우리는 그리스도의 일을 하지 않는다. 광야에서 음식이 떨어졌을 때 제자들은 주님께 말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주님은 말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주님은 어린아이가 드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 전체를 먹였다. 어린아이처럼 가진 것을 주님께 드리는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된다. 성도들은 세상을 향해 이렇게 말해야 한다.
하나님을 제일로 사랑하는 사람, 그리고 둘째로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시기와 미움과 질투와 탐욕을 누를 수가 있고, 막을 수가 있고,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사람이 성숙하다는 것은 사랑이 성숙하다는 말이고, 사랑의 사람이 됐다는 말이다. 믿지 않는 사람은 자기만 알고, 자기 식구만 안다. 성도들 가운데도 신앙이 어린 사람은 자기만 알고, 자기 식구만 안다. 그런데 신앙이 성숙하고 믿음이 자라면서부터는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게 되고, 둘째는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우리가 어떤 일을 만나고, 무슨 사건을 만났을 때,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생각을 늘 하면서 판단을 해야 한다.
사랑은 강하고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사랑은 아까운 것이 없고, 희생과 수고와 땀과 눈물이 동반된다. 사랑의 수고와 땀과 눈물과 희생과 손해가 없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우리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하게 되고 충성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사람을 사랑하면 사랑 때문에 희생하고 서로 도움을 주면서 살아간다. 그런 것이 없는 사랑은 가짜 사랑이다. 우리가 수고와 땀과 눈물과 손해와 희생을 하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할 때 아름다운 열매가 맺어질 줄 믿기 바란다.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서로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 여기서 강조된 말은 ‘피차’와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말이다. ‘피차’란 누구는 항상 권고를 받아야 하고, 누구는 항상 권면하는 자가 아니라, 서로서로 권면하여 잘못된 신앙이나 생활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이다. ‘너희가 하는 것 같이 하라.’는 너희가 하고 있는 것을 그대로 계속하라는 말이다. 재림을 위한 어떤 특별한 준비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믿음생활을 그대로 계속해 나가는 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천년을 하루같이, 하루를 천년같이 주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 안에서, 진실하고 성실하게 어두운 대상에게 빛을 비추며 하루하루를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호심경을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어둠을 두려워하지 마라. 고난을 무서워하지 마라. 그들이 우리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복음의 말씀으로 빛을 비치기를 바란다. (20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