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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5기 현대 맑스주의(1) 조영준-맑스 생태사상의 현대적 해석
홍승용 추천 1 조회 248 26.07.17 23:36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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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26.07.18 18:55

    첫댓글 오늘 발표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질문 몇 가지 올립니다.

    질문 A.
    발표자는 마르크스 생태사상의 핵심으로 물질대사(Stoffwechsel) 개념의 도입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필자는 단순히 물질대사 개념을 마르크스 해석의 중심에 놓는 것만으로 마르크스 사상 체계 전체를 생태주의적으로 재구성(greening)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다소 의문이 든다.
    예를 들어 『자본론』 제2권에서 마르크스는 고정자본의 가치 이전을 논하면서, 기계장치의 물리적 마모와 가치 이전을 반드시 구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기계는 사용 과정에서 물리적으로 마모되지만, 이러한 물리적 변화 자체가 곧 가치 이전은 아니다. 가치 이전은 가치증식과정(valorization process)에 속하는 범주인 반면, 물리적 마모는 노동과정(labour process)에 속하는 물질적 현상이다. 마르크스는 바로 이러한 두 차원의 혼동을 물신적 사고의 한 사례로 비판하며, 가치형태와 물질적 사용가치의 구별을 자신의 비판경제학에서 매우 중요한 방법론적 원리로 제시한다.

  • 26.07.18 18:55

    그런데 물질대사 개념은 그 자체로는 가치관계보다는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교환, 즉 문자 그대로의 Stoffwechsel를 지시하는 개념이다. 따라서 생태주의적 해석이 물질대사 개념을 지나치게 강조할 경우, 오히려 마르크스가 엄격하게 구분했던 가치형태의 논리와 노동과정의 물질적 논리가 다시 혼합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마르크스 체계 내부에서는 가치의 운동과 물질의 운동이 반드시 동일한 분석 수준에서 다루어지는 것이 아닌데, 생태주의적 독해는 이 둘 사이에 일정한 긴장이나 부조화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닌지 궁금하다.
    이와 관련하여 사이토 고헤이는 이러한 이론적 문제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그는 자본주의가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교란한다고 반복해서 주장하지만, 단순히 '자본주의적 재생산이 물질대사를 교란한다'는 설명만으로는 가치형태의 논리와 물질대사의 논리가 어떻게 연결되는지 충분히 해명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 26.07.18 18:55

    결국 가치증식의 운동이 어떠한 매개를 통해 자연의 물질대사를 체계적으로 왜곡하는지,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가치형태 비판과 물질대사 개념이 하나의 이론 체계 안에서 어떻게 매개되는지에 대한 보다 명확한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 26.07.22 04:24

    자본은 자연 자원의 고갈로 인해 가치증식이 어렵게 될 경우, 그 한계를 가치증식의 관점에서 극복하고자 한다. 따라서 자본은 새로운 가치를 찾거나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거나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여 유용성의 체계를 확장하려 한다. 그러나 이는 가치증식을 위한 유용성에 불과할 뿐, 인간과 자연 간의 물질대사 균열을 복원할 수 없다. 결국 가치가 시장과 자연 사이의 순환 기제를 제공하지 않기 때문에 자본주의 하에서 과학과 기술의 혁신은 생태위기를 심화시킬 뿐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이런 맥락에서 후기 마르크스는 생태문제 해결을 위해 가치형태의 논리와 물질대사의 논리를 엄격히 구분하기보다는 통합적으로 파악하면서, 물질대사 균열에 대한 논의를 -비록 상세하게 발전시키지는 않았지만- 전개해 나갔다고 생각한다.

