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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인가 관계인가. 奇跡か関係であるか。 (2022년 2월 20일 주일예배)
본문; 사도행전 19:11~20
19:11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12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이 몸에 지니고 있는 손수건이나 두르고 있는 앞치마를 그에게서 가져다가, 앓는 사람 위에 얹기만 해도 병이 물러가고, 악한 귀신이 쫓겨 나갔다. 13 그런데 귀신 축출가로 행세하며 떠돌아다니는 몇몇 유대 사람조차도 "바울이 전파하는 예수를 힘입어서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다" 하고 말하면서, 악귀 들린 사람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이용하여 귀신을 내쫓으려고 시도하였다. 14 스게와라는 유대인 제사장의 일곱 아들도 이런 일을 하였는데, 15 귀신이 그들에게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알지만, 당신들은 도대체 누구요?" 하고 말하였다. 16 그리고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짓눌러 이기니, 그들은 몸에 상처를 입고서,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였다. 17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에게 알려지니, 그들은 모두 두려워하고,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18 그리고 신도가 된 많은 사람이 와서, 자기들이 한 일을 자백하고 공개하였다. 19 또 마술을 부리던 많은 사람이 그들의 책을 모아서, 모든 사람 앞에서 불살랐다. 책값을 계산하여 보니, 은돈 오만 닢에 맞먹었다. 20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
11. 神は、パウロの手を通して目覚ましい奇跡を行われた。12. 彼が身に着けていた手ぬぐいや前掛けを持って行って病人に当てると、病気はいやされ、悪霊どもも出て行くほどであった。13. ところが、各地を巡り歩くユダヤ人の祈祷師たちの中にも、悪霊どもに取りつかれている人々に向かい、試みに、主イエスの名を唱えて、「パウロが宣べ伝えているイエスによって、お前たちに命じる」と言う者があった。14. ユダヤ人の祭司長スケワという者の七人の息子たちがこんなことをしていた。15. 悪霊は彼らに言い返した。「イエスのことは知っている。パウロのこともよく知っている。だが、いったいお前たちは何者だ。」16. そして、悪霊に取りつかれている男が、この祈祷師たちに飛びかかって押さえつけ、ひどい目に遭わせたので、彼らは裸にされ、傷つけられて、その家から逃げ出した。17. このことがエフェソに住むユダヤ人やギリシア人すべてに知れ渡ったので、人々は皆恐れを抱き、主イエスの名は大いにあがめられるようになった。18. 信仰に入った大勢の人が来て、自分たちの悪行をはっきり告白した。19. また、魔術を行っていた多くの者も、その書物を持って来て、皆の前で焼き捨てた。その値段を見積もってみると、銀貨五万枚にもなった。20. このようにして、主の言葉はますます勢いよく広まり、力を増していった。
지난 한 주간도 우리는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여러분, 행복이란 단지 좋은 기분, 혹은 원만한 일 처리, 뭔가 즐겁고 재미있는 일들을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행복이란 사람다운 생각과 행동, 그리고 온전한 선택과 판단으로 일상에서 천국이 체감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 영원한 생명력을 실감하며 살아가는 것임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의 말씀을 통해서도 다시금 영적인 생명의 지평이 넓어지고, 영원히 빼앗길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실감나게 체감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얻어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인생의 사명을 감당하는 동안 종종 인간의 상식을 뛰어넘는 기적적인 기도의 응답을 만나게 됩니다. 물론 모든 기적들이 다 상식을 벗어난 특별한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일이 은혜요, 그래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주님께서는 때로 상식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기적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실 때가 있습니다.
