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화목하라.♡
성경: 로마서 12장 14~18절
찬송: 435, 428, 384, 370, 357
설교: 이 경준 목사님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로마서 12: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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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산상수훈 중에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화평을 주기 위해 세워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짊어진 사명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인류 역사를 더듬어 보면 화평한 날은 없었습니다. 지구촌에는 항상 전쟁이 있었습니다. 힘 있는 나라가 힘이 없는 나라를 침략하고 탄압했습니다. 종교와 종교의 전쟁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 전쟁들로 말미암아 수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종교전쟁의 중심에는 항상 기독교가 있었습니다. 기독교가 선교를 빙자하여 침략하며 전쟁을 일으킨 일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사람을 이교도라는 명목으로 죽이고 탄압했습니다.
이제 돌이켜보면 그것은 선교가 아니었습니다. 아집이고 독선으로 이루어진 살인행위였습니다. 기독교의 잘못이 이렇게 컸습니다. 역사는 숨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는 지난 잘못을 함구하고 있습니다. 제대로 된 사죄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용서를 빌 것은 용서를 빌고, 그리고 진정으로 세상에 대하여 봉사하고 희생하며 화목하게 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일입니다.
창세기 33장에 보면 동생 야곱에게 복수하려고 수하 400인을 거느리고 달려오는 에서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에서는 정작 야곱을 만나자 목을 끌어안고 울며 야곱을 용서합니다. 그때 야곱이 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라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화평하게 하는 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오늘날을 첨단 과학의 시대라고 합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검증되지 않거나 확실하지 않은 것에는 마음을 두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신앙을 심신이 미약하거나 사회적응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의지하는 미신 정도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이런 사회 분위기 속에서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어려움을 느낄 수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기독교인들은 가능한 한 자기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합니다. 사회 공동체에서 따돌림이나 외톨이 취급을 받지 않기 위한 고육지책
(苦肉之策)일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고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숨지 말고 더욱 그들 속에서 봉사하고 희생함으로 그리스도의 빛을 나타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장 23절에도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라고도 했습니다. 미련하게 취급받는다고 피하고 숨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사회 공동체 속으로 들어가서 신앙을 자랑하고 화평하게 하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것이 우리들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기독교인들은 구별된 삶을 고집하는 이유로 외톨이가 되는 경향이 더러 있습니다. 신앙적 계율(戒律 religio uspre cepts)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들 스스로 고립된 생활을 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세상과 화합하며 그리스도께서 가르치신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우리 스스로가 세상에 대하여 담을 쌓는다면 그들은 어디에서 복음을 들을 수 있으며 복음을 접하지 못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더불어 화합하기를 회피하고 고립을 자초하는 신앙을 끼리끼리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문제는 이런 방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인간사회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입니다. 싫든 좋든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네 인간사회인 것입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야 하고, 어렵게 느껴지는 사람들과도 함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런 것, 저런 것, 가릴 것 다 가리고 자신이 즐기는 공간 안에서 자신만을 위한 삶을 펼쳐나간다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해하고, 공유하고, 사랑하고, 배려하기를 노력할 때 비로소 복음의 열매가 맺혀지는 것입니다.
그런 삶을 위해서 오늘 본문은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같은 신앙공동체 안의 사람들만 서로 화목하게 지낼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라고 합니다. 담을 쌓고 고립된 생활을 자처하지 말고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라고 합니다.
핍박하는 자일지라도 미워하지 말고, 저주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오히려 가까이하며 축복하라고 합니다. 축복하는 마음으로 살기 위해서는 용납하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듯이, 또 우리를 용납하셨듯이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70명의 제자를 각처로 보내시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 당시에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환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단으로 취급받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핍박을 자초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동네로 들어가서 아무 집이든지 찾아가고, 먼저 복을 빌라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 집에서 환대하든지 아니면 박절하게 내쫓든지 상관하지 말고 그 집에 복이 내려지도록 먼저 축복하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D. L. Moody 목사님은 항상 성경에서 하시는 말씀을 실천하셨다고 합니다.
그의 목회철학은, 첫째,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며, 세 번째로는 다른 사람에게 성경 말씀 즉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분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하면서 축복을 했습니다. 어린이나 어른이나 술주정뱅이나 누구를 만나든지 축복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는데 축복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긍정적인 변화가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하신 축복의 말씀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서 미국과 유럽을 복음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그분은 존경받는 목사님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에 핍박을 받아도 결코, 저주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십자가 위에서 죽음을 맞으실 때도 핍박하고 자신에게 못 박고 찌른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축복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에 기록되기를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치심을 따라 베드로전서 3장 9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우리를 핍박하고 괴롭히는 사람들을 축복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저주를 하고 있습니까? 야고보서 3장 10절에 기록되기를 “한 입으로 저주와 찬송이 나오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주하면 할수록 저주하는 사람의 생활이 피폐해집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복을 빌면 빌수록 복을 빈 사람의 생활에 기쁨이 넘치게 되고 풍요로워진다고 합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을 위해서라도 마음의 문을 열고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축복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축복을 받은 이웃들이 무관심하고, 핍박하던 마음을 돌이켜서 우리들의 참된 이웃으로 변화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겸손해져야 합니다. 본문 16절에“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주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여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라고 하십니다. 아마 교만한 사람을 친구로 삼기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사람들과 화목하기 위해서는 먼저 낮아져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은 남들에게 전도하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교만하게 보이기가 쉽습니다. 가르치는 모습으로 다가가기 때문입니다. 권면과 가르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제는 가르치지 말고 권면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말씀드리지만 모든 사람에게 축복하는 자가 되고, 겸손한 마음으로 낮은 자리에서 이웃을 대하며, 더불어 화평하게 하고,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고 가치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역사하십니다. 축복하는 자를 축복하시고,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더불어 화평하게 하는 자에게 평화를 주시고, 선을 행하는 자에게 악을 이기는 능력을 주십니다. 이런 삶이 축복의 열쇠를 가진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권세를 누릴 수 있는 성숙한 기독인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많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본문 말씀에서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로마서 12:14~18)고 하십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모시고 살아가면서 이전에 세상에서 하던 옛사람과 옛 모습은 내려놓고 오늘 주신 말씀대로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며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고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게 하소서!
항상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지를 생각하고 기도하게 하시어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며 은밀한 중에 보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우리 삶이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 그러하셨듯이 용서받기보다는 먼저 용서하며 이해받기보다는 먼저 이해하며 말하기보다 먼저 잘 경청하게 하시고 말보다는 실천이 앞서는 우리 삶이 되게 하시어 범사에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우리가 거하는 곳이 항상 웃음꽃이 피어나고 화목하게 되며 주님 주신 평화가 임하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향기 드높은 아름다운 세상이 되게 하소서!
감사드리며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 올렸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