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젖은 손수건
글. 남진원
과거의 인식이나 행위 등의 경험으로 쌓여진 것들로부터 행하게 되는 정신작용을 아뢰야식이라 한다.
그러나 이런 우리들 현상적인 모습이나 체험에 의해 알게 된 것들은 모두 실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모두 생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들로서 소리나 눈에 보이는 것들은 실상이 없음으로 인해 空한 것이다. 결국 내 몸이란 나도 실체적으로는 언젠가는 소멸하게 되는 물체로서 나 자체도 무아인 것이다.
그런데 노자의 도덕경 28장에서는 이러한 아뢰야식에 의한 행위들이 덕을 행함으로서 무아를 깨달아 최상의 도인 무극에 이르게 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무극의 실현은 28장에서 말하는 ‘谷’에 해당하고 ‘谷’은 천하의 골짜기를 뜻하기도 한다.
‘천하의 골짜기’는 무엇을 의미하는 말인가. 천지가 시작되는 자리이다.
자신이 강함을 알고 약한 사람이나 약한 것을 지키면 천하의 物이 된다. 여기서 物이라 함은 음과 양이 조화롭게 합하여 만물이 시작됨을 含有한다. 음양의 만남은 조화된 만남이다. 조화된 만남은 덕과 떨어지지 않고 항상한다. 천하의 물이 되면 어린이 마음으로 돌아간다.
성경의 마태복음 13장 3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말과 상통한다.
지식이 밝으면 어리석음(어둠)을 알게 되고 어리석음마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 되면 천하의 법도(진리)를 행하는 사람이 된다. 그리되면 어디에도 어긋남이 없고 무극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또 영화로움을 진실로 안다면 욕됨마저 포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천하의 골짜기가 된다. 천하의 골짜기가 되면 덕은 그 근본이 되어 恒常하게 된다. 그곳의 지향점은 순수함 또는 질박함(순수함:통나무)이다. 이런 순수함은 베풀음으로 행해지고 그리되면 기물(쓸모있는 인재:남을 위해 쓰여지는 존재, 곧 널리 복되게 하는 홍익 이념)이 되는 것이다. 이리되면 성인이라 할 수 있고 성인은 그래서 인류사회의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노자의 덕은 소크라테스의 절대적인 지식에 가깝다. 소크라테스는 덕을 지식으로 보았지만 절대적인 지식으로 보았다. 일반적인 지식이라면 가르치고 배워서 얻을 수 있어야 하는데 덕은 스스로 깨우치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밝음을 알고 어둠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은 천하의 법도를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항상 덕과 어긋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무극에 이르게 된다.
강함은 약함을 수용하고, 밝음은 어둠과 함께 하고 영화로움이 욕됨을 알게 되면 도에 이르는 성인의 경지에 오른다. 또한 그곳은 무극의 자리이며 불가에서 말하는 환지본처이거나 공성인 본래면목이라 할 수 있다. 즉, 마음을 찾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섭심내조:攝心內照) 진여불성(眞如佛性)에 이르는 것이다.
지성찬의 시조 ‘목련꽃 밤’은 아름다운 시조이면서 내면의 눈으로 본 세계가 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이미지로 드러나는데 ‘한 장 젖은 손수건’이다.
목련꽃 밤은
지성찬
나무는 서성이며
백년을 오고가고
바위야 앉아서도
천년을 바라본다
짧고나, 목련꽃 밤은
한 장 젖은 손수건
단시조이지만 그 속에 강한 울림을 담고 있다. 시조의 묘미는 단시조에 있다. 짧은 3장 속에 압축하여 불어넣은 시혼은 팽팽하다 못해 터질 듯 강한 숨결을 뿜어내고 있다. 목련꽃의 아름다움과 지는 아픔을 한 장 젖은 손수건으로 대신 한 점이 압권이다. 목련꽃이 지는 짧은 한 순간의 밤이지만 백년을 버티는 나무보다도 길고, 천년을 바라보는 바위보다도 진한 아름다움의 정취를 느낄 수 있으니 목련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은 곧 영원성으로 사람들의 가슴에 한 장 젖은 손수건으로 남게 된다. 그 영원성은 순수함과 질박한 마음의 심처에서 자연스럽게 배어나온 것이다.
즉, 목련꽃을 보는 아뢰야식의 행위들이 작가의 순수한 영혼의 눈에 의해 목련꽃 피는 밤의 순간성을 영원성으로 바꾸어 놓았다.
꽃은 시인들에게 늘상 시적 화두이다. 그 아름다움에 취하고 반하여 끊임없이 시의 대상으로 삼는다. 지성찬 역시 목련꽃에 대한 비감과 서정을 놓치지 않는다. 문제는 그 꽃에 대한 이미지를 얼마나 수용하고 육화하여 감동 있는 작품으로 드러내놓는가 하는 점이다. 예부터 많은 시인들이 꽃을 노래하였지만 큰 감흥을 자아내는 작품은 흔치 않다. 이 작품은 이런 면에서 마음에 오래도록 감동의 물결로 흘러넘치는 통나무 같은 情의 덕이라 하겠다.
시인 지성찬은 1942년 충북 중원군에서 출생하여 경기도 안성에서 성장하였다. 연세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기업인으로 <미방기업> 대표를 맡기도 했다.
1959년 정부 주최로 열린 전국시조 백일장에서 입선하였고 시조문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는 ‘서울의 강’ 등이 있다.대표 시조로 ‘목련꽃 밤은’, ‘질그릇’을 들 수 있다.
시조 ‘질그릇’에서는 존재의 근원과 삶의 진솔한 철학을 감동있는 언어로 그려내기도 하였다.
나는 고요한 겨울밤, 지성찬의 시조 ‘목련꽃 밤은’ 작품을 읽다가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시인의 모습이 그리워지기도 하고 문득 한잔 술에 취하고 싶기도 했다.
‘목련꽃 밤은’ 시조를 읽다가
남진원
많은 시인들, 저간의 일 궁금하다
불빛을 밝히려고 나무가 태워지듯
스스로 자신을 태우고 밝혀놓은 언어의 빛
이처럼 어둠 깊어 홀로 외론 시간이면
묻고 싶은 안부하며 詩情에 물이 들어
이 몇 줄 절장의 句로, 못내 밤을 취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