저는 저의 출생과정이 그런 기적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시는 분들도 계시지만,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임신하셨을 때에 굉장히 어려움을 겪으셨습니다. 임신중독증이 생겨서 자연분만으로는 아기를 건강하게 낳을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만일 무리해서 아기를 살리려면 어머니의 목숨이 위험하였지요. 그러므로 어머니의 생명을 지키려면 태아를 포기해야 했었습니다. 그래서 저희 아버지는 병원에 아이를 포기한다는 조건의 각서를 쓰고 어머니의 자연분만에 동의하셨습니다. 결과는 기적적으로 산모와 아기가 모두 살아나게 되어서 보시다시피 지금 제가 여러분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나중에 저희 할머니께서 그날 그 소식을 들으시고 시골에서 간절히 기도하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일상과 삶에서도 이와 같이 인간의 이성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분명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밖에 설명할 수 없는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만이 아니라, 성경에서는 이미 그런 기적적인 일들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죽었던 여인의 시신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하였더니 살아나는 기적을 체험합니다.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이르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행 9:40)
그보다 먼저 예수님께서는 공생에 기간에 더 많은 놀라운 기적들을 일으키셨지요.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눅 7:21)
물론 예수님께서도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이적을 행하기도 하셨습니다. 대표적으로 죽은 지 사흘이 지난 무덤 속의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 (요 11:43-44a)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을 고치셨다는 기록은 공관복음서 세 곳에서 모두 자주 나오는 표현입니다. 예수님은 기적 그 자체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실 아기 때 헤롯에 의해서 죽임 당할 위기에서 벗어나신 적이 있지요. 그리고 예수님은 이미 하나님 아들이셨기 때문에 모든 약한 것과 병든 것과 악한 것을 고치실 기적의 능력을 갖고 계셨지요.
구약의 선지자 중에, 엘리야도 죽은 소년을 살린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여호와께서 엘리야의 소리를 들으시므로 그 아이의 혼이 몸으로 돌아오고 살아난지라 (왕상 17:22)
이 외에도 성경 속에는 수많은 기적적인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울에게서도 그런 기적이 나타났다는 것인데요. 우리가 주목할 구절은 그 기적의 주체가 사람인 바울이 아니라,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은 이렇게 시작하지요.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을 빌어서 비상한 기적들을 행하셨다... 기적을 행하시는 주체가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듭난 성도는 모든 기적적인 일들은 곧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또한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은 기적을 일으키는 주체가 될 수 없다는 말씀이기도 한데요.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이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기적이나, 혹은 사람이 자신의 힘으로 뭔가 초자연적인 일을 일으키는 것을 본다면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더구나 그러한 놀라운 일을 자신의 힘으로, 혹은 자신의 재능으로 삼고 자랑하는 이들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특히나 요즘과 같이 뭔가 신비한 것을 갈망하는 시대에는 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대단한 능력이나 혹은 주술적이고 신비로운 초자연적인 힘을 빌어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처럼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면 분명히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이단과 사이비들은 언제나 이렇게 혼란스러운 때를 이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또한 그러한 혼란을 일부러 일으키는 경우도 있지요. 생각만으로도 끔찍한 일본 지하철 독가스 사건도 그와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옴진리교라는 사이비 종교의 교주가 사회를 극단적으로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 자신을 과시하고, 자기 종교의 조직을 강화하기 위하여 사람들을 세뇌하여 꾸민 사악한 사건으로 밝혀졌지요.
소위 과학과 사회가 발전하여도 그런 시도들은 여전히 우리 주위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기적에 대해서는 감사하고 인정하되, 사람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불리는 행위는 그 자체가 거짓과 사기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마지막 때에 이런 영적 혼란을 틈타 사탄 마귀가 소위 능력자들을 통해 이적을 나타내며 미혹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짐승 앞에서 받은 바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하며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을 위하여 우상을 만들라 하더라 (계 13:14)
따라서 성도인 우리가 초자연적인 이적이나 기적이 일어나는 것 자체에 놀라워하거나 주목을 한다면 언제든 미혹의 덫에 걸릴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적과 이적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인지를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너무도 쉽습니다. 그 기적으로, 혹은 이적으로 말미암아 누가 이득을 보는가? 혹은 누가 영광을 받고 있는가를 보면 됩니다. 기적이 하나님께서 혹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드러내고 있습니까? 혹은 그 기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자연스레 믿어지고, 찬양과 예배로 고백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적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고 누군가 눈에 보이는 사람에게 이익이 몰리고 있습니까? 사람의 활동과 행동이 주목을 받고,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미혹의 덫이 매우 가까이 있음을 깨우치고 경계해야 합니다.