  • 26.07.18 18:56

    질문 B
    발표에서는 자본주의와 생태위기의 구조적 모순을 강조하면서 근본적인 해결은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에서만 가능하다는 점이 제시되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본주의 내부에서도 일정한 생태적 조정과 제도적 해결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다소 성급한 결론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든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자본이 노동력을 약탈할 뿐만 아니라 자연 역시 약탈한다고 분석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자본주의가 자신의 재생산 조건을 스스로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다고 지적하면서도, 이러한 모순을 완화하기 위한 다양한 제도적 대응 역시 역사적으로 등장했음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사례가 공장법이다. 개별 자본의 입장에서는 가능한 한 노동시간을 연장하는 것이 유리하지만, 장시간 노동은 노동력 자체를 파괴하여 장기적으로는 자본축적의 기반을 훼손한다. 결국 국가는 공장법을 통해 개별 자본의 단기적 이해를 강제로 제한하고 노동력의 지속적 재생산이라는 총자본의 장기적 이해를 관철하였다.

  • 26.07.18 18:56

    이러한 논리를 생태문제에도 일정 부분 적용할 수는 없을까? 흔히 고대의 야만민족들이 약탈한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지 않고 일부를 남겨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내년에 다시 와서 약탈하기 위해서는 약탈 대상 자체가 존속해야 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자본 역시 자연을 무한히 파괴할 수는 없다. 자연이 완전히 붕괴하면 자본축적 자체도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개별 자본은 단기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이러한 장기적 고려를 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총자본의 관점에서는 자연의 지속가능성이 자본주의 재생산의 필수 조건이 된다.
    그렇다면 공장법이 노동력의 재생산을 위해 개별 자본의 행태를 교정했던 것처럼, 국가가 생태 규제와 환경정책을 통해 개별 자본의 단기적 행동을 교정하는 것 역시 자본주의 내부에서 충분히 가능한 발전 경로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장기적 관점을 가진 자본의 일부 분파와 노동자 및 환경운동 세력이 일정한 정치적 연합을 형성한다면, 공장법이 그랬던 것처럼 생태적 전환 역시 자본주의 내부에서 상당한 수준까지 진전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 26.07.18 18:57

    발표자께서는 이러한 가능성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 궁금하다. 사이토 고헤이를 비롯한 생태마르크스주의는 이러한 제도적 정치적 타협을 자본주의의 일시적 자기조정으로만 평가하는지, 아니면 공장법과 유사한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으로도 인정하는지 설명해 주시길.

  • 26.07.22 05:38

    공장법에서처럼 국가가 규제와 통제를 통해 자본의 탐욕을 조절해 나간다면 자본주의 내에서 생태적 전환이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생태적 전환을 부분적 이룬 북유럽의 국가들이 ‘제국적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남반구 후진국들에 생태적 위험을 전가하고 있지만, 이제 더 이상 위험을 외부화할 수 없을 정도로 후진국을 포함해 전 세계가 생태 위기의 심각성을 함께 체감하고 있다. 이 점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자본주의의 일시적 조정이 아니라 역사적 진보의 가능성을 담보하기 위해 ‘탈성장 코뮤니즘’을 주장하고 있다. 그의 ‘탈성장 코뮤니즘’은 마르크스가 요구한 ‘사용가치 경제로 전환’, ‘노동시간 단축’, ‘획일적 분업 폐지’, ‘생산과정의 민주화’, ‘필수노동 중시’에 착안하여 구상된 것이라고 그의 책 <지속 불가능 자본주의>에서 스스로 밝히고 있다.

  • 26.07.18 18:57

    질문 C
    발표자는 제4절에서 초기 마르크스의 소외(Entfremdung) 개념이 런던 노트를 거쳐 『자본론』의 물질대사(Stoffwechsel) 개념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연속성에 대해서는 다소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굳이 알튀세르의 인식론적 단절론을 받아들이지 않더라도, 『1844년 경제학 철학 초고』의 소외 개념과 『자본론』의 물질대사 개념은 분석 대상과 이론적 지평이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된다. 초기 마르크스의 소외론은 인간의 본질적 능력 또는 유적 존재를 전제로 하여, 자본주의가 인간을 자신의 본성으로부터 소외시키는 과정을 설명하는 철학적 인간학적 범주이다. 반면 『자본론』에서의 물질대사 개념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물질적 교환과 그 사회적 조직 방식을 분석하는 정치경제학적 범주이다. 여기서 문제는 더 이상 인간의 본질이 상실되었다는 점이 아니라, 특정한 생산양식이 인간과 자연의 물질대사를 어떠한 방식으로 조직하고 교란하는가에 있다.

