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026-02-22 주일설교
환난 많은 세상에서 신자의 소망
다니엘 11:36~45
음식 중에는 처음으로 먹어보려 할 때는 맛도 모르고 먹기도 힘들지만 작정하고 먹어보면 맛을 알게 되고 즐기게 되는 음식이 있습니다. 여러분 마음에 떠오르는 음식이 있죠? 저는 홍어가 생각납니다. 홍어 맛을 알고부터는 아주 좋아합니다.
성경에도 그런 책이 있습니다. 그냥 읽으면 이해도 안 되고 어렵지만 신경 써서 공부하면 아주 매력적인 성경이 있습니다. 다니엘이 그중 하나입니다. 다니엘은 그냥 읽으면 어렵습니다. 그중에도 특히 11장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다니엘 11장은 먹을수록 맛이 나는 음식과 같습니다. 지난 두 주간 여러분이 다니엘 11장 설교를 따라오느라 고생 좀 했는데 오늘은 그렇게 복잡한 설명이 없고 은혜가 됩니다.
오늘은 이 예언의 마지막 부분을 볼 텐데, 여기에는 환난 많은 세상에 사는 신자의 소망이 무엇인지 설명해 줍니다. 교회 역사를 돌아보아도 그렇고 여러분의 개인사를 보아도 그렇고 믿음 좋은 신자의 삶에도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이렇게 힘든 세상에서 신자는 무슨 소망으로 살아야 할지 고민하신다면 오늘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소망을 발견하시기를 바랍니다.
다니엘 11장 35절까지는 다니엘의 예언과 그 후 진행된 수백 년의 역사를 비교해 보면 정확하게 딱 맞습니다. 그런데 36~45절은 난제(難題)입니다. 이 부분은 한 왕에 관한 예언인데 그 왕이 누구인지 특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36절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한 왕이 등장하는데 이 사람은 누구일까요? 36~39절을 보면 악한 짓을 많이 한 안티오코스 4세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40절 이후의 전쟁 이야기는 그에게 부합하지 않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이집트를 두 번 침공한 후로는 침공하지 못했습니다. 또 43절이 말하는, 이집트의 금은 보물을 다 차지한다는 것도 맞지 않습니다.
40~45절을 볼 때 그 왕은 로마 제국의 황제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로마의 폼페이우스는 BC 63년에 유대를 점령했습니다. 결국 유대는 BC 164에 마카비가 독립을 쟁취하고 101년 만에 끝났습니다. 이는 41절의 예언과 부합합니다.
41절은 또 에돔, 모압, 암몬은 그 손에서 벗어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에돔 왕은 로마와 외교를 잘해서 로마가 점령한 유대 지역의 통치권을 확보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할 때 유대의 왕은 헤롯이었는데 그가 바로 에돔 민족입니다.
로마는 주전 30년에는 이집트도 완전히 병합했습니다. 그때부터 이집트는 로마의 식량 창고 역할을 하게 됩니다. 또 리비아와 구스도 점령했습니다. 이런 사실은 42~43절의 예언과 잘 맞습니다.
그런데 44절에서는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그 왕이 동쪽과 북쪽으로부터 나쁜 소문을 듣고 번민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로마와 맞지 않습니다. 로마는 북쪽과 동쪽의 침략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또 로마는 어느 곳에서 반란이 일어났다고 겁을 먹고 번민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은 오히려 안티오코스 4세에 어울립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동쪽의 파르티아의 침공을 받고 반란을 진압하느라 유대의 독립을 허용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파르티아는 동쪽이지 북쪽은 아닌데 44절은 동쪽과 북쪽에서부터 침략을 받았다고 합니다. 우리말에 ‘동북에서부터’라는 말은 북동쪽을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히브리어 성경은 “동쪽으로부터 그리고 북쪽으로부터”(מִמִּזְרָח וּמִצָּפֹון)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안티오코스 4세와도 잘 맞지 않고 이 왕이 누군지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쯤 여러분이 속으로 생각할 것입니다. “오늘 내용은 복잡하지 않다더니 여전히 복잡하네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설교 준비할 때는 복잡했지만 이제부터 여러분에게 복잡하지 않게 설명해 드릴 것입니다.
