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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Andrés Iniesta Luján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루한
생년월일 : 1984년 5월 11일
국적 : 스페인
재적기간 : 1996 ~ 2002 (유스) 2002 ~ 2018
우승 기록 : 라 리가 9회 (2004-05, 2005-06, 2008-09, 2009-10, 2010-11, 2012-13, 2014-15, 2015-16, 2017-18), 코파 델 레이 6회 (2008-09, 2011-12, 2014-15, 2015-16, 2016-17, 2017-18), 챔피언스리그 4회 (2005-06, 2008-09, 2010-11, 2014-15), 스페인 슈퍼 컵 7회 (2005, 2006, 2009, 2010, 2011, 2013, 2016) 유에파 슈퍼 컵 3회 (2009, 2011, 2015) 피파 클럽 월드컵 3회 (2009, 2011, 2015)
기록 : 674경기 57골
개인수상 : 유로 2012 MVP
1 유에파 올해의 선수 (2012)
9 피파 월드 베스트 (2009, 2010, 2011, 2012, 2013, 2014, 2015, 2016, 2017)
6 유에파 올해의 팀 (2009, 2010, 2011, 2012, 2015, 2016)
월드컵 2010 결승전 MVP
유로 2012 결승전 MVP
챔피언스리그 2014-15 결승전 MVP
이니에스타는 챠비와 함께 바르셀로나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라 평가받는 선수다. 그는 16년간 바르셀로나에서 뛰며 바르셀로나 선수들중 두번째로 가장 많은 타이틀을 획득하였다.
1984년 스페인 카스티야주의 페엔테알비야라는 작은 도시에서 태어난 이니에스타는 고향에 있는 축구클럽인 알바세테 유스팀에 입단하며 축구 선수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한다. 클럽에 입단하자마자 두각을 나타내던 이니에스타가 빅클럽들의 주목을 받게된 계기는 1996년 스페인 1부리그팀들의 유스 토너먼트 대회였다. 이니에스타의 알바세테는 레알 마드리드 유스팀을 꺾으며 4강까지 진출했다. 비록 알바세테는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이니에스타는 이 대회 MVP를 수상하였다. 대회 이후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한 여러 빅클럽들이 이니에스타에게 접근했고 이니에스타 가족이 내린 결론은 바로 이니에스타의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는 바르셀로나였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어렸을 때부터 내성적이었던 성격 탓에 가족과 떨어져 라 마시아에 처음 들어왔을 때가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어린 이니에스타는 푸욜과 발데스같은 주변의 동료들 덕분에 라 마시아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나갈 수 있었다.
이니에스타의 재능은 세계 최고의 재능들만 모인다는 라 마시아에서도 남달랐다. 그를 항상 지켜봐왔던 라 마시아 관계자들은 이니에스타를 완벽한 10번이라고 칭찬하면서 마치 루이스 수아레즈 (스페인 본토 태생의 유일한 발롱도르 수상자)를 보는 것 같다는 칭찬을 하기도했다. 프로에서 뛸 때보다 더 높은 위치에서 뛰었던 그는 득점력 역시 상당했다고. 또한 바르셀로나에서 뛰었던 미카엘 라우드럽은 이니에스타의 우상이었는데, 비록 이니에스타가 라 마시아에 입단했을 때 라우드럽은 떠나고 없었지만 이니에스타는 라우드럽을 롤모델로 삼았다고. 이니에스타의 시그니쳐 무브가 되는 라 크로케타가 바로 이니에스타가 라우드럽의 플레이를 수없이 보고 따라하고 연마한 개인기.
나이키에서 주최하는 유소년 대회에서 우연히 그가 뛰는 모습을 본 당시 바르셀로나 주장 과르디올라는 어린 이니이스타의 플레이에 감명받아 즉흥적으로 대회 사싱식에 등장해 직접 그에게 트로피를 전달했다. 이후 과르디올라는 그의 후계자인 챠비한테 이니에스타를 가르켜 우리 둘 모두를 은퇴시켜버릴 재능이라고 평가했다.
마찬가지로 바르셀로나의 주장을 하고 또 감독까지 오른 루이스 엔리케 역시 일찍부터 어린 이니에스타를 지켜봐왔다. 루쵸가 이니에스타를 처음 봤던 때는 아직까지 유망주였던 이니에스타가 처음으로 1군 훈련 세션에 참가했을 적이었다. 이니에스타의 자서전에 따르면 훈련장 입구 앞에 있던 이니에스타를 차에 태워 훈련장에 처음으로 함께 들어간게 바로 루이스 엔리케였다. (정작 루쵸는 그 사실까진 기억못한다고 고백했다.) 이후로도 루이스 엔리케는 이니에스타가 1군 라커룸에서 자리잡는데 적극적으로 도와주었으며 이니에스타의 라 리가 데뷔골을 어시스트 해줬다. 루이스 엔리케가 은퇴하고 난 뒤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둘은 훗날 루이스 엔리케가 감독으로 돌아오고 경질 위험에 시달렸을 때, 이니에스타는 챠비와 함께 그의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며 은혜를 보답했다.