바울을 통해 일어났던 기적, 즉 그가 쓰던 땀내에 절은 손수건이나 온갖 작업으로 더러워진 앞치마와 같은 하찮은 물건을 통해서도 병과 악귀가 떠나가는 기적은 바울이라는 사람을 수단으로 하여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이적인 것을 오늘 성경은 우리에게 다시금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이적과 기적을 본 사람들 중에 그 기적 자체를 신봉하고 주목했던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관심은 오로지 놀라운 이적과 기적을 일으켜 일반 대중들로부터 사사로운 이득을 취하려고 했던 이들입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의 이름을 흉내내며 돈벌이 수단으로 삼았던 이들이 있었단 말이지요.
오늘 본문의 13절부터 16절에는 ‘스게와’라는 이름의 유대인 주술사와 관련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에는 스게와라는 사람이 제사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요. 실질적으로는 귀신 축출가 즉, 주술사였던 것이지요. 다른 말로는 구마사, 혹은 퇴마사라고도 합니다. 유대인 주술사인 스게와의 아들들이 겪은 사건은 위장되고 거짓된 이적과 기적이 어떻게 폭로되는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영적인 일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일상에서도 거짓과 사기는 반드시 그 사악함이 드러난다는 것을 성경은 항상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거룩함을 위해서 첫 번째로 주신 십계명의 제9번째 계명에 이웃에게 거짓 증언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거짓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게 된 사탄의 유혹에서 시작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귀 곧 사탄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행하시지 않는 이적과 기적은-그것이 현실적인 것이든 초현실적인 것이든- 모두 거짓과 사기이며, 이는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시고, 미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것에 거리를 두는 것은 우리의 유익과 경건한 생활을 위해 매우 바람직한 습관입니다. 이는 곧 우리가 거룩하고 성결하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의 초석이 되는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진리 안에 자유하는 거듭난 성도인 것을 믿습니다.
이적과 기적으로 위장한 사기행각으로 사사로운 금전적 욕구를 탐하던 귀신 축출가, 즉 주술사들이었던 스게와의 아들들의 소문이 에베소에 퍼졌습니다. 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이상 점술이나 주술과 같은 방식의 사악하고 이기적인 습관을 통해 돈벌이를 하며 살아가는 것은 무익할 뿐만 아니라 매우 해롭다는 것을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17절에 그 소문을 들었던 이들이 모두 놀라워하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찬양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의 결과는 항상 이렇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이 바울의 기적을 보고서 놀란 것이 아니라, 주술사들의 거짓이 드러난 것을 보고 주 예수님을 찬양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성도는 이적과 기적으로, 혹은 초자연적인 사건을 경험한 것으로 자신의 믿음을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로 일상을 사는 것을 자랑해야 한다는 뜻이지요. 자신이 어떠한 기도의 능력을 가졌는지, 혹은 어떤 대단한 믿음의 성공사례를 간증할 수 있는지가 자랑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이적이나 기적과 같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도 하나님께는 한마디의 말씀만으로 얼마든지 현실이 될 수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나의 미래를 얼마나 잘 알게 되느냐, 내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살 수 있느냐, 얼마나 실력을 쌓을 수 있느냐,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느냐, 얼마나 돈벌이를 잘 하며 살 수 있느냐... 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주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서 순종하며 살고 있느냐, 주님과 친밀한 동행을 일상생활의 가장 큰 가치평가의 기준으로 삼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과 친밀한 삶에 정말 가치를 두고 있느냐의 여부는 자신의 삶을 주술적인 영향력으로부터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자기의 출세와 돈벌이와 성공을 위해서라면 점쟁이와 주술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상담을 받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면 단호히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비록 그들과 거리두기로 인해서 자기의 인생이 심심해지고, 무력해지는 것 같이 느껴지는 한이 있더라도 결단해야 합니다. 혹은 심지어 그런 관계의 정리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일이 생긴다고 하여도 하나님께서 미워하시고, 가증하게 여기시는 일을 가까이 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풍요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신 18:9-12)
