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第六章
(비유컨대) ‘골짜기(谷; 道·自然·性·德·無爲·命)’는 (세상 사물들을 생겨나게 하는 세상 사물들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앞에 자리하는 바로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신령스럽다. (그런데 하늘과 땅은 아주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골짜기’는) 죽지 않는다. (‘골짜기’) 이것은 이른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한 (세상 사물들의) ‘어미’이다.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한 ‘어미’는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문이다.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한 ‘어미’) 이것은 이른바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이른바,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슴푸레한 ‘골짜기’로서, 하늘이나 땅과 더불어) 떨어져 있는 바가 아니다. (이른바,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한 ‘어미’로서, 세상 사물들과 더불어) 자리하는 바이다. (따라서 하늘과 땅이나 세상 사물들은 도道와 더불어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일삼기를 잘해야 하며, 따라서 하루 내내 일삼고자 하는 바欲) 그것을 일삼더라도 수고롭지 않게 된다.
谷, 神. 不死. 是, 謂𤣥牝. 𤣥牝之, 門. 是, 謂天地根. 綿綿. 若存. 用之, 不勤.
“골짜기谷”는 (도道를) 비유한 말이다. 이른바, (도道) 그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텅 비어 있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를) 받아들이기를 잘한다.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를) 받아들이기를 잘한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있지 않다. (이른바, 도道 그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슴푸레하고 어렴풋하다. (따라서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의 정도나 수준을) 잴 수 없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골짜기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신령스럽다.”
谷, 喻言也. 以其, 虚而能受, 受而不有, 㣲妙莫測. 故曰: 谷, 神.
(이른바)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가)참된 바(眞; 自然·性)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가) 늘 그러한 바(常; 命·德)를 근원으로 삼는 바(로서, 세상 사물들을 생겨나게 하는 세상 사물들의 근원인 하늘과 땅의 앞에 자리하는 바)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은 아주 먼 옛날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도道는) 죽지 않는다.”
道, 本真常. 不滅. 故曰: 不死.
(비유컨대) “암컷(牝; 道)”은 세상 사물들을 생겨나게 하기를 잘한다. 비유컨대, (“암컷牝·道”은) 이른바 (세상 사물들의) ‘어미’이다. 이른바, (“암컷牝·道”) 그것은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한(玄; 微·妙)” 바이다. (따라서) 생겨난 (세상 사물들의 모습) 그것을 (또렷하게) 살펴볼 수 있지만, 생겨나게 한 까닭(인 ‘어미’의 모습) 그것은 (뚜렷하게) 살펴볼 수 없는 것이다.
牝, 能生物. 猶所謂母也. 謂之, 𤣥者. 見其生, 而不見其所以生也.
(“현빈지𤣥牝之, 문門. 시是, 위천지근謂天地根.”) 이른바, “하늘과 땅”은 (도道) 이것으로부터 생겨난다는 것이다.
言天地, 自此而生也.
(이른바) “면면綿綿”은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슴푸레한 바(㣲; 性)인데, 따라서 (“하늘이나 땅”과 더불어) 떨어져 있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綿綿, 㣲而不絶也.
(이른바) “약존若存”은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있는 바有爲가 어렴풋한 바𤣥·命인데, 따라서 세상 사물들과 더불어) 자리하는 바이며, 따라서 (또렷하고 뚜렷하게) 살펴볼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것이다.
若存, 存而不可見也.
(“용지불근用之不勤.” 따라서 “하늘과 땅”이나 세상 사물들은 도道) 이것과 더불어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일삼기를 잘해야 하고, 따라서 하루 내내 (일삼고자 하는 바欲) “그것을 일삼더라도” “수고롭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能如是, 雖終日用之而不勞矣.
(덧붙여,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안다. “하늘과 땅”이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바라는 것을. (그러나 그들은) 알지 못한다. “하늘과 땅”은 도(道; 無爲·自然·德·性·命)에 따라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바라는 것을.
人, 知天地之, 生萬物. 不知天地, 乃生於道也.
노자(老子; 吾)는 어찌 이른바 일컬었는가? “도道는 (일부러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바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신령스럽다”라고.
吾, 何以見道之, 神哉?
비유컨대, (도道) 그것은 이른바 (무위無爲와 무위無爲 사이에 깊숙이 패어 들어간) “골짜기(谷; 自然)”이다. (그런데 “하늘과 땅” 사이에 깊숙이 패어 들어간) 골짜기(谷; 德·性·命)는 (“골짜기”와 같이) 아주 텅 빈 바(虚; 無爲)이지만, 이른바 (“골짜기”와 달리 덕스러움德·성性·명命으로서) ‘모양’을 가진 바가 있다. (따라서) “골짜기는 (무위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신령스럽다.” 왜냐하면, (“골짜기”는 골짜기와 같이 아주) 텅 빈 바이지만, (골짜기와 달리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로서) ‘모양’을 가진 바가 없기 때문이다.