차근차근 기량을 발전해나가던 이니에스타는 마침내 2002년, 반 할 감독 아래서 처음으로 1군 프리시즌에 합류한 데 이어 그해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에서 꿈에 그리던 1군 데뷔 역시 치른다. 비록 반 할은 시즌 중도에 경질되었지만 이니에스타는 스스로 발전하여 1군 스쿼드에 파고들만한 기량을 만들어내며 출장시간을 늘려갔다.
미드필더와 측면 공격수등 여러 포지션을 뛰다가 본격적으로 레귤러 멤버가 된건 2005/06 시즌, 챠비가 장기부상을 당하며 이탈한 자리를 매꾸면서였다. 챠비의 자리를 완벽하게 매꾼 이니에스타는 챔피언스 리그 4강 밀란전에서 맹활약을 하며 팀이 결승전에 진출하는데 일조, 아스날과의 결승전에서는 후반전이 시작하자마자 교체투입되어 아스날의 골키퍼 옌스 레만이 퇴장당해 수적 열세에 있었음에도 전반전 내내 끌려다니기만 했던 팀의 경기력을 바꿔놓는다.
이후 이니에스타는 1군에 자리잡는데 성공, 2007/08 시즌부터는 이적한 지울리의 등번호 8번을 달았다. 또한 이니에스타는 클럽에서의 활약을 바탕으로 -대대적으로 세대교체를 진행하던 스페인 국가대표팀에 합류, 첫 메이저대회였던 2006년 월드컵에서는 팀의 탈락을 막지 못했지만 2008년 유로에서는 측면 미드필더로 뛰며 활약, 스페인은 48년만에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한다.
하지만 팀은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정점으로 내려오기 시작, 특히 호나우지뉴와 데쿠같은 주축 선수들의 게으름으로 인해 팀의 기강 역시 매우 나쁘졌다. 결국 바르셀로나는 세대교체를 위해 호나우지뉴와 데쿠를 방출, 둘의 빈자리를 메시와 이니에스타로 대체한다. 또한 클럽은 에이스뿐만이 아니라 프랑크 레이카르트 감독 역시 경질, 바르셀로나 B팀 1시즌 감독한게 경력의 전부인 펩 과르디올라를 신임 감독으로 선임한다.
분위기 쇄신을 꾀하며 감독 교체까지 단행한 펩 바르셀로나의 시작은 좋지 못했다. 리그 첫 2경기에서 승리하지 못하자 언론은 펩 과르디올라를 공격하기 시작, 그의 실력에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시즌 초반의 부진과 언론의 공격 속에 펩 과르디올라는 클럽 사무실에 앉아 평생동안 흔들리지 않았던 자신의 축구철학에 대해 재고하던와중 이니에스타가 아무런 예고 없이 그의 사무실에 방문하며 외쳤다.
¡Vamos de puta madre
우리 팀은 아주 잘하고 있다, 펩과 함께 상대팀들을 모조리 박살낼 것이라며 팀의 플레이스타일을 바꾸지 말아달라는 부탁과 복둗아주는 말을 하고 사무실을 나갔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의 그가 한 말에 감명받은 펩은 자신의 신조를 밀어붙이기로 결정, 바르셀로나는 이후 연승행진을 달렸다. 또한 리그 막바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엘 클라시코에선 직전 시즌 캄 노우에서 레알 마드리드에게 파시오 (리그 우승을 결정지은 팀에게 해주는 기립박수)를 해줬던 치욕을 씼었다.
리그 우승뿐만이 아니라 바르셀로나는 챔피언스리그와 코파 델 레이를 우승하며 구단 사상 첫번째 트레블을 달성, 이중에서 이니에스타는 챔피언스리그 4강 2차전 경기 막바지에 동점골을 터뜨리며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팀을 구출, 바르셀로나는 원정다득점 규칙으로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이니에스타에게 불안한 기운이 돌기 시작했다. 시즌 막바지 부상을 당한 것이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은 팀닥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잘 뛰었지만 이후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신체적, 감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이니에스타는 자서전에서 2009년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이후부터 2010년까지를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고 회고한다.
다행히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컨디션을 회복하는데 성공, 팀에서 전문 공격수였던 다비드 비야 다음으로 가장 많은 득점을 하며 팀의 공격을 지휘했다.
특히 큰경기에서 강한 그의 장점은 월드컵에서도 나타났다. 결승전에서 네덜란드를 만나 연장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치던 중 나바스로부터 시작된 역습을 마무리하는 결승골을 넣으며 조국에 첫번째 월드컵 트로피를 안겨줬다. 또한 결승골을 넣은 직후 이니에스타는 작년에 갑작스럽게 사망한 에스파뇰의 주장이자 평소 친분이 있었던 다니 하르케를 추모하는 세레모니를 하며 보는 사람들을 모두 감동시켰다. 결승전 MoM은 덤.