44절에서 동쪽과 북쪽의 공격을 받은 것은 안티오코스 4세도 아니고 로마도 아닙니다. 그러면 그가 누구일까요? 성경학자들은 동쪽과 북쪽에서 오는 소문을 하나님의 심판이 개입하기 시작했다는 징조로 이해합니다.
동쪽과 북쪽에서 오는 소문으로 번민하게 된 왕은 분노해서 많은 무리를 죽이고 멸망시키려 합니다. 그러니까 이 왕은 어느 한 나라나 한 왕을 뜻하기보다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세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는 세력은 적그리스도입니다. 성경에서 적그리스도, ἀντίχριστος라는 말을 쓴 사람은 사도 요한입니다.
요한일서 2:18에서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왔다고 말합니다. 역사적으로 적그리스도 노릇을 한 왕은 많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대표적인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는 안식일과 번제와 할례를 금하고 제단에 돼지고기로 제사하고, 성전에 제우스 신전을 세우고 여호와 대신에 제우스를 섬기라고 강요했습니다. 안티오코스 4세 시대의 박해는 교회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경험하게 될 최종 대적의 축소판입니다.
로마 시대에는 네로, 도미티아누스, 디오클레티아누스, 그 외에도 수많은 박해자가 등장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에서 말하는 그 왕은 어느 한 왕이 아니라 장차 등장하는 모든 적그리스도를 말합니다. 적그리스도는 마지막 시대에 등장하는 하나의 초인적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박해하는 모든 권력자의 총칭입니다.
이 적그리스도(ἀντίχριστος)들은 사실은 그림자들이고 그 우두머리는 사탄(שָׂטָן)입니다. 사탄의 하수인들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자기를 모든 신보다 높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대적하며 자기를 섬기라고 요구합니다. 그는 전 세계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마지막 45절에서 적그리스도는 장막 궁전을 바다와 성전 사이에 세운다고 합니다. 지중해와 성전 사이에 왕실 장막을 치고 예루살렘 성전을 공격하다가 죽은 왕은 누구일까요? 안티오코스 4세는 예루살렘을 공격한 적이 있지만 그는 유대 땅에서 죽지는 않았습니다.
또 로마 장군 티투스도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을 공격하고 허물었지만 그도 유대나 예루살렘에서 죽지 않았습니다. 또 안티오코스 4세나 로마의 티투스 장군도 도와 줄 자가 없어서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을 보면 다니엘 11장의 마지막 부분은 장차 벌어질 역사적 사건 예언에서 떠나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언의 앞부분은 역사책처럼 정확하지만, 마지막 부분은 해석하기가 어렵습니다. 그 이유는 이 예언이 특정 시대의 역사 설명이 아니라 주전 150년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까지 두고두고 등장할 박해자에 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왕은 어느 한 왕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든 박해 세력이라는 설명을 듣고 여러분에게 또 다른 질문이 생길 것입니다. 교회는 왜 맨날 박해만 당해야 할까요? 그 박해는 언제 끝날까요? 제가 답을 드릴게요.
그 적그리스도를 다니엘 7장에서는 “작은 뿔”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니엘 7:7~8, 19~22을 보겠습니다. 이렇게 되면 교회에는 소망이 안 보입니다. 하지만 7:22은 다니엘 11:45~ 12:1로 연결됩니다.
만일 다니엘이 11장으로 끝난다면 진짜 큰일입니다. 하지만 다니엘은 12장이 있습니다. 11:45에서 박해자의 마지막 운명이 살짝 언급되었는데 12장에서 교회의 운명을 설명합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의 소망입니다. 예수님과 교회는 결국 승리할 것입니다.
12장은 다음 주에 설교할 본문인데 12:1의 마지막 부분만 보세요. 예수님은 다니엘에게 이렇게 약속하십니다. “그때에 네 백성 중 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받을 것이라.”