  • 26.07.18 18:57

    이러한 점을 고려하면, 물질대사는 소외 개념의 단순한 연장이라기보다 분석 수준 자체가 변화한 결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다시 말해, 초기의 인간주의적 소외론에서 후기의 정치경제학 비판으로 이행하면서, 문제의 중심은 '인간 본질과의 괴리'에서 '자본주의적 사회형태가 구성하는 객관적 사회적 관계'로 이동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표자께 질문드리고 싶은 점은 다음과 같다. 발표에서 말하는 '소외에서 물질대사로의 연속성'은 개념적 동일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문제의식이 계승된다는 정도의 역사적 연속성을 의미하는 것인지 궁금하다. 만약 후자라면, 두 개념 사이에는 분명한 이론적 전환 또는 범주적 재구성이 존재한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특히 사이토 고헤이는 이러한 초기의 인간주의적 소외론과 후기의 정치경제학적 물질대사론 사이의 개념적 차이를 어떻게 설명하고 있는지, 그리고 양자를 어떤 논리적 매개를 통해 연결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 26.07.24 04:22

    마르크스는 인간과 자연 관계를 초기에 소외 개념을 통해, 후기에는 물질대사 개념을 통해 다룬다. 초기에 그는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삶을 철학적 통찰력으로 설명했으나 점차 초기 설명의 이론적 맹점(추상성)을 인식하고, 후기에는 정치경제학과 자연과학의 연구에 따라 물질대사 개념을 이용해 자신의 통찰력을 깊이 발전시킨다. 따라서 ‘소외에서 물질대사로의 연속성’은 개념적 동일성이 아니라, 자본주의 생산과 재생산 체계의 핵심 모순을 좀 더 과학적이고 역사적으로 탐구하기 위한 문제의식의 계승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가 인간과 자연 관계를 초기의 인간소외론이 아니라, 후기의 자본주의 경제 형태 분석에 따른 ‘물상화’ 이론을 검토함으로써, 그가 자본주의 비판을 체계적으로 드러낼 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태학을 체계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었다고 해석한다.

  • 26.07.19 09:28

    추기.
    생태주의와 국가주의의 관계를 둘러싼 논쟁은 오늘날 생태전환 전략의 핵심 쟁점 가운데 하나이다. 한편에서는 기후위기와 에너지 전환이라는 거대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강력한 계획과 조정 능력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국가 자체가 산업주의와 성장주의에 깊이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국가 중심의 생태전환은 결국 또 다른 형태의 생산력주의로 귀결될 위험이 있다고 비판한다. 이번 토론에서도 이러한 국가주의와 생태주의 사이의 긴장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였다.
    국가 모델은 분명한 장점을 가진다. 탄소중립, 에너지 전환, 사회간접자본 재편과 같은 문제는 개별 지역이나 공동체 차원에서는 해결하기 어려우며 국가 차원의 계획과 재정 투입이 불가피하다. 그러나 동시에 국가 모델은 테크노크라트가 주도하는 생산력주의의 함정에 빠질 가능성이 크다. 국가는 모든 국민의 이해관계를 동시에 고려해야 하기 때문에 경제성장과 고용을 우선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생태전환 역시 새로운 산업 육성과 성장전략으로 흡수될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각국 정부가 '녹색성장'이나 '친환경 산업 육성'을 강조하면서도 경제성장 자체는 거의 문제 삼지 않는 현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 26.07.19 09:28