譬之, 於谷. 谷, 至虚, 而猶有形. 谷, 神. 則虚, 而無形也.
(도道는 무위無爲와 무위無爲 사이에 깊숙이 패어 들어가 아주) 텅 빈 바(虚; 谷)이자,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로서) ‘모양’을 가지는 바가 없는 바이다. 따라서 (도道는 일부러 일삼아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바(生; 活)를 가지는 바가 없다. (따라서 도道가) 어찌 (일부러 일삼아 세상 사물들을) “사라지게 하는 바(死; 滅)”를 가지는 바가 있겠는가?
虚而無形. 尚無有生. 安有死耶?
(도道는 일부러 일삼아 세상 사물들을) “사라지게 하는 바도 아니며”, 살아가게 하는 바도 아니다. (그런데 일부러 일삼아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저절로 그러하게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기를 잘한다는 것이다. (이른바, 도道는 저절로 그러하게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기를 잘)하는데, (노자는 그러한 도道) 그것을 “현빈𤣥牝”이라 일컬었다.
不死, 則不生. 不生者, 能生. 生是, 謂之𤣥牝.
“현빈𤣥牝”(의 “현𤣥”)은 (세상 사물들을 살아가게 하는 데 있어서 일부러 일삼는 바가) 없는 바(無; 無爲)를 가지는 바가 있다(는 말)이자, (“사라지게 하는 데” 있어서 저절로 그러한 바自然와 더불어) 어우러진다(는 말)이다. “빈牝”은 (암컷으로서,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게 하기를 잘하는 바라는 말이다.
𤣥牝者, 有無之合. 牝, 能生者也.
도道는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까닭이고, (“하늘과 땅”의 생겨남은 도道) 이것을 말미암을 따름이다. 따라서 (노자는) 일컬었다. “(도道) 이것은 (하늘과 땅이 생겨나는 까닭) 그것이다. 이른바, (도道는) 하늘과 땅의 뿌리이다.”
道之, 所以生天地, 由此而已. 故曰: 是, 之. 謂天地根.
(노자는) 따라서 (유위有爲에 대해 말하는) 입을 망가뜨리는 바를 일삼았다. 따라서 (무위無爲와 더불어)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유위有爲와 더불어) 떨어지는 바를 맛보는 바에게 찾아들었다. 따라서 (그 무위無爲와 더불어) “자리하는 바”를 일삼았다. 따라서 그 (유위有爲와 더불어) “자리하는 바”를 바라보는 바를 미워했다.
而為亡𫆀. 則綿綿. 而来嘗絶. 以為存耶. 則惡覩其存哉.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도道) 이것과 더불어 하기를 잘해야 하는데, 따라서 ‘모양’을 가지는 바가 있는 몸이 (유위有爲에 대해) 텅 비워지게 된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골짜기(谷; 自然)”와 더불어 (하기를 잘)해야 하는데, 따라서 ‘모양’을 가지는 바가 없는 마음이 (유위有爲에 대해) 조용해지게 된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은 무위無爲의 정도나 수준이) “신령스러운 바(神; 道)”와 더불어 (하기를 잘)해야 하는데, 따라서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몸(吾; 身)이 (무위無爲와 더불어 아우러지고 어우러지는 바) 그것을 일삼게 되고, (유위有爲를) 일삼는 바를 가지는 바가 없는 마음이 (무위無爲와 더불어) 아우러지고 어우러지게 될 따름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상 사람들이 하루 내내 일삼고자 하는 바欲를 “일삼더라도”) 어찌 (몸과 마음이 “수고롭게 되는 바”와 같은) 근심(을 가지는) 바가 있겠는가?
人, 能如是, 則有形之身, 可使虚. 而如谷, 無形之心, 可使寂. 而若神, 而吾之, 用之, 無所用心, 脗合而已. 尚何勤之, 有哉.
(따라서 이 장章) 이것은 밝힌다(章; 彰).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자가 처음으로 생각했다) 이른바, ‘(도道·無爲·自然·德·性·命) 그것을 닦고 기르며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을). 이른바, ‘저절로 그러하게 (살아가는 바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아주 먼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노자가 처음으로 생각했다. ‘(유위有爲를) 물리쳐야 하고 펼쳐내지 말아야 하며, (무위無爲를) 닦아야 하고 길러야 한다’(는 것을).”
此, 章: 乃修養工夫之, 所自出. 老子之, 初意却不尃主修養也.
첫댓글 잘못된 부분이 있다면, 모두 저의 부족함 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