월드컵에서 그동안의 부진과 어려움을 완벽하게 씻어낸 이니에스타는 이전보다 더 강해져서 돌아왔다. 2010년 발롱도르에서는 메시의 뒤를 이은 2위를 차지하며 발롱도르 포디움을 세자리를 바르셀로나에서 뛰는 라 마시아 출신으로 채우는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1위 메시, 2위 이니에스타, 3위 챠비) 바르셀로나는 그 시즌 위 세명을 앞세우며 리그와 챔피언스 리그를 제패, 축구 역사상 역대 최고의 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2012년에 열렸던 유로에서는 스페인의 명실상부한 에이스로 활약, 스페인의 축구 역사상 최초 메이저대회 3연패 (유로 - 월드컵 - 유로) 대업을 달성을 이끌었다. 대회 최우수상은 물론이요 결승전 MoM까지 수상한 이니에스타는 그 시즌 73골을 넣은 메시와 메시에 도전했던 호날두를 제치고 유럽 올해의 선수상까지 휩쓸었다.
2014년, 바르셀로나는 6년만에 챔피언스리그 4강 진출 실패에 이어 5년만에 처음으로 시즌을 무관으로 마감하며 대대적인 변화를 맞이한다. 경질된 타타 마르티노 감독을 대신해 이니에스타와 함께 뛰며 친하던 루이스 엔리케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 이니에스타는 챠비를 뒤이어 부주장이 되었다. 새로운 감독인 루이스 엔리케는 시즌 초반부터 중반까지 언론의 공격을 받으며 경질설마저 나돌았지만 챠비와 이니에스타의 지지를 받으며 유임, 시간이 지나면서 바뀐 팀컬러에 완벽하게 적응하며 역대급 경기력을 보여주며 다시 한번 리그, 코파 델 레이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를 우승하며 축구 역사상 트레블을 두번 달성한 유일한 팀이 되었다. 이니에스타는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맹활약하며 결승전 MoM으로 선정, 역시 축구 역사상 유일한 챔피언스 리그, 월드컵 그리고 유로 결승전에서 모두 MoM을 수상한 선수가 되었다.
이후 이니에스타는 2014/15 시즌을 마지막으로 팀을 떠난 챠비의 뒤를 이어 팀의 주장으로 임명되었으며 2018년까지 3년간 뛰며 팀의 여러 우승을 이끌었다. 특히 2015년 가을에 있던 엘 클라시코에서는 팀의 세 번째 골을 넣으며 호나우지뉴 이후 10년만에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기립박수를 받는 바르셀로나 선수가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 마지막 시즌이었던 2017/18 시즌 코파 델 레이 결승전에서는 클럽에서의 마지막 골을 넣고 교체된 이니에스타는 바르셀로나 팬들뿐만이 아니라 결승전 상대였던 세비야 팬들로부터까지 박수갈채를 받으며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바르셀로나와 종신계약을 맺으며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남아있을 수 있었음에도 이니에스타는 팀의 짐이 되기 싫다며 리그-코파 더블을 우승을 끝으로 16년을 뛰어온 클럽과 아름답게 이별했다.
처음 1군에 들어왔을 때만해도 챠비와 플레이스타일이 유사하다며 둘이 같이 못뛸거라는 예상이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니에스타는 챠비와 다른 유형의 선수가 되었다. 그의 플레이스타일은 트레이드마크인 '라 크로케타'에서도 드러나듯 공을 지키면서 전진하는 스타일이었다. 주위에 몇 명의 선수가 둘러쌓여있든, 아무리 공간이 좁더라도 절대로 공을 뺏기지 않고 유유히 압박을 빠져나가니 상대하는 수비수들은 항상 뒤로 물러날 수 밖에 없고 이는 바르셀로나가 아무리 수비라인을 올려도 상대방의 역습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던 이유였다.
전성기 바르셀로나는 메시-챠비-알베스가 오른쪽을 지배하는동안 왼쪽은 중앙과 왼쪽을 오가는 이니에스타가 지배하며 바르셀로나의 좌우밸런스를 완벽하게 맞췄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또한 경기 조율을 도맡던 챠비가 떠난 뒤로는 그의 역할까지 이어받으며 못하는 것 하나 없는 바르셀로나의 해결사 역할을 톡톡히 해줬다.
챠비와 함께 역대 최고의 미드필더라는 평가를 받는 이니에스타. 그 실력 못지않은 성품과 국가대표에서의 맹활약 덕분에 바르셀로나를 넘어 스페인 전국민으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인물이다. 사실 그의 플레이를 보고있노라면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그를 싫어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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