    반대로 무정부주의적 코뮌 모델은 국가의 성장주의를 비판하고 자율적 공동체를 강조한다는 점에서 생태주의와 친화성이 높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국가 수준의 거시적 계획이나 대규모 인프라 구축을 담당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가진다. 기후위기 대응에는 전력망, 교통체계, 에너지 시스템과 같은 광역적 조정이 필요한데, 순수한 자율 공동체만으로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결국 국가 모델은 지나치게 중앙집권적이며, 무정부주의 모델은 지나치게 분권적이라는 양극단의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딜레마에 대한 하나의 현실적 대안으로 지역 기반의 코뮌 모델을 제안할 수 있다. 이는 국가를 즉각 폐지하거나 모든 문제를 지역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와 지역 공동체를 기반으로 생태적 사회를 실험하는 교두보를 구축하자는 전략이다. 지역 수준에서는 국가 수준보다 주민들의 가치와 생활방식이 보다 동질적이기 때문에 생태적 실험을 수행하기가 상대적으로 용이하다.

  • 26.07.19 09:29

    지역 발전 모델 역시 하나의 유형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북부 이탈리아 또는 이른바 제3이탈리아 운동에서 나타난 소상품생산자 중심의 지역경제 모델이다. 중소기업과 협동적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지역경제를 활성화한 사례이다. 둘째는 실리콘밸리와 같은 자본주의적 지역혁신 모델이다. 현재 한국의 지방발전 전략 역시 대부분 여기에 해당한다. 지방정부들은 여야를 막론하고 반도체, AI, 바이오와 같은 고부가가치 기업을 유치하는 것을 지역발전의 핵심 전략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모델은 성장의 공간적 분산일 뿐 성장주의 자체를 극복하지는 못한다.
    이에 비해 세 번째 모델은 코뮌형 지역발전 모델이다. 여기에서는 지역사회가 에너지, 주거, 돌봄, 소비, 교통 등을 민주적으로 운영하며 생태적 삶의 방식을 실험한다. 국가 차원의 완전한 계획경제는 아니지만 지역 차원의 준계획과 공동체적 의사결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특히 이러한 공동체는 강제적 동원이 아니라 자발적 참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 26.07.19 09:29

    국가는 전체 국민을 대상으로 정책을 수립해야 하기 때문에 다양한 소비 욕구와 성장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다. 반면 지역 코뮌은 생태적 가치에 동의하는 사람들이 스스로 참여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이는 티부(Charles Tiebout)가 말한 '발로 하는 투표(vote by foot)'의 논리와도 연결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에 적합한 공동체를 선택하여 이동할 수 있으며, 이러한 자발성은 생태적 규범을 보다 안정적으로 유지하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미국 뉴욕시의 사례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주사회주의 성향의 조란 맘다니가 제시한 강력한 임대료 통제와 공공성 강화 정책은 국가 권력을 장악하지 않더라도 지방권력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사회경제적 개혁을 추진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사례는 생태주의 역시 중앙정부 권력 획득만을 목표로 할 것이 아니라 지방정부와 지역공동체를 변화시키는 전략을 적극적으로 모색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다.

  • 26.07.19 09:30

    결국 현실적으로 국가 권력을 단기간에 획득하기 어렵다면 지방권력을 획득하고, 이를 자발적 공동체와 코뮌으로 전환하는 전략이 보다 실천 가능한 경로일 수 있다. 이러한 지역 코뮌은 단순한 이상향이 아니라 장기적인 사회변혁을 위한 교두보의 역할을 수행한다. 만약 이러한 실험들이 여러 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하고, 나아가 다양한 코뮌들이 연합체를 형성한다면, 이는 국가 차원의 에너지 체제 전환을 요구하는 강력한 사회적 압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 동시에 오늘날 자본주의가 유지되고 있는 제국주의적 생활양식과 과잉소비 체제에 대해서도 실질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생태주의는 국가와 시장이라는 기존의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적 공간을 필요로 한다. 지역 기반의 코뮌 모델은 국가의 계획능력과 공동체의 자율성을 절충하면서 생태적 전환을 현실 속에서 단계적으로 실험할 수 있는 전략이라는 점에서 충분한 이론적 실천적 가능성을 가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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