다니엘과 함께 또 다른 묵시록인 요한계시록도 같은 구조입니다. 만일 요한계시록이 19장으로 끝나면 진짜 큰일 납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에는 20~22장이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의 결론은 결국 예수님의 군대가 이긴다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3대 심판은 “일곱 인 심판”, “일곱 나팔 심판”, “일곱 대접 심판”입니다. 이 심판들은 순차적으로 오는 심판이 아니라 반복적인 묘사입니다. 반복은 확실하게 심판하겠다는 뜻입니다. 세 번이나 반복하시는 심판 예고는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빨리 세상을 심판하지 않고 시간을 끌어서 신자가 이렇게 박해받고 순교하도록 하실까요? 교회는 박해받는다고 망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박해가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망합니다. 평화가 계속되면 교회가 스스로 부패하고 교회 안으로 온갖 가짜가 들어옵니다.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을 때 신자들은 드디어 이 땅에 천국이 실현될 것이라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313년부터 변질되고 타락하여 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환난이 있는 동안에는 가짜들이 교회로 들어오지 않습니다. 신자들은 영혼은 더욱 정결해지고 믿음은 더욱 단단해집니다. 좋습니다. 그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박해받던 신자가 죽는 것은 너무 불쌍하지 않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계시록은 성도의 죽음을 복되다고 말합니다.
(계 14:13)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죽었는데 무엇이 복되다는 말일까요? 죽는 것이 복이 있다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 이렇게 생각해 봅시다.
요즘 군대는 훈련할 때 마일즈(Multiple Integrated Laser Engagement System) 장비를 몸에 부착해서 실전처럼 합니다. 총에는 레이저 발사기를 붙이고 몸에는 감지기를 붙여서 레이저에 맞으면 센서가 작동하여 “사망하셨습니다”라고 알려줍니다. 병사가 죽으면 그의 총도 레이저 발사가 안 됩니다.
죽은 병사는 전장에서 빠져나와 대기실로 이동하여 훈련이 끝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대기실에 있는 병사는 장비도 벗지 못하고 갇혀 있어야 해서 불편하겠지만 산에 뛰어다니며 전투하는 병사보다는 훨씬 편합니다. 그러므로 모의 전투에서 적을 물리치다가 레이저에 맞는 것은 답답하지만 불쌍한 일은 아닙니다. 자기 부대가 승리하기만 한다면 대기실에 있는 것이 더 편하겠죠.
신자가 신앙생활 하다가 박해를 받아 죽는 것은 레이저에 맞아 대기실로 이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땅에서 순교하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낙원에서 예수님과 함께 지냅니다. 낙원은 이 세상보다 훨씬 좋은 것입니다.
30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은 늘 전쟁합니다. 고대에는 창칼로 싸웠고 근대에는 총포로 싸웠고 오늘날은 심리전과 전자장비로 싸웁니다. 전쟁만 싸움이 아닙니다. 경제활동도 전쟁입니다. 정치도 전쟁입니다. 치열한 이념 전쟁도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삶이란 항상 피곤하고 슬픕니다. 그래서 120년을 산 모세는 시편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 90: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주전 200년에서 주후 70년까지 예루살렘은 주변 열강에 의해 늘 환난을 당했습니다. 예수님 승천 후부터 313년까지 로마 시대 신자들은 늘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박해당하다가 죽는 것은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낙원으로 옮겨가는 것입니다. 이는 MILES 전투에서 대기실로 가는 것과 비슷합니다. 우리 부대가 이긴다는 보장만 있다면 더 열심히 싸우다 빨리 대기실로 가는 것이 낫듯이 하루바삐 낙원에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사도 바울은 빨리 죽어서 천국에 가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최후 승리를 보장해 놓고 신자에게 이 싸움에 동참하라고 하십니다. 때로는 이 전투에서 전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전사는 끝이 아니라 낙원으로의 이동입니다. 전투가 끝나면 생존자끼리 승전 파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대기소의 병사도 함께 영원히 영광을 누립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다음 4가지를 기억하세요.
1) 예수님 군대는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2) 죽음은 끝이 아니라 낙원으로의 이동이다.
3) 예수님 안에서는 죽는 것도 유익하다.
4) 승리의 영광은 산 자와 죽은 자가 함께 누린다.
바로 이것이 환난 많은 세상에 사는 신자의 소망입니다.

첫댓글 https://youtu.be/BFsKUDqA-X4?si=Czj0IJeK-EPvvp6m
PL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