오늘날, 영적인 이스라엘인 성도들은 영적인 가나안 땅과도 같은 이 세속의 일상을 살면서 이 말씀의 취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내 안에 여전히 도사리고 있는 가나안 민족의 습성인 주술과 점술을 통해 얻는 이익과 돈벌이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가증스러운 행위를 용납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네가 쫓아낼 이 민족들은 길흉을 말하는 자나 점쟁이의 말을 듣거니와 네게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런 일을 용납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신 18:14)
그리고 최후의 심판 때에는 예수님께서 주술가나 점쟁이들을 영원히 심판하신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계 21:8)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히 이렇게 확실히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물욕에 휩싸여 여전히 점을 치거나, 운세를 믿거나, 주술과 같은 세속의 힘을 빌어서라도 돈벌이를 하려고 시도거나, 성공에 목말라 살고자 한다면 주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또한 그러한 이들을 편들거나, 감싸고, 두둔하고, 변명하는 것도 하나님께서는 용납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에베소에서 주술적인 활동과 점술로 돈벌이와 사리사욕을 도모하던 사람들 중에 바울의 기적이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것임을 알고 두려워하며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온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탐욕과 주술적인 모든 흔적들을 지우고 청산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갖고 있던 주술을 행하기 위해, 혹은 점을 치기 위해 쓰던 교재와 책들을 모아 불살랐습니다. 그 책들의 값을 추산하면 약 은 돈 5만개의 가격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은 돈 한 개가 당시 일반 노동자의 하루 급료에 해당하는 금액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해보면 약 50억 원에 달하는 돈인데요. 이는 당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2019년 대한민국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한국의 점술시장의 매출 규모가 확인할 수 있는 것만 약 1749억원 규모라고 합니다. 혼란스러운 시대에 사람들이 더더욱 점술과 주술에 의존하여 불안을 해결하려고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일본이야 더 말할 것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때에 점술과 주술과 같은 미신이라도 이용하여 불안과 염려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을 치기보다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를 통해 참된 평안과 소망과 그리고 용기로 살아 갈 수 있는 복음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사회와 시대의 역사가 발전하고 개인은 풍요를 누리는데, 오히려 그의 내면이 공허해 진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일까요? 이적과 기적으로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것보다, 주님과의 온전한 관계로 사람답게, 아름답게 사는 것이 훨씬 행복한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주술과 점술을 이용해서라도 돈벌이와 쾌락에 성공하고 재미있게 살면 그만이라는 이 세상의 미혹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그렇게 우리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힘은 창조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과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고 동행하는 일상을 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사실 이적과 기적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너무도 평범하고 당연할 일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일이 이미 기적과 이적이기 때문이지요. 정작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적과 기적을 허락하시는 주체이신 주님과 친밀하고 분명한 관계로 동행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기적과 이적, 그리고 행운을 얻어서 성공해보겠다고 주술과 점술이라도 이용해보려는 어리석은 유혹에서 거듭난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불안하고, 두렵고, 염려되는 마음조차 지금 내 곁에 나와 동행하시는 주님께 맡기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영원하고 온전한 말씀으로 응답해 주십니다. 비록 지금 당장은 이런 저런 혼란과 미혹으로 소란하여 멀미나는 이 세속의 파도 위에 서 있는지 모르지만, 나의 곁에 늘 함께 계시는 주님 손잡고 사람다운 행복한 영생의 일상을 살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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